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롤리타' 달력도 정리한 김에, 지젝의 <롤리타> 읽기를 간단히 정리해둔다. 주인공 험버트 험버트의 분신 구조에 관한 해명인데, 관련내용은 <진짜 눈물의 공포>(울력, 2004), 154-5쪽에 있다. 역자들은 <롤리타>의 주인공 'Humbert Humbert'를 '훔버트 훔버트'라고 표기했는데, 국역본 <롤리타>에 따라서 여기서는 '험버트 험버트'로 표기한다. 에드리안 라인의 <롤리타>(1997)에서 제레미 아이언스가 맡은 역이 바로 험버트 험버트이다(큐브릭의 영화에서는 제임스 메이슨이 연기했다. 한편, 큐브릭의 <롤리타>에서는 '롤리타'가 님펫으로서는 너무 성숙하다. 아마도 시대적 제약 때문이지 않았을까 싶다. 님펫은 9-14살까지이다).

지젝: "나보코프의 <롤리타>에 나오는 험버트 험버트를 생각해보라. 나보코프는 천재적인 솜씨를 발휘하여 주인공의 세례명을 성과 일치시킨다. 다름 아닌 그의 이름 안에 분신의 구조가 이미 존재한다는 것이다!"

'세례명'은 'Christian name'의 사전적 의미이지만, 일반적으론 (성과 대비하여) 그냥 '이름'을 뜻하므로 "이름과 성을 일치시킨다"로 이해하면 되겠다. 그러니까 <롤리타>의 남자 주인공은 이름이 '험버트'이고 성도 '험버트'이다(그의 환상세계는 '험버랜드'이다). 즉, 한 이름 안에 두 '험버트'가 들어 있는 것이다. 지젝이 지나가면서 덧붙이는 것은 키에슬롭스키의 영화 <화이트>에서 남자 주인공의 이름이 '카롤 카롤'이라는 것. 지젝은 그걸 '나보코프식 아이러니'의 빼어난 흉내라고 본다.  

지젝: "따라서 험버트 험버트는 자신과 롤리타를 괴롭히는 외설스런 분신인 퀼티를 필요로 한다. 퀼티는 상징적인 것(=상징계)에서 배제된(=폐제된) 아버지의 이름이 실재(the Real) 속에(=실재로서) 편집증적으로 귀환하는 것이다(험버트 험버트라는 이름에서 나타나듯이 제대로 된 성이 없다). 이는 <롤리타>가 성관계의 불가능성을 나타내는 방식이기도 하다. 험버트 험버트와 롤리타의 밀통관계는 편집증적 제3자(=퀼티)의 개입으로 방해받는 동시에 유지된다." 참고로, 'Quilty'란 이름은 'Guilty'(죄의식)을 막바로 떠올리게 하는 이름이다. 아래는 퀼티 역의 프랭크 랑겔라.

지젝: "나보코프는 정신분석학을 열렬히 반대하기는 하지만 아버지의 기능이 멈추는 것과, 자신의 분신과 맺는 살인적인 편집증적 관계 사이에 연관성이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여기에 덧붙여진 각주: "더욱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 불가능성의 전치는 삼중적이다. 샬로트는 험버트를 사랑하고, 험버트는 롤리타를 사랑하며 롤리타는 퀼티를 사랑하고 퀼티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다." 샬로트는 롤리타의 엄마이다. 그리고 실제로 나보코프는 문학작품에 대한 프로이트적 독해를 혐오했다.  

지젝: "따라서 <롤리타>를 통속적인 의사-프로이트적 방식으로, '억압된 동성애'의 사례로 읽는 것은 잘못이다. 초점은 험버트 험버트가 자신의 분신 퀼티와의 직접적인 동성애적 연루를 피하기 위해 성적 매력이 있는 소녀를 선택했다는 것이 아니다. 그 반대로 퀼티는 험버트와 롤리타의 불가능한 관계를 보충하는 필수적인 제3자이다." 다르게 말하면, 퀼티는 그 불가능성의 알리바이가 되겠다.

지젝: "이는 (<베로니카의 이중생활>에서) 두 명의 베로니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폴란드의 베로니카에서 프랑스의 베로니크로 이동할 때 우리는 베로니카가 콘서트 무대 위에서 죽은 후에 무덤쪽에서 찍은(그녀의 시체의 불가능한 시점 쇼트) 드라이어식(Dreyeresque) 쇼트를 보게 되는데, 이 쇼트에 뒤이어, 사랑을 나누고는 마치 무언가 알 수 없는 상실을 감지한 듯 형언키 어려운 슬픔을 느끼는 베로니크로의 직접적인 커트가 이어진다. 그녀의 분신의 흔적은 사랑의 훼방꾼으로서, 성행위의 조화를 깨는 침입자로서 간섭해 들어온다. 다시금 분신의 형상은 성관계의 불가능성과 정확히 상관관계를 갖는다."(강조는 나의 것)

 

 

 

 

지젝의 '힌트'는 거기까지이다. 이어지는 건 보충적인 '음란패설'인바, "그렇다면 이러한 불가능성은 무엇인가?" 쿠바의 경우를 예로 들어보자. "쿠바에서는 한 남자가 다른 사람에게 '내가 저 여자를 가졌었지!'라고 뽐낼 때 그것은 단순한(straight) 질(vaginal) 성교만이 아니라 항문 삽입까지를 포함한다. '단순한' 성교는 여전히 페팅의 형태로 간주될 뿐이고 항문 삽입만이 더없이 완전한 성관계를 대표한다. 왜 그런가?"

"질은 항문의 창백하고도 왜곡된 복사본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항문이 순수한 플라톤적 이데아(털도 없고 갈라진 틈도 없는 분명하고도 단순한 동그런 구멍)와 같다면, 돌기와 곁가지로 가득 찬 질은 항문의 이상적인 단순성과는 거리가 먼, 항문의 왜곡된 물적 실현인 것이다. 이는 성관계가 존재하지 않음을 보충할 또다른 방법이 아닌가?" 여기서 "'자연스런' 삽입(=질 삽입)은 '부자연스런' 이상적 모델(=항문 삽입)에 비해 이차적인 것으로 평가절하된다."

그리고 이러한 "항문/질의 대비는 남성에게서는 팔루스/페니스의 차이로 나타난다. 이는 마치 '페니스가 삽입되긴 했지만 내 구멍은 여전히 팔루스를 향해 열려 있어요'라고 말하듯이 항문으로 삽입당하면서 동시에 자신의 열린 질의 구멍을 과시하는 여자들을 담은 표준화된 포르노 쇼트에서 잘 나타나는 바이다." 물론, 이러한 쇼트는 인터넷 공간에 지천으로 널려 있기도 하다.

결론은, 다시 반복하건대, 성관계의 불가능성이다. 물론 이 '불가능성'은 병리적인/심리적인 차원의 것이 아니라 구조적인/실재적 차원의 것이다. 그리고 분신은 그 구조적 불가능성의 편집증적 귀환이라는 것. 그것이 지젝이 말하는 '험버트 험버트'의 진실이다.

06. 03.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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