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60년의 한국정치>(이매진, 2006)는 얼마전 출간된 손호철 교수의 신간이다(생각만큼 팔리는 책은 아닌 모양이다). 보관함에 들어 있는 책인데, 마침 프레시안(06. 05. 22)에 자세한 서평 기사가 게재되었기에 옮겨온다(한데, 기사는 노무현 정부에 대한 비판에 주로 할애돼 있다). 필자는 강이연 기자이고, 타이틀은 '노무현 정부, YS와 똑같은 비극 반복'으로 돼 있다. 그 '비극'의 내용까지 동일한지는 모르겠지만, 지방선거를 앞둔 현 정부와 여당의 지지율이 바닥을 기는 걸 보면, 뭔가 '반복'되는 것만은 틀림없어 보인다(해서 내년엔 정권교체가 이루어지는 것일까?).

 

 

 

 

-"실력이 뒷받침되지 않은 무비판적 개방과 공세적인 세계화 전략이 한건주의와 결합해 나라를 거덜 낸 비극을 두 눈 똑바로 뜨고 지켜보고도 노무현 정부는 YS와 너무나 똑같은 일을 반복하고 있다." 손호철 서강대 교수(정치외교학과)가 집권 4기에 들어선 노무현 정부에 대한 '쓴소리'를 쏟아냈다. "노 대통령이 추진하고 있는 한미 FTA도 실력이 뒷받침되지 않은 무모하고 무비판적인 공세적 세계화 전략의 전형으로서 YS의 OECD 가입을 빼닮았다"는 것(*한국일보의 칼럼에서 그가 종종 내비치던 의견이다).
  
-손 교수는 "정말 안타까운 것은 YS는 처음이라 몰라서 그랬다고 치더라도 YS의 경험을 생생하게 목격한 노 대통령이 정치적 스승의 비극을 반복하고 있다는 점이다. 세상에 미련한 것이 역사에서 배우지 못하고 똑같은 비극을 반복하는 것이다"고 쏘아붙였다.
  
-한발 나아가 손 교수는 "'내가 세계경제를 제일 잘 아니까 내가 한 결정에 국민들은 무조건 따라오면 된다'는 계몽군주식 정책 결정은 박정희 시대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며 "반대하는 사람은 농민이건, 영화감독이건, 교사건 '변화에 반대하는 수구세력'으로 모는 오만은 오히려 군사독재보다 더 심하다"고 꼬집기도 했다.
  
-손 교수는 자신의 저서 <해방 50년의 한국정치>(새길, 2005) 이후 10년 만에 새롭게 펴낸 <해방 60년의 한국정치>에서 이같이 지적하고 "노무현 정부의 최대 실책은 단순히 최악의 사회적 양극화를 야기한 것이 아니라 21세기의 한국의 발전모형에 대한 국민적 논의를 조직하고 만들어내는 작업을 전혀 하지 않았다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따라서 손 교수는 "노무현 정부가 남은 임기의 두 가지 과제로 내세운 사회적 양극화 해소와 한미 FTA 추진은 모순된 처방이라는 문제점은 말할 것도 없고, 실제로 강력히 추진하고 있는 것은 한미 FTA일 뿐이어서 사회적 양극화 해소와 복지국가 건설은 선거용 립서비스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2002년 대선에서 노무현 후보에게 표를 던진 국민들은 과연 한미 FTA를 체결하라고 표를 던져준 것일까?" 손 교수는 노무현 정권의 등장 이후 발생한 이런 모순과 한국 사회의 갈등양상을 두 가지 전선으로 구분해 설명했다. 하나는 냉전적 보수(수구) 세력과 개혁적 보수(자유주의) 및 진보세력 사이에 있는 '민주 전선'이다. 국가보안법 폐지 문제에서 한나라당과 열린우리당의 대립이 보여주듯 민주개혁을 둘러싼 이 전선은 자유주의적 보수세력과 진보세력의 연합이 냉전적 보수세력과 대립하는 모습을 보인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또 다른 하나는 개혁적 보수(자유주의) 세력과 진보세력 사이에 존재하는 전선으로 이는 '신자유주의 전선'으로 명명된다. 그간 FTA 문제에서 이를 지지하는 개혁적 보수(자유주의)와 냉전적 보수세력이 연대해 이것에 반대하는 진보세력과 대립하는 양상이었다는 것이다.
  
-손 교수는 두 개의 전선을 분리하면 노무현 정부가 외쳤던 '개혁'의 성격이 명확해진다고 했다. "정작 해야 할 민주개혁은 제대로 추진하지 못하고, 하지 말아야 할 무한경쟁과 시장만능의 신자유주의 개혁(개악)은 과감하게 추진했다는 점"에서 그간의 정부들과 차이점이 없었다는 것이다. 즉 '민주개혁'과 '신자유주의 개혁'이 혼재된 개념 속에서 노무현 정부를 '개혁적'이라고 평가했기 때문에 앞서 말한 모순된 상황이 발생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손 교수는 '신자유주의 개혁'이 지속되고 있는 현재의 한국 사회는 97년 체제의 연속이라고 해석했다. 97년 체제란 역사적 맥락 속에서 한국 사회를 구분 짓는 개념이다. 극우반공 체제였던 48년 체제, 개발독재로 상징되는 박정희의 61년 체제, 그 61년 체제의 정치적 독재 부분을 6월 항쟁으로 해체한 87년 체제를 거쳐 세계화 전략과 IMF 사태로 국가주도형 정치경제 체제를 해체한 것이 97년 체제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체제에서 핵심으로 남은 건 신자유주의 정책임은 두말할 나위 없다.

-다만 노무현 정부 초기부터 97년 체제가 뚜렷이 모습을 드러낸 것은 아니었다. 손 교수는 노무현 정부의 국정운영을 4개의 구간으로 시기구분해 이를 설명했다. 손 교수의 구분에 따르면 제1기(출범~2004년 총선 전까지)는 탄핵 등으로 민주개혁도, 노동운동 등의 반대로 신자유주의 개악도 제대로 못한 시기다. 제2기(총선~2005년 초까지)는 총선 승리에 기초해 민주개혁을 추진한 시기로 봤다. 그 후 제3기(2005년 초~2006년 전까지)는 전략 부재로 국보법 폐지에 실패한 뒤 사실상 민주개혁을 포기하고 '경제 살리기'라는 이름 아래 신자유주의 개악을 주로 추진했으며, 한나라당과의 대연정 제의로 상징되는 시기라고 구분했다.
  
-2006년 신년사에서 노 대통령이 사회적 양극화를 우리 사회의 주요 문제로 거론하며 해소를 위한 조치를 할 가능성을 시사한 시점을 계기로 4기로 들어선 것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신자유주의 개악이 기본 골격이라는 점에서 손 교수는 오히려 "3기의 연속일 뿐 4기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고 진단했다. "신자유주의 전선에서 이해관계를 함께 하는 '한노연(한나라당+노무현정부 연합)을 깨고 '노노연(민주노동당+노무현 정부 연합)'을 복원해 민주전선을 유효화하라"는 주문 속에는 노무현 정부가 남은 임기동안 수행해야 할 바에 대한 손 교수의 고언이 담겨 있다.
  
-하지만 "정작 해야 할 민주개혁은 제대로 추진하지 못하고, 하지 말아야 할 무한경쟁과 시장만능의 신자유주의 개혁은 과감하게 추진"했던 노무현 정부가 임기 말에 이런 궤도전환을 모색할 수 있을까? 손 교수 역시 이에 대해선 대단히 부정적이다(*그럼 뭐, 정권교체는 필연적인 대세이겠다. 그런데, 현 진보정당은 내년까지 집권을 위한 대중적 지지기반을 확보할 수 있을까? 혹은 맨날 죽만 쑤는 것일까?).

06. 05.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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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osculp 2006-05-24 11:05   좋아요 0 | URL
손호철의 처음 질문 왜 노무현 정부는 김영삼정부의 비극을 반복하고 있는 것일까요?
노무현 정부에게 21세기 한국의 발전모델에 대해 진보세력은 설득력있는 답을 주지 못하고 그나마 설득당한게 한미FTA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어제 상가집에서 애기하다 공통된 의견은 한나라당이 한 10년 정권잡을 생각가지고 가야겠다였는데.
먹고사는 문제가 개혁만으로 해결이 될런지.

pax 2006-05-24 11:25   좋아요 0 | URL
윗분에게//음... 그러니까, 님의 말씀은 21세기 한국의 발전모델에 대해 누군가가 설득력 있는 비젼을 제시하고 있다는 뉘앙스로도 들릴 수 있겠네요. 그리고 그 새로운 발전 모델은 우리들이 먹고 사는 문제로 집약된다? 혹시 한미 FTA도 21세기 한국의 새로운 발전 모델의 연장으로 간주 될 수 있을까요?

로쟈 2006-05-24 11:32   좋아요 0 | URL
어제오늘 여론조사에서는 한나라당 지지도가 거의 50%에 육박하는 것으로 나오는데, '진보세력'은 소위 이 '반동적인' 50%에 대해서(대개는 '먹고사는 게 문제'라고 생각하죠) 어떤 설득력있는 대안을 제시해줄 수 있는 건지 저도 궁금합니다. 열린우리당이나 한나라당이나, 라고 생각하니까 거의 70% 되겠네요. '당신들의 진보'로 만족하는 건지, 70%에 대한 '인간개조' 계획이라도 갖고 있는 건지 궁금하기도 하고 의문이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도덕적 우월주의를 내세우지만(소위 '강철 같은' 품성을 갖춘 인간), 도덕이 사람들을 움직이는 건 '미담사례'에 속할 만큼 예외적이며, 사회적 진보는 이러한 '이기적인' 인간들(자신과 가족을 위해서라면 대충 못할 게 없는 사람들)을 기본단위로 간주하고 방향을 모색해야 한다는 것이 제 기본적인 생각입니다...

pax 2006-05-24 11:31   좋아요 0 | URL
혹시 그 개혁으로는 해결 못하는 "먹고사는 문제"는 "먹고사는 문제"에서 누군가를 배제시키는 논리와 무관한 것인지... 다시 말해 누군가 잘먹고 잘사는 목표 실현을 위해 누군가가 못먹고 못살아야만 하는 구조가 존재한다면 그것을 해소하는 것도 그 "먹고사는 문제"에 포함이 되는 것이며 21세기 한국의 발전 모델인가 뭔가 하는 것이 고려하는 문제인지? 현실의 이미 요란하게 선전되고 진행되고 있는 "21세기 한국의 발전 모델"이 그것을 포함하지 못한다면 적어도 당위적 차원에서 포함해야하는 것에 사람들은 동의를 하는 것인지? 그렇지 않다면 누가 동의를 하지 않는 것인지? 결국 21세기 한국의 발전 모델은 '개혁'(그것이 무엇인지는 구체적으로는 모르겠지만)과 상호배타적인 관계에 놓여 있는지? 에구... 복잡하다 복잡해...

pax 2006-05-24 11:38   좋아요 0 | URL
로쟈님에게//로쟈님이 품고 계신 의문은 저의 의문이기도 합니다.(님의 기본적인 생각이라는 것에는 유보적이지만...) 제가 말하는 것은 "먹고사니즘 비판"은 아니며 더더욱 '영웅적인' 도덕성을 타인에 대한 우월함으로 내세우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그 '먹고 사는 문제'를 너무 편협하게 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존재하는 것 뿐입니다.(가령 저 역시도 "먹고 사는 문제" 때문에 민노당을 지지하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님이 말씀하신 70%의 사람들이 도덕적으로 비천하다고 말할 이유는 저에게도 그리고 다수의 '진보'에게도..... "원칙적으로" 없다고 저는 믿습니다.(혹 진보진영 내부에 님이 그동안 줄기차게 비판하시는 분이 있다면 저로서도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yoonta 2006-05-24 12:52   좋아요 0 | URL
진보진영에 있으면 모두 강철인간인가요? 진보를 하려면 모두 강철인간이 되어야 하나요? 전 로쟈님의 풍부한 식견과 지식에는 늘 탄복하는 편이지만 정치적 판단에는 문제가 많다는 말씀을 드리지 않을수 없네요. 지난번 김규항씨관련 님글을 보면서도 느낀겁니다. 저도 님이 말씀하시는 진보진영의 도덕적 우월감이라는것이 무엇인지 잘 압니다. 하지만 소위 진보가 그것만으로 추동된다고 생각하신다면 오산입니다. 어떤 분이 저한테 이런 말씀을 하신적이 있습니다..자본주의자체를 바꾸지 않고서는 고치기 힘든 문제들에 대해서는 우리도 어쩔수없는것 아니냐...라는 저의 말에...
그것은 "실천적 허무주의"일수도 있다..라는 코멘트...

이 말에 저는 매우 공감했습니다..그것은(그러한 저의 공감)은 저의 도덕적 우월감때문도 아니고..저의 품성이 강철같아서도 아닙니다.

로쟈 2006-05-24 16:43   좋아요 0 | URL
yoonta님/ '강철인간'으로서 품성 없이 진보를 자처한다는 게 어떤 것인지 저로선 상상이 되지 않습니다(물렁하고 게으르면서 '무엇을 할 것인가'를 질문할 수 있을까요?). 님은 진보라는 걸 '자본주의 체제'의 극복과 동일시하는 듯하지만, 그러한 근본주의적 관점에 설 경우에 '진보'는 어디에 있습니까? 자본주의를 극복하는 '과정'에 있나요, 혹은 자본주의의 외부에 대한 '상상'에 있는 것인가요? 제가 생각하는 진보는('변화'라는 말이 더 적합할 수도 있지만), 평균적인 인간의 일상적 의식과 삶이 변화해가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중년의 자영업자이면서 한나라당 지지자인 '평균치'의 한국인에게서 현재 어떤 삶이 가능하며, 그것이 어떻게 변화될 수 있는가.

자본주의의 외부를 말씀하지만, 현체제에서나 사회주의에서나 혹은 미-래의 어떤 체제에서든 그 구성원은 지금의 '우리들'입니다(이 중 70%는 보수라고 분류될 수 있는). 박근혜와 정동영과 노회찬도 다 공존하는. 아시다시피, 자본주의의 적은 자본 자체이며, 자업자득으로 언젠가 붕괴될 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때도 살아남아 얼굴을 마주볼 사람들은 지금 서로가 다 지겨워하는 사람들입니다. 무엇이 변화되는 것인가요? (소위 '새로운 시대'에 대한 비전 혹은 열망을 갖고 있지 않은, 혹은 그럴 필요를 갖고 있지 않은) '현재의' 인간들은 소위 '인간해방'의 새로운 시대를 살 만한 자격이 있는 건가요?(그런데, 누가 해방되는 것인지요? 혹 죽음이란 인간 조건 자체로부터 해방되어야 하는 건 아닐까요?)

사실, 이런 물음들이 얼마나 공소한가를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젊은 대학생들 몇몇의 의식이 바뀐다고 해서 세상이 달라지지 않습니다. 제가 기준으로 생각하는 건 적당히 이기적이면서 적당한 선량한 사람들의 삶과 행복입니다. 저는 많은 부분 우리 자신이기도 한 그들이 삶을 훨씬 더 복잡하고 진지하게 사고한다고 생각합니다. 젊은이들의 나이브한 관념을 신뢰하지 않는 이유입니다.

최근 정세와 관련하여 말하자면, 한나라당 지지자가 50% 이상이면 자신의 가족과 친구들의 절반이 그렇다는 얘기입니다. '나는 진보야, 나는 아니야!'라는 건 면책 사유가 되지 않습니다. '그게 바로 나야, 우리야'라고 말해야 합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다시 고민해야 합니다. (yoonta님과 관련한 건 아니지만) 최근의 정세에 대한 냉소와 조롱을 진보를 자처하는 이들이 특권처럼 남용하는 건, 더불어 모든 걸 '노무현 정권'과 '낙후된 사회의식'의 탓으로 돌리는 건 유치한 일입니다...

biosculp 2006-05-24 16:53   좋아요 0 | URL
물질적 이해관계라는게 이렇게 징그러운것일줄은 예전엔 정말 미쳐 몰랐었습니다.
지금 지방선거에서 민노당후보들이 내놓는 공약을 보면 정말 물질적이해관계는 도외시하는것은 아닌지, 그 물질적 이해조건의 외부에서 사고하면서 물질적이해조건을 변경시킬려는것은 아닌지 그런생각이 듭니다. 좀 허공에 떠있는 공약들.

저도 한미 FTA에 찬성하는 쪽은 아닌데 그렇다고 별다른 수가 없으면 해야되지 않나 뭐 그런쪽입니다.

다시 화두랄까요. 왜 김영삼 정부의 비극을 노무현 정권이 반복할까요. 이 비극의 반복이 지금 민노당이 들어선다고 비극의 주인공이 안될까요.
이래야 된다라고 쓰면서 이래야 되려면 이렇게 하라도 할수있어야되지 않을까 뭐 그런생각입니다.
그리고 돈벌기가 생각을 지우면 그리어렵지는 않지만 생각을 가지고 돈벌려면 이거 쉽지 않은 일인데 진보진영에 보면 돈벌이는 전혀 생각하는것 같지 않고요.

pax 2006-05-25 02:33   좋아요 0 | URL
오히려, 딱히 진보가 아니어도 '강철인간'을 요구하는게 요즘 사회의 트렌드가 아닐련지... 극한의 자기계발과 헌신 인내 그리고 경쟁을 요구하는 사회에서 인간개조 프로젝트는 이미 진행되고 있는 것이 아닐련지... 저로서는 로쟈님이 우려하고 있는 사태가 이미 현실로 이루어지고 있는게 아닌가 두렵습니다. 이 것이 "젊은이의 나이브한 생각"일지는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세상에 대한 조롱과 냉소를 특권처럼 이용하는 사람(예컨대, 진중권?)들이 모든 것을 사회의식과 노무현 정권 탓으로 돌리는 것이 님의 말씀대로 유치한 행동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설사 세상에 대해 삐딱한 태도로 냉소와 조롱을 던질지라도 그것이 지금까지 일상 지겹도록 부대끼며 살아온 모든 사람들에 대한 적대와 직결되는 것만은 아니라고 봅니다. 어떻게 이야기해야할지는 모르겠지만 사회전체가 낯설고 기괴한 것으로 비추어질지라도 그 속에서 만나는 사람 하나하나를 신뢰할 수는 있고 그들 속에서 충분히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다고 봅니다. 설사 그가 한나라당 지지자라 할지라도 말입니다. 그들을 신뢰할 수 있는 조건이 딱히 그들이 강철인간이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라고 저 역시 생각합니다. 아니라면 그래야만 한다고 강변할 수 있는 근거가 있을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드네요. 적당히 이기적이고 적당히 선량한 사람들이 다수라고 했지만 이건 이미 우리 자신들의 모습이 아닐까하고 생각이 드는군요. 역시 너무 나이브한가요? 아니면..... 그러한 우리 자신의 모습에 대단한 원한감정을 가지고 인간개조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강철인간들이 있는 것일까요? 지금, 대한민국에서?

설사 지금 진보가 30%이고(이마저도 안될지도 모르죠) 한나라당 지지자들이 50%라 할지라도 딱히 그들 모두에게 원한감정을 가질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그래야만 한다고 보는 것이 오히려 더 오버일지도 모르죠. "당신네 진보진영 사람들이 그토록 신뢰하던 노동자대중(혹 이렇게 표현될 수 있다면)들은 다 어디로 갔나? 당신들의 눈에 원래는 당신들과 함께여야할 이들마저도 개혁대상인가?"라고 누군가 빈정거릴도 모르겠지만 그런 빈정거림은 그다지 의미가 없어보입니다. 그들을 개혁대상, 계도의 대상으로 놓고 그들로부터 스스로를 우월한 위치에 놓는 한가한 사람들이 존재한다면 그는 이미 진보로서의 자격 상실이 아닌가 생각하고요, 아니, 진보운동이든 뭐든 한다고 보기에는 이미 너무 한가한 인간이라고 생각됩니다. 상황은 항상 유동적이고, 그들 한나라당으로 돌아선 집단을(로쟈님이 보기에 그것이 일반 대중의 적당히 선량하고 적당히 이기적인 본성에서 유래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하나의 확고부동한 실체라고 보기에는 너무나도 성급한 것이고, 의식적 차원에서 그들이 스스로를 기만한다 치더라도 그들이 다시금 진보진영과 연대할 수 있는 객관적 조건이 마련될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로쟈님은 적당히 선량하고 적당히 이기적인 사람들을 기본단위로 설정해야한다고 말씀하시는데 확실히 이는 매우 현실적인 날카로움을 갖춘 안목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지금 문제는 사람들이 충분히 선량하지도 못한 동시에 충분히 이기적이지도 못한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아니, 오히려 지나치게 선량하고 전혀 이기적이지 못한 것일지도 모르겠네요. 오히려 좌파나 진보진영의 세계관에 있을 수 있는 지나친 선량함이 수반하는 자기극기, 자기 채찍질과 같은 우스운(어쩌면 숭고한) 요소들은 이미 현 사회에서 충분히 넘쳐나지 않나요? 일상을 근근이 살아가는 주체는 진정으로 이기적인가요? 어떻게 보면 로쟈님의 말씀이 부분적으로 맞다고 생각되네요... 문제는 적당하게만 이기적인 것일지도...

에궁... 잡설이 길어졌네...

pax 2006-05-25 02:27   좋아요 0 | URL
아참, 이건 공자님 앞에서 문자쓰는 꼴인데, 아도르노가 이런 말을 했더군요. "있는 그대로의 사람들에 대한 그의 사랑은 올바른 인간에 대한 증오로부터 나온다" 올바른 맥락으로 인용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참고로 로쟈님과 관련한 것은 아니지만) 적당히 이기적이고 적당히 선량한 사람들에 대한 있는 그대로의 긍정이라는 매우 사려깊은 행동이 자칫하다가는 잘못된 방향으로 흐를 수도 있다는 노파심이 드네요. 그 부분에 대해서.... 사람들은 한편으로, 올바른 인간에 대한 그의 사랑이 있는 그대로의 사람들에 대한 부당한 증오로 흐를 위험에 대한 로쟈님의 감수성만큼의 경각심을 가져도 좋을 듯 싶습니다...

로쟈 2006-05-25 18:39   좋아요 0 | URL
정치 얘기만 나오면 말씀들이 길어지시는군요. 나중에 따로 자리를 마련하든가 해야겠지만, 아무튼 제 관심은 구체적인 개인의 삶이 어떻게 변화하느냐에 더 맞춰져 있습니다. 추상적인 사랑에 아무런 관심이 없듯이 추상적인 이념들에도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그런 것들이 저에겐 기만이거나 알리바이 정도로밖에는 여겨지지 않습니다). 구체적인 정치적 실천의 경우, 제 관심은 '일관성'입니다. 자신의 모토와 이념에 맞게 일상적 삶을 모두 재구조화하는 것. '말'은, 정치인들의 말이 웅변적으로 보여주지만, 믿을 만한 게 아닙니다. 좌파건 우파건 상투적인 정치적 구호들에 제가 염증을 느끼는 이유입니다...

눈팅 2006-05-26 02:11   좋아요 0 | URL
학자들의 현실 분석은 너무 조심스러워 핵심을 비켜가는 것 같습니다. 신자유주의와 양극화 문제를 아무리 제기해 봐야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절차적) 민주주의에 의해 대통령과 정부는 국민의 의사를 존중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국민들이 보수화 내지 반동적으로 변한다면 민주주의는 위기에 처하게 됩니다. 사람들의 영혼이 병들면 논리적인 분석이나 학문은 무력할 뿐입니다. 대중이 노무현을 혐오하고 증오하는 현상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은 그들이 좌향좌가 아니라 오히려 우향우를 한다는 점입니다. 구체적인 개인의 삶이 바뀌려면 이상적인 사회를 향한 개인들의 의지가 필요하겠지요. 개인들 각자가 유토피아적 동경을 꿈 꿀 수 있도록 예술이 충격을 가해야 합니다. 지나치게 소모적인 논쟁은 별로 결실이 없는 것 같습니다. 정치적 설득보다는 도덕적 진실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눈팅 2006-05-26 02:38   좋아요 0 | URL
강철같은 품성이나 도덕적 우월주의라는 표현은 오해의 여지가 있는 것 같습니다. 이기적이란 개념이 불투명하듯이 도덕적이란 개념도 아주 다양한 해석이 가능합니다. 이해관계가 사람들을 움직이기도 하지만 사람들은 특정한 도덕적 관점에 따라 행동하는 경우도 아주 많습니다. 도덕은 이해관계를 떠난 습관화된 가치 평가일겁니다. 도덕을 떠나면 이기적일 수도 없는 일이지요. 단지, 좌파와 우파의 도덕 유형은 아주 판이한 것 같습니다. 우파는 아버지의 권위에 복종하고 좌파는 어머니의 사랑을 요구한다는 비유는 지난친 단순화의 위험이 있습니다만...또 다른 버전으로는, 우파는 공동체의 통합과 조화를 강조하고 좌파는 공동체 내의 적대를 드러낸다는 지젝의 언급이 있습니다.

biosculp 2006-05-26 17:12   좋아요 0 | URL
도덕적 진실을 구현하기위해 정치적 설득력이 있어야 된다. 뭐 이런 애기가 맞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도덕적 진실은 있는데 정치적 설득력은 없고 건드릴수록 덧만 나게 하면 참 답답해지는것이죠.
집값버블 애기에 1주만에 제가 사는 동네쪽에 1억이 집값이 떨어진게 아니라 올랐습니다. 더불어 인터넷부동산들어가보면 이제 왠만큼 큰평수도 전세가 아니라 월세로 돌리고 있습니다.
바라는 사회는 적절한 집값이 되는 사회가 좋지만 건드릴수록 집값만 올려버리는 이런 상황에서는 도덕적진실은 애기조차 못꺼내고 저건 완전 무능아냐 이런애기밖에 안나옵니다. 좌파우파 뭐 가릴게 있나요. 제일 집값잘잡은 정권은 노태우정권같더군요. 그때는 토지 공개념이니 신도시 건설이니 해서 제일 안정적인 집값으로 되었었는데.
도덕적 진실은 기본이고 정치적 설득까지 갖추어야 세금받아먹을 자격이 있는것은 아닐런지요.

로쟈 2006-05-28 21:41   좋아요 0 | URL
모비딕님/ 사회주의적 인간형, 내지는 품성론은 제가 이해하는 사회주의, 더 나아가 공산주의의 핵심입니다. 주체사상은 그 품성론의 김일성 버전이라고 생각하구요. 중국의 '문화혁명'이 바로 그러한 인간형을 만들기 위한 인간 개조운동이었다고 봅니다(결과는 좋지 않았지만). 그러한 '개조'의 다른 편이 자유주의적 '개량'이 아닐까요? 저는 '개량주의'에 반대하는 이들이 '개조'에 거부감을 갖는 이유를 논리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biosculp님/ 이전에 '정치적 판단과 도덕적 판단'이란 페이퍼를 쓴 적이 있는데(모스크바 통신에 있습니다), 필요하시다면 참조하시길. 개인적으론 도덕과 정치는 구별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다만, 정치적 리더십을 사람들은 대개 도덕성에서 찾곤 하니까 무시할 수 없는 정도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