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센코, 황우석 그리고 국가'란 페이퍼에서 리센코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이 한 러시아 소설을 읽고서라고 했는데, <병사 이반 촌킨의 삶과 이상한 모험>이 그 소설의 제목이다. 작가는 블라디미르 니콜라예비치 보이노비치. 대학원 시절에 발표용으로 써두었던 글을 여기에 옮겨놓는다. 서사성과 풍자성이 아주 강한 재미있는 장편소설인데(줄거리만으로도 재미를 느낄 수 있는 작품이어서 '공개적'으로 소개한다), 아직 우리말로 번역되지 않은 것이 유감이다(아래 이미지들은 작가의 근영과 러시아본, 그리고 영역본). 보이노비치의 책으론 그의 소비에트 문명 비판서인 <혁명 70년의 소련사회>(지식산업사, 1988)가 유일하게 소개돼 있는 듯하다. 기억에 독역본의 번역이다.

먼저, V. 보이노비치(1932- )에 대해서 러시아 문학사전의 내용을 간략하게 정리하면: 소비에트 중앙아시아의 타지키스탄의 수도 스탈리나바드(현재의 두샨베)에서 1932년 9월 26일 출생. 아버지는 세르비아계로서 저널리스트이자 번역문학가(세르비아문학을 러시아어로 번역)로 활동했고, 어머니는 유태계로서 교사였다. 5년간의 학교 교육을 받은 후 집단농장과 건설공사장, 공장 등지에서 일했다. 1951년에서 55년 사이에 붉은 군대의 병사로 복무하였다. 몇 편의 시를 발표하고 고리키 세계문학연구소에 지원했으나 거절당했다. 이후 카자흐스탄에서 낮에는 목수로 일하고 저녁엔 교사로 활동. 1960년에 모스크바 라디오에서 일자리를 얻고 소비에트의 비공식적인 우주비행사가의 작사가로서 유명해졌다(50여편의 노래를 작사하였고, 그 중에는 당시 소련 사람들에게 친숙한 것들도 많다고 함).

그의 첫번째 단편 <우리는 여기에 산다>가 1961년 <노브이 미르>에 발표되어 명성을 얻게 된다. 집단농장의 젊은이들에 대한 사실적인 묘사(“있는 그대로의 삶”을 묘사한다는 그의 창작방법은, 그러나 곧 논란을 불러일으킴). 1973년(1963년?) 5편의 다른 단편과 혁명가 베라 피그너에 대한 한 편의 소설 발표. 아파트 공사장의 냉소적인 일꾼들에 대해 묘사한 <나는 정직하고 싶다>가 많은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본격적인 탄압은 그가 1966년에서 68년까지 진행된 시냐프스키와 다니엘 재판과 솔제니친의 작가동맹으로부터의 축출에 반대(그는 솔제니친을 “우리의 가장 위대한 시민”이라 부름)함으로써 시작되었고, 결국 1974년 2월 21일 그 자신 작가동맹으로부터 축출됨에 따라 소련에서는 더 이상 출판할 수 없게 되었다. <메트로폴에서 생긴 일>(1975)에서 그는 1975년 KGB가 자신을 독살하려 했다고 폭로한 바 있다.  

 

보이노비치의 대표작이자 풍자소설인 <병사 이반 촌킨의 삶과 이상한 모험>(1963-70)은 지하출판(사미즈다트)을 통해 널리 읽혀졌고 해외에서 출간되었다(이 소설은 속편을 포함해 2부작이며 여기서 소개하는 것은 1부의 내용이다. 물론 영화화돼 있다). 1976년 미국에서 러시아어로 출간된 <이반키아다>에서 그는 모스크바에서 아파트를 얻기가 얼마나 힘든가를 묘사, 상층 관료집단을 가감없이 그려내기도 했다. 결국 어느 날 한 장교가 찾아와 “나는 소련 정부와 국민들의 인내심이 한계점에 다다랐음을 당신에게 알리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통고한다. 다행히 바로 체포되지는 않고 망명을 권유받아 1980년 12월 21일 가족과 함께 서독으로 강제 이주당한다. 이어서 6개월 후 당시 공산당 서기장 브레즈네프에 의해 소련 시민권을 박탈당하고. 1981년 무니흐에 있는 바바리안 미술 아카데미에서 강연, 1982-3년에 프린스턴 대학의 객원교수 역임를 역임했다. 현재는 다시 러시아에 귀향하여 작품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보이노비치의 주된 테마는 사실보다는 환상에 가치를 두는 국가-통제 체제 속에서 개인의 정체성 찾기가 얼마나 힘든가이다.  장편 희극 서사시 <병사 이반 촌킨의 삶과 이상한 모험>에서 이반 촌킨이라는 농민 반-주인공을 통해 보이노비치는 NKVD를 포함한 소비에트의 생활양식의 거품을 모조리 빼버린다(마음껏 풍자한다). 보이노비치의 탁월한 풍자적 재능과 상상력은 몇몇 비평가들로 하여금 그를 '새로운 고골'이라 칭하게 한다. 하지만 19세기의 고골이 단순한 풍자작가 이상의 대접을 받고 있는 것처럼, 보이노비치 또한 풍자작가 이상의 대우를 받을 만한 자격이 충분히 있어 보이는데, 그것은 그의 작품을 읽는 독자들은 누구라는 공감하는 바이겠지만, 그에겐 ‘뭔가’가 있기 때문이다. 마치 고골의 <외투>가 보여주는 ‘눈물 속의 웃음’과도 같은 짓궂음이 그에게도 있는 것이다.   

<병사 이반 촌킨의 삶과 이상한 모험>(이하 <촌킨의 모험>)은 일차적으로 재미있다. 러시아에서 보이노비치는 대단한 인기이며, 그의 문학을 좀 읽는다는 사람치고 '촌킨'을 읽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한다. 제대로 된 풍자작가에게라면 당연히 뒤따르는 대중성을 그 또한 가지고 있는 것이다(주로 단편을 쓰긴 했지만 1920년대의 풍자작가 조셴코 또한 우리가 이 방면에서 기억해 두어야 하는 이름이다. 보이노비치 자신의 조셴코의 탄생 90주년에 부치는 글을 쓰기도 했다. 러시아풍자문학의 전통과 계보의 맥락안에서 보이노비치를 위치시키고 다른 작가들과 비교․평가하는 일은 기본적인 일이면서 해볼만한 일로 보여진다, 당장은 아니지만.)  

 

먼저 줄거리. 이야기는 러시아의 어느 변두리 콜호즈인 크라스노예(어원상으론 '빨간 마을'이면서 '아름다운 마을'이란 뜻)와 병영을 오가며 시작된다. 때는 1941년 5월말에서 6월초. 히틀러의 러시아 침공(6월 21-2일)을 불과 얼마 앞두지 않은 시점이다. 비번인 날에 우체국 직원인 노처녀 뉴라가 밭을 매고 있을 때 러시아군 비행기 한 대가 엔진고장으로 이 크라스노예의 한 텃밭에 불시착한다. 마을 면장인 골루베프는 자기 스스로는 무엇 하나 제대로 선택하거나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인물인데, 이제나저제나 ‘검찰관’이 오지 않을까 하던 차에 그런 방문을 받고서 애써 의연해진다.

 

그리고는 병영. 숏다리에다 앙가발이(O자형 다리)인 촌킨은 제대를 1년 정도 남겨둔 붉은 군대의 사병인데, 한창 얼차려를 받고 있다. 이미 이름(바보 이반)에서 예상할 수 있지만, 촌킨은 단순/소박의 무지랭이형으로서 무엇 하나 똑부러지게 하는 일이 없는 고문관 타입으로 땔감이나 나르는 등의 허드렛일을 하고 있다(군대는 그의 체질이 아니다). 정신교육 시간에 그는 자주 놀림거리가 되는데, 순박한 촌킨은 자신이 놀림당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한다. 그래서 태연하게 “스탈린 동지에게 마누라가 둘 있다는 게 사실이냐?”는 식의 황당한 질문으로 교관을 당혹스럽게 한다.

 

 

 

 

 

 

 

 

 

 

그러던 중 사령부에서는 비행기 불시착에 대한 보고를 받고 사병 하나를 보초로 보내기로 결정하는데, 엉겹결에 남는 사병(으로 여겨지는) 촌킨이 발탁된다. 한 조용한 마을에 덩그러니 놓인 비행기에 새 엔진이 도착할 때까지 일주일 가량 경계근무를 맡게 된 것이다. 그게 시작이다. 왜 하필 이런 인물이 주인공이냐는 질문에 대해, 작가는 다른 똘똘한 주인공들(가령, 나중에 다시 언급되겠지만 오스트롭스키의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는가>의 강철 같은 주인공들)은 다른 작가들이 다 데려가고 물렁쇠 같은 촌킨만 남았기 때문이라고 답한다. 또 아무리 모자란 주인공이라도 제 자식이 이쁘고 똑똑해 보이는 것과 마찬가지로 작가로선 애착이 간다면서. 하여간 모험은 그렇게 시작된다. 

 

경계근무를 서는 보초수칙에 의하면 잡담은 물론 먹고 마시는 것도 금지이지만, 일주일간 보초를 서면서 그런 수칙을 지킨다는 건 아예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지레 내린 촌킨은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다가 마침 또 밭을 매던 뉴라를 보게 되고 수작을 건다. 여기서 한 가지 알아둘 일은 농부로서의 촌킨은 거의 흠잡을 데가 없다는 사실(농사일은 그의 체질이다). 촌킨의 일솜씨에 뉴라는 반하게 되고 내친 김에 둘은 동거를 시작한다. 집안 청소며 가축들 먹이 주는 일에도 촌킨은 열성이고 남는 시간에 자수를 하는 자상한 면모까지 갖추고 있으니 남편감으로 손색이 없다(더구나 밤에는 잠도 못자게 한다).

 

이런 촌킨과 비행기에 대해서 사령부에서는 까맣고 잊고 있는데, 부지하세월(不知何歲月) 속에서도 문득 자신의 공적인 임무는 잊지 않고 있던 촌킨은(꿈에서 스탈린 동지가 근무지 이탈을 추궁한다) 왜 일주일이 지난 뒤에도 아무런 연락이나 후속조치가 취해지지 않는가 의아하게 여기며 옆집 친구인 글라드이셰프의 손을 빌어 사령부에 보고편지를 내지만, 이 편지는 촌킨과 헤어질 것을 우려한 뉴라에 의해 몰래 소각된다. 그래서 당분간 촌킨은 뉴라의 집에 기숙하면서 크라스노예에 죽치고 있게 된다. 이런 그를 면장인 골루베프는 또 찾아와 “나는 주정꾼이다, 잡아갈테면 잡아가라.” “나는 애가 여섯이다, 그래도 잡아갈테냐”는 식의 푸념을 늘어놓는다. 물론 촌킨으로서는 영문을 알 리가 없다.

 

 

옆집 사는 글라드이셰프는 종자개량에 열성인 유사-과학자이다(리센코를 떠올리게 하는 인물이다. 물론 글라디이셰프는 사기꾼은 아니며 논문을 조작하거나 하지도 않는 '순수' 과학자이다. 아마추어라는 게 문제일 뿐). 그는 감자 뿌리에 토마토 열매가 열리는 종자교배(그걸 그는 “사회주의로의 길”이라고 이름붙인다. 러시아어 약자로는 '방귀소리'가 된다)에 몰두하고 있는데, 거의 성공하여 토마토 뿌리에 줄기가 감자 비스무레한 식물을 얻는데까지는 성공한다. 그는 아내를 아프로디테라 부르고 아들은 헤라클레스라 부르면서 자신의 연구에만 몰두하느라 집안일은 소홀히 하고(퇴비냄새가 진동한다), 또 입만 열면 자신의 업적과 관심에 대해 떠벌이기 일쑤이다(그래서 친구가 없다).

 

그런 그가 촌킨과는 막역한 친구가 되는데, 그로선 촌킨이 무식한데다 아무런 군소리 없이 자신의 열변을 다 들어주기 때문이고, 촌킨으로선 또 나름대로 대화상대가 생겼기 때문이다(이전의 촌킨은 주로 말과 대화를 나누던 정도). 진화론자인 글라드이셰프는 원숭이가 인간이 됐다는 자신의 지식을 떠벌이지만, 왜 열심히 일하는 말은 인간이 되지 못했느냐는 촌킨의 반문에 머리를 싸맨다(손가락이 없어서 그랬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한편 촌킨은 뉴라가 애지중지하는 새끼 돼지 보르카에 대해 이웃들이 수군거리자 보르카를 쏴죽이겠다고 하여 뉴라가 다투게 되고 홧김을 잠시 집을 나와보지만 딱히 갈곳은 없다. 잠깐 잠이 든 새에 그는 보르카와 뉴라가 결혼식을 하고 모두가 즐겁게 꿀꿀대는 꿈을 꾼다).

 

 

 

 

 

 

 

 

 

그러던 차에 촌킨이 크라스노예에 안착한 지 3주쯤이 지나고 전쟁이 터진다. 독․소 불가침조약(1939)만 철석같이 믿고 있던 소련군은 뒤통수를 맞은 격이니 전혀 준비가 안 돼 있다. 마을사람들은 자발적으로 마을 공회당에 집결하여 마을의 면장인 골루베프와 당위원장인 킬린을 당혹스럽게 만든다. 그들은 한바탕 연설로 사람들을 해산시키고, 마을엔 사재지가 일어나는 등 어수선해진다. 한편 사령부에서는 뒤늦게서야 크라스노예에 누군가 보냈던 걸 기억해내고, 촌킨을 탈영병(근무지 이탈)으로 간주하여 체포영장을 발부한다. 이 와중에 사령부와 골루베프 간의 전화 교신 중 오해가 발생한다. 특이한 자가 있는가라는 질문에 골루베프가 '촌킨과 그의 여자'라고 한 것을 사령부는 '촌킨과 그의 여단'으로 알아듣고 ‘촌킨과 그의 여단’에 대한 소문은 와전에 와전을 거듭하여 급기야는 독일군 첩보대로 간주된다.

 

 

 

 

 

 

 

 

 

사정도 모르고 있던 촌킨에게 일곱인가 여덟 명의 특수요원 체포조가 들이닥치지만 좀 엉성하면서 영웅적인 촌킨과 뉴라의 활약에 의해 오히려 이들이 촌킨의 포로가 되고 헛간에 갇힌다. 마침 전시라 곡물 수확량이 거의 없는 점에 착안해 촌킨은 이 유휴인력을 수확에 동원하고 크라스노에 마을은 가장 우수한 수확실적을 올린다. 한편 사령부에서는 체포조가 모조리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사단 병력을 동원하여 마을을 포위한다. 이때 체포조장이었던 밀랴가 대위는 어렵사리 촌킨의 헛간을 탈출하지만 기절한 상태로 붉은 군대에 잡혀 오는데, 붉은 군대는 그를 독일군으로 착각하여 촌킨 일당에 대해 독어로 심문하게 되고 밀랴가는 자신이 독일군에 체포된 줄 알고 더듬대는 독어로 ‘히틀러 만세’까지 부른다. 나중에 밀랴가는 자신이 붉은 군대에 둘러싸인 걸 발견하고 러시아군이라는 걸 밝히기 위해 러시아어로 한 마디 하지만, 엉겹결에 말이 잘못나온다. ‘히틀러 만세’(그는 총살된다). 도대체 영문을 모르는 촌킨은 자신의 근무지를 사수하기 위해 결사항전을 하지만, 끝내 체포된다. 울먹이는 뉴라를 뒤에 남겨놓고...(여기까지가 1부이다. 이야기는 속편인 2부로 이어지지만 분량관계로 아직 읽지 못했다.)

 

 


크라스노예 마을의 별칭인 그랴즈노예('더러운 마을'이란 뜻)인 데서 드러나듯이 “촌킨의 모험”은 실재와 가면, 사실과 환상이 서로 뒤섞인 이야기이다. 스탈린이라는 절대 권력 하에서 모든 인물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유보당한 채 끊임없이 어떤 역할(가면)들을 강요받으면서 서로가 서로를 틀리게 읽고, 대부분의 웃음은 이 오인에서 비롯한다. 사회주의 혁명 이후에 사회체제가 바뀌었으니 인민들도 바뀌어야 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그래서 사회주의적 인간형으로 재탄생해야 마땅한 것이지만, 이 변두리 마을 크라스노예의 사람들이 대표해서 보여주듯이 사람들의 심성도 지적 수준도 더 나아지지 않았고 또 달라지지도 않았다.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사회주의적 영웅을 강요받지만, 가령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는가>에서의 주인공은 혁명과 내전을 위해 자신의 두 팔과 두 다리를 바쳤고 눈까지 멀었음에도 인민을 위해 마지막까지 봉사하려고 한다지만, 정작 어디 그런가, 누가 그런가? 이 점을 아주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밀랴가 대위의 경우라 할 것이다. 대부분의 인민들은 무능력하고(간간히 인물들은 자신의 무능력을 절감한다. 가령 2차 대전이니, 독일의 소련 침공이니 하는 것과 촌킨과 뉴라의 달짝지근한 삶과는 도대체 무슨 연관이 있는 것일까?), 또 대단히 무식하다(이 무식함 또한 여러 군데서 독자를 웃게 만든다). 그렇다면 무엇을 어떡해야 하나? 종자개량이다.

 

 

이 점을 표나게 보여주는 것이 글라드이셰프의 “사회주의로의 길”이다. 토마토나 감자 가지고는 안 돼고 감자 뿌리에 토마토 열매가 열리는 것, 이것이 사회주의 국가에서 필요로 하는 새로운 종자이고 새로운 인간형이다. 그러나 그것이 성공하고 있는가? 글라드이셰프의 열성에도 불구하고 고작 토마토 뿌리에 감자 줄기가 전부이다. 이건 물론 죽도 밥도 아니다(즉 감자로도 토마토로도 쓸모가 없다). 과도기에 진통이라고 넘어갈 수도 있다(그 70년의 과도기 끝에 현실 사회주의는 붕괴했지만). 하지만 보이노비치는 단호하고 아주 결연하게 그러한 프로그램과 그러한 인간형, 그러한 종자개량에 반대하는 듯하다. 그저 바보 이반다움, 무식함, 순박함, 그런 걸 가지고도 얼마든지 사람다운 세상,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나갈 수 있다는 것일까? 그렇다는 듯하다.

 

이 점은 서술전략에 있어서도 사회주의 리얼리즘과는 전혀 거리가 먼 주인공과 러시아 전래의 요술담 모티브들이 사용됨으로써 보강된다. 요컨대 전면전인 것이다. 재미있고 우스꽝스러운 이야기 속에, 크라스노예와 그랴즈노예의 대립이, '촌킨과 그의 여단'과 새로운 사회주의 인간형의 대립이, 그리고 사회주의 리얼리즘과 러시아 민담의 대립이 날줄과 씨줄로 짜여져 있는 것이다. 그래서? <촌킨의 모험>이 조만간 번역되기를 바란다는 것. 그리고 비슷한 성격의 원조격 작품으로 체코 작가 야로슬라프 하셰크(1883-1923)의 <병사 슈베이크>(주우, 1983)도 재출간되기를 기대한다.

 

 

06. 01.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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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냐 2006-01-12 04: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와.........디게 재밌네요. 번역 예정이 있긴 하답니까.

로쟈 2006-01-12 1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분량이 좀 두꺼운 탓인지 아직 번역 소식은 들려오지 않는데, 시장성은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눈밝은 출판사를 기다려봐야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