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기형도(1960-1989)의 기일은 3월 7일이지만, 내가 그를 한번쯤 떠올리게 되는 날은 4월 5일, 식목일이며, 그건 순전히 그의 시 '식목제' 덕분이다(그는 전세주 엘리엇의 '4월' 한달 가운데, '5일' 하루를 자신의 것으로 임대하고 있다). 1983년 연세대 재학 시절 윤동주문학상에 응모하여 당선된 작품이니까 그가 20대 초반에 쓴 것이며 그런 만큼 푸르고(상승에의 의지) 어둡다(침잠에의 강박). 요즘은 고등학교의 문학교과서에도 들어가 있다는 시이므로 '기본교양' 차원에서라도 아는 체 해두는 게 좋겠다. 

 

 

어느 날 불현듯

물 묻은 저녁 세상에 낮게 엎드려

물끄러미 팔을 뻗어 너를 가늠할 때

너는 어느 시간의 흙 속에

아득히 묻혀 있느냐.

축축한 안개 속에서 어둠은

망가진 소리 하나하나 다듬으며

이 땅 위로 무수한 이파리를 길어 올린다.  

낯선 사람들, 괭이 소리 삽 소리

단단히 묻어 두고 떠난 벌판

어디쯤일까 내가 연기처럼 더듬더듬 피어올랐던

이제는 침묵의 목책 속에 갇힌 먼 땅

다시 돌아갈 수 없으니, 흘러간다.

어디로 흘러가느냐, 마음 한 자락 어느 곳 걸어 두는 법 없이

희망을 포기하려면 죽음을 각오해야 하리, 흘러간다 어느 곳이든 기척 없이

자리를 바꾸던 늙은 구름의 말을 배우며

나는 없어질 듯 없어질 듯 생(生) 속에 섞여 들었네.

이따금 나만을 향해 다가오는 고통이 즐거웠지만

슬픔 또한 정말 경미한 것이었다.  

한 때의 헛된 집착으로 솟는 맑은 눈물을 다스리며

아, 어느 개인 날 낯선 동네에 작은 꽃들이 피면 축복하며 지나가고

어느 궂은 날은 죽은 꽃 위에 잠시 머물다 흘러갔으므로

나는 일찍이 어느 곳에 나를 묻어 두고

이다지 어지러운 이파리로만 날고 있는가.

돌아보면 힘없는 추억들만을

이곳저곳 숨죽여 세워 두었네.

흘러간다. 모든 마지막 문들은 벌판을 향해 열리는데

아, 가랑잎 한 장 뒤집히는 소리에도

세상은 저리 쉽게 떠내려간다.

보느냐, 마주보이는 시간은 미루나무 무수히 곧게 서 있듯

멀수록 무서운 얼굴이다 그러나,

희망도 절망도 같은 줄기가 틔우는 작은 이파리일 뿐, 그리하여 나는

살아가리라 어디 있느냐

식목제(植木祭)의 캄캄한 밤이여, 바람 속에 견고한 불의 입상(立像)이 되어

싱싱한 줄기로 솟아오를 거냐, 어느 날이냐 곧이어 소스라치며

내 유년의 떨리던, 짧은 넋이여.

 

 

시에 대한 나의 생각을 적기 전에, '교과서식' 요점정리를 옮겨온다. 시에 대해서는 이렇게 해야 '안심'이 되는 독자들도 있기 때문에.

 

-갈래 : 자유시, 서정시
-성격 : 감상적, 독백적, 회고적, 애상적, 연민과 회상의 어조
-심상 : 시각적, 상징적,
-어조 : 우울하고 비판적인 어조, 자기 고백적인 어조, 연민과 회상의 어조
-제재 : 식목제, 나무 심기
-주제 : 식목제에서 느끼는 비관적인 삶, 유년의 아픔에 대한 회상(回想), 전망이 부재하는 삶에 대한 인식과 성찰
-표현 : 지은이의 경험과 의식을 개인적 상징을 통해 독창적이면서도 우울하게 표현
-구조 : 과거(뿌리)-현재(이파리)-미래(줄기)로 시상이 전개된다.

 

1연 : 1-13행 : 이 시에서 시적 화자는 과거와 현재, 미래의 자신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1-13행까지에서 화자는 ‘과거에 대해 회상’하고 있다. 어느 날 문득 시적 화자는 자신의 과거의 삶을 뒤돌아보니 그것은 땅속에서 묻힌 나무의 뿌리처럼 아득하기만 하고 손에 쉽사리 잡히지 않는다고 한다. 이처럼 과거로 돌아가기는 어렵기에 화자는 현재의 삶을 살아갈 뿐이라고 한다.


2연 : 14-26행 : 화자가 ‘살아가고 있는 현재’의 삶을 이야기하고 있다. 특정한 목표나 희망이 있는 것이 아니라 무상함을 느끼며 주어진 삶을 살아갈 뿐이다. 그 삶에는 고통도 있고, 슬픔도 있으며 때로는 삶의 결실도 있으나 화자의 삶은 ‘어지러운 이파리’로만 힘없이 진행되고 있다.


3연 : 27-36행 : 과거에 대한 회상을 기반으로 한 ‘앞으로의 삶’이다. 화자는 살아가면서 늘 과거와 마주하게 된다. 그 과거는 쉽게 포착되지 않으며, 먼 과거일수록 유쾌하지 않았던 기억과 마주치게 된다. 나뭇가지가 모두 한 뿌리에서 뻗어나가듯 희망과 절망도 모두 같은 곳에서 연원함으로 아직은 ‘짧은 넋’이지만 과거를 반추하여 앞으로의 삶의 길을 '흘러간다.‘

 

 

기형도 식의 기본구도에 대해서는 이전에 '기형도의 보편문법'이란 글에서 적어놓은 바 있다. 전기적으로 참조할 필요가 있는 것은 1975년 5월에(그러니까 중3 때이다) 기형도의 바로 손위 누이가 불의의 사고로 죽음을 맞은 일. <기형도 전집>의 연보에서는 "이 무렵부터 시를 쓰기 시작했다"고 씌어 있다. 이러한 전후관계를 그대로 수용하자면, 기형도 시의 발생론적 밑자리에 놓여 있는 것은 누이의 죽음이라는 외상(트라우마)이다. 그리고 이 '상처'를 다스릴 수 없다는 사실이 그의 삶의 정처없는 유동성(흘러간다, 떠내려간다)을 낳는다.

 

어느 날 불현듯

물 묻은 저녁 세상에 낮게 엎드려

물끄러미 팔을 뻗어 너를 가늠할 때

너는 어느 시간의 흙 속에

아득히 묻혀 있느냐.

 

그러한 맥락에서, 시의 시작 부분은 아주 구상적으로 읽을 필요가 있다. 어느 날 '물 묻은 저녁', 그러니까 울적한 저녁에 '물끄러미 팔을 뻗어' 가늠할 수 있는 대상이란 유년시절에 같이 팔베개 하고 누워있기도 했을 누이이다. 하지만, 그 '너'는 없다. "너는 어느 시간의 흙 속에 아득히 묻혀 있느냐"에서 '직접적으로' 암시되고 있듯이 '너'는 중의적으로 외상적 근원으로서의 '죽은 누이'이다(해설서들에서는 제목을 고려하여 '너'를 '나무의 의인화'로 보며, 나중에 화자 자신과 동일시되는 것으로 이해한다).

 

'나'(시적 자아)가 '죽은 누이'(대상)와 스스로를 동일시할 때, 이것은 그대로 우울증의 발생도식을 따르는 것이 된다. 프로이트가 규정한바, 우울증이란 상실한 대상과 자신을 무의식적/나르시시즘적으로 동일시함으로써 대상 상실이 자아 상실로 전환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때 대상과 자아 사이의 갈등은 동일시에 의해 변형된 자아와 초자아 사이의 갈등으로 변모되고, 이것은 대상화된 자아에 대한 애증의 감정을 낳으면서 급격한 자기애의 상실, 곧 자기 비하로 이어진다.

 

낯선 사람들, 괭이 소리 삽 소리

단단히 묻어 두고 떠난 벌판

어디쯤일까 내가 연기처럼 더듬더듬 피어올랐던

이제는 침묵의 목책 속에 갇힌 먼 땅

다시 돌아갈 수 없으니, 흘러간다.

 

이 대목에서 처음 등장하는 대명사 '나'는 그런 맥락에서 보자면, 대상과 자아의 동일시에 의해서 변형된 자아이다(기형도의 시적 자아 '나'는 '원래의 자아'와 '죽은 누이'의 합체이다). 그것은 낯선 사람들이 '누이'(대상)를 묻어 두고 떠난 벌판에서 '더듬더듬 피어올랐던' 기억을 갖고 있다. 그 시적 자아는 마치 망자의 유령처럼 어떤 형체(육체)를 갖고 있지 않기에 '흘러간다'. 바로 앞대목은 그런 문맥에서 다시 읽을 수 있다.

 

축축한 안개 속에서 어둠은

망가진 소리 하나하나 다듬으며

이 땅 위로 무수한 이파리를 길어 올린다.  

 

'망가진 소리'란 '괭이 소리 삽 소리', 즉 죽은 자를 매장하던 소리였으며, 그것은 '망가진 육체'에 상응한다. 어둠, 혹은 '나'의 무의식은 그 '망가진 소리 하나하나 다듬으며' '무수한 이파리를 길어 올린다'. 죽음의 자리에서 그렇게 길어올려진 '이파리'가 바로 시적 자아의 (엘리엇의 용어를 쓰자면) '객관적 상관물'이다. 

 

어디로 흘러가느냐, 마음 한 자락 어느 곳 걸어 두는 법 없이

희망을 포기하려면 죽음을 각오해야 하리, 흘러간다 어느 곳이든 기척 없이

자리를 바꾸던 늙은 구름의 말을 배우며

나는 없어질 듯 없어질 듯 생(生) 속에 섞여 들었네.

이따금 나만을 향해 다가오는 고통이 즐거웠지만

슬픔 또한 정말 경미한 것이었다.  

 

이어지는 것은 그러한 '나=이파리'의 유령적 삶이다. '없어질 듯 없어질 듯 생 속에 섞여 든' 그의 삶은 기형도 버전의 '살아있는 죽음(living dead)'이다. 당연한 일이지만, 그에겐 삶의 일상적인 '즐거움'과 '슬픔'이 별다른 의미를 갖지 못한다.  

 

한 때의 헛된 집착으로 솟는 맑은 눈물을 다스리며

아, 어느 개인 날 낯선 동네에 작은 꽃들이 피면 축복하며 지나가고

어느 궂은 날은 죽은 꽃 위에 잠시 머물다 흘러갔으므로

나는 일찍이 어느 곳에 나를 묻어 두고

이다지 어지러운 이파리로만 날고 있는가.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나는 일찍이 어느 곳에 나를 묻어 두고"에서 보이는 두 '자아'의 분리/대립이다. 그것은 시적 자아로서의 '나=이파리'와 '누이'(대상)의 죽음과 함께 같이 매장된 원래의 '나' 사이의 분리/대립에 대한 '확인'의 의미를 갖는다. 그러한 '확인'이 의미를 갖는 것은 그것이 자기 자신에 대한 객관화, 즉 성찰을 함축하기 때문이다.

 

돌아보면 힘없는 추억들만을

이곳저곳 숨죽여 세워 두었네. 

흘러간다. 모든 마지막 문들은 벌판을 향해 열리는데

아, 가랑잎 한 장 뒤집히는 소리에도

세상은 저리 쉽게 떠내려간다.

 

라는 구절이 이어지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힘없는 추억들'이란 '나=이파리'의 추억들이며, 그것은 '살아있는 죽음'의 '숨죽인' 추억들이다. 이러한 추억들로는 삶도 세상도 물론 지탱할 수 없을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러한 확인/성찰이 '없어질 듯 없어질 듯'한 생이 아니라 '견고한' 새로운 생의 의지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이 시의 대단원이자 '발견'이다.

 

보느냐, 마주보이는 시간은 미루나무 무수히 곧게 서 있듯

멀수록 무서운 얼굴이다 그러나,

희망도 절망도 같은 줄기가 틔우는 작은 이파리일 뿐, 그리하여 나는

살아가리라 어디 있느냐

식목제(植木祭)의 캄캄한 밤이여, 바람 속에 견고한 불의 입상(立像)이 되어

싱싱한 줄기로 솟아오를 거냐, 어느 날이냐 곧이어 소스라치며

내 유년의 떨리던, 짧은 넋이여.

 

'마주보이는 시간'은 더이상 과거가 아닌 미래의 시간일 것이다. 그것은 구름처럼 흘러가는 게 아니라 '미루나무'처럼 곧게 서 있는 시간이다. 그러한 시간을 두려움 속에서도 정면으로 응시할 때 시적 자아는 자기 안에서 새로운 삶의 의지를 발견한다. 그 발견은 '줄기'의 발견이다.   

 

희망도 절망도 같은 줄기가 틔우는 작은 이파리일 뿐

 

고로, 시적 자아에게서 '새로운 삶'이라는 것은 '나-이파리'에서 '나-줄기'로의 이행에 대응한다. "그리하여 나는/ 살아가리라"는 의지의 표명은 그러한 구도를 전제로 한다. 이러한 의지가 이제 당당하게 과거를 호출한다 "어디 있느냐/ 식목제의 캄캄한 밤이여". 또 이와 동격을 이루는 것: "어느 날이냐 곧이어 소스라치며/ 내 유년의 떨리던, 짧은 넋이여".

 

동일한 구문형식으로 돼 있는 이 두 문장에서 짝이 되고 있는 것은 '식목제의 캄캄한 밤'과 '유년의 짧은 넋'이다. '짦은 넋'은 '짧은 생애를 산 넋'이란 뜻으로 읽으면 되겠다(그래서 '캄캄한 밤'과 조응한다). 즉, 그의 '죽은 누이'를 가리키는 것이면서도 동시와 그 누이와 합체가 된 서정적 화자 자신이기도 하다. 이 근원적 과거의 시점("어느 날이냐")과 장소("어디 있느냐")를 이제 불러세우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장래의 대한 '나'의 당찬 결의를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더이상 '이파리'가 아닌 '나'를 보여주겠다는 것. "바람 속에 견고한 불의 입상(立像)이 되어/ 싱싱한 줄기로 솟아오를 거냐"란 구절이 뜻하는 바이다. 여기서 '불의 입상'은 나무의 은유이면서 (나무가 흔히 상징하듯이) 한 가계(家系)의 기둥이다. 더이상 '나-이파리'가 아닌, '나-줄기', 더 나아가 '나-불의 입상'이 될 거라는 다짐 혹은 예감.

 

앞에서 '나무심기'(=식목)가 죽은 누이의 매장(하관)에 대한 알레고리가 될 수 있다고 했는데, '식목제'에서의 '제(祭)'가 뜻하는 건 말 그대로 '제의(ritual)'이다. 이 제의는, 반복하지만, '니-이파리'에서 '나-줄기'로의 통과제의이다. 성년의 문턱에서 기형도가 반드시 넘어가야 했을 어떤 과정이면서 절차.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시인 기형도의 생애에서 그러한 이행은 완수되지 않는다. '견고한 불의 입상' 같은 강렬한 남성적 이미지는 그에게서 지극히 예외적이라는 것이 한 반증이다. 더불어, 이 시의 마지막 단락이 행가름에 있어서 지극히 혼란스러우면서 중의적인 것도 예시적이라고 할 수 있다(이 대목에서 통사론과 의미론이 서로 길항한다). 그는 끝까지 자신의 '이파리' 존재론과 단절하지 못했다. 물론 이에 대한 총체적 해명은 보다 널따란 다른 자리를 필요로 한다.

 

06. 04. 05.

 

P.S. 기형도의 '제망매가'로 씌어진 시는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와 <기형도 전집>에 수록돼 있는 '가을무덤'(연도 미상)이다. 그 시의 마지막 연은 이렇다.

 

편안히 누운

내 누이야.

네 파리한 얼굴에 술을 부으면

눈물처럼 튀어오르는 술방울이

이 못난 영혼을 휘감고

온몸을 뒤흔드는 것이 어인 까닭이냐.

 

육필 원고(사진)가 남아 있는 시 '풀'은 1979년, 그러니까 대학 1학년때 씌어진 것인데, 2연과 4연을 옮기면 이렇다(강조는 나의 것이다).

 

긴 설움을

잠으로 흐르는 구름 속을 서성이며

팔뚝 위로 정맥을 드러내고

흔들리는 영혼으로 살았다.

 

(...)

 

이제를 뿌리를 내리리라

차라리 웃음을 울어야 하는 풀이 되어

부대끼며 살아보자

발을 얽고 흐느껴보자

 

이 시의 구도 또한 '식목제'의 그것과 대동소이하다. "흔들리는 영혼으로 살았다" -> "이제는 뿌리를 내리리라" 하지만, 그의 뿌리는 너무 얕은 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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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ts 2006-04-05 2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로쟈님. 낮에 봤을 때 진행중이었는데, 금방 이리 긴 글이..^^ 자주 오는데 인사는 처음 드리네요. 어렵기는 하지만 가끔은 추천하고 퍼가기도 했음을, 뒤늦게 고백합니다..^^

로쟈 2006-04-05 23: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처음 뵙겠습니다. 식목일 행사가 (생각보다) 좀 길어져서 저도 당혹스러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