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경제학자 갤브레이스 교수가 어젯밤에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1908-2006). 아마도 내일 아침 신문마다 이 저명한 경제학자의 타계 소식을 전할 듯한데, 강의 계획안을 만드는 일을 하다가 잠시 짬을 내어 고인의 부고기사와 사소한 추억 거리를 떠올려본다. 기사는 한겨레와 세계일보의 것이다.

한겨레(06. 04. 30) 부의 분배와 같은 논란적인 주제를 연구해 온 세계적인 경제학자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 미국 하버드대 교수가 29일 밤(현지시각) 미국 매사추세츠주 케임브리지의 마운트 오번 병원에서 숨졌다고 <아에프페 통신> 등 외신들이 전했다. 향년 97세.

-1908년 10월 캐나다 온타리오에서 태어난 갤브레이스는 1934년 이후 하버드대에서 교편을 잡았으며, 경제학뿐 아니라 경영학·역사학·사회학도 폭넓게 연구했다. <뉴욕타임스>는 “갤브레이스는 복잡하고 재미없는 주제를 학식있는 독자들에게 전달하는 데 능력을 보임으로써 존경과 질투를 한몸에 받았으며, 때론 장광설로 경멸을 받기도 했다”고 고인을 평가했다. 33권의 저서를 남긴 갤브레이스는 58년 펴낸 <풍요로운 사회>에서 “미국의 경제는 개인의 부를 낳았지만 학교나 고속도로와 같은 공공수요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며 성장 위주의 미국 경제정책을 통렬히 비판했다.

-사회문제를 해결하려면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주장해 온 그는 2차 세계대전 이후 수십년 동안 미국 정치 무대에서 거물로 통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에서 빌 클린턴에 이르기까지 민주당 대통령의 자문역으로 일하거나 연설문 작성에 관여하는 등 미국 민주당의 방향과 민주당 지도자들의 사고에 큰 영향을 끼쳤다. 존 에프 케네디 대통령 시절인 61∼63년에는 인도대사를 지내기도 했다. 베트남전 탓에 린든 존슨 대통령과 결국 결별하기는 했지만, 존슨 대통령이 ‘위대한 사회’ 정책을 만드는 과정에서 크게 기여했다. 정부에서 일한 경험 등을 토대로 <트라이엄프>(1968년) 등 소설 세 편을 쓰기도 했다.

-미국의 경제학자 폴 새뮤얼슨이 그를 “경제학자보다 경제학 외부에 더 영향을 끼친 경제학자”라고 표현한 대로, 그의 업적이 과대포장됐다는 지적도 나온다. 홍기현 서울대 교수(경제학)는 “그의 제도경제학이 사회적인 비판에 자주 이용됐지만 실제 그의 이론을 계승하고 발전시킨 경제학자는 미국이나 한국에서도 별로 없다”며 “다만 그가 사회적 발언을 많이 했다는 점에서 경제학자로서 높이 살 만하다”고 평가했다.

-홍 교수는 “그의 비판이론의 핵심은 ‘집단간 갈등이 직접적 의사소통으로 해결될 수 있다’는 것”이라며 “예컨대 자원배분을 왜곡하는 독점도 시민단체·전문가 집단의 비판, 곧 ‘정치적 대항력’을 통해 조절할 수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갤브레이스는 사회에 비판적이었지만, 이런 정치적 대항력을 들어 사회에 대해 비관적이지는 않았다”고 덧붙였다.

세계일보(06. 04. 30) '자유주의 경제학자’로 미국에서 널리 알려진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 하버드대 명예교수가 지난 29일 향년 97세로 사망했다. UPI통신 등 미 언론에 따르면 갤브레이스 교수 가족은 이날 그가 최근 2주 동안 입원해 있던 매사추세츠주 케임브리지 소재의 한 병원에서 고령으로 숨을 거뒀다고 발표했다.

-캐나다 온타리오주 출신 갤브레이스 교수는 프랭클린 루스벨트 행정부에서 빌 클린턴 행정부까지 오랜 기간 민주당 정권의 경제 자문역으로 활동했으며, 존 F 케네디 대통령 시절에는 인도 주재 대사를 지내기도 했다. 그는 또 1946년과 2000년 각각 해리 트루먼 대통령과 클린턴 대통령으로부터 자유메달을 수상했고, 미국 경제학회장을 역임했다.

 

-갤브레이스 교수는 온타리오 농대와 토론토대를 다녔으며, 버클리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1934년 하버드대에서 강의하기 시작했다. 그는 <풍요로운 사회>, <불확실성의 시대>, <대공황> 등의 저서를 통해 자유주의 경제학자로 이름을 알렸으며, 특히 1958년 발간된 <풍요로운 사회>는 미국의 모던라이브러리 출판사가 구성한 도서 평가위원회에서 ‘금세기 영어로 된 논픽션 분야 100대 서적’ 가운데 46위에 선정되기도 했다.

-그는 2차대전 이후 각종 사회 문제 해결에 대한 정부 개입을 지지했다. 저서 <풍요로운 사회>에서도 그는 “미국 경제가 개인적 부를 창출하고 있지만 학교와 고속도로 등 공공 수요에는 적절히 접근하지 못하고 있다”며 정부 개입을 촉구했다.

-1975년 하버드대 교수에서 은퇴한 그는 자신의 저서와 같은 제목의 영국 TV 시리즈 ‘불확실성의 시대’를 진행해 더욱 명성을 얻었다. 신랄하고 통렬한 풍자로 미국 사회를 비판해온 신장 2m의 거구 갤브레이스 교수는 집필을 위해 버몬트주 산악지역에 있는 별장에서 수개월 동안 칩거하는 등 억척스러운 ‘일벌레’로 알려져 있다.

-1998년에는 소련 경제학자 스타니슬라프 멘슈코프와 <자본주의, 공산주의, 그리고 공존:고통스런 과거에서 더 나은 가능성으로>를 공동 집필하기도 했다(*<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공존>(영남대출판부, 1990) 등으로 번역돼 있다).  

내가 대학에 들어왔을 때 가장 유명했던 현역 경제학자가 갤브레이스였고, 가장 유명한 책은 <불확실성의 시대>였다. 그래서 아마 소장하게 된 것이 범우사판 <불확실성의 시대>였을 것이다. 세로읽기여서 다 읽어볼 엄두를 내지는 않았지만, 아마도 내가 산 최초의 경제학 관련서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1977년의 BBC TV강좌를 토대로 한 만큼 대중적이었던 이 경제사 책은 칼 세이건(1934-1996)의 <코스모스>를 떠올리게 한다(학원사판 <코스모스>를 나는 고등학교 때 사서 읽었다. 내가 산 최초의 천문학 책). 두 사람 다 소위 '최고의 경제학자나'나 '최고의 천문학자'로 남지는 않겠지만, 가장 친근하고 대중적이었던 경제학자와 천문학자로 기억될 듯하다.  

 

 

 

 

<불확실성의 시대> 이후로도 나는 갤브레이스의 책들을 여러 권 더 샀다. 비교적 두껍지 않은 책들이었지만, <만족의 문화>(동아일보사, 1993) 정도를 빼면 완독한 책은 거의 없다(폴 크루그먼의 책들도 그런 식이다). 그래도 나는 갤브레이스가 '기본'이라고 생각해왔다(이른바 '각인' 행동이란 것. 정신의 '성장기'에 영향을 준 저자나 책들을 우리는 잊지 못한다. 더불어 '비판적 거리'를 갖지 못한다).

이번에 부음을 듣고 갤브레이스의 책들을 검색해보다가 다소 놀라고 실망했는데, 그토록 많이 번역되었건만 제대로 남아있는 책이 한두 권밖에 없었다! 미국 현지사정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이 정도면 국내에서는 '잊혀질 경제학자'에 속하게 되지 않을까 싶다(우리는 '불확실성'이 제거된 시대에 살고 있는가? 하긴 우리 사회는 '위험사회'요, 우리 시대는 '확실한' 테러리즘의 시대, 제국주의의 시대이다!).

비록 그의 업적이 '과대 포장'된 점이 없지 않다고 하나 젊은 날의 '영웅들'을 하나둘 잃어간다는 건 쓸쓸한 일이다. 우리는 아마도, 앞으로 궁극적으로는 '풍요로운 사회'의 '만족의 문화'를 지향하게 될 터인데(그게 대한민국의 꿈인가?), 갤브레이스의 충고쯤은 기억해둠 직하지 않을까? 고인의 명복을 빈다.

06. 04.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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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ioli 2006-04-30 2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불확성실의 시대를 재밌게 읽었는데, 참 안타깝네요.
거인의 죽음을 직접 목도하는 데 은근한 기쁨도 있긴 하지만요.^^

로쟈 2006-04-30 2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은근한 기쁨'의 이면은 이제 '우리'도 나이를 좀 먹었다는 '슬픔'이죠...

maritime 2006-09-05 2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얼마전 다큐를 보니 빈국에 대한 서방국가들의 정책를 꼬집는 고령의 갤브레이스가 나오더군요. 지식인이 걸어가야할 전형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로쟈 2006-09-05 22: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정도 '양심'도 드문 시대인 거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