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C 상태가 여전히 불안정하여(여러 차례 부팅을 하고 나서야 겨우 서재에 들어올 수 있다) 서재일이 계속 여의치 않다. 오늘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발표되었기에 몇 마디 적으려고도 했지만 나중으로 미루고(밥 딜런의 수상은 의외성에 있어서 2004년 옐리네크의 수상에 견줄 만하다) 이번 달 출판문화(610호)에 실은 글을 옮겨놓는다. '이현우의 책읽는 세상' 꼭지로 최근 하루카 요코의 <나의 페미니즘 공부법>(메멘토, 2016)이 출간된 걸 계기로 우에노 지즈코(치즈코)의 <여성 혐오를 혐오한다>(은행나무, 2012)를 다시 떠올렸고 셰익스피어의 <오셀로> 이야기를 덧붙였다. 

 

 

 

출판문화(16년 10월호) 나의 페미니즘 공부법

 

지난해 화제작으로 페미니즘 관련서의 붐을 가져온 리베카 솔닛의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든다>는 인상적인 에피소드로 서두를 연다. 친구와 함께 한 파티에 참석한 솔닛이 나이 많은 남자들에 둘러싸여 있다가 자리를 떠나려고 할 무렵에 아주 돈 많고 당당한 주최자가 말을 붙여왔다. 솔닛에 몇 권의 책을 쓴 저자라는 정보만을 갖고 있던 이 남자는 솔닛이 최근작에 대한 얘기를 꺼내자마자 아는 척을 시작했다. 그러고는 그 주제에 관한 아주 중요한 책이 나왔다고 하면서 거만한 표정으로 장광설을 펼쳤다. 옆에 있던 솔닛의 친구가 여러 차례나 그게 바로 이 친구 책입니다라는 말로 끼어들기 전까지. 남자는 안색이 잿빛으로 변했는데, 그럼에도 말을 멈추지는 않았고 또다른 장광설이 이어졌다. 사실 그는 솔닛의 책을 직접 읽은 것도 아니었고 <뉴욕 타임스 북리뷰>에 실린 서평을 읽은 것에 불과했지만 여자들에게 한 마디 해주어야 한다는 맨스플레인본능을 작동시키는 데는 충분했다.

 

이 에피소드는 저자 솔닛의 문제의식을 집약해주면서 요사이 페미니즘 관련서에 대한 여성 독자들의 전폭적인 지지 배경이 무엇인지 알게 해준다. 올해만 하더라도 치마만다 응고지 아다치에의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 록산 게이트의 <나쁜 페미니스트> 등이 이 분야의 베스트셀러에 올랐고, 국내서로는 이민경의 <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하다>가 독자들의 열띤 지지를 얻고 있다. 저명 페미니스트들의 에세이에서 실전적인 페미니즘 입문서로 독자들의 관심이 확장되고 있음을 짐작하게 한다. 일본의 연예인 하루카 요코의 <나의 페미니즘 공부법>까지 소개된 맥락이다. 부제는 도쿄대에서 우에노 지즈코에게 싸우는 법을 배우다’. 연예인이라 하더라도 하루카란 이름은 생소하지만 한국의 페미니즘 독자에게 우에노란 이름은 더 이상 낯설지 않다. 온라인상에서는 흔히 여혐으로 약칭되는 여성 혐오란 말의 유력한 출처로서 <여성 혐오를 혐오한다>의 저자가 우에노 지즈코이기 때문이다. 하루카에 따르면 도쿄대 사회학 교수인 우에노는 일본에서 가장 무서운 여자이기도 하다.

 

 

우리에게는 우에노가 여성혐오론의 원조쯤 되는 셈이지만, 사실 여성혐오란 말이 영어 단어 ‘misogyny’의 번역어라는 데서 예상할 수 있듯이 진짜 원조는 따로 있다. 국내에는 아직 소개되지 않은 미국의 영문학자이자 퀴어 이론가 이브 세지윅이다. 우에노의 <여성 혐오를 혐오한다>는 세지윅의 여성혐오론을 일본 문화의 다양한 사례에 적용하고 있는 책이므로 순서상 여성혐오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세지윅의 여성혐오론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우에노의 책 역시 그렇게 구성되어 있다. 우에노의 정리를 따라가 보자면, 세지윅은 우선 호모섹슈얼(homosexual)’호모소셜(homosocial)’이라는 두 개념을 구분한다. 호모섹슈얼이 남성 간 성애를 뜻한다면 호모소셜은 성적이지 않은 남성 간 유대를 가리킨다. 개념적으로는 구분되지만 호모소셜에는 호모섹슈얼한 욕망이 포함되어 있기에 호모소셜리티(동성 간 유대)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호모섹슈얼리티(동성애)를 엄격하게 배제할 필요가 생긴다. 즉 호모포비아(동성애 혐오)는 호모소셜리티의 필수적 구성소이다. 그리고 이러한 남자들끼리의 연대로서 호모소설리티(동성사회성)를 유지하기 위해 이용하는 장치가 여성을 성적 객체화하는 것이다. “남성이라는 성적 주체에 대한 동일화는 여성을 성적 객체화하는 것에 의해 성립되며 그 경계에는 수많은 혼란이 존재하기 때문에 철저하게 관리되어야 한다.”

 

 

남자들끼리의 연대가 성립하고 유지되기 위해서는 남성이 되지 못한 이들과 여성을 지속적으로 배제하고 차별화해야 한다. 이것이 여성혐오의 작동 원리다. 세지윅에 따르면 남성은 자신을 남성으로 인정해주는 남성 집단으로부터 인정을 받음으로써 성적 주체가 된다. 곧 남자다운 남자가 된다. 이쯤에서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이 예로 든 농담이 떠오른다. 한 가난한 농부가 난파를 당해 무인도에 표류하게 되었다. 한데 알고 보니 표류자는 자기 말고도 톱모델 신디 크로퍼드가 더 있었다. 무인도에 남녀라고는 둘밖에 없으니 자연스레 농부는 크로퍼드와 섹스를 했다. 그로서는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러운 일이었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농부는 크로퍼드에게 한 가지 사소한 부탁을 들어달라면서 바지를 입고 얼굴에 콧수염을 그려서 자기 친구처럼 분장해달라고 요구했다. 그가 원하는 대로 분장을 하자 농부는 크로퍼드에게 다가가 옆구리를 쿡 찌르며 이렇게 말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깜짝 놀랄 거다. 내가 말이야, 글쎄 신디 크로퍼드와 섹스를 했다구!” 지젝은 이 농담을 통해서 우리가 주체가 되기 위해서는 대타자로서 제삼자의 인정이 필요하다는 점을 지적하는데, 세지윅의 주장을 참고하여 우리는 이 주체가 정확히 남성 주체라는 점을 어렵지 않게 인지할 수 있다. 농부가 남성이 되기 위해서는 단지 여성과의 성관계에서 남자 구실을 했다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가 한 여자를 소유했다는 사실을 대타자로서 다른 남성이, 혹은 남성 집단이 인정해주어야만 그의 남성 되기는 완성된다.

 

남성과 여성의 구획이 이러한 차별화의 산물이라면 여성혐오는 남성 주체 형성의 필수적인 요건이 된다. 다시 말해서 남성이 존재하는 한, 여성혐오는 제거될 수 없다. 세지윅은 19세기 영국 빅토리아조 시대의 여성 차별과 혐오를 주된 근거로 참고하지만, 우리는 그보다 더 앞서서 나온 셰익스피어의 <오셀로>를 통해서도 그러한 여성혐오 문화를 확인할 수 있다. <베니스의 상인>과 마찬가지로 이탈리아의 상업도시 베니스를 배경으로 한 이 작품에서 백인이 아닌 무어인 주인공 오셀로는 용병 장군이다. 그는 군사적 영웅으로서 베니스인들의 환대를 받지만 인종차별의 장벽까지 뛰어넘지는 못한다. 그가 겪은 역경과 고난의 이야기에 매료된 아름다운 처녀 데스데모나와 결혼을 하려고 할 때 그녀의 아버지 브라반시오가 보여주는 태도가 이를 잘 보여준다. 그는 오셀로를 더러운 도둑놈으로 매도하면서 자신의 딸을 마법으로 홀려서 결혼하려 한다고 분노를 터뜨린다. 그렇지 않다면 시커먼 피부의 무어인 남자를 데스데모나가 사랑할 리 없다고 믿어서다. 하지만 오셀로를 사랑한다는 딸의 진심을 알게 된 이후에 그의 태도는 돌변한다. 배신한 딸에 대한 사랑을 곧바로 거둬들이면서 그는 오셀로에게 이렇게 충고한다. “저 아이를 조심하게, 무어, 보는 눈이 있다면. 저 아이는 아비를 속였어, 그러니 그대를 속일 수도 있지.”

 

 

딸의 결혼을 무산시키려고 했던 아버지 브라반시오가 흥미롭게도 어느 새인가 오셀로와 같은 편이 되어 딸을 비난하고 나선다. 무어인 오셀로와 백인 브라반시오 사이를 가르는 인종 차별보다 더 근본적인 것이 여성 차별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사례가 아닐까. 이 작품에서 오셀로를 눈먼 질투로 이끌고 가는 이아고도 가장 대표적인 여성혐오자이다. 그는 자기 아내 에밀리아의 정조를 의심하는데, 상관인 오셀로가 아내와 정을 통했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에 대해 복수하고자 한다. 그런데 이 복수는 다소 특이한 방식으로 기획되고 실행에 옮겨진다. 의심의 당사자인 오셀로에게 직접 복수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아내 데스데모나를 의심해서 그녀를 죽이도록 하는 게 이아고의 음모인 것이다. 그는 베니스의 모든 여자들이 남편 몰래 음탕을 일삼는 부정한 이들이며 데스데모나 역시 예외일 수 없다고 오셀로에게 암시한다. 오셀로도 다른 베니스 남자들과 마찬가지로 오쟁이 진 남편의 운명을 벗어날 수 없다고 믿는 순간, 데스데모나에 대한 오셀로의 사랑은 저주로 돌변한다.

 

흔히 <오셀로>는 질투의 비극으로 읽히지만 여성혐오의 파국을 보여주는 비극으로서도 뚜렷하다. 이 작품은 무엇을 다루는가. 압축하자면 두 남자가 각자의 아내를 죽인 이야기다. 오셀로는 무고한 아내 데스데모나를 목 졸라 죽이고, 이아고는 데스데모나의 하녀이자 자기의 아내인 에밀리아를 칼로 찔러 죽인다. 행위적 차원에서 보자면 오셀로와 이아고 간의 갈등과 앙금은 무색해 보인다. 각자의 아내를 죽였다고 해서 이 두 남자가 승자가 되는 건 아니다. 당연하게도 이들은 자신의 과오(살인)에 대한 책임을 지게 된다. 곧 오셀로는 자살하고 이아고는 처형당할 운명에 놓인다. 오늘의 시각에서 다시 읽게 되면 <오셀로>는 동성 간 연대로서 남성의 호모소셜리티가 어떤 파국을 초래하는지 경고하는 작품으로도 읽힌다. 교훈은 무엇인가. 남성 되기의 과정을 다시 생각해보라는 것. 그리고 남성을 재발명하라는 것. 우에노 지즈코와 이브 세지윅과 셰익스피어에게서 내가 배운 것이다.

 

16. 10.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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