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여름에 한 카페에 올려놓았던 글을 다시 옮겨놓는다. 종교에 관한 토론/논쟁에 부득이하게 끼어들어 한 마디 거들었던 글인 듯하다. 다시 읽어보면서, 세월이 지남에 따라 무엇이 변하고 안 변하고 하는지를 알겠다.

저는 굳이 밝히자면, 무신론자이고, 범신론자입니다. 저에겐 무신론과 범신론의 차이가 잘 구별되지 않기에 그냥 막연하게 그렇게 분류하기로 하지요. 하긴 유신론이나 무신론이냐 하는 것이 대개는 기독교 신의 존재 유무에 대한 판단 혹은 태도에 따른 것이어서, 그러한 사유 전통이나 범주의 바깥에서 바라볼 경우, 별다른 의미를 갖지 않는다는 것은 인정해야겠죠.

그리고 사실, 러시아의 무신론이란 것도 19세기에는 일종의 신앙이었기에, '무신론'에 말에 대한 '체감' 또한 저마다 다를 거라는 점도 인정해야겠구요. 하여간에 신의 존재에 대해서 (논리적으로) 증명해 보겠다는 발상 자체가 자연적인 것도, 보편적인 것도 아니라는 전제 하에서, 어떤 것이 존재한다는 것이 '증명'의 대상이 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이런 문제에 대해 길게 논의하고 싶지는 않지만, 또 제가 자세히 알지는 못하나 유대교적 전통이나 부정신학에서의 신은 똑같은 기독교적 신이라 하더라도 양상이 좀 다르다는 건 말씀드리고 싶어요. 요는 우리가 신에 대해서 알 수 없다는 것. 왜냐면, 우리는 무능력하고 어리석으며 모자라니까. 조금 만용을 부려 신의 존재를 증명했다고 해서, 그 증명 때문에 신이 존재하기 '시작'하는 것도 아닐 뿐더러, 만약에 '존재'한다면, 존재 '증명'이 안된다고 해서 더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도 아니겠죠.

요는 신의 존재 증명이니 하는 것은 (비트겐슈타인의 용어를 빌리면) 기독교적 담론 체계(/전통) 내에서의 언어게임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믿는 자에게만 중요한. 믿지 않는 자에게는 바람에 흩날리는 비닐 봉다리만큼이나 사소한. 그러면서 때로 거룩한.

 

 

 

 

이러한 토론/논쟁에 제가 깊이 참여하지 않는 것은 오래 전부터 그러한 '게임'에 멀미를 느끼기 때문입니다.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에서의 <대심문관>)이나 이문열의 <사람의 아들>을 재미있게 읽었더랬습니다. 하지만, 관념이 주는 재미라는 건, 한 인류학자가 지적한 대로, 그저 '생각하기에 좋은 것(good to think)'이어서, 우리 삶을 가상으로만 지배할 따름입니다. 삶을 철학화하는 데 대해 반감을 가졌던 체홉의 경우를 떠올릴 수도 있겠네요.

이반 카라마조프가 가졌던 의문 중의 하나는 신의 존재라기 보다는 신의 의미입니다. 하여간에 이러저러한 신의 존재한다고 칩시다. 그리고 그러한 신(들)에 의해서 이 세계가 창조되었다고 칩시다.(그런 믿음은 가정이 아닐 경우, 대개는 용기의 결여에서 나오는 것인데- 즉 끝까지 가보지 않는 사유) 그렇다고 해서 무엇이 얼마만큼 달라지는지요. 순진한 어린아이들의 무고한 고통이 감면됩니까? 소위 세계 고가 탕감됩니까? 예수만 믿으면 천국에 간다고 아침마다 전철역에서 설교하는 분도 있는데, 정말 그런 확고한 믿음을 갖고 있다면, 제 생각에 그 믿음의 환희 때문에(혹은 두려움 때문에) 심장이 터져 죽든가 혼절하든가 해야하지 않을까 싶군요.

주인 의식을 가지고 사는 건 좋지만, 주인 의식이라는 게 자신이 이 세상의 중심이라는 의식이어야 할 필요는 없을 겁니다. 내가 사는 곳, 내가 속한 공동체, 내가 가진 믿음이 반드시 옳은 것이고 절대적인 것이어야 한다는 믿음보다 태만하며 부정직한 믿음을 저는 알지 못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의미에서, 그러한 믿음은 '인간적'이기조차 합니다. 무능력하고 이기적이며 모자란...

 

 

 

 

'하늘을 나는 새, 들의 백합'이란 성경 구절도 있지만("공중 나는 새를 보라, "들의 백합화를 보라"), 자신의 존재를 그 새들과 백합과 차별화시키면서 잘난 체하기보다는 그 새들과 백합의 자유로움과 아름다움을 조금이라도 본받아 보려는 삶이 제겐 좋아보입니다. 저마다 자신의 의견과 주장을 말할 수 있고, 자신이 좋아하고 싫어하는 걸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건 타자로서의 자신뿐만 아니라(우리는 자신에게 낯설지 않던가요?) 다른 이, 다른 존재들의 언어에 귀기울이기 위한 것입니다. 일종의 말건넴이지요.

정말로 보기에 좋더라는 세상에 살고 싶은 건 모든 사람의(모든 사람은 아닐 겁니다) 꿈이고 열망일 겁니다. 하지만, 그런 세상을 손에 물 안 묻히고, 무슨 믿음 하나로 이루려고 하는 건 교만이겠지요. 믿거나 말거나 각자의 자리에서 세상의 조그만 정의들을 위해서 조금씩 노력해 가는 것, 가끔은 퇴보도 하고 방황도 하면서 하여간에 어딘가를 주시하며 가는 것, 그것이 저에겐 신의 존재 증명보다도 신의 의미보다는 중요해 보입니다. 그래서 저는 무신론자이고, 굳이 말하자면 범신론자입니다. 당신들이 모두 신으로 보이니까...

 

 

 

 

(*)마지막 멘트는 그냥 유머이다. 그리고 그 유머의 다른 말이 '이데올로기'이다. 테리 이글턴에 따르면, 인간을 신이나 벌레로 간주하는 태도가 이데올로기의 정의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그 사이의 어중간한 무엇이다. 혹은 침팬지와 보노보 사이의 '제3의 침팬지'일 뿐이다...   

06. 05.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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