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스크바 통신을 꼼꼼하게 읽으신 분이라면 이 글의 제목은 낯설지 않을 것이다. 재작년 7월말에 나는 지젝의 <이라크> 읽기 한 대목을 "유럽은 무엇을 원하는가?"란 제목으로 올린 적이 있다. 이 글은 그 이미지-버전이다. 한편으론 지젝에 관한 글들을 한 데 모으기 위한 정리이기도 한데, 모스크바 통신에서는 여러 조각으로 나뉘어 있어서 읽기에 불편한 점이 있었다. 다시 읽으면서 일부 곁가지들을 제거했고, 몇 마디 새로 집어넣기도 했다(이런 글을 다시 읽는 건 개인적으로 회고적인 정서에 물들게 한다).

오늘 서울에서 보낸 온 책 소포를 받았다. 점심을 먹고, 인터넷카페에 산책 삼아 가려는 참이었는데, 7층 경비 할아버지 책상에 우편물 수령안내장이 놓여져 있는 걸 우연히 봤다. 그런데, 수신자가 나였다! 안내장을 들고 찾아간 곳은 1층의 허름한 방이었는데(그런 곳이 있는 줄은 처음 알았다), 소포우편물들이 잔뜩 쌓여 있고, 우편 행낭이 여럿 놓여 있는 방에서 나를 맞이한 여직원은 그래도 상당히 친절한 태도로 안내장을 확인하고 여권을 보여달라고 했다. 출입증만 갖고 있던 나는 다시 7층의 방으로 올라서 여권을 챙겨가지고 내려왔다. 여직원이 안내장 뒷면에다 필요한 기재내용을 적고, 나는 서명을 했다. 그리고는 행낭에서 ‘우체국택배’라고 한국어로 씌어진 소포박스를 하나 꺼내서 저울에다 무게를 달았다. 1.92kg이라는 저울의 눈금을 나에게 확인시키더니 역시나 확인 서명을 하도록 했다.

 

 

 

 

그런 과정을 거쳐서 받아온 것이, 이달 초순에 지인(知人)에게 부탁했던 세 권의 책인바, 지젝의 <이라크>와 들뢰즈의 <비평과 진단>, 그리고 들뢰즈/가타리의 <철학이란 무엇인가>이다. 우편물의 경우 보통 서울에서 모스크바까지 3주 정도가 소요되는데, 나는 다음주에나 받아보지 않을까 생각하던 참이어서 다소 뜻밖이었다(물론 좋은 쪽으로). 이 세 권의 책을 부탁한 건 물론 세 권의 러시아어본을 내가 모두 갖고 있기 때문이고, 그런 참에 좀 읽어보고자 해서이다. 지젝의 신간에 대한 관심은 물론 그의 ‘독자(혹은 수신자)’로서 당연한 것이고, 들뢰즈의 책 두 권은 내가 이전에 국역본은 물론이거니와 영역본으로도 ‘재미를 못 본’ 책들이라, 러시아어본이라면 사정이 혹 다를까 해서 ‘주문’한 책이다.

<철학이란 무엇인가>를 좀 읽어본 건 적어도 6년 전의 일이고, <비평과 진단>은 올 연초엔가도 잠시 들춰봤는데, 첫 에세이인 '문학과 삶'을 넘기기가 힘들었다(이런 건 누가 해설을 좀 해줬으면 좋겠다. *결국엔 귀국 후에 <비평과 진단> 읽기를 한동안 진행한 바 있다. 언제 끝날지 가늠할 수 없지만). 몇 줄로 요약하는 건 나도 할 수 있지만, ‘읽어 내려가는 건’ 쉽지 않다(누가 들뢰즈를, 특히 <비평과 진단> 같은 걸 쉽게 읽어 내려가는지 궁금하다). 국역본만을 술술 읽어서 이해할 수 있다면, 굳이 두 종의 번역본을 참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물론 나는 그런 경우에도 여러 개의 번역을 선호하는 편이지만).

하지만, 이미 여러 차례 지적한 바대로 (부정적으로는) 우리 번역들이 대개는 아직 만족할 만한 수준에 이르지 못하고 있으며(<비평과 진단> 같은 건 나로선 완독이 불가능한데, 거기엔 물론 부정확한 번역 외에도 아직 한국어가 서구의 철학/이론을 번역하기에는 덜 조밀하다는 것이 한몫할 터이다), 다른 한편으로 (긍정적으로는) 다른 번역, 다른 언어의 ‘바꿔 말하면-효과’를 통해서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기 때문에, 나는 두 가지 언어의 번역본을 읽는다. 들뢰즈가 <비평과 진단>의 서두에서 인용하고 있는 프루스트에 따르면, “훌륭한 책들은 일종의 외국어로 씌어져 있다”고도 하고(그러니까 훌륭한 책들은 아예 외국어로 읽어볼 필요도 있다!).

물론 국역본으로만 읽고 이해할 수 있고 마음 놓고 인용할 수 있다면 그보다 더 바람직한 경우는 없을 것이다. 아무래도 러시아어 등의 외국어로 읽는 것보다는 ‘빨리’ 그리고 ‘편하게’ 읽을 수 있고, 또 인용할 때 따로 번역해야 하는 수고도 덜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제는 ‘정확성’이다. 지젝의 <믿음에 대하여> 같은 부도덕한 번역서(라기보다는 오역서)들이 양산되는 한, 결코 안심하고 읽거나 인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언제나 마음 놓고 읽을 수 있을까?

번역도 ‘문화’인 한에서, 좋은 번역서들이 하늘에서 뚝 떨어지기를 고대할 수만은 없다. 해서, 좋은 번역서들을 장려하는 한편, 나쁜 번역서들이 발붙이지는 못하도록 하는 독서문화, 번역문화, 출판문화가 우리에겐 필요한 것이다. 책에 묻혀 사는 나에게 좋은 세상이란 좋은 책들이 나오는 세상이며, 내가 좋은 세상을 만드는 데 조금이라도 보탤 수 있는 힘은 그런 책들이 나올 수 있도록 노력하고 감시하는 것이다. 그런 것이 우리가 각자의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최소한이리라.

서두가 길어졌는데, 오늘 받아본 세 권의 책 중에서 일단 제일 먼저 읽기 시작한 것은 <이라크>이다. 물론 주업(번역)에 대한 부담 때문에(요즘 계속 할당량을 못 채우고 있다. 옛날 같으면 ‘시베리아 유형’ 감이다) 중간에서 책읽기를 끊어야 했는데, 내가 읽은 건 1장의 “유럽은 무엇을 원하는가?”란 절까지이다(52쪽까지). 그러니까 1/4이 좀 못 되게 읽은 셈이며, 조금 자제하면서 읽으려고 하지만 잘 될지는 미지수이다.

Славой Жижек Ирак. История про чайник Iraq: The Borrowed Kettle

이미 이전에 언급한바 있지만, 지난달에 나온 러시아어본은 프락시스란 출판사에서 출간된 것인데, 포켓북 사이즈이고, 가격은 3,500원 정도였다(2,000부 발행). 발행부수가 적은 것은 러시아에서 지젝의 지명도가 상대적으로, 그러니까 한국보다도 훨씬 낮기 때문이다. 영어본의 원제가 (Verso, 2004)인 <이라크: 빌려온 항아리>(도서출판b, 2004)의 러시아어본 제목은 <이라크: 주전자에 관한 이야기>이며 오렌지색 겉표지에는 작업복 차림에 미군 헬멧을 쓰고 걸어가고 있는 부시 미대통령의 사진이 박혀 있다.



사소한 것이긴 하지만, 원제의 ‘kettle’이 우리말로는 왜 ‘주전자’가 아닌 ‘항아리’가 됐는지는 잘 모르겠다. 직접적으로는 아마도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의 한 일화(‘농담’)에 나오는 것이고, 짐작에는 거기서도 ‘항아리’가 아니라 ‘주전자’였을 거 같은데 말이다(항아리를 빌려주었다가 돌려받는 건 드문 일이지 않을까?). 단서가 없는 건 아니다. 국역본 8쪽에 보면, 후세인 정권 붕괴 이후에 이라크의 박물관이나 유적지에서 도난당한 ‘고대의 항아리’ 얘기가 나오기 때문이다.

아마도 영어본에서는 이 ‘항아리’도 (흔히 ‘항아리’를 가리키는 ‘urn’이란 단어 대신에) ‘kettle’로 표기하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kettle’은 무엇을 보관해두는 ‘항아리’가 아니라, 무엇을 끓이는 데 사용되는 도구이다. 미심쩍어서 찾아본 영한사전에는 ‘솥’이나 ‘탕관’ 혹은 ‘주전자’를 뜻하는 걸로 나와 있다. 그러니까 만약에 이라크에서 도난당한 것이 ‘kettle’이라면 엄밀한 의미에서 ‘항아리’는 아닌 셈이다.



러시아어본에는 ‘관’이나 ‘용기’를 나타내는 단어가 쓰이고 있는데, 그런 의미에서라면 ‘항아리’라고 옮겨도 무방하겠다. 다만, 러시아어본에서는 ‘다른 항아리’로서 얘기하는 ‘주전자’에 대해서는 그와 다른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그러니까 ‘항아리’와 ‘주전자’를 구별하고 있다는 얘기다. 국역본에서는 ‘일관성’을 고려해서인지 ‘항아리’로 통일하고 있다. 하지만, 지젝이 말하고 있는바, “이 책의 제목은 고대의 항아리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므로, ‘주전자’가 ‘항아리’로 탈바꿈한 것은 ‘시적 허용’에 가까운 것이 아닌가 싶다.

사실, 국역본 <이라크>는 부제답게 ‘주전자’라기보다는 ‘항아리’에 가깝다. 촘스키의 경우도 마찬가지이지만(9.11 관련 촘스키의 책들은 대부분 러시아어로 번역돼 있다), 현실에 대한 긴급하고도 현실적인(=액츄얼한) 비평을 담고 있는 이런 류의 ‘시사적인’ 책이 하다카바에 ‘학술적인’ 서적처럼 포장돼 나오는 건 너무 ‘무거운’ 감이 있다(실제 원서 중 하드카바로 나온 지젝의 책이 얼마나 있던가?). 항아리처럼 말이다.

지젝의 한 독자로서 나는 그의 책들이 보다 많이 읽히기를 바라는바, 적어도 <이라크> 같은 책만큼은 소프트카바에 재생용지를 써서라도 보다 저렴한 판형으로 출간되었더라면 더 좋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을 해본다(책이 좀 팔린다면, ‘보급판’을 고려해봄 직하다는 것이 나의 제안이기도 하다). 그랬더라면 15,000원이라는 정가가 3,500원까지 다운되지는 않더라도, 대학생들이 아무런 부담 없이 사볼 수 있는 정도는 되지 않았을까? 이라크에 3,000명의 한국군이 파병될 예정으로 있지만, 그에 대응하기 위해서라도 최소한 3,000명 정도는 이 책을 읽어야 하겠기 때문이다(나의 바람은 적어도 3만 명은 읽는 것이지만).

인간사랑에서 나오는 지젝 번역서들도 그렇지만, 나는 ‘하드카바’ 지젝은 反지젝적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읽고 이해하는 한, 지젝은 고상하거나 귀족적이지 않으며 아카데믹한 것도 아니다. 그는 누구보다도 대중적이며 보편-지향적이다(그는 라캉=예수의 ‘바울’이고자 한다). 다만, 그가 구사하는 담론의 모태가 헤겔과 라캉이기 때문에 다소 어렵게 느껴질 따름이다(더구나 우리에겐 헤겔도 라캉도 제대로 번역돼 있지 않으니까). 하지만, 그걸 중화시키기 위해서 그가 얼마나 애쓰고 있는 것인지(반복해서 말하는 것도 그런 노력의 일환일지 모른다)!

헐리우드 영화 등의 대중문화들을 주로 참조하는 다른 책들에서도 그렇지만, <이라크>를 말하기 위해서 주전자(‘항아리’) 일화를 끌어올 만큼 ‘서민적’이며 ‘대담한’(더불어 ‘비학술적인’) 지식인(그는 말의 본래적 의미에서 전형적인 ‘인텔리겐치아’이다)이 우리 시대에 과연 몇이나 되는가? 거기에 부응하기 위해서라면, 지젝은 보다 대중화될 필요가 있다. ‘주전자’처럼 헤프게 빌려주고 받으며 ‘상식적으로’ 읽힐 필요가 있다. 지젝이 원하는바, 세상이 조금이라도 바뀌려면 말이다.

국역본 <이라크>가 다소 ‘무겁다’는 얘기를 했는데, 그건 번역에도 해당되는 말이다. 제대로 된 번역이 오히려 ‘이상한’ 지젝 번역 시장에서 읽기에 무난한 번역서가 나온 것만으로도 다행스런 일이긴 하지만, (보다 많은 독자를 확보하기 위해서라도) 좀더 쉽게 읽히는 번역이었으면 하는 욕심을 가져본다. 예컨대, 10쪽에 “라캉의 ISR 삼항조”라는 얘기가 나오는바(몇 군데 더 나온다), 역자들은 ISR이 CIA만큼 독자들에게 친숙할 거라고 생각하는 것인지 궁금하다. 심지어 매스컴에서 자주 나오는 WMD조차도 처음 나올 때, ‘대량살상무기’라고 풀어준 것에 비하면, ‘ISR’은 좀 불친절하다. “상상계-상징계-실재의 삼항조”라고 풀어주던가, 아니면 역자들이 쓰는바, “상상적인 것-상징적인 것-실재의 삼항조”라고 풀어줄 수 있지 않았을까? ISR에서 책을 덮어버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그런 게 농담만은 아닌 것이, 한때 인문서적에서는 ‘기표’란 말조차도 금기시 됐었다. 소위 교양 있는 독자들조차도 기호학(記號學)이 기호(嗜好)에 관한 학문이 아닌가라고 짐작하는 게 ‘일반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령, “기표 ‘유럽’에 되살려야 할 어떠한 차원이 있다면, 이 행위는 그 용어의 가장 감동적인 의미에서 ‘유럽적’이었다.”(45쪽)라고 할 때도 굳이 ‘기표 ‘유럽’’이란 말을 고집하느니 그냥 ‘‘유럽’이란 말’이라고 하는 게 더 낫지 않았을까? 덧붙여 ‘용어’도 그냥 ‘말’로 충분하다. 이런 건 물론 오역의 사례가 아니다. 다만, 번역에서 ‘발신자’ 지젝뿐만 아니라 ‘수신자’ 독자까지도 더 고려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을 피력하는 것뿐이다...

제목과 관련한 얘기로부터 지젝은 현 이라크 정세(이건 세계 정세의 축약본이기도 한데)에 대한 자신의 개입/발언을 시작한다. 항아리 얘기를 보다 가벼운 주전자 버전으로 바꾸면, 프로이트의 ‘농담’은 이렇게 된다: (1)나는 당신의 주전자를 빌린 적이 없다. (2)나는 당신의 주전자를 고스란히 돌려주었다. (3)내가 당신에게서 주전자를 빌려왔을 때, 주전자는 이미 구멍이 나 있었다. 자연스런 삼단논법처럼 보이지만, 여기서 (2)는 (1)을 뒤집고(씹고), (3)은 다시 (2)를 뒤집는다(씹는다). 결과만을 놓고 보자면, 주전자의 ‘망가짐’을 ‘부정을 통해’(per negationem) 승인하는 대신에, 그 책임을 상대방에게 전가시키는 궤변이다.

이러한 궤변적 사례를 통해서 프로이트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기묘한(‘이상한’) ‘꿈의 논리’이며(이건 동시에 ‘부조리한 논리’이다), 이라크 공격에 대한 정당화 논리이기도 하다. 그리고 동시에 전쟁 반대론자들의 논리이기도 했다(9쪽의 각주2). 이 비일관적인(=부조리한) 논리에 일관성(=정합성)을 부여해주는 건, 즉 그러한 비일관성을 ‘봉합’하는 건 이데올로기인바, 지젝은 ‘전쟁의 얼굴’ 제시카 린치 일병의 사례를 통해서 이 이데올로기의 상상적, 상징적, 실재적 차원이 어떻게 얽혀있는가, 라캉식의 ‘매듭’을 구성하고 있는가를 보여준다. 그렇다면, 이데올로기가 아닌 (전쟁의) 진리는 무엇인가?

추상적-기술적 비디오게임식 접근으로 요약되는 걸프전(1991)과 병사의 관점에서 ‘인간적 촉감’을 제공하는 종군기자들의 구체적 묘사로 특징지어지는 이라크전(2003), 즉 “추상적 디지털적 층위”와 “인간적 접촉이라는 층위” 사이의 ‘분리 자체’가 그 ‘진리’이다. 두 가지 층위(=차원)는 모두 ‘구체적 총체성’을 포착해내는 데 실패했다는 점에서 똑같이 추상적이며, 사실 지젝이 자신의 이론적/실천적 개입을 통해서 구성/구축해내고자 하는 것이 바로 이라크전의 ‘구체적 총체성’이다.

그러한 ‘구체적 총체성’에 이르기 위한 여정에서 지젝이 먼저 짚고 있는 것은 이 전쟁의 실재적인 이유이며, 그는 그것을 세 가지로 정리한다. (1)미국이 다른 나라에 민주주의와 번역을 가져다 주고 있다는 진지한 이데올로기적 믿음. 즉 서구 민주주의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믿음. (2)미국의 헤게모니(=미국 중심의 새로운 세계질서)를 단언하고자 하는 필요성(국역본에서는 ‘추동’). (3)이라크 석유에 대한 통제. 즉 경제적 이해관계. 이 세 가지 동기는 ‘상대적 자율성’을 갖고 있지만, 지젝은 그런 가운데에서도 핵심적인 건 (2)라고 본다.

즉 (국역본의 뒷표지에도 박혀 있지만) “새로운 세계질서의 좌표들에 말뚝을 박기 위해서, 예방적 차원에 대한 미국이 권리를 주장하고 그리하여 미국의 지위를 유일무이한 세계경찰의 지위로 끌어올리기 위해서 이라크를 구실이나 본보기로 사용하는 것.”(14쪽) 말하자면, ‘시범-케이스’라는 것이다(미국은 시범케이스로서의 이라크가 없었더라면 이라크를 만들어내기라도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메시지는 이라크 국민에게 보내진 것이 아니었으며, 우리 모두가 그 메시지의 “진정한 이데올로기적, 정치적인 표적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라크>를 읽으며 나는 한국의 이라크 파병에 찬성하느냐, 반대하느냐는 유사-쟁점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본론인 1장에서 지젝이 프랑스와 독일의 행태에 대해서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기도 하지만, “전쟁 반대, 파병 반대”라는 슬로건만이 도덕적인 선과 진보적 정치의식을 담보하는 건 아니다. 그건, 만약에 우리가 파병을 철회할 경우 ‘우리는’ 이 ‘더러운’ 전쟁에 손을 담그지 않는 것이며, 도덕적 자존심을 보존하는 거라는 ‘민족의식’만을 일시적으로 만족시켜줄 따름이다. 미국 헤게모니라는 우산 아래 있는 한 우리는 이미 손에 구정물을 흠뻑 묻히고 있는 것이며 충분히 ‘더러워져 있다.’(지젝도 반복하는 것이지만, “우리 모두는 이미 미국인이다!”) 그걸 망각/은폐하려는 어떠한 시도도 도덕적인 선이나 진보와는 거리가 멀다.

“유럽은 무엇을 원하는가?”란 절에서 지젝이 페미니즘(‘여성주의’)의 교훈으로 끌어내고 있는 바는, 앞당겨 얘기하자면, 우리에게도 적용될 수 있지 않을까? “여성을 위한 첫걸음은 가부장제에 대항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상황을 부당하고 굴욕적인 것으로, 자신의 수동성을 행위에의 실패(러시아어는 ‘무능력’)로서 경험하는 것이다.”(51쪽)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혹은 가능한 것은 어쩌면 ‘대항’이 아니라 ‘굴욕’인지도 모른다.

한국이란 약소국의 자존/자립의 가능성은 강대국에 대한 대항의 ‘제스처’를 통해서가 아니라(‘反美’라는 구호는 전형적인 정치적 슬로건이다. 사자 우리에서 “나는 사자가 싫어!”라고 외치는 건 얼마만큼 ‘현실적’일 수 있을까?) ‘굴욕’을 통해서 얻어질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반대 여론에도 불구하고, 이라크 파병이 강행된다면, 우리는 좀더 빨리 한미동맹관계의 굴욕적인 ‘더러움’을 깨닫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거꾸로 파병을 철회함으로써 혹 한미관계가 악화된다면, 오히려 한미동맹 강화에 대한 요구가 더 강해질지도 모를 일이고). 그런 게 변증법 아닌가?

다시 서론. 지젝은 자신의 책이 점진적인 ‘추상’의 길, ‘구체적 총체성’을 향한 길을 따른다고 미리 안내하는바(그 ‘구체적 총체성’의 대척관계에 있는 것이 ‘거짓 구체성’이다), 그 문학적 모델로 닥터로우(1931- , 사진)의 걸작(국역본은 ‘대작’이라고 옮겼는데, 정확하지 않은 번역이다. 6편의 단편과 1편의 중편을 ‘대작’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시인의 생애>(1984)를 들고 있는데, 그의 설명을 듣자면, 읽고 싶은 작품이다(닥터로우의 책이 번역돼 있는가?).

여하튼, 지젝이 반복해서 강조하는바, <이라크>는 이라크에 대한 책이 아니며, 이라크 위기와 전쟁 역시 이라크에 관한 것이 아니다. 그건 우리 모두에 관한 것이다(그러니까 “우리 모두는 이미 이라크인이다!”). 우리가 거기에 발을 넣고 빼고 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세계화(globalization) 시대의 철학자, 지젝이 보기에 순진한 환상, 혹은 자기기만에 불과하다(그는 어쩌면 유마경의 지혜를 반복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하기야 불교의 연기설(緣起說)이야말로, 인식론이면서 동시에 무한책임의 윤리학이 아닌가!).

거듭 지젝이 강조하는 것은 이라크전의 ‘세계적 맥락’(=전지구적 컨텍스트)이다(‘세계적’이란 말은 ‘global’의 역어로 보이는데, 역자들이 이전의 ‘범역적’이란 역어를 고집하지 않은 것은 다행스럽다). 사실 이 점만을 독자들에게 설득력 있게 제시하는 것만으로도 지젝의 역할은 충분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독자의 목록에 가장 우선적으로 고려되어야 할 사람들은 ‘미국의 정치엘리트들’이지만(그리고 한국의 정치엘리트들), 그들이 이 책을 참조할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어제(이미 어제이다) 낮에 모스크바에 와서 처음으로 ‘아마존’에서 '지젝'을 검색해보니까 <이라크>에 대한 독자리뷰가 한 편 떠 있었는데, 혹평에 가까웠다(별 2개). 지젝의 ‘빈곤한 어휘’(마이클 무어보다 빈곤한?)와 논증이 결여된 단언들에 대한 비판으로 읽혔는데, 그렇듯 (계몽적인) 지젝을 안 읽어도 되는 (이미 계몽된) 독자들이 미국민의 다수였다면, 사실 <이라크> 같은 책 자체가 불필요하며 아예 씌어지지도 않았을 텐데 안타까운 노릇이다.

그리고 1장. '이라크와 그 너머'인데, 첫번째 절은 “이라크 맥거핀”, 즉 맥거핀으로서의 이라크이고, 내용은 어렵지 않다. 그런데, 23쪽에서 “나는 그들이 다음 백 년 동안 사담 후세인 제국의 유물을 파묻고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23쪽)라는 CIA분석가 데이비드 케이의 말은 오역인 듯싶다. 문맥상 앞으로도 후세인의 유물(=WMD)를 찾는 데는 백 년의 세월이 더 필요할지도 모른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런 뜻이라면, “유물을 파묻고 있을 것”이 아니라, “유물을 파헤치고 있을 것”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논리상 말이다.

부시와 마찬가지로 그의 ‘푸들’ 블레어 역시 열렬한 크리스천인 모양인데, “부조리하기 때문에 믿는다(credo quia absurdum)”라는 ‘진정한 기독교인’들의 슬로건이야말로, 내가 혐오해 마지 않는 것이다. (파병 찬성론자들의) 이라크 파병도 하나님의 뜻이고, (파병 반대론자들의) 파병 반대도 하나님의 뜻이지만, 이 ‘진지한 기독교인들’은 그러한 ‘부조리함’ 때문에 더더욱 열심히 기도를 드리는 모양이니 ‘불경한’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을 따름이다(나는 차라리 '주전자'나 믿어야 할 모양이다). 가령, 부시의 “자유는 다른 나라에 선사하는 미국의 선물이 아니라 인류에게 내린 신의 선물이다”(39쪽)라고 말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물론 지젝은 이러한 독실한 ‘신성모독’에 대해서도 분석/비판하고 있지만, 그와 별도로 나는 이런 족속들(=우리 인간들)을 신이 창조했다고 믿는 것이야말로 가장 ‘가공할 만한’ 신성모독이라는 생각을 한다. 이반 카라마조프식으로 말하자면, 혹 인간을 창조한 신이 있다 하더라도 그는 그 ‘수치심’ 때문에 진작에 자결하고 말았을 것이다(어디다 얼굴을 들고 다닌단 말인가?). 해서, 생각건대, 모든 ‘진지한 신앙’은 ‘진지한 이데올로기’일 따름이다. 민족에 대한 신앙도, 진보에 대한 신앙도. 그리고 유토피아에 대한 신앙도(그 점에서 나는 지젝의 ‘유토피아주의’에 대해서도 유보적이다. 이건 3부를 읽고 나서 얘기해 보기로 한다)…

세계 정세, 특히 아랍권 정세에 눈과 귀가 밝지 않은 나로서는 지젝을 읽으면서 ‘정보’를 얻기도 한다. 그 중 하나는 “이라크에서의 사람 후세인 체제는 궁극적으로 세속적 민족주의 체제였으며 이슬람 원리주의적 포퓰리즘과는 거리가 멀었다.”(29쪽)거나(그래서 오히려, 미국이 이라크 공격은 이슬람 원리주의를 전쟁 명분과는 다르게 오히려 조장하는 ‘역효과’를 낳고 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 사이에서 아라파트의 지배적 영향력을 잠식하려는 마키아벨리적 목표를 지닌 이스라엘이 최근까지도 재정적으로 지원했던 것이 바로 그 하마스다.”(33쪽, 각주2)라는 것이 그런 정보들이다(反아라파트는 미국과 이스라엘의 공통적인 태도이다). 미국과 이스라엘은 한마디로 배울 게 많은 나라들이다!

 

 

 



새로운 세계 제국으로서의 미국에 대한 지젝의 비판은 미국의 ‘제국-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제국-덜됨’에 있다. “오늘날 미국에 대한 문제는, 그것이 새로운 세계 제국이라는 것이 아니라, 그렇지 않다는 것, 즉 그런 척하면서도 무자비하게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민족국가로서 계속 행동한다는 것이다.”(32쪽)라는 게 핵심이다(*그러니까 문제는 '제국'이 아니라 '민족주의'이다).

같은 맥락에서 그는 세계화를 비판하는데, 그것은 세계화의 실상이 그 명칭에 걸맞지 않기 때문이다. 예컨대, “최근에 유럽연합의 한 불길한 결정이 거의 주목받지 못한 채 통과되었다. 유럽연합 영토의 격리를 보증하고 따라서 이주자들의 유입을 방지하는 전유럽적 국경 경찰력을 창설하는 계획. 이것이 세계화의 진실이다.”(50쪽) 즉 상품들은 국경을 자유롭게 넘나들면서 순환하지만, 인간들의 순환은 점점 통제되는 것이 그 진실이다(물론 이런 건 대한민국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니까, 문제는 ‘지나친’ 세계화가 아니라 ‘모자란’ 세계화이다(그런 의미에서 지젝은 反세계화에 반대한다. 反세계화는 ‘모자란 세계화’와 공모적이다).

해서, ‘세계 제국’이니 ‘세계화’니 하는 것은 듣기 좋은 슬로건들에 불과하다(그러니 거기에 반대하는 슬로건들도 듣기 좋을 건 당연하다. 즉 그들은 공모적이다). ‘신자유주의’라고 얘기하지만, 그 경우에도 문제는 ‘넘쳐나는 자유주의’가 아니라 ‘부족한 자유주의’이다. 자유무역을 내세우지만, 그때 자유무역이라는 건 자국의 비교우위가 확실한 분야에 한정된다. 거꾸로, 조금이라도 불리한 분야의 경우에는 해당사항이 없는 것이다(지젝은 의약품과 면화의 사례를 드는데, 덧붙여 우리와도 무관하지 않은 철강 또한 대표적인 사례이다).

‘민주주의’ 또한 마찬가지인데, 후세인의 독재를 타도하고 이라크의 민주화를 위해서 이라크전을 벌였다고 주장하지만, 정작 미국이 우려하는 것은 이라크의 진짜 민주화이며, 민주선거이다. 이러한 사정이 거꾸로 입증하는 바는, “사담의 이라크야말로 공식적으로 이미 세속국가였다는 점”이고, “반면 민주적 선거는 이슬람을 특권화하는 결과를 낳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36쪽).

‘구유럽’(럼스펠드의 표현) 독일과 프랑스 같은 “2순위 열강”의 이라크전에 대한 태도에 대해서 지젝은 매우 비판적인데, 이 역시 궁극적으로는 세계화에 대한 그의 시각과 맥락을 같이 한다. “따라서 프랑스에서 많은 좌파들과 우익 민족주의자들이 공유하는 ‘미국화’에 대한 거부는, 궁극적으로는, 프랑스 자신이 유럽에서의 헤게모니적 역할을 잃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따라서 크고 작은 민족국가들 사이에서의 비중의 평준화는 세계화의 유익한 효과를 가운데 포함시켜야 한다.”(41쪽) 그가 보기에, 독일과 프랑스가 두려워하는 것은 유럽공동체의 ‘이원적 헤게모니’를 꿈꾸는 자신들이 세계 제국의 일원으로 서 “오스트리아, 벨기에, 혹은 룩셈부르크 수준”으로 전락하는 것이다. 그리스가 우승을 차지한 ‘유로2004’에서처럼 축구로 치자면, 결승은커녕 8강의 문턱에도 오를지 못하게 될까봐 전전긍긍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지젝은 암시적으로 한 “영웅과 겁쟁이의 이야기”를 드는바, 이러한 이야기의 배경이 되고 있는 것은 구공산주의 국가들의 복잡한 정세, 아이러니컬하면서도 비극적인 정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민족주의적 보수주의자들이 한탄하고 있는 새롭게 출현하는 사회-이데올로기적 질서는 ‘억압적 관용’과 부자유의 현상 양태로서의 자본주의적 자유라는 오래된 신좌파의 묘사처럼 읽힌다.”(44쪽)

여러 번 반복해서 읽어야 뜻을 짐작할 수 있는데(즉 명쾌한 번역은 아닌데), 러시아어본을 참조해서 다시 옮기면 이렇다: “민족주의적 보수주의자들이 불평해대는, 새로운 사회적-이데올로기적 질서를 잘 설명해줄 수 있는 것이 신좌파들이 과거에 이름붙인바 ‘억압적 관용’과, 부자유를 은폐하는 수단으로서의 자본주의적 자유라는 점은 운명의 아이러니이다.”(인용부호로 봐서는 ‘신좌파의 묘사’가 ‘억압적 관용’에만 걸리는 것인데, 확실치는 않다.) 아이러니라고 한 것은 ‘억압적 관용’과 ‘자본주의적 자유’라는 것이 대개는 보수주의 이념의 근간이기 때문이다. 즉 보수주의자들이 보수주의에 대해서 불평하고 있는 것!

그런 상황 속에서 크로아티아의 겸손한 판사 이카 사리치(Ika Saric을 ‘이카 사릭’으로 음역하는 것은 오류이다. 대개의 동구어에서 ‘c’는 ‘ch’로 발음된다)는 대중적 지지 없이도, 그리고 생명에 대한 위협 속에서도 1992년 유고 내전시의 범죄와 관련하여 미르코 노라치(역시 Mirko Norac는 ‘미르코 노락’이 아니라 ‘미르코 노라치’로 읽어야 한다) 장군과 그의 동료들(전우들!)에게 12년 형을 선고했다. 그가 지젝이 꼽은 ‘윤리적 영웅’이다. 반면에 ‘겁쟁이’의 사례는 이라크전 발발 이후에 슬로베니아 정부가 보여준 행태이다.

슬로베니아는 빌니어스(Vilnius) 선언에 서명함으로써 ‘신유럽’의 일부로서, 그리고 ‘의지의 연합coalition of the willing’(‘willing’은 ‘의지’란 뜻이 아니라 ‘자발적’이란 뜻이다. 군사용어로는 ‘의용군’이라고 할 때의 ‘의용’이다. 해서 ‘자발적 연합’이란 뜻이겠다. ‘자발적’이란 것은 미국의 공식적인 요청 이전에 미국을 ‘알아서’ 지지하고 나섰다는 의미이다)의 일부로서 행동했다. 처음엔.

하지만, 외무부(‘외무성’) 장관이 서명한 이후, 곧바로 부인하는 코미디가 일어났는데, “대통령과 다른 권위자들에게”(‘권위자’란 말도 적절한 역어가 아니다. ‘고위층 인물들’ 정도의 뜻이겠다) 자문을 구한 걸로 돼 있지만(‘자문을 구하다’는 ‘협의하다’란 뜻이겠다), 모두가 부인하고 나선 것이다. 해서 미국은 지속적으로 사의를 표하는 공문을 보내오고 슬로베니아는 그러한 감사 표시에 매번 ‘저항’하는 코미디가 연출된 것. “미국의 압력과 전쟁을 지지하지 않는 슬로베니아 국민 다수 사이에서 절박하게 줄타기를 시도”한 결과였다(우리의 경우도 ‘영웅’보다는 ‘겁쟁이’의 사례에 곧 등록되지 않을까 싶지만).

 

 

 



이제 “유럽은 무엇을 원하는가?”(“여성은 무엇을 원하는가?”라는 프로이트적 질문의 패러디)에 대해서 간단하게 정리하기로 하자. 구공산주의권(‘후-공산주의 동유럽 국가’) 출신의 지식인으로서 지젝은 ‘중산계급 서구 좌파’ 혹은 ‘강단좌파’의 행태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며(그는 관념적인 좌파가 아니다), 이 절에서 그러한 비판의 표적이 되고 있는 것은 하머바스(독일)와 데리다(프랑스) 등 대표적인 서유럽 지식인/철학자들의 ‘시국선언’이다(이 내용은 우리 언론에도 번역/소개된바 있다). 그 선언에서 그들은 유럽이 자신의 “윤리-정치적 유산”을 재단언할 힘을 발견해야 한다고 주장한바, 지젝은 그것이 충분하지 않다고 비판한다. 왜나면, “우리가 미국 정치와 문명 속에서 비난받아야 하는 것으로 그리고 위험한 것으로 발견하는 것은 유럽 자체의 일부이며, 유럽적 기획의 가능한 결과들 중 하나”(50쪽)이기 때문이다.

즉 “미국은 유럽 자체의 왜곡된 거울이다.”(즉 미국이란 거울에 비쳐지고 있는 것은 유럽 자신의 얼굴이다) 해서 먼저 전제되어야 할 것은 자기비판이다. “유럽 자체에 대해 비판적으로 개입하기를 원치 않는 이들은 미국에 대해서도 침묵해야 한다.”(51쪽) 그것이 지젝의 단언이며, 이는 새로운 주장으로 이어진다. “유럽적 유산의 방어가 연대와 인권이라는 위협받는 유럽적 민주주의 전통의 방어에 국한된다면 전투는 이미 패배한 것이다. 유럽의 유산이 방어되기 위해서는 유럽이 스스로를 재창안해야 한다. 방어의 행위 속에서 우리는 방어해야만 하는 그 무엇을 재창안해야 한다.”(51쪽)

즉 한쪽에서는 우리의 ‘금송아지’를 보호/방어하기 위해서 피 흘리는 가운데, 한쪽에서는 그 ‘금송아지’를 열심히 만들어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유럽으로서는 자신의 ‘외설적 이면’으로서의 미국과 결별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고, 해야 할 일이지만, 현재로선 가망이 없어 보이는 일이다.

지젝이 유럽에 대한 기대와 환멸을 표시하고 있는 것은 현 세계정세 속에서 미국에 맞설 수 있는 유일한 힘은 유럽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오늘의 진정한 대립은 제1세계와 제3세계의 대립이 아니라, 제1, 3세계 전체와 남아있는 제2세계(유럽)의 대립이다.” 즉 미국이라는 제1세계(‘후근대적인 세계적 자본주의’)와 중국을 포함한 제3세계(‘전근대적 사회’)의 연합, 지하드(Jihad)와 맥월드(McWorld)의 연합으로서의 맥지하드(Mcjihad)에 저항할 수 있는, 그것에 “유효하게 동화시킬 수 없는 외래적 신체”는 “유럽적 근대성”이다(48쪽).

지젝이 기대하는 것은 미국(=초자아)과 제3세계(=이드) 사이의 합작이라는 현재의 ‘억압적 탈승화’ 국면에 대항하기 위해서 유럽이라는 자아(Ich)의 역량을 회복/확장하는 것이다. 자아, 코기토적 주체성, 근대성. 때문에 그는 미국-이라크 전쟁이 “미국과 유럽 사이의 최초의 전쟁”(52쪽)이라고 본다. 더불어 “오늘날 통합 유럽은 미국이 부과하길 원하는 ‘새로운 세계 질서’의 주요한 장애물이다.” 그렇다면, 현 시국의 관건은 장애물이 장애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하는 것이겠다. 적어도 지젝이 판단하기에는…

06. 05.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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