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영화평론가 '조너선 로젠봄과의 대화'를 읽어보기 위해 '씨네21'(06. 05. 10) 사이트에 들어갔다가 '전영객잔' 코너에서 김소영 교수의 흥미로운 칼럼을 발견하게 되어 옮겨온다. 원제는 '계급 상승 욕구와 취향 맞추기'이며, '<매치포인트>와 <달콤, 살벌한 연인>이 도스토예프스키를 인용하는 방식'이 부제이다. 부제에서 드러나지만 최근 개봉작 두 편에 대한 리뷰 성격의 글인데, 물론 나의 관심은 '도스토예프스키를 인용하는 방식'에 더 가 있다. (아직 비디오로 출시되지 않은) 두 편의 영화를 아직 보지 못한 탓에 내가 덧붙일 말은 별로 없을 것이다.

 

 

 

 

-중1 때 학교 백일장에서 장려상을 받았다. 뭐, 그렇겠거니 했다. 그런데 담당 선생님이 불러서 하시는 말씀이 곧잘 썼는데 조숙한 내용인데다 (도스토예프스키) 표절 의혹이 느껴져 일단 대상에서 제외했다는 것이다(이후로도 대상이라고는 받은 적이 없다). 말하자면 조숙해서 장려해야 할 대상이던 나는 그 뒤에도 소설 습작에 몰두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듯이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에 깊이 감명받아 누구에게나 해가 되는 “하찮고 보잘것없는” 사람을 살해하는 이야기를 썼다.  

-그런데 하필이면 내 첫 번째 소설의 독자가 바로 어머니가 (몰래) 되는 통에 내 윤리적 성향을 의심받아 대단히 고생했다. 나의 도스토예프스키 모작이 실패로 끝났다는 것을 유난히 강력하게 상기시켜주는 두편의 영화가 있으니 <달콤, 살벌한 연인>과 <매치포인트>다. <달콤, 살벌한 연인>에서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은 교양의 척도이자 살인 지침서로 등장한다. 굳이 제목에서 생각하자면, 어떤 살벌함을 가리키는 인덱스다.

-<매치포인트>에서도 도스토예프스키는 교양의 척도이자, 소포클레스와 더불어 인생의 살벌한 비극을 가리키고 있다. 두 영화에 모두 도스토예프스키가 등장한다고 지적하고 그래서 두편을 함께 쓴다고 하는 것은 반쯤 진담이지만, 둘 다 계급 상승이나 신분, 취향이라는 문제에 있어 매우 흥미로운 사례를 제공한다. 그리고 두 영화에는- <매치포인트>엔 도스토예프스키만이 아니라 스트린드베리, 베르디 등이 그리고 <달콤, 살벌한 연인>엔 몬드리안, 고흐 등이 등장한다― 대단히 통속화된 고급예술과 아직은 약간 접근 불가능한 예술 작품을 계급성의 중요한 참조물로 활용한다.

욕망과 행운으로 대치된 <매치포인트>의 도덕적 판단

-<매치포인트>라는 제목의 의미는 승패를 좌우하는 마지막 1점이다. 자신에게 적합한 매치포인트를 필요로 하는 것은 주인공인 크리스(조너선 리스 마이어스)다. 그는 아일랜드 출신의 전직 프로 테니스 선수였으나, 선수 생활을 그만두고 런던으로 와 테니스 교습을 시작한다. 미래가 불투명한 어려운 처지다. 그러나 그는 영국 상류층의 한량인 톰(매튜 구드)을 만나 오페라를 좋아하는 자신의 고상한 교양을 말한 덕에 톰의 가족이 사용하는 로열오페라하우스의 관람석에 앉게 된다. 그러다가 톰의 여동생인 클로에(에밀리 모티머)의 눈에 든다.

-한편 톰의 연인이자 크리스가 한눈에 매혹되는 노라(스칼렛 요한슨) 역시 사실 매치포인트가 필요하다. 미국 콜로라도 볼더 출신으로 여배우가 되려 하지만 불행히도 오디션에는 실패하고 남자의 눈길을 끄는 데는 성공한다. 그녀에겐 몇년 대학을 다닌 고전적 아름다움을 가진 언니가 있지만 마약에 빠져 있고, 아버지는 가족을 두고 떠났으며, 직업을 전전하던 어머니가 있다.

-크리스와 노라가 만난 계기는 영국 상류층 올드 머니의 ‘미덕’을 가진 휴잇 집안의 혼기가 닥친 톰과 클로에의 각각의 파트너로서다. 크리스와 노라는 둘 다 인생의 게임에서 1점이라도 더 필요한 사람들이라 서로를 금방 알아보지만, 크리스의 기회주의적 섹스 이후 둘은 헤어진다. 톰은 노라를 떠나 자신의 집안이 승인할 수 있는 여자와 결혼한다. 반면 휴잇 집안은 크리스에게 그에 걸맞은 직책을 구해준 뒤 딸과 결혼시킨다. 여기까지 스코어를 보자면 크리스는 계급 무한 상승 이동 가능한 점수를 얻었고, 노라는 잃었다. 그러나 문제는 크리스가 템스 강가의 호화 아파트의 삶 외의 무엇인가 다른 것, 말하자면 애욕이라고 알려진 것을 노라에게 투사하면서 일어난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문제는 크리스에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노라에게 일어난다.

-노라는 그녀의 말처럼 남자들이 그녀와 잠을 자면 뭔가 특별할 것이라고 생각해서 유혹하기 때문에 상대가 톰이건 크리스건 사실 별 관계가 없다. 톰이 잘생기고 그녀에게 선물 공세를 하기 때문에 좋아한다고 크리스에게 말했지만, 초반의 호기심 말고는 사실 노라가 왜 크리스와 관계를 하는지는 그녀의 말대로 모호하다. 처음 만났을 때 노라는 크리스가 대단히 공격적인 사람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영화에서 가장 격한 장면은 둘이 호텔에서 나와 다시 노라의 아파트로 가 정사를 벌이는 부분이다. 노라는 크리스의 넥타이를 풀어 그의 눈을 가리는데, 크리스는 여기서 처음으로 흥분한 모습을 보인다. 이제까지 그는 냉정하고 계산된 발언을 했었다. 상류층의 별장이나 런던의 팝, 음식점 그리고 테이트 모던 등을 우아하게 보여주던 카메라가 이 부분을 정면에서 잡기 때문에 관객은 거의 날것처럼 이 장면을 불현듯 응시하게 된다. 여기에서 뿜어져 나오는 성적 에너지는 상당히 높다. 또 노라가 뒤에 있기 때문에 관객은 흥분하고 만족해가는 남자의 몸을 직접 마주한다.

-<매치포인트>는 계급 상승 욕구의 실현이라는 것 말고도 크리스의 육체적 흥분과 쾌락의 충족을 보여준다. 관객이 그의 성적 흥분을 날것처럼 느끼게 구조화되어 있는 셈이다. 이 장면은 영화의 종결부 크리스가 노라에게 가하는 모종의 끔찍한 무엇과 기묘한 대구를 이룬다(스포일러를 피하고 있음). 이 영화에서 질리는 부분은 노라의 일기장의 진술마저도 크리스의 그저 행운으로 충만한 사회적 건재를 훼손시키지 못한다는 것이다. 또한 유령의 저주도 크리스의 비윤리적 행운을 앗아가진 못한다. 굳이 그 의미를 구한다고 한다면 그것은 상층 계급, 건재의 비밀이 자본가로서의 능력이 아니라 상당 부분 운에 달려 있다고 하는 것이다. 영화는 도덕적 망설임없이 그 부분을 끝까지 밀어붙이고 또 도스토예프스키와 소포클레스의 사유를 씌운다. 하지만 사실 영화는 크리스의 살갗 벗겨진 욕망과 상류층의 옷으로 덧씌운 욕구의 변주에 다름 아니다. 또 그것은 노라의 삶의 포인트를 제거함으로써 가능해진다.

-이 영화가 유사한 이야기를 다룬 시어도어 드라이저의 소설 <아메리카의 비극>이나 영화 버전인 <젊은이의 양지>(1951)와 다른 점은 남자주인공이 사형과 같은 처벌을 받지 않는다는 점이다. 또 다른 차이점은 위 작품들에선 먼저 가난한 여자와의 관계 중에 부자인 여자를 만나는 설정이지만 <매치포인트>는 계급 상승을 가능하게 해줄 대상과 성적 욕망을 일으키는 대상을 거의 동시에 등장시킨다. 바로 그러한 동시성으로 상승하려는 욕구와 성적 충동에 대한 욕망은 서로 경합하면서 영화에 응축된 긴장과 에너지를 더한다.

-우디 앨런은 예술·상류 계층의 문화와 날것 그대로의 욕망을 정교하게 혼합해 살인에 대한 대가를 받지 않는 텍스트의 내재적 논리를 만들어내고, 영국사회의 세습적 부의 완고함과 자비로움을 우아하게 보여준다. 그래서 이 영화에 도덕적 판단을 내리는 것을 <아메리카의 비극>의 1920년대 미국이나 <젊은이의 양지>의 1950년대와는 달리 어느 정도 시대착오적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이 <매치포인트>가 위의 작품들과 결정적으로 갈리는 부분이기도 하다. 나는 텍스트가 관객에게 주입하려는 이런 충동, 유혹과 달리 이 영화의 여성과 일하는 계층, 그리고 노인에 대한 혐오는 도가 지나치다고 생각한다. 아이러니의 흔적이 있다고는 하지만 제스처이지 텍스트를 가볍게 태울 정도는 아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통속적 인용 <달콤, 살벌한 연인>

-이 영화의 두 장면에서 나는 사실 포복절도했다. 그 하나가 영화의 마지막 즈음, 헤어진 사랑에 대한 그리움을 다른 사람들은 연인이 좋아하던 음악을 들으며 느낀다거나 하는데, 황대우(박용우)는 암매장된 시체가 발견되면 느끼게 된다는 이야기. 나는 사실 토요일 저녁, 달콤한 무드를 가장하고 있는 연인들 틈에 끼어 멀티플렉스 복도 끝자리에 앉아 영화를 보고 있었다(처음에 들어섰을 때 둘씩 앉은 연인들이 매우 동정어린 눈길을 던졌다. 시사회에서 볼걸…). 그래서 원한 것만큼의 박장대소를 연출하지는 못했으나 모처럼만에 보는 엉뚱하고 웃기는 코미디다.

-이 영화는 거의 낫 놓고 기역 자도 모르는 것에 버금가는 몬드리안 그림을 놓고도 누군지 모르고 도스토예프스키도 생판 초면인 한 여자 미나(최강희)가 대학 영문과 강사인 남자를 만나 취향 갖추기를 해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그러나 또 다른 한편에서 시체를 묻을 구덩이를 파고 있는 것이 문제다.

-이 영화는 취향을 통한 계층간, 성별간 구별짓기의 풍속도이면서 또한 그러한 고급 취향의 통속화 과정이다. 대학 영문과 강사와 혈액형으로 상대를 파악하는 ‘유치’한 여자간의 취향의 조정 과정 말이다. 동시에 순애보적 사랑이나 그 사랑의 대상으로서의 청순명랑 타입의 여성에 대한 가벼운 해체적 시각이 있다. 이웃집 청순 명랑 처녀가 블랙 위도로 밝혀지는 과정이 흥미롭다.

-두 번째로 웃긴 장면은 미나/미자의 도스토예프스키 인용과 해석이다. 예의 그 하찮고 보잘것없는 사람을 죽인다는 구절 말이다. <매치포인트>의 도스토예프스키 인용보다 통속적이고 웃기는 코드로 사용되었지만 오히려 이러한 참조가 덜 느끼하다. 이렇게 가볍게 날이 선 영화, 또 농담이 상당히 마이너한 감성인 영화를 저예산으로 만들어 주류영화의 배급망 속으로 올려놓은 것은 앞으로도 흥미로운 벤치마킹의 사례가 될 것 같다.

06. 05.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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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ule 2006-05-26 02: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년 연말에 봤던 연극 <육분의 륙>에서도 도스토예프스키의 <악령>에 나오는 구절이 주인공(유지태)의 대사로 인용되더군요. 생각해 보면 니체적인 발언이기도 했지만.

승주나무 2006-05-26 1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매치포인트는 곳곳에서 죄와벌을 원용합니다. 노골적이다 싶을 정도로..

로쟈 2006-05-26 14: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디 애런의 초기 영화에서도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을 코믹하게 패러디한 적이 있습니다. <우디가 말하는 앨런>을 한번 들춰봐야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