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연휴를 맞아 아침부터 일찍 채비를 차려서 어머니댁으로 왔다. 1시간 거리이기에 '민족 대이동'과는 거리가 멀며 하룻밤을 자고 내일 오전이며 다시 돌아갈 것이기에 특별히 수고스러운 것도 아니다. 차례도 없는 탓에 어른들께 새배를 드리는 것과 김치만두만을 잔뜩 빚어서 두어 끼를 해결하는 것이 집안의 행사를 모두 가름한다. 이런 명절이면 으레 만드를 빚어먹는 게 집안의 내력이며, 이제 만두 속만 다 준비되면 곧 '장정'에 돌입하게 된다(조촐한 식구이지만 보통 200-300개는 빚어야 한다). 그런 틈틈이 이런 페이퍼를 쓸 수 있는 건 지난 가을에 어머니댁에 컴퓨터(와 인터넷)가 들어왔기 때문이다. '무료한' 시간을 때우는 데는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노릇이다.

 

다른 일들을 제쳐놓고 푸슈킨과 도스토예프스키에 관해 재작년 가을/겨울에 모스크바에서 써놓은 글을 다시 정리하려고 마음 먹은 것은 오늘이 도스토예프스키의 기일(忌日)이고 내일은 푸슈킨의 기일이기 때문이다. 물론 구력의 경우인데, 도스토예프스키는 1881년 1월 28일에, 그리고 푸슈킨은 1837년 1월 29일에 (이틀 전에 입은 결투에서의 총상으로 인하여) 세상을 뜬다. 이걸 신력으로 환산하면 각각 2월 9일과 10일이 되며, 러시아에서의 기념행사는 이때에 맞추어 치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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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이맘때 나는 모스크바 체류를 끝내고 귀국 준비에 마음이 바쁘던 차였는데, 맨마지막으로 띄운 모스크바통신에는 이런 대목이 포함돼 있다. (바로 며칠 전 1월 29일을 돌이키며) "그날은 구력으로 푸슈킨의 사망 168주년이 되는 날이기도 했다. 푸슈킨은 1837 1 27일 단테스와의 결투에서 총상을 입고 이틀 후인 29일에 숨을 거둔다. 이걸 신력으로 환산하면 2 10일이 되는바, 이날엔 그가 죽은 집(현재는 박물관인, 페테르부르크의 모이카 12번지)에서 매년 기념행사가 치러진다." 위의 사진이 모이카 강변 12번지이며 왼편 출입문이 푸슈킨 박물관의 입구이다. 에르미타주박물관으로부터 도보로 15-20분 정도의 거리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왼쪽 이미지는 푸슈킨 박물관. 마당에 그의 동상이 하나 서 있고, 이 2층짜리 건물이 시인의 마지막 저택이자 그가 숨을 거둔 곳이다(재작년 가을에 나는 이 마당까지만 들어가봤다. 둘러볼 당시엔 무슨 행사로 인하여 박물관은 예정된 시간보다 일찍 문을 닫았었다). 그리고 오른쪽 이미지는 죽기 이틀전 그러니까 1837년 1월 27일 푸슈킨이 단테스와 결투한 장소. 아래는 그걸 수평으로 확대해서 보여주는 사진인데, 두 결투자가 서 있던 자리에 비석이 세워져 있다. 그 아래 이미지는 결투에서 푸슈킨을 쓰러뜨린 단테스기 사용했던 총(단테스는 프랑스군 장교 출신으로 네덜란드 공사 헥케른의 양자였다).

 

 

 

하지만, 당시 나로선 설 연휴 이전에 귀국을 결정했던바, 아쉽게도 이번 러시아 체류기간에는 그 행사를 참관할 수 없었다. "대신에 그날 나는 푸슈킨의 동상이 있는 푸슈킨거리의 푸슈킨광장에 가서 붉은 장미 한 송이를 시인에게 바쳤다(겨울이라 그런지 장미 한 송이에 120루블, 4,800원이었다. 꽃과 초코렛 선물에서만큼은 아주 유별난 게 러시아 사람들이다. 하지만, 러시아식 예법에 따르자면 붉은 카네이션 두 송이 정도를 바쳤어야 했다). 우중충한 날씨만큼 침울한 표정으로 시인은 여전히 건너편 맥도널드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돌아서는 마음이 좀 무거웠다." 아래의 사진이 바로 그 유명한 푸슈킨동상이다.

  

 

동상의 후면에 보이는 극장이 '러시아'극장으로 모스크바영화제의 개/폐막식이 개최되는 메인극장이다(재작년 여름에 유일한 한국영화 출품작 <귀여워>를 본 곳이기도 하다). 내가 동상을 마지막으로 보던 날은 좀더 어둡고 눈이 많이 내린 날이어서 단대의 계단이 미끄러워 단상에는 못 올라가고 눈덮인 계단에다 헌화했다. 참고로, 동상에 머리에 비죽 올라 있는 것은 비둘기나 갈가마귀 같은 새 종류이다(러시아의 회청색 동상들은 대개 이 새똥들을 잔뜩 뒤집어쓰고 있다). 이 푸슈킨 동상의 시선이 가리키는 방향에, 그러니까 대각선쪽에, 스크바에서 두번째로 매출이 좋다는 맥도널드가 있다(가장 매출이 좋다는 곳은 크레믈린에 있는 맥도널드).

 

모스크바의 이 푸슈킨 동상이 유명한 것은 시인의 사후에 최초로 건립된 동상이기 때문이다. 푸슈킨 사후에 그의 동상을 건립하자는 제안이 선배시인이자 문학적 후견인이었던 주코프스키를 중심으로 해서 나오지만, 황제 니콜라이 1세는 거절한다. 그리하여 최초의 푸슈킨 동상이 세워지는 것은 그로부터 한참 뒤인 1880 6월에야 이르러서이다. 이 동상 단대에서 정면을 제외한 면에는 푸슈킨의 시 <기념비>(1836) 1-3연이 새겨져 있다(내 기억이 맞다면).  

 

 

 

 

 

그런데, 역시나 이 동상만 보고서, 도스토예프스키의 동상 제막 기념연설을 떠올리지 못한다면 별로 의미없는 구경이 된다(이 연설의 우리말 번역은 <작가의 일기>(벽호)와 <러시아 이념>(제이엔씨, 2004)에 실려 있다. 동상제막식에 운집한 군중을 찍은 사진은 페테르부르크의 도스토예프스키 박물관에서도 구경할 수 있었는데, 당장은 큰 사이즈의 이미지가 눈에 띄지 않아서 작은 걸 옮겨놓았다. 마지막 이미지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장례식). 

나는 손으로 만들지 않은 자신의 기념비를 세웠노라,

그리로 가는 민중의 오솔길에는 잡초가 자랄 틈이 없고,

기념비는 알렉산드르의 기념탑보다도 더 높이

머리를 치켜들고 솟아올라 있다.

 

아니다, 나는 아주 죽지 않으리라 - 영혼은 신성한 리라 속에서

나의 유골보다도 더 오래 살아남아 썩지 않으리라

그리고 나는 영광을 얻으리라, 이 지상에

단 한명의 시인이라도 살아남아 있는 한.

 

나의 명성은 위대한 러시아 전역에 퍼져 가리라,

그리고 존재하는 모든 민족이 그들의 언어로 나를 부르리라,

자랑스러운 슬라브족의 자손과 핀족, 지금은 야만적인

퉁구스족, 그리고 초원의 친구인 칼미크족까지.

 

그리고 오랫동안 나는 민중의 사랑을 받으리라,

내가 리라로 선량한 감정을 일깨우고,

이 가혹한 시대에 자유를 찬양하고,

쓰러진 자들에게 자비를 호소했으므로.

 

오 뮤즈여, 신의 뜻에 따르라,

모욕을 두려워하지 말고, 왕관을 바라지 말 것이며,

칭찬과 비방을 무심하게 받아들이고,

어리석은 자들과는 다투지 말지어다.

 

Thumbnail of Dostoevsky's funeral

 

푸슈킨 주간으로 선포된 3일간의 기념행사 마지막 날에 행해진 도스토예프스키의 연설에서 푸슈킨은 다시 예언자적 시인으로 호명되고, 위대한 천재로서 셰익스피어, 괴테, 세르반테스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아니 전 세계적인 공명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시인이라는 점에서 오히려 그들을 능가하는 시인으로 간주된다. 투르게네프를 비롯하여 여러 시인/문인들이 기념연설을 했지만, 도스토예프스키의 이 연설은 군중들을 감동과 흥분의 도가니로 몰고 갔으며 이렇듯 열렬한 반응에 대해서는 정작 도스토예프스키 자신조차 감동할 정도였다(때문에 푸슈킨과 도스토예프스키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장면이다).

 

 

다시 푸슈킨의 <기념비>로 돌아오면, 전체 5연으로 이루어져 있는 이 시의 1연에 나오는 알렉산드르의 기념탑이 바로 궁정광장(현재 에르미타주박물관 광장)에 서 있는 거대한 화강암 원주이며(동생 니콜라이 1세가 형 알렉산드르 1세를 기념하기 위해서 1834년에 건립했다), 푸슈킨은 이 시에서 자신의 사후 문학적 영광이 황제의 그것을 능가할 거라고 자부하고 있다. 시에서 손으로 만들지 않은 기념비’란 인간의 손으로 만든 기념비(=황제의 기념탑)와 대조되는 것이다푸슈킨은 자신의 문학(행위)을 국가권력과 대응하게 맞세운 최초의 러시아 시인/작가이며, 그런 의미에서 이 러시아 국민문학의 아버지는 최초의 근대작가이자 최초의 망명작가이다.

 
이 시가 씌어진 곳도 아마도 모이카 강변 12번지인지 모르겠다. 푸슈킨이 생애의 마지막 1년을 살았던 곳이 바로 그곳인데, 모이카강은 네바강의 작은 지류이며(우리로 치면 청계천쯤 된다) 에르미타주에서 나와 모이카 강변을 따라서 10-15분쯤 걸어가면 지금은 박물관이 된 이 저택에 이르게 된다. 생애의 마지막 1년이라고 했지만, 그의 방 시계는 1837년 1월 29일 그가 사망한 시각인 2시 45분에 맞추어 멎어있다. 아래 사진은 푸슈킨의 서재. 

 

 

 

푸슈킨의 죽음은 당시 전 러시아의 국가적인 이슈가 되었는바, 기록에 따르면 그의 결투 소식이 전해진 직후 1837 1 28-29일에 그의 집 주변에는 대략 2-5만 명의 문상객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좁은 거리와 넓지 않은 마당을 보건대, 얼마나 대단한 인파였을지 짐작해볼 수 있다. 푸슈킨의 천재성을 인정하면서도 요주의 인물로 간주했던 당시의 황제 니콜라이 1세는 문상 인파에 놀라서 장례식 장소조차 비밀리에 변경하고 그의 6만의 군대로 하여금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도록 했었다. 한편으로 그는 황제의 주치의를 푸슈킨에게 보냈고, 당시에 불법이었던 결투에 대해서 사면하며 마지막으로 러시아 정교식의 죽음을 맞을 것을 시인에게 당부하는 전보를 보내기도 했다. 그리고 가족을 보살펴주겠다고 약속도 했는데, 애꿎은 것은 시인의 아내 곤차로바를 황제가 은근히 좋아했었다는 점이다

 

 

아래의 두 이미지는 당대 절세의 미녀였다는, 시인의 아내 나탈리아 곤차로바(1812-1863). 왼쪽은 1831년의 초상화인데, 푸슈킨은 곤차로바와 1831년 2월 18일에 결혼했고, 슬하에 네 자녀를 두었다.곤차로바는 시인의 사후에 1844년 란스키 장군과 재혼했으며, 황제 니콜라이 1세는 결혼식에 참석하여 곤차로바에게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선물로 하사했다고 한다...

 

분량상 푸슈킨과 도스토예프스키의 이야기는 자리를 바꿔서 이어가기로 하겠다...

 

06. 01. 28.

 

 

 

 

 

 

 

 

  

P.S. 푸슈킨과 곤차로바에 대한 읽을 만한 참고문헌은 한 일본작가가 쓴 <러시아의 사랑과 고뇌>(고려원, 1991)이다(체르니셰프스키 부부의 사랑 이야기도 읽을 만하다). 푸슈킨의 사생활에 대한 적나라한 '고백'으로 물의를 일으켰던 <푸슈킨 비밀일기>(작가정신, 1997)도 흥미로운 자료이긴 하다. 대부분의 전공자들은 이 책을 위작으로 간주하지만, 푸슈킨의 돈후안적 기질과 젊은 시절의 연애행각(?)은 결혼 이후 그의 '성생활'에 대한 (위작일 경우) 이러한 '추정'을 아주 허무맹랑한 것으로 만들지는 않는다. 그는 연애시와 포르노그래피적 시의 달인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이름이 포르노적 이미지에 도용되는 것도 이유가 없지는 않은바, 최근에 발견한 오른쪽 이미지(*다운됐다)에 나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푸슈킨이라면 분개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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