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가 지방선거 유세 도중에 피습을 당한 사건이 발생했고, 알다시피 여론의 여론의 초관심사가 되었다. 범인은 현장에서 체포되었고 현재 수사가 진행중이지만, 이 '정치적 테러'의 여파로 가뜩이나 열세이던 집권 여당은 벌써부터 선거에서의 패배를 기정사실화하고 있는 듯하다(물론 한나라당의 사정은 정반대인 것이고). 테러의 배후에 대한 추측성 기사들이 난무했지만(케네디와 김구의 암살이 들먹여졌다) 여느 정치 보도들과 마찬가지로 그러한 기사가 '전달'하는 것은 의미론적인 것이 아니라 화용론적인 것이다. 즉, 거기서 '사실' 관계보다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것은 (정치적) '효과'이다.

거기에 끼어들어 그 효과를 확대 재생산하며 몇 마디 보탤 생각은 없고, 대신에 '테러'라는 말이 나에게 가장 실감있게 다가왔었던, 지난 2004년 9월초에 러시아 베슬란에서의 테러 사건과 관련하여 모스크바 통신에 올렸던 글을 이미지 버전으로 정리하여 창고에 넣어두도록 한다(당연한 일이지만, 러시아 TV에서는 현지 생방송으로 인질로 잡혀있던 학생들의 억류 상황과 이후에 벌어진 진압작전에 대해서 자세히 보도했었다). 원래의 제목은 릴케의 시구절인 "그들, 일찍 떠난 자들은 우리를 필요로 하지 않으니"였지만, 내용과 보다 직접적으로 관련된 것으로 바꾼다. '정치적 기획으로서의 테러리즘'은 이 글에서 자세히 검토하게 될 지젝의 <이라크>에 나오는 표현이다.  

러시아의 가을은 테러와 함께 시작됐다. 지난 9월 1일 개학식날에 체첸 분리주의자들에 의해서 북부 오세티야의 베슬란(Beslan)시의 한 학교(러시아에서는 1학년부터 11학년까지 같은 학교에 다닌다)가 점거되면서, 어린 학생들과 학부모 등 1,500명 가량이 인질로 억류되면서 시작된 이번 사건은 지난 금요일(9월 3일) 전격적인(그것이 전격적인 것이었는지 우발적인 것이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대테러 ‘진압작전’ 끝에 인질 중 다수가 희생된 채로 종결되었다.

오늘(9월 6일)자 <이즈베스찌야>에 따르면, 사망 355명, 부상 435명, 실종 200여명으로 잠정 집계되고 있는데, 부상자 중에는 중상자가 다수 있기 때문에(대부분이 어린 학생들이고, 이들은 모스크바의 아동병원으로 급송되었다) 최종 사망자는 더 늘어날 전망이다. 아마도 최근 몇 년간 러시아에서 발생한 테러 중 최악의 참사로 기록될 듯한데(이곳 언론에서는 금요일까지 ‘베슬란의 드라마’란 표현을 쓰다가 이후엔 ‘베슬란의 비극’이란 표현을 쓰고 있다), 이미 지난 토요일 푸틴 러시아대통령이 공식담화를 통해서 희생자들에 대한 애도를 표시함과 함께 테러행위에 대한 강경대응을 다짐했고, 내일(9월 7일)은 모스크바 중심인 크레믈린 옆 성 바실리 성당 앞에서 대규모의 反테러 집회가 예정돼 있다(페테르부르크에서는 오늘 反테러 집회가 있었다).



그리고 오늘 이번 참사로 희생된 자들(=어린이들)의 장례식이 오늘 엄수됐다. 지젝의 주장대로(<이라크>, 63쪽), 테러리즘을 ‘정치적 기획’의 일부로서 승인한다 하더라도(승인과 동의는 별개의 문제이지만) 이번과 같이 어린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테러는 저열하다. 비록 체젠 문제에 대한 전세계적 여론을 다시금 환기시키는 데 성공함으로써 이번 테러(인질사건)가 목표한 바를 달성했다고 하더라도 이 ‘성공’은 궁극적으로 자기-패배적이다. 내가 살기 위해서, 우리의 아이들이 살기 위해서, 네가 죽어줘야겠다는, 당신의 아이들이 좀 죽어줘야겠다는 논리는 타협의 여지가 전혀 없는 ‘적대적’ 논리이며, 궁극적으로는 러시아가 전복되거나(현 상황에서 체첸의 독립이 뜻하는 바는 러시아 자체의 붕괴이다) 체첸 분리주의자들이 전부 ‘청소’되거나 간의 양자택일만을 강요하는 논리이다.

 

 

 



지젝은 자유주의적 논리를 “테러리즘의 거부를 일종의 초월적 선험성으로 고양시키는 논리”, 즉 테러리즘의 무조건적인 포기를 협상(=타협)의 전제조건으로 내거는 논리라고 비판하는데, 이번 테러리즘의 논리는 그 이면, 즉 “테러리즘 자체를 일종의 초월적 선험성으로 고양시키는 논리”라고 할 만하다. 즉, 그것은 어떠한 협상(=타협)도 거부하는 테러리즘이다. 그런 식의 ‘자기확인’에서 테러리즘이 얻는 것은 “마치 교착(상태)를 지속함으로써(=유지함으로써) 모종의 병리적인(=정념적인) 리비도적 이익”(<이라크>, 55쪽)일 따름이다(양자는 그렇게 공모한다. ‘맥지하드’처럼).

그것이 병리적인 것은 러시아정부의 강경대응이 뻔히 예상됨에도 불구하고(더 나쁜 건, 그 대응이 서툴기도 하다는 것이다. 대테러작전에서 러시아는 미국이나 이스라엘보다 한참 뒤떨어져 있다) 뻔한 결과를 무릅쓰고, 그 결과를 ‘성공’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지젝이 이들의 논리에 동의할 리는 없어 보이는데, 체첸 문제의 역사적 기원은 지젝이 공언한바 “최선의 자본주의보다도 더 나은 최악의 공산주의 체제”, 즉 스탈린 치하에서의 反민족주의 정책에 있기 때문이다(이러한 정책 기조 때문에 체첸인들이 대거 시베리아로 강제이주 당했다. 극동에 거주하던 한인(韓人)들도 대거 카자흐스탄이나 우즈베키스탄 등의 중앙아시아로 전격 강제이주 당했던 것처럼. 이 한인들이 현재는 러시아에서 소위 ‘고려인’이라고 불리는 우리 동포들이다).

 

 

 



정치적 기획의 일부로서의 테러리즘을 설명하기 위해서, 지젝이 <이라크>(이건 이라크에 대한 책이 아니다. 거꾸로 말하면, 러시아에 대한 책이기도 하고 한국에 대한 책이기도 하다)에서 끌어들이고 있는 것은 “‘하이데거와 정치적인 것’에 관한 영원한 논쟁에 신선한 바람을 불어넣은” 에른스트 놀테의 논변이다. 놀테는 자신의 저작(Martin Heidegger – Politik und Geschichte im Leben und Denken)에서(‘M. 하이데거 – 그의 삶과 사유에서의 정치와 운명’쯤이란 뜻인가?) “1933년의 하이데거의 악명높은 정치적 선택을 변명하기는커녕 정당화한다.”(참고로, 이 정치적 선택에 대한 우리말 참고문헌은 박찬국 교수의 <하이데거와 나치즘>(문예출판사)이다). 즉, “경제적 혼돈과 공산주의적 위협이 있었던 1920년대 후반과 1930년대 초반의 상황 속에서 실행가능한 선택으로서 말이다.”(64쪽)

즉, 하이데거는 공산주의라는 ‘최악’에 굴복하지 않기 위해서, 나치즘(국가사회주의)라는 ‘차악’의 유혹에 넘어갈 수밖에 없었으며, 이 정치적 선택은 그의 ‘실수’가 아니라 ‘역사적으로 옳은’ 선택이었다는 것. “이에 따르면 파시즘 그리고 심지어 나치즘은 궁극적으로 공산주의의 위협에 대한 반작용이었고 그것의 최악의 실천들(강제수용소, 정적의 대량 숙청)을 반복한 것이었다.” 해서, “국가사회주의자들과 히틀러가 단지 자신들을 (볼셰비키적인) ‘아시아적’ 행위의 잠재적인 혹은 실제적인 희생양이라고 간주했기 때문에 ‘아시아적’ 행위(=홀로코스트)를 실행에 옮겼다는 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번역을 일부 수정했다. 국역본은 “-실행에 옮겼다는 것이 사실일 수 있을까?”(65쪽)라고 옮겼는데, 사실에 대한 ‘의혹’으로 읽힐 수 있기 때문에 모호한 번역이다.) 즉 “(스탈린의) 수용소군도가 (나치의) 아우슈비츠를 앞서지 않았던가?”

여기서 핵심은 공산주의와 파시즘(나치즘)이 모두 나쁜 것이라는 (아름다운 영혼의) ‘순수한’ 자유주의적 자세가 아니라,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보다 ‘더 나쁜 것’이라고 선언하는 자세이다. 그럴 때에만 파시즘, 심지어 나치즘은 가능한 ‘정치적 기획’으로 사고될 수 있다. 해서, 선택지는 두 가지이다. 좌파 전체주의(=反자본주의적 공산주의)와 우파 전체주의(=자본주의적 파시즘). 하이데거는 후자의 편에 섰지만, 지젝이 편드는 쪽은 전자이다. 그는 현 정세에서 ‘거대한 규모로 진행중인 이데올로기-정치적 기획’을 간취하는바, 가령 “무솔리니가 독재자이긴 했지만, 히틀러나 스탈린, 그리고 사담 같은 정치적 범죄자나 살인자는 아니었다”는, 이탈리아 수상 베를로스코니의 발언은 개인적인 돌출행동(스캔들)이 아니라, “反파시즘적 단결에 기초하고 있는 유럽적 정체성에 관한 전후(=2차 대전 이후) 상징적 협약의 조건들을 변화시키려는 기획”으로 보는 것이다.

거기에 대해서, 지젝은 나치즘을 정치적 기획으로 사고하려는 것에 대한 거부의 이면을 아도르노를 비롯한 프랑크푸르트 학파 일반의 이론적 추문(러시아어 번역은 ‘구멍’), 즉 스탈린주의에 대한 분석의 완전한 결여(‘부재’)에서 찾는다(<소비에트 이데올로기>를 쓴 마르쿠제는? *이에 대해서는 지젝의 '두 개의 전체주의' 참조). 해서, “아마도 아도르노와 한나 아렌트 사이의 긴장이라는 궁극적 수수께끼는 거기에 놓여 있을 것이다. 그들 양자는 거부를 공유했다. 그러나, 아렌트에게서 그것은 활동적 삶(vita activa), 참여하는 정치적 삶이라는 적극적인 규범적 관념에 기반해 있었던 반면에 아도르노는 이러한 단계를 거부했다.”(66쪽)

여기서 양자가 ‘거부’한 것은 ‘스탈린주의’이다. 아렌트는 ‘전체주의의 기원’에 대한 상세하고 방대한 분석을 통해서, 그리고 ‘활동적 삶’(=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하는 삶)이라는 규범적 관념에 근거하여, 스탈린주의를 거부한 반면에, 아도르노의 거부에는 이러한 단계, 즉 분석과 근거가 결여돼 있다는 것(각주에서 지젝은 이러한 ‘적극적 규범성’으로의 진입 거부를 아도르노의 ‘단순한 실패’가 아니라 ‘마르크스주의의 혁명적 기획’에 대한 ‘충실성’으로 이해하고자 한다).

나치즘을 정치적 기획으로 사고할 경우, 다시 문제는 나치즘(혹은 파시즘)이냐, 스탈린이즘이냐, 이다. ‘더 좋은’, 혹은 ‘더 선한’ 기획이란 선택지로 주어져 있지 않다(주어진 건 무엇이 덜 나쁜 것이냐이다). 해서, “선한 이슬람과 악한 이슬람적 테러리즘에 대한 구별이 사기인 것과 마찬가지로”(우리는 “이슬람은 그런(=테러리즘의) 종교가 아니다. 이슬람은 평화의 종교이다”라는 순진한 진술에 유혹되지 말아야 한다!) “유대인과 이스라엘(정부) 혹은 시오니즘에 대한 전형적인 ‘급진-자유주의적’ 구별 또한 문제 삼아야 한다.”

다시 말해서, “유대인과 이스라엘의 유대인 시민들이 이스라엘의 정치와 시오니즘 이데올로기를 비판하면서도 반유대주의로 비난받지 않고 더 나아가 그 비판을 유대성(Jewishness)에 대한 그들의 바로 그 열정적 애착에, 그들이 유대적 유산에서 보존할 가치가 있다고 여기는 것에 기반한 것으로서 공식화할 수 있는 공간을 열어놓으려는 노력 또한 문제삼아야 한다.”(67쪽) 여기서는 잠시 이 문장을 문제삼아 보기로 하자(이런 번역문은 불친절하다). 몇 번 읽어보면 내용은 짐작할 수 있겠는데, 그런 수고를 굳이 왜 해야 하는지 의심스럽다.

문장의 줄거리는 “(우리는) 유대인과 유대인 시민들이 (어떤) 공간을 열어놓으려는 노력 또한 문제삼아야 한다.”이다. 나머지는 전부 ‘공간’을 수식하는 형용사절이다(아마 원문은 관계형용사절일 듯하다). 다시 정리하면, “즉, (급진-자유주의자들은 그러한 구별을 통해서) 유대인들과 이스라엘의 유대인 시민들이 이스라엘 정부의 정책과 시오니즘 이데올로기를 비판할 수 있는 공간을 열어놓고자 한다. 그러한 공간에서는 반유대주의란 비난을 피해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유대적 유산에서 보존할 가치가 있다고 여기는 것, 즉 ‘유대적인 것’에 대한 열정적인 집착에 그 비판의 근거를 둘 수 있게 말이다.” 하지만, 그걸로 충분한가?

물론 충분하지 않다고 지젝은 말한다. 하지만, 내가 국역본 <이라크>와 나란히 읽은 러시아아본에서 이하의 한 페이지 남짓 분량이 빠져 있다. “그러나 이것으로 충분한가?”에 이어지는 건 69쪽에서 “축출되어야 할 하나의 신화는…”이라고 시작되는 문장이다. 이런 대목은 몇 곳에 더 있는데, 국역본의 1장 ‘이라크와 그 너머’에서 87쪽 “좋아, 그러면 꺼져버리고 그만 날 괴롭혀!” 이하는 러시아어본에서 정말로 꺼져버리고 없다. 알려져 있다시피, 국역본은 지젝의 초고를 번역한 것이다. 따라서, 국역본보다 이후에 나온 영어본(Verso, 2004)과는 약간 차이가 날 수도 있다. 그 차이는 물론 영어본의 편집과정에서 생겨날 수 있는 차이이다. 러시아어본이 그 영어본을 충실하게 옮긴 거라면, 국역본과 러시아어본의 차이는 국역본과 영어본의 차이이기도 할 것이다(하지만, 영어본을 아직 확인해볼 수 없는 나로서는 이 점에 관하여 확실하게 말할 수 없다. *어떤 이유인지는 몰라도 러시아아본이 일부 내용을 축약하고 있다).

어쨌든 지젝은 ‘선한’ 레비나스적 유대교를 ‘악한’ 여호와의 전통과 대립시키려는 급진-자유주의적 시도를 비판한다. 그건 한낱 환상일 뿐이다. 왜냐하면, “유대교 그 자체는 참을 수 없는 절대적 모순의 계기이며, 최악(=일신교적 폭력)과 최선(=타자에 대한 책임)이 절대적 긴장 속에 있는 계기이며, 동일하고 일치하는 동시에 절대적으로 양립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틈새, 그 긴장이 바로 유대교의 핵심이다. 이러한 사정은 이슬람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원리주의적 테러리스트들에 의해 오용된 이슬람’과 ‘참된 이슬람’이 따로 있는 게 아니다. 그것은 결정불가능하다. 즉 이슬람은 “우리의 현대적 곤경에 대해 파시즘적으로 응답할 수 있는 ‘최악의’ 잠재력을 품고 있다는 바로 그러한 이유에서, 그것은 (자본주의적 세계질서에 저항하는) ‘최선’을 위한 장소로 판명날 수도 있다.” 해서, “우리의 과업은 이러한 애매한 사실을 어떻게 정치적으로 이용하는가이다.”(68쪽)

지젝이 ‘중동에서의 행위를 위한 온건한 제안’이란 절의 마지막 대목에서 덧붙이고 있는 것은 들뢰즈가 ‘이접적 종합’(disjunctive synthesis)이라고 부른 것의 한 역사적 사례인바(1937년 9월 26일 아돌프 아이히만이 유대인의 팔레스타인 이주를 용이하게 하기 위한 협력방안을 논의하기 위해서 베를린에서 기차에 탑승한 것), 그것은 나치와 급진 시오니스트들이 공통의 이해관계를 갖고 있었다는 걸 보여주는 사례이다. 그러한 이해관계 내에서 나치와 시오니스트는 서로 구별가능하지 않(았)다. 그것이 소위 변증법에서의 ‘대립물의 통일’이고 (짜고 치는 고스톱처럼)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이다.

지젝이 ‘온건한 제안’으로 제시하고 있는 내용은, 다시 앞으로 돌아가서 59-60쪽에 집약돼 있다. 오늘날 중동에서(그리고 체첸에서, 더불어 한반도에서) 진정으로 근본적인 윤리-정치적 행위는 무엇이 될 것인가? “이스라엘인과 아랍인 모두에게 그것은 예루살렘의 (정치적) 통제를 포기하는 제스처에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예루살렘 구(舊)시가지를 (일시적으로) 어떤 중립적인 국제적 세력이 통제하는 국가-외적인 종교적 참배의 장소로 변형시키는 것을 승인하는 제스처에 말이다.”(59쪽)

궁극적으로 “우리는 이스라엘의 유대인과 팔레스타인인을 결합시키는 두-민족 세속국가라는 ‘불가능한 꿈’을 포기해서는 안된다. 장기적으로 볼 때 진짜 유토피아는 이러한 두-민족 국가의 유토피아가 아니라 그 두 공동체들을 명백히 분할하는 장벽의 유토피아이다.”(60쪽) 이 대목에서 ‘유토피아’란 말은 ‘불가능한 꿈’과 동의어이다(즉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음에 주의해야 한다). 여기서 ‘장벽’은 1967년 이전의 이스라엘과 서안 지구의 점령된 영토를 분리시키는 장벽으로서 1989년까지 동/서독을 분할했던 장벽과 “섬뜩하게 닮아있다.”(우리의 휴전선은?) 그 다음 세 문장의 순서 A-B-C는 러시아어본의 경우 A-C-B로 돼 있는데, (역시나 영어본의 경우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논리상 후자가 더 적절한 듯하여, 여기서는 문장의 순서를 재배열해서 옮긴다.

(A) 이러한 새로운 장벽의 환영(=환상)은, 그것이 ‘정상적인’ 법치와 사회생활을 항구적인 긴급사태로부터 분리해주는 분할선으로 기능하리라는 것, 즉 그것이 긴급사태의 상황을 ‘저기 바깥’ 영역으로 국한시키리라는 것이다.
(C) 양 진영 각각은, 이러한 인종적으로 ‘깨끗한’ 국가의 포기가(=‘깨끗한’ 국가를 포기하는 것이) 단지 타자를 위해 행해지는 희생이 아니라 스스로를 위한 해방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B) 그것은 중동에서의 또 다른 진정한 ‘사건’, “우리에게 유대인도 팔레스타인인도 없다”는 바울적 의미에서의 진정한 정치적 보편성의 폭발이 되었을 것이다.

지젝이 핵심적으로 강조하는 것은 ‘진정한 보편성’이다(바울은 언제나 그러한 보편성의 이름으로 참조된다). 민족주의나 민족국가를 그가 문제삼는 이유는 그것이 진정한 보편성이라는 기준에 미달하기 때문이다. 다시 한번 상기하자면, “오늘날 미국에 대한 문제는, 그것이 새로운 세계 제국이라는 것이 아니라 그렇지 않다는 것, 즉 그런 척하면서도 무자비하게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민족국가로서 계속 행동한다는 것이다.”(32쪽) 사실 덩치값을 못하는 건 미국만의 문제가 아니라, (덩치가 좀 줄긴 했어도) 러시아의 문제이기도 하며, (덩치가 작은) 체첸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한국의 덩치는 어떤가?).

체첸 분리주의자들의 테러에 내가 공감하지 않는 것은 그들이 겉으로 내세우는 체첸 민족주의 혹은 이슬람주의라는 상상적 명분이나, 러시아의 역사적 탄압에 대한 저항이라는 상징적 명분, 그리고 석유 송유관을 둘러싼 경제적 이권 다툼이라는 실재적 명분이 모두 우리가 기대할 만한 ‘보편성’에 미달하기 때문이다(“우리에게는 러시아인도 체첸인도 없다”는 보편성 말이다). 즉 러시아와 체첸의 적대적 관계는 보편적 적대가 아닌 상대적 적대에 근거하고 있으며, 이에 바탕을 둔 분리주의적 테러리즘이 진정한 ‘해방’을 가져다 줄 리는 만무하다. 때문에 거듭 애꿎은 것은 어린 목숨들이다.

반복하지만, 우리가 거부해야 하는 것은 “테러리즘 자체를 일종의 초월적 선험성으로 고양시키는 논리”이다. 그것은 “테러리즘의 거부를 일종의 초월적 선험성으로 고양시키는 논리”가 위선적인 만큼이나 저열한 논리이다. 테러리즘은 정치적 기획이 될 수 있다. 하지만, 테러를 위한 테러리즘은 결코 그러한 정치적 기획이 될 수 없다. 이 둘은 결정불가능한 것인가? 하지만 확실한 건 양립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애매한 사실을 우리는 정치적으로 어떻게 이용할 수 있을 것인지? 어린 목숨들의 희생을 우리는 어떻게 애도하고 보상할 수 있을 것인지?..

06. 05.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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