재작년 8월말에 모스크바 통신문에 올려놓았던 '번역의 속도에 대하여'에서 후반부를 옮겨놓는다. <선악의 저편>의 한 대목 읽기였다. 발단은 “한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 번역하는 데 가장 어려운 것은 그 문체의 속도이다.”란 니체의 말이었고(<선악의 저편>, 단장 28). 이 번역은 책세상판 니체전집 14권, <선악의 저편/도덕의 계보>(2004, 초판 3쇄)의 55쪽에 나온다. 그 단장  28을 읽어보기로 한다. 니체는 이 단장에서 번역이 궁극적으로 도달해야 하는 바에 대해서 시사하고 있다.

 

 

 



-한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 번역하는 데 가장 어려운 것은 그 문체의 속도이다: 문체의 속도라는 것은 종족의 성격에, 생리학적으로 말하자면, 그 종족의 ‘신진대사’의 평균 속도에 근거한다. 충실하게 그 뜻을 담고 있는 번역도, 본의 아니게 원전의 격조를 더럽힘으로써, 거의 위작이라 할 수 있는 것이 된다. 그것은 오로지 사물과 언어 속에 내재된 모든 위험한 것을 뛰어넘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원전의 대담하고 경쾌한 속도가 함께 번역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요컨대, 번역은 원전의 의미만이 아니라 그 (경쾌한) 속도까지도 옮겨놓아야 하며, 옮겨놓을 수 있어야 한다. 지나가는 김에 덧붙이자면, 나는 “생리학적으로 말하자면”의 니체를 사랑한다. 내가 아는 니체가 거기에 있다("안녕, 프리드리히!").

 

 

 



-독일인은 자신의 언어에서 빠른 템포(프레스토)를 거의 다룰 수 없다: 우리가 정당하게 추론할 수 있듯이, 자유로운, 자유정신적 사상의 가장 유쾌하고 대담한 많은 뉘앙스도 낼 수 없다. 독일인에게는 육체적으로나 양심적으로 부포(Buffo)와 사티로스가 낯선 것처럼, 그들에게는 아리스토파네스(Aristophanes)와 페트로니우스(Petronius)는 번역을 잘해내기 힘든 것이다. 독일인에게는 장중한 것, 용해하기 힘든 것, 엄숙하고 둔중한 모든 것, 느리고 지루한 종류의 온갖 문체가 엄청나게 풍부하고 다양하게 발달했다. 괴테의 산문마저도 딱딱함과 우아함이 혼합되어 있는데, 결코 예외가 아니다. 이는 그의 산문이 속하는 ‘옛날 좋은 시절’의 반영이며, ‘독일적인 취미’가 아직도 존재했던 시대에 독일적 취미의 표현이며, 양식과 기교 면에서 볼 때 로코코 취미였다.

(*)아리스토파네스와 페트로니우스는 각각 그리스와 로마의 (희극)작가이다. 니체는 독일어의 느리고 지루함에 대한 불만을 털어놓고 있는데, 나의 짐작에는 오직 니체에 이르러 독일어가 자신의 빠른 템포(=프레스토)에 다다른 건 아닌가 싶다. 그만큼 니체는 유쾌하고 경쾌하다.

 

 

 



-레싱(Lessing)은 많은 것을 이해했고, 많은 것을 잘 아는 배우적 천성 때문에 예외가 되었다. 그가 베일(Bayle)의 번역자였다는 데는 분명 이유가 있었으며, 기꺼이 디드로(Diderot)와 볼테르 곁으로, 오히려 로마의 희곡작가들 틈으로 피신하고자 했다. (문체의) 속도에서도 레싱은 자유정신을 사랑했고, 독일에서 벗어나는 것을 좋아했다. 그러나 독일어는 어떻게 레싱의 산문에서조차도 마키아벨리(Machiavelli)의 속도를 모방할 수 있었던 것인가. 마키아벨리는 자신의 <군주론>에서 플로렌스의 건조하고 맑은 공기를 포함하면서 가장 중요한 사건을 제어할 수 없는 쾌속조(allegrissimo)로 서술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아마 어떤 대립을 감행하고자 하는 심술궂은 예술가의 감정이 없는 것은 아닐 것이다. 즉 그 사상은 지루하고 무겁고 딱딱하고 위험하며, 말처럼 질주하는 속도와 최고의 오만한 기분 속에 있는 것이다.

 

 

 

 

(*)니체는 레싱 정도를 예외로 쳐주는데(지난주에 러시아어 레싱 선집을 샀다. 절판된 그의 책<현자 나탄>이 다시 출간되기를 기대한다), 때문에 18세기 프랑스 철학자인 베일을 번역할 수 있었을 거라고 말한다. 베일도 상당히 경쾌한 문체를 구사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런 레싱조차도 마키아벨리의 속도(=알레그리시모)를 따라가는 건 역부족이라는 얘기. 여기서, 마지막 두 문장은 좀 미흡해 보인다. ‘어떤 대립’보다는 ‘어떤 대조’가 맞는데, 그 대조의 내용이 번역문에는 명확히 드러나 있지 않기 때문이다. 무엇과 무엇의 대조인가? “지루하고 무겁고 딱딱하고 위험한 사상”과 그 문체가 갖는 “말처럼 질주하는 듯한, 너무나도 쾌활한 기분의 속도” 사이의 대조이다. 그러니까, <군주론>에서 마키아벨리의 사상은 지루하고 무겁지만, 그 문체는 경쾌하고 아주 활달하다는 것.

(*)한가지, 편집/교정에 대한 아쉬움을 피력하자면, 이런 문단 같은 경우 인명에 대한 외국어 표기들이 일관성 있게 병기돼 있지 않다는 점이다. 내 생각에 미주에서 처리하고 있는 인명들은 굳이 본문에서도 외국어 표기를 병기해줄 필요가 없으며, 그렇지 않은 경우, 즉 익히 알려진 인명의 경우에는 더더구나 그렇다. 볼테르는 낯익기 때문에 그냥 놔두고 디드로는 낯설기 때문에(?) ‘Diderot’라고 병기해준다는 건 상식적이지 않다(하긴 ‘디데로’라고 옮기는 이들도 있긴 하지만). 하여간에, 그건 좀 이상한 ‘노파심’이다. 이어지는 문장에서, 마키아벨리에다가 ‘Machiavelli’를 나란히 표기한 것처럼. 이러한 논리에 따르면, 우리에겐 ‘사티로스’가 ‘마키아벨리’보다는 친숙한 이름이어야 한다. 풍자(Satire)란 말의 어원이 되는 이 ‘사티로스(Satyr)’가 과연 그런지?.. 나는 완벽한 책, 적어도 최선을 다한 책을 읽고 싶다.

-결국 그 누가 지금까지의 어느 위대한 음악가보다 훌륭한 창의와 발상, 말에 있어서 빠른 속도의 장인이었던 페트로니우스를 감히 독일어로 번역할 수 있겠는가: - 우리가 그와 마찬가지로 모든 것을 내닫게 하면서 모든 것을 건강하게 만드는 바람의 걸음걸이를, 들이마시고 호흡하는 바람을, 바람의 자유로운 조롱을 지니고 있다면, 병들고 사악한 세계의 수렁이나 ‘고대 세계’의 수렁이 결국 무슨 문제가 된다는 것인가! 저 신성하게 변용시키면서 보완하는 정신 아리스토파네스에 관해 말하자면, 그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과거에 있었던 그리스 세계 전체를 용서하게 된다. 그곳에 있는 모든 것에 용서와 변용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우리가 가슴 깊이 이해했다고 전제한다면 말이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서, 니체는 페트로니우스와 아리스토파네스에 대한 경탄으로 이 단장을 마루리하게 된다. 어쨌든 독일어로는 페트로니우스를 번역할 수 없다는 것. 그는 너무도 빠른 속도의 장인이었기 때문에. 그리고 그리스의 대표적인 희극작가 아리스토파네스에 대한 경탄. “저 신성하게 변용시키면서 보완하는 정신 아리스토파네스”라고 옮겨져 있는데, 희극에서 세상이 ‘신성하게 변용’된다는 건 약간 어색하다(내가 아직 아리스토파테스를 읽지는 않았지만). 러시아어 번역에는 ‘밝게 하다’란 동사가 쓰이고 있다. 즉 빛이 들게 하는 것이다. 용서의 대상이 되는 ‘그리스 세계’란 어두운 세계인바, 그것을 ‘희극적으로’ 재현/묘사함으로써 용서해줄 만한 것으로 만들어준다는 얘기인 듯싶다(웃음은 세상을 견딜 만한 것으로 만들어준다). 아리스토파테스는 “저 밝게 비춰주면서 보완해주는 천재”인 것.

-그렇기 때문에 저 다행스럽게도 보존되어온 소품(petit fait)보다 더 내가 플라톤의 비밀스러움과 스핑크스의 본성에 대해 꿈꾸게 만들 수 있었던 것을 나는 알지 못한다: 즉 우리가 그의 임종의 베개 밑에서 발견한 것은 <성서>도, 이집트의 책도, 피타고라스의 책도, 플라톤의 책도 아닌, -아리스토파네스의 책이다. 플라톤 또한 –그가 부정했던 그리스적인 삶을- 어떻게 견딜 수 있었겠는가, -아리스토파네스가 없었다면 말이다!-

(*)원문은 문단이 나뉘어져 있지 않지만, 내가 임의로 분할한 마지막 문단이다. 니체의 경쾌한 속도를 그런대로 따라온 우리말 번역은 이 대목에서 헛걸음을 하고 있다. “저 다행스럽게도 보존되어온 소품”이란 게 무슨 뜻인지? ‘소품’은 보통 작은 단편/작품을 말하는 것이지만, 병기된 불어 ‘petit fait’는 ‘작은 사실’(little fact)이란 뜻 아닌가? 역자는 ‘보존되어온’이란 말에 너무 신경을 쓴 나머지 ‘사실’을 ‘소품’으로 옮긴 듯하다. 우리말이 어색하다면 번역에서 약간의 변형이 필요하지만, 여기선 방향이 잘못됐다. ‘보존되어온’에 맞출 게 아니라 ‘작은 사실’에 맞추었어야 했다. ‘다행스럽게도 전해져 내려온 사소한 사실 하나’라고 하면 어떨까? 그리고, “플라톤의 비밀스러움과 스핑크스의 본성”은 분리돼 있는 게 아니다. “플라톤의 비밀스러움과 그 스핑크스적(=수수께끼적) 성격”이란 뜻이다.

(*)그렇다면, 니체로 하여금 “플라톤의 비밀스러움과 그 수수께끼적 성격”에 대해서 공상해보게 만든 ‘사소한 사실’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플라톤이 임종한 베개 밑에 있던 책이 아리스토파네스였다는 사실이다. <성서>(<구약>을 뜻하는 건가? 아니면 다른 종류의 경전?)도, 이집트의 책도, 피타고라스의 책도, 그리고 플라톤 자신의 책도 아닌,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들 말이다. 해서, “플라톤 또한 삶을, 자신이 부정했던 그리스적인 삶을 어떻게 견딜 수 있었겠는가, 아리스토파네스라도 없었다면 말이다!”(책들, 이 책들이 아니라면, 나는 모스크바에서의 생활을 어떻게 견딜 수 있겠는가?)

2004. 08. 2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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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니체와 문체의 속도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09-04-27 23:37 
    이번주 교수신문에 실은 서평위원 칼럼을 옮겨놓는다. 예전에 '니체와 번역의 속도'란 페이퍼에서 니체의 번역론, 정확하게는 문체의 속도 번역론을 소개하고 나대로 풀이한 적이 있는데, 최근 <번역이론>(동인, 2009)이란 책에서 다시금 그 대목이 번역돼 있는 걸 보고 그 속도의 문제를 한번 더 생각해본 글이다. 당시엔 번역돼 있지 않았던 페트로니우스의 <사티리콘>(공존, 2008)이 그 사이에 소개된 것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