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젝에 관한 글을 쓸 일이 있어서 그간에 써놓은 페이퍼들과 관련자료들을 한 데 모아두기로 한다. '지젝의 맑스주의에 대하여'는 지난 2001년 'Radical Philosophy'(July/August )지에 실렸던 것은 필자는 숀 호머(Sean Homer) 교수이다. 우리에겐 <프레드릭 제임슨>(문화과학사, 2002)으로 소개된 바 있는데, 이념적 포지션상으로는 '제임슨주의자'로  분류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제임슨과 마찬가지로, 마르크스와 라캉이론의 접목에 관심을 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나의 예단일 수도 있지만, 루틀리지에서 나온 'Critical Thinkers' 시리즈의 <자크 라캉>(2005)을 그가 쓰고 있는 걸 보면 근거 없는 예단은 아니다(이 시리즈는 도서출판 앨피에서 역간되고 있는데, <자크 라캉>은 아직 근간 목록에 올라와 있지 않다. 참고로, <데리다>와 <프레드릭 제임슨> 등이 근간예정이며, 기대해볼 만하다. 니콜라스 로일의 <데리다>는 모스크바에서 완독했던 책이기에 더더욱 기다려진다).

마르크스와 라캉을 접목시키고자 한다는 점에서, 제임슨/호머의 이론적 기획은 지젝의 그것(헤겔+라캉)과 먼 거리에 있지 않으며 당연히 서로의 주장에 대해 민감할 것이다(좌파의 적은 보통 우파가 아니라 또다른 좌파이다. 서로가 '유사-좌파'로 간주하는). 이 논문에서 숀 호머 또한 '전통적인 맑스주의'적 입장에서 지젝의 '맑스주의'에 대해서 의혹의 시선을 보낸다('전통적인 맑스주의자'들이 이진경주의에 대해서 불편해 하는 걸 떠올려보면 되겠다). 그런 걸 고려하면 일독해볼 만하다. 번역문 뒤에는 원문을 옮겨놓았는데, 아쉽게도 전문은 아니다. 'Radical Philosophy'지에서는 일부만을 원문 서비스로 제공하는 듯하다.

 

 

 

 

번역 텍스트의 출처는 <라깡과 현대정신분석> 제3권 제1호(2001년 여름)이며 원제는 '문제는 정치경제학이다! ―지젝의 맑스주의에 대하여'이지만, 부제를 이 페이퍼의 제목으로 삼는다. 역자는 김서영씨이며, 영국 셰필드대학에서 숀 호머 교수의 지도 아래 자크 라캉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지젝의 내한 강연문집 <탈이데올로기 시대의 이데올로기>(철학과현실사, 2005)에 실려 있는 강연문 '신체 없는 기관'이 그의 번역이다.  

 

문제는 정치경제학이다! ― 지젝의 맑스주의에 대하여

 

-나는 신자유-민주주의 질서가 무한히 지속될 수 없고, 언젠가 생태학적 위기나 그 밖의 다른 어떠한 원인에 의하여 파열될 것이며, 우리는 그 순간을 위해 대비해야 한다는 매우 전통적인 맑스주의적 신념을 가지고 있다.

-1997년 인터뷰에서 슬라보예 지젝은 버쏘 출판사에서 나오는 '그것이 있던 곳'(Wo es War)이라는 그의 총서의 성향에 대해 질문 받았다. 그는 그 총서들에 대한 전반적 계획은 세우지 않았지만, 두 정통이론의 재건을 총서의 지침으로 삼았다고 답했다. 지젝에 의하면, “오늘날 필요한 것은 반 포스트 맑스주의적 시각과 결합된 엄격히 교조적인 라깡적 시각이다.”(*아래의 책들이 'Wo es War' 시리즈의 책들이다.) 

 

 

 

 

-“반 포스트 맑스주의적” 시각이라는 다소 불분명한 개념에도 불구하고, 지젝의 앞의 주장은 1990년대 초기의 가장 유행적이고 재치 있는 이론가에서 현대 문화연구의 ‘미운 오리새끼’로 역전되는 그의 작업의 이론적 그리고 정치적 행적을 명료하게 부각시킨다. 지젝의 포스트 맑스주의, 문화 다원주의 그리고 정체성 지향 정치에 반대하는 최근 논쟁은 어네스토 라클라우나 샹탈 무프와 같은 영국과 미국에 있는 그의 예전 동료들과 지젝 사이의 거리를 조명한다.(*라클라우는 지젝을 서구 지성계에 소개한 인연을 갖고 있다.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의 서문 참조.) 

-얼마 전 피터 듀스가 지적했듯이, 지젝은 “국제무대에서는 ‘맑스주의’ 문화 비평가이고, 그의 고향에서는 민족적 성향을 띤 집권당인 신 자유당의 일원” 이라는 매우 애매한 정치적 입장을 고수해 왔다. 이러한 지젝의 모호한 입장은 한 순간은 포스트 모더니즘과 포스트 맑스주의에 관심이 있는 문화 비평가이며 다음 순간에는 정통 맑스주의자로 변모하는 지젝의 국제적 연혁 또한 설명한다.

-본 논문에서 나는 정통 맑스주의 이론에 대한 지젝의 논의가 얼마나 '정통적'인가라는 질문을 제기하고, 이 보다 더욱 중요한 질문인 엄격히 '교조적' 라깡주의와의 관계에 있어 이 입장이 얼마나 지속적인가에 대한 문제를 검토하면서 동시에 맑스주의에 대한 지젝의 양가적 관계에 대해 논의하고자 한다. 지젝에게 맑스주의는 그의 비평가들에 의해 언급된 이상으로 그의 글들에 구심점이 되어 온 듯 하며, 이 사실은 그의 포스트 맑스주의적 성향의 모호함을 극단적으로 부각시킨다.

-지젝이 말하는 맑스주의의 정확한 본질은 가늠하기가 어려운 반면, 지젝의 라깡에 대한 관심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으며 바로 이러한 그의 일관된 라깡주의에 의해 맑스주의의 정통적 이해의 가능성이나 명백히 동일시할 만한 정치적 과업의 실현이 배제되는 듯 보이기도 한다.

국제적 지성의 출현
-서유럽과 북미 학계에서 이룩한 슬라보예 지젝의 주목할만한 성공은 폄훼하기 어렵지만 한편 내게 그 성공의 당위성은 한번도 자명해 보인 적이 없다. 헤겔의 변증법, 알튀세르의 맑스주의 그리고 라깡의 정신분석을 독특하게 혼합하는 지젝의 방법은 처음에는 포스트 모더니즘, 퀴어이론과 포스트 식민주의 연구에 주력하는 영미 학자들의 풍토에는 그리 알맞지 않은 듯 하다.

 

 

 

 

-<정치적 무의식>의 제임슨이 아마도 유일하게 지젝과 비교될 수 있는 학자일 것이다. 이론적으로 매우 다른 학문체계를 함께 다루려는 제임슨의 시도는 포스트 맑스주의 좌파로부터 끊임없이 비판받아 왔다. 지젝에 대한 주목할 만한 긍정적 반응을 초래한 결정적 요인의 하나는, 비록 같은 농담이 세 권의 책에서 동시에 발견되는 경우가 허다하긴 하지만, 지젝의 농담할 줄 아는 능력에 있다. 짚고 넘어갈 점은 그의 글을 대중화시킨 가장 주된 요인인 그의 초기 두 권의 저작―<삐딱하게 보기: 대중문화를 통한 자끄 라깡의 이해>(1991)와 <당신의 증상을 즐기세요! 헐리웃 안팎의 자끄 라깡>(1992)―은 지젝의 가장 비정치적인 작업이라는 것이다.

-맑스와 맑스주의는 이 두 권의 저서들 어느 곳에서도 주된 역할을 하고 있지 않으며, 헐리웃의 주류 영화와 장르 소설들을 악명 높은 라깡의 불가해한 문장들을 설명하는데 이용했다는 점에서 그는 명료히 포스트 모더니스트의 일원으로 분류되었다. 어려운 이론과 대중문화를 접목시키는 능란한 솜씨와 미국의 대중문화에 대한 명백한 관심은 그의 인기에 가장 주된 역할을 해 왔다. 로버트 미크리취가 말하듯 지젝은 “미국을 내부에서부터 알고 있는 듯 보인다 (그리고 아마도 이것은 외국인만이 할 수 있는 일일 것이다). 지젝은 우리 자신이 가지고 있는 미국 대중문화에 대한 시각을 우리에게 다시 투영해(reflects) 주며 이것이 우리가 그를 즐겨 읽는 이유이다 (이것을 라깡은 역투영(in reverse)이라 할 것이다).” 내용면에서는 아니라 하더라도 적어도 형식면에서 본다면 지젝은 명백한 포스트 모더니스트이며 때때로 지젝 자신이 그의 작업에 대한 이러한 방식의 해석을 선호하는 듯 보인다.

 

 

 

 

-두 번째로, 지젝의 이론에 대한 영국과 미국의 관심에서 정치적으로 더욱 중요한 요인은 지젝의 글에 나타난 포스트 맑스주의를 이용한 이데올로기적 필터이다. 지젝의 글들 중 영어로 번역된 첫 저서인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1989)은 라클라우와 무프의 프로네시스 총서로 출판되었는데 그 총서의 발간사에 분명히 언급되어 있듯이 프로네시스 총서는 반-본질주의와 포스트구조주의 이론에 입각하여, “급진적 다원 민주주의를 중심으로 한 좌파를 위한 새로운 전망”을 모색한다.

-어떤 면에서, 지젝의 글을 번역하기에 이보다 더 알맞은 시기는 없었을 것이다. 동유럽에서는 “실재로 존재하는 사회주의”의 역사적 붕괴와 소비에트 연방의 해체가 연이어 일어났으며 서유럽에서는 서구 맑스주의의 최종적 소멸이 이미 완성되었거나 보증된 듯 했다. 반면 포스트 모더니즘과 포스트 맑스주의를 중심으로 하는 학계의 경향은 최고조에 이르러 그 기세가 의기양양했다. 좋은 예로 라클라우와 무프의 글에는 <헤게모니와 사회주의 전략>(1985)의 결론에서 보여주듯 그들의 주장이 본질적으로 맑스주의적 논쟁에 근거한다는 어떤 종류의 단서도 포함되어 있지 않다(*국내에는 대표적인 포스트-맑시스트로 잘 알려진 라클라우와 무페(무프)의 책은 <사회변혁과 헤게모니>(터, 1992)로 번역돼 있다. 얼마전에 나온 무페의 신간이 <민주주의의 역설>(인간사랑, 2006)이다. 두 사람은 '급진적 민주주의'의 주창자들이기도 하다).

-대부분의 미국인들보다 오히려 미국 대중문화에 대한 이해가 더 해박한, '사회주의'정부의 반대자인 지젝은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에서부터 <삐딱하게 보기>까지 이 순간을 조명했다. 그러므로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의 서문에서 라클라우가 말하듯, 지젝의 포스트 맑스주의의 구호가 명료한 동조를 끌어냈다는 사실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라클라우는 지젝의 이론과 슬로베니아 학파를 한편으로는 라깡주의에 연결시키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고전 철학에 연결시키는 반면 (철학가로서의) 맑스나 '맑스주의적 구조주의' 이론가들과 '맑스주의 경향'의 영향에 대해서는 단지 지나가는 참조사항으로만 언급하고 있다. 라클라우는 다음과 같이 결론짓는다: "포스트 맑스주의 시대에 민주사회주의의 정치적 프로젝트를 구성하는 문제점들을 명확하게 하기 위한 이론적 전망을 모색하려는 모든 이들에게 이 책은 필독서적이다."

-이번에도 역시 지젝은 여러 인터뷰에서 이 견해를 인정하는 발언을 하였다. 슬로베니아가 유고슬라비아 연방에서 분리된 첫 독립 공화국임을 발표하는 전날 행해진 <급진주의 철학(Radical Philosophy)>을 위한 1990년 인터뷰에서 지젝은 그의 입장을 신흥 슬로베니아 자유당과 연관지어 명시하였다. 슬로베니아의 자유당은 유럽의 그 이외 지역에서 득세하고 있는 신자유주의에 대하여 부분적으로 반대체제를 구축하고, 여성주의 운동과 생태학적 운동을 포함하는 새로운 사회 운동과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

-지젝에 의하면, 자유당의 특징은 재건된 공산당, 녹색당, 그리고 극우 세력에 이르기까지 모든 정치 그룹들을 연합시킨 정치적 경향인 인민 민족주의에 대한 그들의 반대에 있다. 다원주의, 생태학 그리고 소수의 권리 옹호를 이데올로기로 삼으며 자유당은 그들 자신들이 급진적이고 민주적인 자유주의의 전통을 잇고 있다고 보았다.

-여기서 포스트 맑스주의 경향을 식별해 내는 것은 어렵지 않으며 이것은 샹탈 무프가 <정치적인 것의 회귀>에서 현대 정치학의 목표는 국가 체제의 전복보다는 민주주의의 실천과 그 제도들을 심화하고 확장하는 것이라고 주장할 때 더욱 분명해 진다. 그러나 부분적으로 지젝은 신자유주의의 주장에 동의하고 있는데, 비록 지젝이 스스로를 맑스주의자로 정의하고 자유당을 자유 시장 경제에 대립시키지만, 경제 개혁에 관해서 만은 '실용주의자'라는 것이다 - “만약 어떤 것이 효과가 있다면, 조금 시도해 보는 것도 괜찮지 않은가?”

맑스의 유령들
-지젝의 글 자체와 비교하더라도 라클라우의 서문에 맑스나 맑스의 영향의 긍정적 가치에 대한 어떠한 종류의 인식도 결여되어 있다는 점은 흥미 있는 일이다.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제1장의 제목은 “맑스는 어떻게 증후를 발명하였나?”이며 여기서 지젝은 상품형태, 상품물신숭배, 이데올로기, 알튀세르와 잉여가치에 대한 일관된 분석을 제시한다. 즉, 지젝의 서론에서 더욱 분명해 지듯, 정신분석 용어를 빌면 일종의 억압의 순간이 있는 듯하다.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은 하버마스의 <근대성에 관한 철학적 담론>에 제외되어 있는 몇몇 고유명사들에 대한 논의로 시작한다. 하버마스의 앞의 책에는 라깡의 이름이 단지 다섯 번밖에 언급되어 있지 않으며 그것도, 라클라우의 서문에 나타난 맑스의 이름처럼, 매번 다른 사람과 함께만 말해짐을 지적하며 지젝은 다음과 같이 질문한다: “바타이유, 데리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푸코에 대해서는 상당량의 지면을 할애하고 있는 이 책이 어째서 라깡과의 직접 대면을 거부하는 것일까?” 지젝의 글에 익숙한 독자라면 예측할 수 있듯이 이 수수께끼에 대한 해답은 라깡이라는 이름보다는 오히려 <근대성에 관한 철학적 담론>에 너무나 깊이 억압되어, 심지어 언급되지조차 않는 이름인 알튀세르에서 찾아진다.

-다시 말하면 하버마스-푸코 논쟁은 사실 이론적으로 더욱 광대한 영역을 포함하는 알튀세르와 라깡의 조우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지젝에 의하면: "알튀세르 학파의 갑작스러운 쇠퇴에는 이론적 패배라고 결론 내리기엔 미흡한 뭔가 수수께끼 같은 면이 있다. 이것은 마치 알튀세르의 이론에 조급히 잊혀지고 '억압되어야 하는' 외상적 중핵이 존재하는 듯한데 이것은 이론적 망각증세(theoretical amnesia)의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라클라우와 무프의 공동 연구의 초기 단계에서조차 알튀세르주의는 지젝과 포스트 맑스주의가 분리되는 지점이라는 사실을 감안하지 않는다면, 라클라우와 무프 자신들의 이론 형성이 알튀세르적 맑스주의를 기반으로 한다는 주장은 다소 억지인 듯 느껴질 것이다. 라클라우와 무프의 포스트 맑스주의 그리고 지젝의 맑스주의는 모두 알튀세르를 ‘넘어서고자’ 하는 시도라고 한정지을 수 있다.

-라클라우는 라깡이 포스트 구조주의자라는 명제나 헤겔의 독법 등에 대해 항상 지젝과는 다소 다른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1990년에 지젝이 포스트 맑스주의에 대한 실질적 비판을 공식화 할 때, 그는 라깡이나 헤겔이 아닌 알튀세르에 관한 이해하기 힘든 침묵에 초점을 맞추었다. 지젝에 의하면, 1980년대의 라클라우와 무프의 공동 연구는 주체라는 의미 있는 관점에서 그 전의 그들 각자의 작업들로부터의 이론적 후퇴를 보여주는데, 즉 <헤게모니와 사회전략> 이후에 발전되는 “주체의 위치들”(subject positions)이라는 개념은 라클라우의 초기 저작들에 “정교하게 설명되어 있는 알튀세르의 호명이론(theory of interpellation)”으로부터 한 걸음 물러서게 됨을 암시한다.

-이론적으로, “주체의 위치들”이라는 개념과 정체성의 논증적 구조는 이데올로기적 호명에 의해 주체가 성립된다는 본질적으로 알튀세르적 논쟁의 테두리 안에 머문다. 한 마디로, “주체-위치는 우리가 (관심을 가지고) 우리의 입장으로서 채택하게 되는 사회 과정의 한 대리인으로서의 우리의 위치를 자각하게 하며, 그 특정 이데올로기적 동기에 참여하게 되는 방식이다.” 이러한 이론적 토대에서의 동일시는 알튀세르의 호명이론과 더불어 우리가 호명과정 이전에 항상-이미 주체들이라는 사실을 설명하는 데 실패한다.

 

 

 

 

-지젝에 의하면, “엄격한 의미에서 개인들은 주체가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들은 ‘항상-이미’ 주체로서 존재한다.” 그러므로 문제는 알튀세르가 인지했던 것처럼 개인으로서의 우리가 주체가 되는 방법보다는 오히려 항상-이미 주체인 우리가 어떻게 특정 종류의 이데올로기적 주체가 되는가에 있다.(*그러니까 알튀세르의 '주체'는 지젝에게서 '주체화'를 가리킨다. 이에 대한 쉬운 설명은 토니 마이어스의 <누가 슬라보예 지젝을 미워하는가> 참조.) 

-알튀세르의 이론에서 고려되지 않은 채 남겨진 것은 영상과의 동일시 이전에 존재하는 호명의 순간이다. 주체화의 이전에 일종의 기괴한 주체가 존재한다고도 할 수 있는데, 즉 라깡의 개념으로 설명하자면 주체의 중심에는 빈 공간, 틈이 있어 이것이 “주체 자신과 더불어 주체의 자아-정체성을 침식한다”. 지젝은 라클라우가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적 호명의 문제점을 넘어서는 데 실패함으로써 초래되는 직접적 결과로 <헤게모니와 사회전략>에 나타나는 급진적 차원의 이론적 축소를 들고 있는데, 이는 즉 “사회의 적대구조”라는 개념에 나타나듯 사회적인 것(the social)이 일관되고 통합된 실체로서 구성될 수 없음을 뜻한다.

-지젝에 의하면, 주체 위치들이라는 개념은 이 근본적인 외상적 경험을 배제하는 데에만 주력하며 이 사실은 포스트 맑스주의의 급진적 성격을 약화시킨다. 다시 말해 파편화된 주체성과 다수의 주체위치들에 관한 반 본질주의 이론은 후기 자본주의의 중심을 벗어나 불안정하게 파동치는 지구 단위 경제의 수요를 충족시키기에 가장 적합한 형태의 주체에 대한 학문적 정당성을 제공한다.

문화 다원주의와 정체성 지향 정치의 비판
-1990년대 초에 지젝이 제기한 포스트 맑스주의의 담론 개념과 '주체의 위치 정하기'(subject positioning)에 대한 비판은 라깡적 개념인 결핍과 적대관계(antagonism)에 관한 문제를 드러내었다. 지젝에게 중요한 점은 적대관계라는 개념이 주체와 사회적인 것 안에 있는 내적 한계와 균열을 보여준다는 데 있는데, 즉 이 한계에 직면한다는 것은 바로 연속적이고 통합적인 체계의 불가능성에 대면하게 되었음을 의미하며, 또는 이미 구성되어 있는 주체들 사이에 나타나는 외적 적대관계에 대면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후자의 경우는 사회에 이미 존재하는 한계 내에서 일어나므로, 체계적인 차원에서는 어떠한 종류의 실질적인 정치적 위협도 야기하지 못한다고도 할 수 있다. 더욱 최근의 저서에서 지젝은 다소 비이론적인 어투로 주체의 위치 정하기, 문화 다원주의 그리고 정체성 지향 정치(identity politics)의 정치적 결과를 지적한다:

-사회적 상상력의 범위가 이제 더 이상 우리로 하여금 자본주의의 궁극적 몰락을 상상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으며, 모든 사람이 묵묵히 ‘자본주의는 영속적 체계’임을 받아들인다고도 볼 수 있으므로, 비판적인 에너지는 자본주의적 세계 체제의 기본적 동질성에는 어떠한 영향도 끼치지 못하는 문화적 차이들의 옹호를 위해 투쟁하는 데에서 그 대체적 분출구를 찾았다. 그래서 우리는 좌파적 투쟁을 통해 소수민족들, 동성연애자들, 그리고 그 외 다른 삶의 방법을 선택한 사람들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싸운다.

-반면 자본주의는 그 승리의 전진을 감행하고, '문화 연구'의 가면을 쓴 오늘날의 비판 이론은 자본주의의 거대한 존재를 감추는 데 주력하는 이데올로기적 역할에 활발히 동참함으로써 자본주의의 무제한적 발전에 궁극적으로 기여하고 있다: 오늘날의 주도적인 형태인 포스트모던 '문화비평'의 자본주의가 세계체제라는 언급은 '본질주의', '근본주의' 등에 대한 비판을 불러일으키게 되는 경향이 있다. 이렇듯 경제를 비정치화하면 정치의 영역 자체가 비정치화되는 대가를 치르게 된다. 이전의 정치적 투쟁은 소외된 정체성들에 대한 인정과 차이에 대한 관용을 위한 문화적 투쟁으로 변모되는 것이다.

-최근 지젝의 글에는 그 자신의 이론을 프레드릭 제임슨의 작업에 동일시하는 흔적이 늘어나고 있다. 최근 그는 본래의 정치학을 윤리학으로 대체하려는 시도와 자본주의의 한계를 벗어나 사고할 수 있는 유토피아적 상상력의 결핍에 대해 비난하고 있다. 지젝에 의하면, 문화 다원주의는 합병된 세계경제의 문화적 표현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며, 정체성 지향 정치는 우리가 현재 경험하고 있는 비정치화의 부자연스러운 결과와 완벽하게 일치한다. 특수성을 강조하는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항하는 유일한 길은 보편성의 차원과 맑스주의의 메시아적 차원을 (재)강조하는 것이다.

-지젝은 요즘 세상에서는 공정함을 유지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즉 편들기를 거부하는 행위는 자본의 국제적 논리를 찬성하는 것을 뜻하며 역설적으로 “'편들기'의 필요성을 받아들이는 것만이 효과적으로 ‘보편성’을 획득하는 유일한 길임을 의미한다.” 우리에게 남은 것은 한편으로는 자유주의로 후퇴한 급진적 민주주의와, 다른 한편으로는 제 삼의 길 ― 즉 현실에 작용하는 사상들의 정치이다.

-지젝에 의하면 정치 고유의 행동은 “단지 현존질서의 체계 안에서 잘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사물들의 작용을 규정하는 체계 자체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이렇게 말할 때의 지젝은 앞에서 언급되었던 1990년에 동유럽은 경제 재건에 효과적인 것이라면 무엇이든 시도해 보아야 한다고 말했던 자유 민주주의적 '실용주의자' 지젝으로부터 매우 멀리 떨어져 있다.

자유주의와 지젝의 양가감정
-지금까지 포스트 맑스주의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그의 최근 정통 맑스주의에 이르기까지의 지젝의 글에 나타나는 일련의 변화를 살펴보았다. 그러나 지젝의 작업들을 정말 '정통' 맑스주의적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일까? 만일 그렇다면 포스트 맑스주의자들 전부가 정말로 그토록 엉터리 독자일 수가 있을까? 1990년에 지젝은 <신좌파 평론(New Left Review)>에 이전 동유럽의 국가들의 분열과 신 민족주의의 부흥에 대한 글을 발표했다. 이년 후 그는 <신독일 비평>에 '동유럽의 자유주의와 그 불만'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썼는데, 이는 지젝이 콜롬비아 대학에서 강의한 강의록에 근거하고 있다.

-이 중 첫 번째 글에서 지젝은 서유럽에 이상화되고 매혹적인 것으로 비춰지는 동유럽을 라깡의 ‘물 자체’(das Ding)―즉 주체가 그렇게 특별한 존재로 인식하는 한 포착할 수 없는 미지의 사물―이라는 개념을 통해 흥미롭게 설명하고 있다. 지젝에 의하면 동유럽 안에서 부활하는 소수 민족에 대한 폭력과 신 민족주의는 공산주의 체제라는 과거로부터의 급작스러운 분리가 아니라 오히려 그것의 연속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민족적인-것”(national-Thing)의 출현은 공산주의 이데올로기라는 상징 체계가 해체될 때 사회적인 것의 중심으로 귀환하는 실재계, 즉 외상적 중핵의 회귀를 뜻한다.

-지젝은 동유럽의 사람들이 왜 그들이 앞서 전복시킨 바로 그 억압적이고 견디기 힘들며 인종차별적인 체계를 다시 부과하는지에 대해 물으며 이에 대한 대답은 서양의 해설자들이 생각하고 싶어하는 것처럼 원초적인 증오와 그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격세유전의 심리학이 아니라 오히려 자본의 논리에서 찾아 진다고 답한다. “자본주의의 근본적인 특징은 계속되는 위기와 현존하는 조건들의 끊임없는 혁신 사이에 나타나는 '그 고유의 구조적 불균형'과 그 심부에 자리잡은 적대적 성질에 있다.”

-지젝이 말하듯, 민족 우월주의의 고조는 바로 이러한 자본의 과잉과, 자본의 과잉이 사회에 초래하는 고유의 불안정성, 개방성 그리고 갈등의 충격을 완충하는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발칸에서 보여지는 고삐 풀린 폭력과 증오는 공산주의에 의해 오랫동안 억압되어 온 고대 종족의 증오가 다시 폭발한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자본주의 그 자체에 내재한 폭력으로 볼 수 있다.

-지젝이 같은 주제에 대해 콜롬비아 대학에서 조금 다른 성격의 청중을 대상으로 강의하게 되었을 때 그는 <신좌파 평론>에 발표된 글을 지적하며 강연을 시작했다: "동유럽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에 대한 진상을 규명하고자 하는 좌파의 요구는 바로 이러한 요구 자체에 대해 거울상 역할을 한다: 즉 우리는 이를 통해 그 동안의 의심을 확인하고 사람들이 이미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실망하였으며 서서히 그들이 얻게 된 것뿐만 아니라 (사회 안전처럼) 잃어버리게 된 것들까지도 인식하게 된다고 말하도록 요구받는다. 이 논문에서 나는 의식적으로 이 덫에 걸려들어 좌파에게 그들이 원하는 대답을 주었다: 상황이 얼마나 악화되고 있는가, 민주주의적 열광이 어떻게 해서 민족주의적 조합국가로 귀결되고 있는가 - 한 마디로 해서 이것은 우리에게 사회주의를 배반하는 권리를 부여해줄 뿐이라는 원한에 가득 찬 시각을 제시해 주었다."

-여기서 명백히 해야할 점은 지젝이 민족주의에 대한 그의 원래 입장을 철회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이 기회를 통해 그는 전체주의와 자본주의 ‘모두에’ 대한 대안으로 논의되는 “제 삼의 길” 지지자들의―우리가 보기에는 지젝 스스로 자신을 이 그룹에 포함시키고 있는 듯도 하지만―순진함을 강조하였다는 것이다. 지젝은 서구의 맑스주의자들은 민족주의를 비난하는 데에서 만족감을 느끼는 것이 그들의 전공인 듯하다고 혹평하기도 하는데 그에 의하면 이것은 “자신의 성적 무능과 성적 실패를 훌륭하게 설명하고 나서 느끼는 만족감과 섬뜩하다할 정도로 유사하다.”

-물론 우리는 모두 청중을 대상으로 이야기하며, 제임슨의 말대로 우리는 모두 약호를 사용하여 이야기한다. 그러나 지젝이 제시한 예가 우리를 난처하게 만드는 이유는 그 이면의 심층 논리에 있다. 최근에 정치적으로 문제되는 또 다른 예를 들어 보겠다.

-1999년 봄, <신좌파 평론>은 나토의 유고슬라비아 폭격에 대한 일련의 논문들을 게재하였다. 여기에는 나토의 행동을 강력히 비판하는 타리크 알리, 에드워드 사이드, 피터 고완의 글들과 '이중 블랙메일에 대항하여'라는 제목 하에 나토와 세르비아인들 모두를, 특히 밀로세비치의 정권을 비판하는 지젝의 글이 포함되어 있다. 폭격에 대하여 반-나토, 반-밀로세비치의 입장을 취하는 지젝의 관점은 전 유고슬라비아 대통령과 나토 모두에 각별한 동정심을 품고 있지 않은 서유럽 좌파에게 명백히 큰 매력으로 작용하였다:

"만약 우리가 이 이중 블랙메일을 거부해야 한다면 (만약 나토의 공격에 반대한다면 당신은 인종청소를 감행하는 밀로세비치의 프로토-파시스트 정권에 찬성하는 것이며, 만약 밀로세비치에 반대한다면 당신은 지구 단위로 전개되는 자본주의의 새로운 세계 질서를 지지하는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만약 인종적 근본주의에 대항하는 개화된 국제적 개입과 새로운 세계 질서에 영웅적으로 저항하는 최후의 보루라는 대립이 그릇된 것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만약 밀로세비치 정권과 같은 현상들이 새로운 세계 질서에 반대하는 현상이 아니라 오히려 그 ‘증후’이며 그래서 새로운 세계 질서의 숨겨진 ‘진실’이 드러나는 지점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중 블랙 메일에 대항하여'의 결론에서 지젝은 “제삼의 길”이 블레어와 클린턴의 신-자유주의적 제삼의 길과 혼동되어서는 안되고 “폐쇄된 민족주의와 지구단위 자본주의의 대립이라는 악순환을 타파”하는 진정한 제삼의 길이어야 함을 간명히 주장한다.

-여기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이 글이 <신좌파 평론>에 발표되기 전에 이미 인터넷상에 유포되었다는 것인데, 거의 모든 내용이 동일한 이 두 글에 나타나는 유일한 차이점은 좀더 확신 있는 어투의 '좌파적' 결론 이외에 하나의 중요 문장이 발견된다는 것이다. 지젝이 제안하는 밀로세비치 문제의 대안은 영어권의 주도적 맑스주의 잡지라는 테두리 밖에서는 그다지 호소력이 있어 보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분명한 좌파의 한 사람으로서 "폭탄공격을 해야 할 것인가?"라는 딜레마에 대한 나의 대답은 아직 폭탄의 양이 '충분치' 않으며 그나마 이것은 모두 '이미 늦었다는' 것이다.

-계속되는 단락에서 분명하게 드러나듯이 지젝은 라깡이 <햄릿>과 논리적 시간의 문제에 대해 다룬 글을 참고하고 있다. 여기서 지젝은 사회적인 것 자체에 내재하는 고유의 균열과 적대관계로 규정되는 실재계의 불가능함을 암시하는데, 이런 의미에서 실재계의 외상을 지우기에 '충분한' 폭탄은 있을 수 없으며, 충분한 폭탄이 있다 하더라도 폭탄공격을 하기에 적당한 시기는 오지 않을 것이다. 실재계와의 대면은 언제나 어긋나므로 우리는 항상 너무 일찍, 또는 너무 '늦게' 목적지에 도착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문장은 기묘하게 스스로의 논지를 취소시킨다. 어차피 너무 늦게 도착될 것이라면 더 많은 양의 폭탄을 투하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러므로 “폭탄 공격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지젝의 대답은 명백히 “그렇다인 동시에 그렇지 않다”인 것이다! 정신분석적 측면에서 볼 때, 이것은 저자가 의식적으로 숨기려고 노력하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드러낸다는 점에서 일종의 증후적 현상을 나타내고 있는 듯 하다. 즉, 아무리 많은 양의 폭탄도, 그리고 폭탄이 투하되는 시간이 언제이건 모두 절대 충분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복잡한 라깡적 견해와, 순진하고 표면적인 시각이라고도 할 수 있는 나토의 공격이 더욱 강력하게 그리고 더욱 일찍 감행되어야했다는 주장 사이에는 현저한 마찰이 존재한다. 지구단위 자본과 전체주의를 극복한 제삼의 길을 향한 솜씨 있는 접근방법은 사라지고 이제 우리에게 남은 것은 나토가 세르비아인들에 대항하여 더욱 ‘일찍’ 그리고 더욱 ‘군사적’으로 개입했어야 했다는 주장이다.

-위의 문장은 지젝이 동일시할 만한 정치적 입장을 채택하기를 거부하고 있음을 제시하며, 또한 동시에 이것은 지젝의 심부에 내재한 민족주의로 인해 불투명해 진 그의 정치학을 증후적으로 드러낸다. 위의 문장이 ‘유일하게’ 인터넷에 실린 글로부터 제거된 문장이라는 거북한 사실은 지젝이 위의 문장의 정치적 반향, 즉 그 문장의 라깡적 독법뿐 아니라 순진한 정치적 독법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을 제시한다. 사실, 이 문장은 전체 글의 어조를 완전히 바꾸며, 이것은 이 논문뿐 아니라 발칸의 국가들에 대한 지젝의 최근 글들의 다수에 명백하게 나타난 반 세르비아 민족주의를 강조한다.

-위에서 언급되었던 정체성 지향 정치가 지구단위 자본의 논리적 표현이라는 긴 인용문으로 다시 돌아가고자 한다. 이 인용문 직후에 지젝은 “문화 다원주의적 포스트 모더니즘이라는 허상”에 대해 좌파로서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에 대해 고찰하는데, 비록 그가 '한 쪽의 편을 들고 있는 듯' 보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지젝에 의하면 이로부터 내려져야 하는 역설적 결론은 “오늘날의 진정한 보수주의자들은 오히려 자유주의적 문화 다원주의와 대중적 근본주의 모두를 거부하는 좌파 '비판이론가들'이며 그들은 지구단위 자본주의와 인종적 근본주의의 공범관계를 명백히 인지하는 자들”이라는 것이다.

-이 경우, 우리는 쉽게 주디스 버틀러, 라클라우 그리고 포스트 맑스주의를 좌파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때에 우리가 묻게 되는 논리적 질문은 만약 우리가 이미 사회주의의 실패를 인정하였다면 자유주의와 지구단위 자본주의 중에서 과연 어떤 것을 선택하여야 하는가이다. 벤 왓슨의 최근 논평을 바꾸어 말하자면 지젝에 관련된 문제는 그를 과연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보다는 그의 어떤 주장을 심각하게 고려할 것인가에 있다.

실재계의 귀환
-1990년의 인터뷰에 이어 1993년에 다시 <급진주의 철학> 지젝의 인터뷰를 다루었는데 이 두 번째 인터뷰의 어조가 첫 번째와 매우 다르다는 점은 주목할 만 하다. 그는 자유 야당의 정치적 안건은 여전히 민족주의의 폐쇄성에 대항하여 개방성을 강조하는 것이라고 제안하는 반면, 종래의 포스트 맑스주의적 담론인 헤게모니, 접합(articulation), 담론 투쟁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사실 급진적 민주주의라는 개념 자체가 문제시되고 있다:

"나는 라클라우의 급진적 민주주의라는 개념에 대해 매우 회의적인데 그 이유는 기본적으로 그것이 단순히 표준적 자유 민주주의 게임의 수정본이기 때문이며 이것이 바로 그가 이상할 정도로 자본주의에 대해 침묵하는 이유이다. 즉 급진적 민주주의는 그의 허수아비인 것이다."

-이전의 지젝이 그의 반대 입장을 새로운 사회 운동들과 동일시했던 반면 최근 그는 새로운 사회운동들을 자본 자체의 모순들과 근본적 적대관계에 대한 투쟁이라는 더욱 시급한 관심으로부터의 이탈로 이해하고 있다. 더욱이 때때로 지젝은 여전히 정체성 지향 정치의 적법성을 받아들이는 한편―이것은 우리가 정체성 지향 정치가 근본적으로 사회변혁을 초래하리라는 바람을 포기하는 한에서만 적용된다 ―또 다른 경우에는 성적 주체성의 새로운 형태들을 이끌어 내는 것이 해방과업과 사회 변혁에 반대하는 작용을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에 의하면, “이러한 새로운 전략과 새로운 정체성들을 생성하는 푸코적 실천은 후기 자본주의의 주체성 게임을 즐기는 [매우 많은] 방법들 중 하나이다.” 이전에 유고슬라비아였던 곳에 일어난 두 차례의 내전 후, 세 번째로 벌어진 보스니아 - 헤르체고비나의 더욱 잔인한 전쟁 끝에, 그리고 삼 년 간의 경제 개발이 수행된 후에 지젝의 글에 나타나는 정체성, 철학 그리고 문화의 섬세한 짜임은 마침내 실재계라는 부동의 바위, 다시 말하면 자본의 경제 논리에 직면한 듯 하다.

-지젝의 글에서 실재계는 그 의미가 다양하고 끊임없이 변하는 범주이다. 이는 또한 그의 입장과 고전적 맑스주의, 즉 정통 맑스주의 사이의 거리를 의미한다.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에서 실재계는 명백히 ‘적대관계’라는 라클라우와 무프의 개념과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실재계의 대상에 대한 정확한 정의: 실재계는 존재하지 않는 원인이고 항상 왜곡되고 전치되는 방식으로 일련의 효과 속에서만 존재한다. 만약 실재계가 불가능한 것이라면 불가능한 것이라는 바로 이 사실이 일련의 효과들을 통해 포착될 수 있을 것이다. 라클라우와 무프는 그들의 ‘적대관계’라는 개념을 통해 실제계의 논리를 발전시켜 처음으로 사회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영역에 적용하였다: 적대관계란 바로 그러한 불가능의 핵이며 그 자체로는 아무 것도 아닌 어떤 종류의 한계를 뜻한다: 이것은 오직 일련의 효과들을 통해 소급적으로(retroactively) 구성된다. 적대관계는 모든 효과들에서 벗어난 외상의 지점으로서 그것은 사회 영역이 폐쇄되는 것을 저지한다.

-라클라우와 무프에 의해 주장되었듯이 우리는 여기서 적대관계란 변증법적 또는 결정론적 모순이라는 맑스주의적 개념으로부터 명확하게 분리되어야 한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지젝 또한 그의 역사주의에 대항한 논쟁에서 실재계를 알튀세르의 부재 원인(absent cause)으로서의 역사라는 개념정의와 연결시켰다.

-상징계는 '소거'(barred) 되었으며 의미 사슬은 본질적으로 비일관적이고 '전체가 아니며' 빈 공간을 중심으로 형성된다. 상징화에 저항하는 이 내재된 장애물이 바로 상징계와 실재계 간의 거리를 유지해 주며 상징계가 실재계 안으로 '침몰'하는 것을 방지해 준다. 궁극적으로 실재계를 상징계와 관련짓는 주요 개념은 '원인'이다: 실재계는 상징계의 부재 원인인 것이다.

-마지막으로 최근 실재계는 지구단위 자본에 내재된 논리와 연관되었다. <난제>의 서문에서 지젝은 근래의 생태학적 위기에 대해 고찰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러한 재난은 우리 시대의 실재계에 육신을 제공한다: 자본의 공격은 인간성의 존속을 위협하며 특히 세상의 생명체들을 무자비하게 파괴한다.” 그러나 지젝의 맑스주의를 이해하는 데 곤란한 점은 그의 실재계에 대한 라깡적 해석으로부터 비롯된다.

-지젝에게 실재계라는 라깡의 개념은 그의 작업을 포스트 맑스주의와 고전적 맑스주의 ‘모두로부터’ 분리시키는 것이다. 포스트 맑스주의가 정치적 갈등의 특수성을 강조하며 이러한 특수성을 자본에 내재한 고유의 모순 같은 하나의 결정 층위로 환원시키는 것이 절대적으로 불가능함을 강조하는 반면 라깡의 정신분석은 완전히 그 반대의 견해를 가진다.

-라깡의 관점에서 보면 현존하는 갈등들의 다원성과 특수성은 하나의 심급(審級)에 대한 직접적 반응이다. 즉, 그것들은 실재계와의 불가능하며 외상적인 대면에 대한 동일한 반응인 것이다. 그러나 실재계를 맑스주의적 의미에서의 사회적 모순이라고 정의하는 것이 가능한가? 그렇지 않다. 라깡의 실재계는 칸트의 '물자체'(Thing-in-itself)와는 달리 모든 상징화에 저항하므로 주체나 사회가 참아 내기에 너무나 외상적인 것이다. 실재계는 근본적으로 주체와 사회의 심부에 있는 틈 또는 공백이며 주체의 통일성과 사회의 연대성을 저지하는 불가능의 순간이다:

-그러므로 실제계는 상징화에 저항하는 단단한 관통 불능의 핵인 ‘동시에’ 그 자체로는 아무런 존재론적 일관성을 가지지 않는 순수한 정체불명의 실체이다 ... 실재계는 어떠한 종류의 상징화를 위한 시도도 좌절되는 바위이며 우리의 모든 가능한 세계들(상징적 우주들)에 항상 일관되게 존속하는 견고한 중심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 상태가 매우 변덕스러워서 실패한 상태에서나 그림자 속으로 사라진 후에만 흔적으로 지속되며 우리가 그것의 긍정적 특성을 획득하려고 노력하자마자 사라져 버린다.

-로버트 미크리치에 의하면 실재계는 그 최종 분석에서 드러나는 헤겔의 순수한 “사유물”(Thing-of-thought)이라고도 할 수 있으나 역사적 현재의 구조를 가리키는 헤겔의 개념 속에서 <관념성>을 강조하는 것은 실재계에 고유한 역설을 망각하는 것이다. 실재계는 상징계를 유지시키는 동시에 그 기반을 약하게 하고 혼란시킨다. 이것은 부재하는 원인인 동시에 그 또한 사후적으로 구성되는 것이며, 지젝은 무산계급과 계급투쟁이라는 맑스주의적 개념 역시 이러한 방식으로 정의한다.

-지젝에 의하면 맑스주의의 역사적 독창성은 그 이론이 계급과 계급투쟁의 체계적 역할을 자본의 논리의 중심으로 삼고 있는 데 있다. 라클라우는 계급갈등 자체의 역할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그는 이것을 단지 잠재적 정체성과 차별성의 연쇄 안에서 가능한 하나의 주체 위치로 간주하며, 게다가 그는 이 입장이 현대 사회에서는 점차 쇠퇴하는 경향이 있다고 주장한다.

-반면 지젝에 의하면 계급투쟁은 단순히 동등하게 중요한 일련의 투쟁들 중 하나의 사회적 적대관계가 아니라 “이 특수한 적대관계는 '나머지에 대해 우월하므로 이것과의 관계에 따라 그 이외의 투쟁들에 서열과 영향력이 부과된다. 즉, 이것은 모든 나머지의 색채에 영향을 미치는 광선과 같아서 그들의 특성을 변형시킨다'.” 다시 말하면, 계급 대립은 오늘날의 정치적 주체들과 정치적 갈등의 분화와 증식 속에서 부차적인 역할을 맡게 되지 않으며 오히려 이들은 모두 지구단위 자본 안에서 전개되는 “계급 투쟁”의 직접적 결과이다.

-세계화의 시대에 지젝의 계급 투쟁의 중요성에 대한 확인과 인정의 정치(politics of recognition)에 대한 다원적 평가는 환영받게 되어있다. '정치적' 쟁점들은 우리가 그의 '계급 투쟁'이라는 말의 의미를 고찰할 때 제기된다. 즉 계급투쟁이 ‘긍정적’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것인지 또는 사회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영역의 최종적 연대를 저지하는 “어떤 한계와 순수한 부정성 그리고 외상적 한계”를 의미하는 것인지를 논의하게 될 때 일어난다.

-라깡의 관점에서 주체는 그 자체로 존재하는 실체가 아니라 기호에 의해 지배되는 주체이다: 하나의 기호는 다른 기호를 상징하며 주체는 상징의 사슬에 존재하는 ‘틈’(breach)이다. 주체는 사후적으로 구성된다. 주체는 “세상에 무 대신 유가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인가?”라는 실재계의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서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지젝에 의하면 무산계급에 대한 맑스의 이론은 이러한 “실체 없는 주체성”의 완벽한 예를 제시해 준다:

"'소외'라는 역사적 과정과, 상품 생산의 '유기적' 물질적 조건들의 지배로부터 점차 자유로워지는 노동력의 정점으로서의 무산계급 (무산계급의 이중 자유: 그는 모든 물질적-유기적 속박에서 벗어난 추상적 주체성을 대표하는 동시에 그는 가진 것을 박탈당하므로 생존을 위해 시장에서 그의 노동력을 팔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맑스의 착오는 무산계급의 혁명을 통해 주체와 실체의 변증법적 화해―즉 반소외의 과정과 생산과정의 투명화―가 이루어 질 것임을 가정한 데 있다. <부정 안에 머물기>에서 지젝은 맑스의 “유물론적 역전”(materialist reversal)에 반대하여 헤겔의 변증법을 옹호하고 있는데, 그에 의하면 헤겔의 철학보다 맑스의 철학이 오히려 더 자폐적 체계이다. 그는 맑스의 무산계급이라는 개념이 사회적인 것이 전체성과 투명성을 획득하는 시점에서 이러한 폐쇄의 순간이 구체화 된 것이 아니라면 무엇인가라고 묻는다. 이에 반해 헤겔의 이론에서 체계의 핵심에 위치하는 부정적인 것은 사회의 투명성이라는, 어떠한 종류의 소위 이데올로기적 시각도 부정한다.

-지젝은, “맑스주의에 의한 '헤겔철학의 유물론적 역전'이 일세기 이상 논쟁되어 온 후 이제 마침내 맑스에 대한 헤겔주의적 비판이라는 역전의 가능성이 필요한 시대가 된 듯 하다”고 주장한다. 간단히 말해, 헤겔이 “절대적 관념론자”라는 맑스의 비판은 바로 그가 거부한 존재론의 전치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며 이는 “맑스주의 과업에 내재된 불가능성”의 증후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계급투쟁: 긍정적이며 또한 동시에 부정적이다?
-지젝에게 라깡의 실재계는 근본적 불가능성의 계기이다. 그것은 통합되고 일관된 정체성을 위조해 내려는 어떠한 종류의 시도도 저지하므로 이에 의해 정통 맑스주의적 반응의 가능성이 배제된다. 실재계는 주체성의 핵심에 있는 결여이며 사회 구성의 기반을 이루는 빈 공간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어떤 것으로든 그 공간을 채울 수 있는 듯 보인다. 버틀러와 라클라우에 대하여 벌인 지젝의 논쟁에서, (내가 버틀러와 라클라우의 특수한 프로젝트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좌파가 어떻게 특정 무대와 정치적 의제를 구성하고 체계화하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버틀러는 비록 그것이 자신의 이론과 일치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특정한 정치적 투쟁에 참여해야 하며 그것이 단순히 그러한 종류의 정치를 실현시키기 위한 조건들에 대해 논쟁하는 것보다 우리에게 더욱 필요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와 유사하게, 라클라우는 민주주의의 성과를 지키기 위해서는 그람시적 “진지전”(war of position)에 참여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라클라우에 의하면 지젝의 입장을 이해하기 어려운 이유는 “지젝이 세계화의 차원에서의 정치라는 개념에 대해 한번도 분명히 정의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의 담론은 고도로 세밀한 라깡적 분석과 충분히 해체되지 않은 고전적 맑스주의 사이에서 분열증적으로 파편화되어 있다.”

-라클라우와 버틀러 모두 지젝에게 필요한 것은 계급과 계급투쟁이라는 고전적 맑스주의 개념들의 포기라고 주장하지만 나는 문제가 지젝의 일관된 라깡주의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의 정치적 프로젝트가 어떠한 종류의 긍정적 내용도 내포하지 못하고 정치적 행위가 이의나 반대로 축소되는 것은 바로 라깡의 개념인 실재계에 대한 그의 일관된 관심 때문이다. 드니스 기강뜨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지젝은 일종의 개념적 내용이나 비판적 진실을 가장한 어떤 종류의 입장을 채택하는 다른 문학이론가들로부터 근본적으로 분리되는데 그 이유는 그가 근본적으로 아무런 입장도 취하지 않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해서, 그것이 어떤 형태이건 지젝은 반-자본주의적 선택을 취해 왔다. 그것은 1980년대 후반에는 자유주의와 새로운 사회 운동에 의해, 그리고 1990년대 초에는 생태학적 위기의 가능성에 의해 표현되었고, 1990년대 후반에 와서 이러한 입장은 지구단위 자본의 논리에 대항하는 것이 되었으며, 이제 그것은 <나약한 절대>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기독교의 “급진적” 정통성에서 발견된다. 이것을 정통 라깡주의라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이것을 정통 맑스주의라고 하는 것은 억지일 것이다.

 It's The Political Economy, Stupid! On Zizek's Marxism

I have a very traditional Marxist belief that the new liberal-democratic order cannot go on indefinitely, that there will be a moment of explosion, probably caused by some kind of ecological crisis or whatever - and that we must prepare ourselves for that moment.1

In a 1997 interview Slavoj Zizek was asked about the orientation of his series of books for Verso, Wo es War. He responded that, while he had no overall plan for the series, its guiding principle was the rehabilitation of two orthodoxies. `The fact is', remarked Zizek, `that the strictly dogmatic Lacanian approach combined precisely with a not-post-Marxist approach is what is required today.'2 Notwithstanding the rather coy reference to a `not-post-Marxist' approach here, Zizek's programmatic statement underscored an increasingly evident theoretical and political trajectory in his work, a trajectory that has spectacularly reversed his status as the most fashionable and mercurial theorist of the early 1990s to the b?e noir of contemporary cultural studies. Zizek's recent polemics against post-Marxism, multiculturalism and identity politics have only served to highlight the distance that now exists between him and his previous collaborators in the UK and USA, Ernesto Laclau and Chantal Mouffe.3 As Peter Dews pointed out some time ago, Zizek has always maintained a peculiarly ambiguous political profile, `marxisant cultural critic on the international stage, member of the neo-liberal and nationalistically inclined governing party back home'.4 It seems to me, however, that the ambiguity of Zizek's position also extends to his international profile - as a postmodern, post-Marxist, cultural critic one moment, orthodox Marxist the next. In this article I want to begin to untangle something of Zizek's ambivalent relationship to Marxism; for example, just how `orthodox' is Zizek's orthodoxy and, more importantly, how consistent is this position with a strictly `dogmatic' Lacanianism. Marxism, I suggest, has always been much more to the fore of Zizek's work than many of his commentators have cared to acknowledge, and his endorsement of post-Marxism has been equivocal at best. On the other hand, the precise nature of Zizek's Marxism has always been more difficult to fathom, while his thoroughgoing Lacanianism appears to rule out the possibility of any orthodox `understanding' of Marxism, or, indeed, the formulation of a clearly identifiable political project.

The formation of a global intellectual

It is difficult, I think, to underestimate the extraordinary success of Slavoj Zizek in Western European and North American academic circles, and yet it has never seemed self-evident to me as to why this should be so. Zizek's idiosyncratic hybrid of Hegelian dialectics, Althusserian Marxism and Lacanian psychoanalysis would not at first appear to be particularly congenial to an Anglo-American academic climate preoccupied with postmodernism, Queer theory and post-colonial studies. The Jameson of The Political Unconscious is perhaps the only comparable figure who has tried to yoke together such theoretically incommensurable intellectual systems, and he has been unremittingly criticized by the post-Marxist Left for the attempt.5 A significant part in Zizek's overwhelmingly positive reception lies, to be sure, in his ability to tell a joke - more often than not the same one in three different books. Significantly, the two early books that did more than anything else to popularize his work - especially Looking Awry: An Introduction to Jacques Lacan through Popular Culture (1991) but also Enjoy Your Symptom! Jacques Lacan in Hollywood and Out (1992) - are Zizek's least political works.6 Marx and Marxism do not figure prominently in either of these two volumes, and Zizek's facility to elucidate the notoriously impenetrable prose of Lacan through mainstream Hollywood film and genre fiction located him squarely with the postmodernists. The effortless shift from high theory to low culture and his undoubted love affair with North American popular culture have been crucial to his popularity. Zizek, as Robert Miklitsch writes, `appears to know the United States from the inside (as it seems only foreigners can do). This Zizek - the one we love to read because he reflects our own popular-cultural vision of the United States back to us (in reverse, as Lacan would say).'7 At least in terms of form, if not content, Zizek can be read as a thoroughgoing postmodernist and at times it would appear that Zizek himself has encouraged this reading of his work.8

The second, and certainly politically more significant factor relating to Zizek's reception in the UK and the USA was the ideological filter of post-Marxism. The Sublime Object of Ideology (1989), the first of Zizek's works to be translated into English, was published in Laclau and Mouffe's series Phronesis, which, as its opening statement makes clear, is committed to anti-essentialism, poststructuralist theory and `a new vision for the Left conceived in terms of a radical and plural democracy'. In a sense, Zizek's work could not have been translated at a more opportune moment. In Eastern Europe, the historic collapse of `actually existing socialism' and the break-up of the Soviet Union was gathering pace, while in Western Europe the final demise of Western Marxism seemed assured if not already complete. The intellectual currents of postmodernism and post-Marxism were at their most vitriolic and triumphalist. Any sense, for example, that Laclau and Mouffe remained within an essentially Marxian problematic, as with the conclusion of Hegemony and Socialist Strategy (1985), was expunged from their work.9 From The Sublime Object to Looking Awry, Zizek, the former dissident under `socialism' who also knew American popular culture better than most Americans, encapsulated the moment. It is hardly surprising, therefore, to see Zizek so unequivocally co-opted to the banner of post-Marxism as in Laclau's `Preface' to The Sublime Object. Laclau situates the work of Zizek and the Slovenian school in relation to Lacanianism on the one hand and classical philosophy on the other, but with only a passing reference to Marx (as a philosopher) and the influence of a certain `Marxist-structuralist' theorist and `Marxist currents'. Laclau concludes: `For all those interested in the elaboration of a theoretical perspective that seeks to address the problems of constructing a democratic socialist political project in a post-Marxist age, it is essential reading.'10

Again, Zizek did much to encourage this view in interviews. As in his 1990 interview for Radical Philosophy, which took place on the eve of Slovenia declaring itself the first independent republic from the federation of Yugoslavia, and in which Zizek discussed his position within the newly formed Slovenian Liberal Party. In contrast to the neo-liberalism dominant in the rest of Europe, the Liberal Party in Slovenia formed part of the opposition bloc and was closely aligned with new social movements, in particular the feminist and ecological movements. What was distinctive about the Liberals, remarked Zizek, was their opposition to populist nationalism, a political tendency that united all the other major political groups, from the reformed communists and Greens to the far Right. With their ideology of pluralism, ecology and the protection of minority rights, the Liberals saw themselves as drawing on a tradition of radical democratic liberalism. It is not difficult to discern here the post-Marxist agenda, in so far as it is articulated in Chantal Mouffe's The Return of the Political, and according to which the goal of contemporary politics is not so much to overturn the structures of the state but to deepen and extend the reach of democratic practices and institutions.11 There is, however, one key area in which Zizek is in tune with neo-liberalism; despite defining himself as a Marxist and locating the Liberal Party in opposition to free-market economics, he observes that with regard to economic restructuring he is a `pragmatist' - `If it works, why not try a dose of it?'12

06. 05.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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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인 2006-05-27 2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퍼갑니다. 읽고 싶지만, 오늘 박사입학시험을 본 관계로 너무 피곤해서, 우선 퍼갔다가 나중에 읽겠습니다. 언제나 좋은 페이퍼, 도움이 많이 됩니다 ^^

기인 2006-05-27 2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그런데 박사시험을 보면서 조금 황당했던 것. 제2외국어과(?) 서문, 불문, 노문, 독문 분들은 전공과 제2외국어 시험을 보는데, 자기 전공어학을 선택할 수 있더라고요. 노문 분들이 노문 선택하고, 중문 분들이 중문 선택하더라고요....;;;
-_-; 거의 사전 없이 풀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는 국문학 전공인지라, 그럼 우리도 한국어를... 이라고 중얼거려 보았을 따름입니다.

로쟈 2006-05-27 2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국문과 교수 채용에서도 영어강의 가능자를 우대한다고 하니 부득불 신경을 쓰셔야겠죠.^^ 어학이야 여유만 있다면 많이 할수록 좋은 거 아닐까요? 천년만년 살 수 없어서 문제이지만... 그리고 사실 계급문학을 공부할라치면, 러시아쪽 문헌을 참고해야 할 필요성에 맞부닥치실 수도 있을 겁니다. 이왕이면 러시아어도...

기인 2006-05-29 0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 여유가 많으면, 정말 불, 독, 노, 중어 다 하고 싶습니다만..
학부 때는 고전취향(?)이라서 한문과 라틴어를 했고, 이제 일어를 파고 있습니다.
언어... 참 문제에요... 쩝;;

로쟈 2006-10-21 08: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두 맑스주의는 <신체 없는 기관>에서도 드러나지만 전혀 상이하고 대립적인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