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화요일자(06. 02. 14) 한국일보 등에는 뉴욕타임즈(02. 12) 기사에 근거하여 러시아 영화계의 '뿌리찾기' 바람을 소개하는 기사가 실렸다. 내용을 따라가면서 몇 마디 보태기로 한다. 뉴욕타임즈 기사의 원제는 'Time to Come Home, Zhivago'(지바고, 집에 갈 시간이다)이며, 이걸 약간 변형하여 '닥터 지바고, 집에 돌아오다'란 제목을 붙인다. 주된 내용은 과거 헐리우드 영화로 만들어졌던 러시아 명작들이 일종의 붐처럼 러시아 영화로 다시 제작되고 있다는 것이다. 아래 왼쪽 사진이 데이비드 린 감독의 <닥터 지바고>의 한 장면이고, 오른쪽이 올 5월중 TV방영예정이라는 러시아판 <닥터 지바고>의 한 장면이다.  

  

할리우드 영화의 소재로만 활용됐던 러시아 명작 소설들이 줄줄이 러시아 영화 감독에 의해 영화나 TV 시리즈로 제작되고 있다. 뉴욕타임스는 12일 이런 현상을 1930년대 ‘전함 포템킨’의 세르게이 에이젠슈테인 감독 등이 활약했던 소련 영화 전성기에 견줄 수 있는 새로운 영화혁명이라고 평가했다.(*러시아 영화가 부흥을 맞고 있다는 전망은 몇 년전부터 나온 것인데, 2004년작 <나이트 워치> 등의 상업적 성공은 이를 뒷받침하는 한 가지 사례였다. 이러한 '성공'은 러시아의 문화적 전통과 정체성 회복의 계기로 삼으려는 노력이 현재 러시아에서 진행중인 것이다.)


 

 

 

가장 상징적인 영화는 <닥터 지바고>. 러시아 작가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동명 소설을 1965년 할리우드의 데이비드 린 감독이 영화화한지 무려 41년 만에 러시아인의 손에 의해 TV 영화로 거듭난다. 구 소련 시절 금지소설로 분류됐던 이 작품이 영화로 제작되는 것도 처음이다. 러시아 NTV는 올 5월 8시간 분량의 이 영화를 내보낼 예정이다.

러시아 문호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의 형제들>도 러시아 감독에 의해 영화로 제작되고 있다. 앞서 마하일 불가코프의 명작 <거장과 마르가리따>는 지난해 12월 TV 영화로 만들어져(왼쪽 이미지. 오른쪽은 감독 블라지미르 보르트코) 러시아 시청자의 절반 이상을 사로잡는 경이적인 기록을 낳았다(*<거장과 마르가리타>는 러시아 연극의 고정 레퍼토리이기도 하다. 한편, 현재 절판중인 국역본 <거장과 마르가리타>는 새 번역본이 내년까지는 나올 예정이다). 스탈린 치하 강제수용소의 군상을 풍자한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의 소설 <제1원>도 TV 영화로 제작돼 지난달 말 러시아 TV에서 방영됐다.(*'The First Circle'을 옮긴 <제1원>은 <제1권>(분도출판사, 1974)로 번역돼 있는 솔제니친의 장편소설을 가리킨다.) 

닥터 지바고를 제작중인 알렉산드르 프로쉬킨 감독은 “데이비드 린 감독을 존경한다”며 “하지만 그의 영화는 미국 영화일 뿐”이라고 말했다. 러시아인의 작품을 러시아안이 해석해 영화로 만드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라는 것이다. 그는 러시아 소설을 러시아인이 해석하지 않음으로써 기존 영화에 많은 오류가 숨어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린 감독은 슬라브인과 비슷한 금발의 배우 줄리 크리스티를 지바고의 연인 라라로 캐스팅했지만 원작은 라라가 벨기에인 아버지와 프랑스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비 슬라브적인 인물로 묘사한다”고 꼬집었다. 그래서 이번 영화에는 빨간 머리의 러시아 여배우 슐판 카마토바를 라라역으로 캐스팅했고 지바고 역에는 오마 샤리프와 다른 분위기를 풍기는 올레그 멘쉬코프를 기용했다. 멘쉬코프는 ‘러브 오브 시베리아’를 통해 한국 관객에도 익숙한 배우이다.(*'슐판 카마토바'는 '출판 하마토바'의 잘못된 음역이다. 외신기자들도 이제는 영어-러시아어 음역체계에 대해서 좀 주의할 필요가 있다. '올레그 멘쉬코프'는 그냥 '올렉 멘쉬코프'라고 읽어주고 싶다. 얼마전 TV에서 재방영된 <러브 오브 시베리아>의 주연배우가 올렉 멘쉬코프인데, 한국일보인가는 '올렌 멘쉬코프'라고 적었었다.)

뉴욕타임스는 “스페인 라다하라 평원에서 올 로케된 린의 영화 현실은 가공일 뿐 실제 러시아 평원을 배경으로 제작되는 이 작품이 러시아 문학과 영화의 진수를 느끼게 해 줄 것”이라는 러시아 영화계의 반응을 전했다. 러시아 영화계의 이 같은 동향은 구 소련 붕괴 후 정치적 혼란과 경제적 어려움을 겪어온 러시아가 최근 정치안정과 유가급등에 따른 경제발전을 이루면서 국가 정체성을 회복하려는 여러 시도 중 하나로 봐야 할 것 같다.(*어찌되었거나, 러시아문학 전공자로서는 아주 반가운 일이다. 이걸 다 언제 구해 보나?) 

06. 02. 17.

P.S. 모스크바 통신에서 '올렉 멘쉬코프'에 대해 몇 자 적은 대목이 생각나 옮겨온다. 작년, 그러니까 2005년 새해 벽두에 쓴 것이었다.

어제보니까 러시아의 (2005년)새해맞이는 푸틴의 5분 연설로 시작된다. 그는 12월 31일 밤 11시 55분에 대부분의 TV채널에 등장해서 새해의 의미와 새해를 맞는 러시아의 각오/다짐을 되새겨주었다. 그가 가장 강조한 것은 2005년이 전승 60주년이 되는 해라는 것이다(러시아/소련은 1945년 5월 독일로부터 항복을 받아냄으로써 2차 대전의 승전국이 된다. 러시아는 그 전쟁에서 가장 많은 인명 피해를 입은 나라이다). 러시아인의 90%가 독일에 대해서 아무런 ‘감정’이 없다고 하고 독일에서의 삶을 꿈꾸기도 하지만, 독일에 대한 승리는 사회주의 붕괴 이후 ‘러시아’를 지탱하는 가장 큰 이념적 버팀목이다(그걸 보충하는 것이 ‘러시아 정교’이다). 방대한 영토의 다민족 국가인 러시아이기에 그런 버팀목은 불가불 요구된다. 사회주의 시절엔 아마도 ‘러시아혁명’이 그런 역할을 수행했을 테지만, 지금은 오직 ‘조국전쟁에서의 승리’뿐이다. 이 ‘국가 이데올로기’를 어떻게든 유지시켜보려는 노력은 옆에서 보기에 간혹 안쓰럽다.

푸틴의 연설에 이어서 채널 NTV(엔떼베)에서는 ‘올렉 멘쉬코프와의 첫밤’이라는 쇼프로그램을 방송했는데, 멘쉬코프는 <시베리아의 이발사>(<러브 오브 시베리아>로 출신>)와 <위선의 태양> 등으로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미남배우이자 러시아의 국민배우이다(*그는 러시아의 '중년의 꽃미남'이다). 듣기에, 아직 미혼이며 그의 전기까지 출간됐을 정도이고 중년이지만 배용준의 인기를 능가한다(러시아 연예계라는 게 우리처럼 떠들썩하진 않지만).

그래서 그날 챙기게 된 영화가 그의 1999년작인 레지스 바르니에 감독(<인도차이나>의 감독)의 영화 <동과 서>이다(왼쪽 사진은 <시베리아의 이발사>에서 줄리 오몬드와 멘쉬코프. 그리고 오른쪽은 <동과 서>에서 산드린 보네르와 멘쉬코프). 프랑스 등 4개국 합작 영화인데, 2차 대전 종전 후 1946년 의사인 러시아 남편을 따라서 남편의 조국 ‘소련’으로 간 프랑스인 아내의 ‘지옥에서의 10여년’을 다루고 있는 영화인데(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주연은 산드린 보네르이고 카트린 드네브도 조연으로 출연한다(푸틴이 러시아의 1945년을 기념하고 있다면, 멘쉬코프는 1946년 이후에 러시아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지를 고발한다).

러시아 생활에 절망하던 프랑스 아내는 간첩 혐의로 수용소에 끌려가기도 하지만 1956년(이 해 전당대회에서의 흐루시초프의 비밀연설에 대해서는 이전에 언급했다)에 복권되며, 이후 남편의 숨은 노력으로 비밀 망명에 성공한다(그녀는 아들과 함께 불가리아의 프랑스대사관으로 망명하며, 그리스를 거쳐서 프랑스로 돌아간다). 혼자 남겨진 남편이 프랑스에서 가족과 재회하게 되는 것은 그로부터 30년 후인 1987년에 와서이다(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가 이들의 재회를 가능하게 했다). 아래 사진은 각각 <시베리아의 이발사>와 <동과 서>의 DVD 타이틀.

‘동’과 ‘서’라는 이데올로기 때문에 아픔을 겪은 러시아/프랑스판 이산가족을 다룬 영화인 셈인데, 우리의 관객들이라면 보면서 눈물나지 않을 수 없는 영화이다. 이런 '반공'영화가 소개되지 않는 것도 참 신기한 노릇이다(러시아 영화를 소개하는 채널조차 안 갖고 있는 게 우리의 현실이므로 이럴 때는 '주변 4강'이란 말이 무색하다. 고작 '시베리아 유전'에나 눈독을 들이고 있는 게 '우리의 현실'인가? 심히 척박한/천박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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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기 2006-02-17 17: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왜 러시아에는 저렇게 문학이 많을까요... ^^;;

로쟈 2006-02-17 17: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땅넓이에 비하면야.^^

비로그인 2006-02-17 23: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구 수는 그래도 땅 넓이 만큼 많지는 않은데^^

2006-02-17 23: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6-02-18 1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꾸 때리다님/ '고뇌'하는 인구수는 우리보다 훨씬 많은 듯합니다...
**님/ 닥터 지바고의 국역본을 모두 갖고 있지만, 찬찬히 대조해보지는 않았습니다. 마지막 지바고의 시 같은 경우, 대개는 맘에 들지 않더군요. 파스테르나크는 좀더 섬세하게 번역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현재로선 아무 번역본이나 붙잡아도 '무드' 정도는 전달받을 수 있을 거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