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연말에 쿠스투리차의 영화 'Life is a miacle'(2004)를 빌미로 하여 "쿠스투리차로 가려면 어디로 가야 하지요?"란 제목의 모스크바 통신문을 쓴 적이 있다. 주된 내용이 '기적'에 대한 것이어서 다시 정리하는 김에 '기적에 대하여'란 제목을 붙이도록 한다(이 글은 기적에 대한 나의 수다이다).

“지금 나는 졸리지만 자지 않을 것이다. 나는 종이와 펜을 가지고 이야기를 쓸 것이다. 나는 내 안에서 어마어마한 힘을 느낀다. 나는 이 모든 것을 어제 이미 다 생각해놓았다. 이것은 기적을 행하는 자에 대한 이야기인데, 그는 우리 시대에 살면서 아무런 기적도 행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기적을 행하는 자이며, 어떤 기적도 행할 수 있다는 것을 알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그를 아파트에서 쫓아낸다. 손가락 하나만 까딱하면, 그 아파트를 차지할 수 있다는 것을 알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고, 대신 아파트에서 고분고분 떠나 교외에 있는 헛간에서 지낸다. 그는 이 낡은 헛간을 아름다운 벽돌집으로 변화시킬 수도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 계속 헛간에서 살다가, 평생 동안 단 한번의 기적도 행하지 않은 채 그렇게 생을 마감한다.”



 

 

 

이전에 한 차례 인용한 바 있지만, 하름스의 <노파>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앞에서 나는 ‘기적으로서의 삶(Life as a miracle)’과 ‘여행으로서의 삶(Life as a tour)’의 대립양상에 대해서 언급했는데(*단순하게 말하면, 여해에서 기적을 구하는 '여행으로서의 삶'은 '유사-기적으로서의 삶'이다), ‘기적을 행하는 자’에 관한 이야기에서 그는 (1)평생 동안 단 한번의 기적도 행하지 않았다. (2)평생 동안 단 한번의 여행도 행하지 않았다(“계속 헛간에 살다가”)는 걸로 특징지어진다. 이건 변증법적 지양의 길인가, 아니면 제3의 길인가? 이하의 내용은 이 한 대목에 대한 주석의 성격을 갖게 될 것인바, 겸사겸사 지젝의 이데올로기론에 대해서도 살펴보고, 마지막에 가서는 다시 쿠스투리차의 영화 얘기로 되돌아올 것이다.

 

 

 



아마도 ‘기적을 행하는 자’의 라캉적 명칭은 ‘주인기표’가 될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내 삶의 주인이며 나는 내가 말하는 바이다.” 여기서 기적이란 내가 나인 것이다. 왜냐하면, “상징적인 동일시와 상상적인 동일시의 불가능한 ‘원의 사각형’은 반드시 어떤 잔여물을 남”(<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 216쪽)기기 때문이다. ‘원의 사각형’이란 말은 ‘square of the circle’의 번역인 듯한데, 사전에 다 나와 있는 바이지만, 그건 숙어적으로 (원을 네모지게 하는) ‘불가능한 일’을 가리킨다(우리말 ‘원의 사각형’이 그런 뜻을 갖고 있는가?). 때문에 “불가능한 원의 사각형”은 동어반복이며, “불가능한 일”로 충분하다. 다시 옮기면, “상징적인 동일시와 상상적인 (완벽한) 동일시는 불가능하며 그것은 반드시 어떤 잔여물을 남긴다.”

즉, 상징적/상상적 동일시는 불가능한 일이며 ‘미션 임파서블’이다. 그러니, ‘나(I)는 나(me)다’라는 상징적 동일시가 ‘기적’인 것은 당연하다. 특히나 나(me)가 ‘주인’ 혹은 ‘주인기표’일 경우에는 더더욱. 68혁명 이후의 현대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대학 담론’에서(그 담론 공식의 하단부에서) 드러나는 바는 (에릭 샌트너가 말하는바) ‘임명(investiture)의 위기’ 혹은 서임(敍任)/수임(受任)의 위기이다(지젝, <이라크>, 188-9쪽).

그러니까 (주인으로서의) 어떤 임무나 역할을 주려고 하지만, 아무도 안 받겠다며 거부하는 걸 말한다(예컨대, 아무도 반장 안 하겠다고, 아무도 대통령 안 하겠다고, 못 해먹겠다고 버티는 경우이다). 다시 말해서, “주체가 S(=주인기표)와 관계 맺는 것의 불가능성, 주체가 주인기표와 동일화하는 것의 불가능성 혹은 주체가 부과된 상징적 위임을 떠맡는 것의 불가능성”(<이라크>, 189쪽)을 가리킨다. 이 불가능성이 산출하는 것은 ‘상징적 동일성(=정체성)’의 상실이다. 즉, 상징적/사회적 정체성으로서의 ‘나(Me)’를 상상적 ‘나(i)’가 거부/회피함으로써 ‘나(i)≠나(Me)’가 되는 것이다(사회학자 미드의 ‘I-me’ 관계를 ‘i-Me’ 관계로 수정했다).

거꾸로, 기적이란 ‘내가 나인 것’이다. “아니, 이게 어떻게 나란 말인가?”란 부인으로부터 “나는 다름 아닌 나란 말이야!”란 수락에 이르는 여정(물론 이때의 ‘나는 나다’라는 건 동어반복이 아니다. 그것이 표시하는 건 역설적으로 동어반복의 불가능성이다). 그런 의미에서 주인은 ‘운명애’의 인간이다(비록 라캉은 니체를 참조하지 않지만). 그리고 이때의 운명은 (니체를 따를 때) 다리로서의 운명이고 몰락으로서의 운명이다. 너는 너의 운명(=몰락)을 사랑하는 자인가?

운명애로서의 ‘나=나’가 ‘기적’이라면, 그것에 대한 거부/회피로서의 ‘나≠나’가 흔히 가리키는 것은 투어이고 일탈/도착이다(흔히 ‘나’를 찾아간다는 명목의 이 행은 실상은 ‘나’로부터 미끄러지는 여행이다. 이런 여행담의 종결은 보통 집에 돌아와 보니까 거기에 ‘나’가 있더라는 식이니까). 그걸 좋은 쪽으로 말하면, 유목이고 탈주가 된다(무엇의 유목이고 탈주인가? 모든 경계를 넘나드는 블랙메일과 핫머니 아닌가? 정작 유목/탈주의 ‘모델’인 집시들은 탈주하고 있는가? 자신들이 탈주한다고 생각하는가? 무엇을 재배치하는가? 매번 재배치되는 건 전략 핵무기 아닌가? 사고/사유의 재배치는 뉴에이지즘과 과연 얼마나 먼 거리에 있는가? 생각을 바꾸면, 파트너를 재배치하고 체위를 바꾸면 새로운 세상이 되는가?).

하지만, ‘나=나’라는 상징적 동일시의 “상실의 대가로 우리가 얻는 것은 갖가지 형태와 장치를 갖춘 향락으로 인해 온통 사방에서 시달리는 일이다…”(<이라크>, 189쪽) 번역문의 ‘향유’를 ‘향락’으로 고쳤다. ‘향유에 시달린다’는 건 우리말로 넌센스이다. 여기서 ‘갖가지 형태와 장치를 갖춘 향락’이란 지젝의 말은 비유적인 말이 아니며 문자 그대로 읽어야 한다.



러시아의 한 TV채널에서는 ‘플레이보이’사(社)에서 만드는 이런저런 프로그램을 매일같이 보여주는데, 요즘은 주로 스트립쇼와 ‘섹스의 모든 것’이란 제하의 프로그램이 나온다(‘모든 것이 가능한 섹스’라고 해야 할 듯하다). 스트립쇼야 흔하게(?) 보는 거지만, ‘섹스의 모든 것’에 나오는 것들은 간혹 엽기적일 때가 있다.

성기 피어싱부터 각종의 도구와 장치들을 이용한 새도-마조히즘과 집단섹스에 이르기까지 르포식으로 보여주는데(<아이즈 와이드 샷>에서도 보여지는 집단섹스 등은 ‘판타지’가 아니다), 참가자들은 다들 희열에 차 있는 듯하지만(혹은 희열을 연기하는 듯하지만) “온통 사방에서 시달리는” 그들은 사실 너무 고생스러워 보인다(아무런 마취도 없이 성기를 피어싱한다고 생각해보라).

‘향락’이라는 이름의 바로 그러한 고생/고통이 우리가 ‘나=나’라는 기적을 포기하는 대가로 얻는 ‘보상’이다(웬만하면 기적을 택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나는 소위 ‘성 범죄자들’이 보내져야 할 곳은 감옥이 아니라 이러한 (어떠한 금지도 없는) ‘섹스 천국’이라고 생각한다(그들에게 원하는 것을 주라!).(‘섹스 천국’의 유일한 금지는 외부에서는 절대로 아는 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베르톨루치의 문제작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는 ‘나=나’(라는 ‘파시즘’)에 대한 알레르기를 공유한다는 점에서 ‘안티-오이디푸스’적이다. 영화에서 말론 브란도와 마리아 슈라이버는 자신들의 이름을 지우며, 아파트라는 익명성의 공간에서 섹스만을 소통(불)가능성의 수단으로 사용한다. 그들은, 특히 이해할 수 없는 아내의 자살 때문에 심리적 공황상태에 빠진 말론 브란도는 남편이라는 사회적 정체성으로부터, 자신의 수많은 (가짜)이름들로부터 필사적으로 벗어나고자(탈주하고자) 한다.

그에게서 ‘나=나’의 세계란 가식적인/의례적인 탱고의 세계에 다름 아니기에(그는 탱고경연장에서 바지를 내리고 엉덩이를 까 보임으로써 그러한 세계를 욕보이고자 한다). 그러한 그가 도달하게 되는 마지막 지점은 물론 죽음이다(마지막 장면에서 보여지는 것이지만, 그에겐 삶이 그러했던 것처럼 죽음도 ‘껌’이었다). 그의 죽음을 순전히 부르주아 여성의 변덕/배신 탓으로 돌리는 것은 너무 소박한 견해일 것이다.

‘나=나’라는 테마를 사이에 두고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와 대척관계에 놓일 수 있는 것이 자크 도마엘의 <토토의 천국>이다(원제는 ‘영웅 토토’였던 듯하다). 신생아 병동에 난 화재소동 때문에 자신의 운명이 부잣집 아이의 운명과 뒤바뀌었다고 ‘믿는’ 토토는(자신의 연인도 빼앗긴다) 노인이 되어서 부도 위기에 몰린 이 재벌 친구(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 그냥 ‘한스’라고 해보자) 대신에 암살당하는 운명을 선택한다. 그는 그럼으로써 ‘나=한스’로 이행해가며, 자신의 ‘진정한 나(=한스)’로서 죽음을 맞는 ‘기적’을 연출한다. 그는 자기 운명의 주인공/영웅(Hero), 즉 주인-기표이고자 했던 것이다. 그 주인기표가 말 그대로 ‘죽음’을 의미하는 텅 빈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캐나다 감독 장 클로드 로종의 <레올로>에서 다루어지는 것도 같은 테마이다(나는 이 영화를 10년 전에 한 영화제에서 연거푸 보았다. 이 영화 또한 내게 ‘기적’을 보여주었다). 제대로 똥싸는 일에만 관심이 집중돼 있는, 몬트리올의 한 빈민가정에 태어난 소년 레오는 자신의 본래적 아버지는 시실리의 농부라고 ‘믿으며’ 그래서 자신의 이름도 이태리식으로 ‘레올로’라고 부른다. 치매에 걸린 할아버지와 무식한 아버지, 그리고 미친 누이들과 정신박약의 형 사이에서 삶을 버텨나가는 그는 집안에서 유일하게 책을 읽고 글을 쓴다. 그리고 옆집 처녀 비앙카를 사랑한다. 그러다가 비앙카가 돈을 받고서 할아버지에게 매춘을 한다는 걸 알고서는 할아버지를 죽이려다 정신병원으로 가게 된다. 영화의 나레이터에게 남겨진 것은 레오, 아니 레올로가 남긴 기록들뿐이다. 그것은 레오가 레올로라는 상징적 위임을 떠맡고자 분투했던 날들의 기록들이기도 하다(하면, 기적들도 웬만하진 않다).

 

 

 



어쨌든 인상적인 것은 죽음/정신을 담보로 하더라도 끝까지 ‘나(me/Me)’라는 상상적/상징적 정체성에 도달하고자 하는, 혹은 그걸 유지하고자 하는 분투들이다 가령, 모파상의 단편 <쥘르 삼촌>은 여기서 좋은 분석거리가 된다. 거기서 문제되는 것은 한 가족의 상징적 정체성이다. 부자가 돼서 돌아올 걸로 이들 가족이 꿈꾸는 ‘쥘르 삼촌’이 아무리 허울에 지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 허울은 필수적이다.

멕시코 감독 립스테인의 걸작 <짙은 선홍색>에서 자신의 ‘가발’에 악착같이 집착하는 대머리 이발사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그는 그 자신을 ‘가발을 쓴 나’하고만 동일시하고자 강박적으로 애쓴다. 가발을 안 쓰면 어떤가? 하지만, 그에게서 ‘가발을 안 쓴 나’는 곧 비존재(nothing)이다. 허리에 달랑 ‘새끼줄’ 하나만 두른 걸로 ‘의상’을 대신하는 한 원주민 부족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어차피 새끼줄로 가려지는 부분도 없지만, 그들은 새끼줄을 안 찬다는 건 상상도 하지 못한다(새끼줄도 안 차고 어딜 돌아다닌단 말인가?).

여기서 ‘쥘르 삼촌’과 ‘가발’과 ‘새끼줄’은 모두 동일한 의미연관을 갖는다. 즉, 그것들은 아무것도 아닐 수도 있지만(실제로 아무것도 아니기도 하다) 나/우리의 상징적 정체성에 필수적인 보증물이며 버팀목이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의미에서 “이데올로기 이전의 차원에 있는 향락의 무의미한 중핵”으로서의 그것들은 이데올로기적인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니지만, 이데올로기의 최종적인 버팀목으로 기능한다. <이데올로기>에서 지젝은 욕망의 그래프를 해설하면서 잉여 향락의 차원을 끌어오는바, 그것은 ‘이데올로기적 호명’(알튀세르) 너머의 차원에 있는, 이데올로기의 최종적인 버팀목으로서의 이러한 잉여물을 고려하기 위해서이다. 이에 따라 이데올로기 비판은 두 가지 상보적인 절차로 구성된다(이하 <이데올로기>, 217-223쪽 참조).



-하나는 담화적인 차원으로서 이데올로기 텍스트의 ‘증상/징후를 읽는 독법’이다. 이는 의미의 즉각적인 경험을 해체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다시 말해 이데올로기의 영역이 얼마나 서로간에 이질적인 ‘부유하는 기표들’의 조립을 통해, 다시 말해 어떤 ‘매듭’의 개입을 통한 전체화를 통해 가능하게 되었는지를 입증해 보여주는 것이다.

여기서 ‘의미의 즉각적인 경험’이란 건, 텍스트의 의미에 대한 순진한 지각/수용을 뜻한다. 서로 이질적인 기표들이 어떤 ‘매듭’을 통해 얽어 매지고, 조립(=편집)됨으로써 산출되는 게 이데올로기적 텍스트인데(가령 신문의 지면을 보라), 그걸 자연스러운 것으로 지각/수용하는 데 이데올로기의 함정이 있다. 증상/징후 읽기는 그러한 자연스러움을 ‘해체’하는 것인바, 이러한 작업은 바르트의 신화 읽기와 유사하다.

-다른 하나는 향락의 중핵을 추출해내는 것을 목표로 한다. 다시 말해 이데올로기가 (환상 속에 구축된 이데올로기 이전의) 향락을 함축하고 조작하고 산출하는 방식을 밝혀내는 것이다.

첫 번째의 ‘담화분석’을 두 번째의 ‘향락의 논리 분석’으로 보충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예증하기 위해서 지젝이 들고 잇는 것은 ‘이데올로기의 가장 순수한 육화’로서의 반유태주의이다. “담화분석의 수준에서 유태인의 형상 속에 투자된(=투여된) 상징적인 중층결정의 네트워크를 밝혀내는 것은 어렵지 않다. 첫째, 거기엔 전치의 과정이 있다. 반유태주의의 가장 기본적인 계략(=속임수)은 사회적인 갈등(=적대)을 건전한 사회조직체와 그것을 부패시키는 힘으로서의 유태인 사이의 갈등(=적대)으로 전치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전치는 유태인과 돈 거래를 연관시킴으로써 가능해진다. 이와 마찬가지로 착취와 계급적인 적대의 근원은 노동계급과 지배계급의 기본 관계 속에 위치하는 것이 아니라, 조직적인 조합이 계급투쟁을 대치하면서 ‘생산’력(노동자, 생산의 주최자…)과 ‘생산’계급들을 착취하는 상인들 사이에 위치하게 된다.”(218-9쪽)

마지막 문장은 오역인데, 러시아어본을 참조해서 다시 옮기면 이렇다: “그렇게 되면, 착취와 계급적 적대의 근원은 노동계급과 지배계급 사이의 관계가 아니라 생산계급(노동자+산업자본가)과 (생산계급을 착취하고 건강한 협력관계를 계급투쟁으로 변질시키는) 상인계급 사이의 관계가 된다.” 즉, 반유태주의는 ‘노동계급과 지배계급의 적대’를 ‘생산계급과 상인계급의 적대’로 전치시킨다. 이러한 전치를 보조하는 것이 응축(=압축)인데, “유태인의 형상엔 상하위계급들이 연상되는 특징들이, 상호 대립적인 특징들이 응축되어 있다. 유태인은 예를 들어 더러우면서도 지적이고, 음탕하면서도 (성적으로) 무기력하다 등등.”

담화분석에서는 이러한 유태인의 형상이 징후/증상이라는 걸 읽어낸다. 즉 그것이 코드화된 메시지이자 암호이고, 사회적 적대의 왜곡된 표상이라는 걸 읽어내는 것이다. 그러한 읽기가 바로 전치/응축작업의 ‘해체’이다. 하지만, 이러한 은유(=전치)-환유(=응축)의 논리 분석은 유태인의 형상이 얼마나 우리의 욕망을 사로잡고 있는지를 설명하기에 충분하지 않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유태인이 환상의 틀 속에 들어와 우리의 향락을 구조화하는 방식”을 고려하는 것이다.

“사회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환상의 목적은 바로 진정으로 존재하는 사회에 대한 하나의 비전을 구축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적대관계에 분할되지 않으며, 각 부분들 사이의 관계가 유기적이고 상보적인 사회에 대한 하나의 비전을 구축하는 것이다. 이에 대한 가장 분명한 경우는 물론 사회를 하나의 유기적인 통일체로서, 하나의 사회적 신체로서 보는 통합주의적인 관점이다… 우리는 물론 이러한 ‘하나로 통합된 신체로서의 사회’는 이데올로기의 근본적인 환상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220쪽)

그렇다면, 이러한 통합주의적 비전과 적대적인 갈등에 의해 분열된 실제 사회간의 거리는 어떻게 설명하는가? 이에 대한 대답이 유태인이다. “유태인은 건전한 사회조직을 부패시키는 이질적인 신체, 외부적인 요소이다. 요컨대 ‘유태인’은 물신이다. ‘사회’의 구조적인 불가능성을 부인하는 동시에 구현하는 물신인 것이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그것은 사회적인 장 속에서 향락이 분출되는 지점을 표시한다. 따라서 사회적인 환상이란 개념은 적대라는 개념에 대한 필수적인 대응물이다. 환상은 정확히 적대적인 균열을 은폐하는 방식이다.”

요컨대, “이데올로기적인 환상의 기능은 (사회의 구조적인) 이러한 비일관성을, 다시 말해 ‘사회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은폐하는 것이며, 따라서 우리에게 실패한 동일시를 보상해주는 것이다.” 예컨대, “파시즘에 있어 ‘유태인’은 파시즘 자체의 불가능성을 고려하고 표상하는 방편이다… 결국 ‘유태인’은 단지 어떤 근본적인 장벽에 대한 물신적인 구현물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221-2쪽) 더불어 지적하자면, 스탈린 체제에 있어서 ‘인민의 적’들은 사회주의 자체의 불가능성을 고려하고 표상하는 방편이었다. 왜 우리가 완전한 사회주의(=공산주의)에 도달하지 못하는가? 인민의 적들 때문이다! 왜 진정한 세계화가 실현되지 못하는가? 분파적 테러리스트들 때문이다! 등등.

“따라서 이데올로기 비판은 전체주의적인 응시에 의해 인식된 인과율의 연쇄를 전도시켜야 한다. ‘유태인’은 사회적 적대의 실제 원인이라기보다는 단지 사회가 하나의 완결되고 동질적인 전체로서 자신의 완전한 동일성은 획득하는 것을 방해하는 어떤 장벽과 불가능성의 구현물일 뿐이다. 유태인은 사회적인 부정성의 실제 원인이라기보다 사회적인 부정성이 실제의 현존을 떠맡는 지점이다.”(222쪽)

마지막 문장을 다시 옮기면: “유태인은 사회적 부정성의 원인이 아니다. 유태인의 형상은 사회적 부정성 자체가 실정적인 것으로 전화하는 지점이다.” 그렇다면 이데올로기 비판은 어떤 주어진 이데올로기적인 구성물 속에서 그것 자체의 불가능성을 표상하는 요소를 탐사하는/드러내는 것이다. 결국 ‘사회적인 환상의 횡단’은 이런 식으로 ‘증상과의 동일시’와 상관적인 게 된다.

지젝은 이데올로기를 일종의 사회적 환상으로 다루는데, 사회적 환상과 개인적 환상이라는 (불)가능한 구분을 도입하자면, ‘쥘르 삼촌’과 ‘가발’과 ‘새끼줄’은 가족적/개인적 환상이기도 하다. 보다 일상적인 용어로 말해서, ‘환상’을 우리의 (구조적인) 실패에 대한 ‘핑계’가 되어주는 것으로 정의한다면, 그것의 기본문형은 “그것만 없(었)다면(if not only)” 혹은 거꾸로 “그것만 있(었)다면(if only)”이다. 쥘르 삼촌만 있다면, 가발만 있다면, 새끼줄만 있다면, 상징적 동일시가 가능해지고, 모든 것이 완벽하게 될 거라는 기대/가정이 바로 환상의 중핵이다. 그리고 그러한 환상의 횡단이란 쥘르 삼촌과 가발과 새끼줄이 다만 허울이며 핑계라는 걸 인지/확인하는 것이다. 즉, 쥘르 삼촌과 가발과 새끼줄과 유태인은 모두 ‘환상’이며, 그 너머에 있는 건 ‘실재라는 사막’이고 ‘shit’이며, ‘개똥’이고 ‘nothing’이라는 걸. 거기에 있는 건 궁극적으로 죽음 충동뿐이라는 걸. ‘개똥-되기’에의 충동.

앞에서 나는 ‘나=나’로의 이행이 (불가능한) 기적이며, ‘나≠나’(투어적 존재론)가 그러한 기적에의 거부/회피라고 말했지만, 그때의 불가능한 기적은 불완전한 기적이기도 하다. 보다 온전한 기적의 내용은 ‘나=나’가 아닌 ‘나=0’라는 사실의 인지/확인에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그걸 ‘기적의 횡단’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즉, 진정한 기적이란 “나는 나이지만,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라고 말하는 기적이다(“주여, 저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걸 순차적인 것으로 이해하면, 기적은 두 번 일어나며, 두 번 일어나야만 한다. “나는 나다”라는 기적, 그리고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기적.



다시 반복하자면, 하름스의 <노파>에서 ‘기적을 행하는 자’는 (1)평생 동안 단 한번의 기적도 행하지 않았다. 왜인가? 그는 기적을 행하는 자이지만, 동시에 그는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기적을 행하는 자이며, 어떤 기적도 행할 수 있다는 것을 알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 자신을 ‘기적을 행하는 자’와 동일시하기가 첫 번째 기적이라면, 그 ‘기적을 행하는 자’를 ‘아무것도 행하지 않는 자’와 동일시하기가 두 번째 기적이다.

흔히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적’이라고 일컬으며 축복하지만, 그건 기적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되는 듯하다. 죽은 자가 부활하는 거야 기네스북에 오를 만한 일이지만, 그리스도는 신이며 최소한 신의 아들이 아닌가? 벼룩이 뜀뛰기를 잘 하는 게 기적이 아니듯이, ‘특별한 존재’가 기적(奇蹟)을 연출하는 것은 기적이 아니다. 오히려 그의 기적은 다른 데 있다. 십자가에 못 박혀 할 수만 있다면 이 잔을 물리고 싶다고 했지만, 그리고 그렇게 할 수 있었을 테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손가락 하나만 까딱해도 모든 걸 뒤바꿔놓을 수 있었을 테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진정한 기적은 바로 그 (할 수 있지만) ‘하지 않음’이다. 그걸 나는 ‘기적 없는 기적’이라고 부르고 싶다.

그리고, ‘기적을 행하는 자’는 (2)평생 동안 단 한번의 여행도 행하지 않았다. 투어로서의 삶을 ‘나=나’로부터의 도피라고 했지만, 그러한 도피의 이면은 ‘나=0’과의 대면에 대한 두려움이 아닐까? 우리가 진정으로 주체가 되는 것은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승인함으로써이다. ‘주체의 공백/궁핍(destitution of subject)’이란 말이 뜻하는바, 진정한 주체의 자리란 텅 빈 자리이기 때문이다. 그걸 무위(無爲)의 주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이 쉴 곳 없네”라고 한 가수는 노래했다. 내 속에 내가 너무 많은 한, 내가 ‘당신’을 영접하고 환대하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는다. 사랑이란 기적은 일어나지 않는다. 자비라는 기적도 일어나지 않으며, 혁명의 시간도, 민주주의도 도래하지 않는다. 하지만, 정말로 사랑과 자비가 우리의 마음 속에서 일어날 때, 혁명의 시간과 민주주의가 도래할 때, 그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것이어서 우리는 결코 그것이 기적이라고 인지하지 못할 것이다.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떠오르는 것을 아무도 기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타르코프스키(1932-1986)의 마지막 영화 <희생>(1986)은 전적으로 ‘기적 없는 기적’에 바쳐진 영화이다. 자신의 아들 안드류샤에게 바친 이 영화의 이야기는 “은퇴한 노배우 알렉산더가 생일을 맞이하여 꾸는 세계 종말의 꿈과 그것을 막으려는 노력의 하루 낮 하루 밤”을 다루고 있다. 영화평론가 정성일에 따르면, ‘우리 세기(=지난 세기)의 마지막 우화’인 <희생>은 한마디로 ‘자신을 희생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에 관한 영화다. 그는 3차 대전(=세계의 종말)에 맞서서 자신이 사랑하는 가족들을 지켜내고자 간절한 기도를 드리며 신에게 (종말 대신에) 오늘과 같은 하루가 내일 또 주어진다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겠다고 약속한다. 그리고는 다음날, 어제와 같이 밝은 햇살의 아침을 맞이하게 되자 그는 신에게 감사하며 가족들 몰래 자신의 집에 불을 지르고는 결국 앰뷸런스에 실려간다.

사실 이 영화는 암투병중이었던 타르코프스키가 자신의 영화적 유언으로 만든 것이며, 자신의 아들과 인류의 다음 세대를 위해서 영화 속 알렉산더처럼 모든 걸 희생하겠다는 각오로 찍은 영화이다. 이 영화에서의 기적은 알렉산더의 간구대로 다음날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이다. 다른 가족들에겐 일상적인 또 다른 하루가 시작된 것이었지만, 알렉산더는 그 하루에서 신의 은총과 기적을 본다. 그래서 자신의 모든 걸 희생한다(그는 한마디도 하지 않겠다고 약속함으로써 자신의 ‘말씀’, 즉 로고스 또한 신에게 제물로 바친다). 만약에 당신이 이 ‘기적’ 같은 영화를 보면서 눈물 흘리지 않았다면(동시에 이 영화는 아주 코믹하다), 아직 당신의 삶은 기적이 아니라 투어에 가까운 것이리라.

바라건대, 당신 스스로가 ‘기적을 행하는 자’임을 믿을 것이며 세상은 너무도 많은 기적으로 충만해 있음을 믿을지어다. 아멘.

06. 05. 30.



P.S. 쿠스투리차의 <삶은 기적이다>에서는 시작 장면에서 “삶은 정말 기적이군!”이란 대사가 나온다. 우체부가 주인공 루카의 집 암탉이 닭장 둥지에 잔뜩 낳아놓은 달걀들을 보면서 감탄하며 내뱉는 대사이다. 전쟁과 난장 속에서도 (일상적) 삶이 끈질기게 이어지는 것, 그것이 쿠스투리차가 보는 기적이다. 이란 감독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버전으로 말하자면, (지진과 같은 재난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삶은 계속된다”는 것이 기적이다. 그렇듯, 기적은 활달하고 기적은 눈물나며, 기적은 충만하다. 눈물 흘리는 성상/성화나 불상/탱화를 찾아 다니는 이들만 모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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