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3년의 성탄절'이란 제목을 달았다가 '브로드스키의 성탄절'로 고친다. 아래에 옮겨온 글은 원래 재작년, 그러니까 2004년 성탄절에 쓴 것인데, 러시아의 시인 이오시프 브로드스키의  시 '성탄-1963'에 대한 '읽기'이다. 제목 그대로 성탄을 기념하는 시인데, 씌어진 것은 1964년 1월이다.  러시아에서는 축일을 구력에 따르기 때문에 1월 7일, 그러니까 내일이 성탄절이며, 오늘은 크리스마스-이브이다(메리 크리스마스!). 어느 새 '재작년'이 돼 버린 기억을 잠시 떠올리며, 성탄시를 옮겨놓고 이미지들을 띄워놓는다(아래의 사진은 역시나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데릭 월코트와 브로드스키. 월코트의 수상작은 <오메로스>(고려원, 1994)이다).

1987년 노벨문학상 수상 시인인 이오시프 브로드스키(1940-1996)는 성탄절에 관한 시들만으로 시집 한 권 분량을 썼기 때문이다. 그는 거의 해마다 성탄을 기념하는 시들을 썼으며, 그가 쓴 성탄시들이 대략 20편 정도 된다. 17세 때부터 시 번역(주로 영시 번역)을 하면서 습작을 겸했던 이 마지막 러시아 시인이 (노동을 하는 대신에) 시를 쓴다는 이유로 고발되어 재판을 받고 시베리아로 유형을 가게 되는 것이 1964년이다(예외는 예외로서 대우를 받는다). 그리고 미국으로 망명하게 되는 것이 1972년이며, 거기서 그는 러시아어와 영어로 시를 쓰고(짐작에 영시인으로서의 그는 존 단과 T. S. 엘리엇 계보에 속한다) 강단에서 시를 강의한다(나보코프가 러시아 망명문단의 가장 탁월한 소설가였다면, 브로드스키는 가장 재능있는 시인이었다).


짐작할 수 있는 바이지만, 1988년에서야(그러니까 노벨상 수상 이후에서야) 비로소 그의 시집들이 러시아에서도 공식 출간되며, 1992-97년 사이에 4권짜리 전집이 출간됐고, 현재는 2권에서 7권짜리까지의 다양한 전집들이 나와 있다. 그리고, 뛰어난 에세이들과 두꺼운 인터뷰집들도. 한국에서 그가 소개된 것도 물론 노벨상 수상 직후이다. 기억에 두 권의 번역 시선집, <소래 없는 노래>(열린책들), <겨울물고기>(정음사)가 (부랴부랴) 나왔고, 나중에<아름다운 시대의 종말>(문학사상사)인가란 또 다른 시집이 번역/소개됐다(제목에 20세기가 들어간 것 같기도 하고). 그리고, 안정효가 옮긴 그의 에세이집<하나 반짜리 방에서>(고려원)도 나왔는데, 이 책이 노벨상 수상 이전에 나왔는지 이후에 나왔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번역시집들이야 대개 그렇듯이 독서용이라기보다는 장서용이기 때문에(겨울 물고기란 시 정도만 인상에 남는다. 우리말로도 시였기 때문에), 브로드스키가 우리에게 소개는 되었지만, 데리다의 표현에 따르면 정말로 전달되었는지는 의문이다. 그는 다만, 노벨상 작가/시인으로, 고상한 상품으로 잠시 우리에게 다가왔다가 아무 말도 건네지 않고 지나가버렸던 건 아닐까? 이젠 브로드스키를 전공한 러시아문학도들도 없지 않으므로(두엇 된다) 그의 작품세계가 보다 본격적으로 소개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물론 읽기가 쉬운 건, 인터뷰와 에세이, 그리고 시집 순이다).

 

브로드스키에 대한 문단들을 쓰면서 CD로 나와 있는(국립문학박물관에서 제작한 것으로 16편의 시를 시인이 직접 낭송하고 있는데, 1시간이 좀 안되는 분량이다) 그의 시낭송을 오랜만에 들었는데, 얼핏 들으면 독일시를 낭송하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을 준다(약한 비음이 많이 섞여 있는데, 호흡기쪽에 문제가 있지 않았던가 싶다). 하여간에 그의 시들을 읽을 때는 그의 목소리를 참조하여, 그의 목소리로 읽게 될 것이다(이게 포노센트리즘음성중심주의이다. 형이상학에서뿐만 아니라 시 읽기에서 음성중심주의는 불가피하다). 그렇게 한번 시험 삼아 읽어본다. 그가 23살의 성탄절을 기념하여 쓴 시<1963년의 성탄절>(1964년 1월에 완성한 걸로 돼 있다)인데, 제목을 직역하면 그냥<성탄 1963>이다. 그러니까 이때의 성탄(聖誕)은 해마다 찾아오는 성탄절이 아니라, 기원 1년, 아기 예수의 탄생일을 가리킨다. 데리다의 표현을 빌면, 성탄절은 이 성탄의 반복(불)가능성에 근거한다. 아래는 1960년대말의 브로드스키.

 


전체 12행 중 마지막 4행은 이렇게 돼 있다(첫 4행을 반복/변주하고 있는데, 시 분석 시간이 아니므로 이런 자세한 내막은 생략한다. 그러니까 이 시의 1/3만 읽도록 한다. 일종의 맛보기로). 물론 (러시아어의) 키릴 알파벳으로 읽힐 수는 없기 때문에, 로만 알파벳과 우리말로 음역한다(굵은 글씨에 강세를 주어 읽으면 된다).


Volkhby prishli. Mladenech krepko spal.

Krutye svody jasli okruzhali.

Kruzhilsja sneg. Klubilsja belyj par.

Lezhal mladenech, i dary lezhali.

 

발흐 쁘리슐리. 믈라제네츠 끄렙까 스.

끄루띄예 즈슬리 아끄루좔리.

끄루쥘샤 스. 끌루샤 벨르이 르.

믈라제네츠, 이 다리.


이게 일단 무슨 뜻인가를 보이기 위해서 (대충 직역해본) 영역과 우리말 번역을 제시한다.


Magicians had come. A Baby was sleeping fast.

Round arches surrounded the trough.

Snows were swirling. White vapor was whirling.

The Baby was lying, and the gifts were laid.

 

동방박사들이 왔다네. 아기 예수는 곤히 잠들어 있었네.

둥근 아치의 기둥들이 구유를 둘러싸고 있었네.

눈들이 원무(圓舞)를 그리고, 하얀 입김이 맴돌았네.

아기 예수는 누워 있고, 선물들이 놓였다네.

 


세 명의 동방박사들이 아기 예수의 탄생을 점치고서 예루살렘으로 찾아와 요셉과 마리아에게 선물을 증정했다는 얘기는 성탄과 관련하여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바이다. 그 동방박사가 러시아어로는 볼흐브(Volkhv)인데, 마법사/점성술사라는 뜻이다(물론 이 경우는 좋은마법사이다). 그래서 영어로는 magician이라고 옮겼는데(실제로는 어떻게 옮겨지는지 알지 못한다. 영어 성경을 읽은바 없기 때문에), 이게 우리말로 박사인 것이 재미있다. 이런 용례에 충실하기 위해서라면, 박사는 모름지기 별점도 볼 줄 알고, 제법 마법도 부릴 줄 알아야 하는 것이다(하니, 우리 주변엔 엉터리박사들이 얼마나 많은 것인가!).


 

 

 

 

 

 

 

 

옆길로 잠시 새는 얘기지만, 사실 박사(博士)란 말의 어의(語義)는 널리 아는 사람이다(넓을 박이니까). 그런데, 그 박사의 (국어)사전적 의미는 (1)대학에서 수여하는 가장 높은 학위. 또는 그 학위를 딴 사람. (2)어떤 일에 정통하거나 숙달된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이런 박사의 줄임말이 이다. 내가 어제 김박, 이박하고 저녁을 먹었지.에서 김박’‘이박이 거기에 해당한다. 그럼, 쿠웨이트 박도?). 그러한 제도적인/비유적인 정의에서 나는 넓을 박의 원형을 발견하지 못하겠다. 어떤 일의 전문가를 박사라고 칭하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요즘의 박사들은 밤하늘을 쳐다보는 대신에 한 우물만 판 사람들을 가리킨다(해서, 그리스의 철학자 탈레스가 그러했듯이, 별만 쳐다보고 다니다가는 그런 우물에 빠지기 십상이다. 요즘은 철학 전공자들도 밤하늘을 쳐다보기보다는 우물이나 파지만).


그러니까 요즘 쓰는 박사라는 말에는 어떤 아이러니가 들어가 있다. 널리 아는 사람이 아니라 (한 주제에 대해서) 깊이 아는 사람, 다르게 말하면, 좁게 아는 사람박사이니까 말이다(가령 협사(狹士)가 아니라). 해서 이러한 추세에 따르자면, 널리 아는 박사는 박사로서 의심스러운 사람이며, 척척박사는 사이비-박사의 별칭이다. 좁게 아는 사람으로서의 진짜 박사들은 보통 자신의 무지를 용맹정진에의 표식 혹은 부산물로 간주하는바, 이들이 주로 내세우는 것이 전공 타령이다(이 전공에는 내 전공남의 전공이 있으며, 서로간에 간섭을 안 하는 것이 예의이다).

 


전공(專攻)이란 말의 어의는 오로지 (하나만) 친다이다(더 리얼하게 말하면, 한 놈만 족친다). 여기서 친다(攻)란 말을 보다 친근한 말로 바꾸면 물고 늘어지다가 될 것이다. 즉, 전공이란 자기가 물고 늘어지는 한 가지를 가리킨다. 가령, 연애가 전공인 사람은 연애만을 물고 늘어지는 사람이다. 연애(戀愛)가 뜻하는바, 밤낮으로 사모하고 사랑하는 사람이다. 즉, 사모/사랑에 눈먼, 연애에 눈먼 사람이다. 거기서 알 수 있는바, 오로지 하나만을 물고 늘어지기의 가능조건은 눈멂이다. 한 우물 파기의 전제조건 또한 눈멂이다. 오호, 두더지들! 이 한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진짜 박사들, 곧 두더지-박사들이 주로 하는 일이란 자기 앞가림이다. 역설적이지만, 그들은 자기 앞가림을 위해서 밤하늘을 올려다보는 눈을, 세상을 근심하며 살피는 눈을 찌른 이들이다. 보고 있지만 보지 않기 위해서, 알고 있지만 모른 체하기 위해서, 혹은 알아야 하지만 알지 않기 위해서.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면, 이 두더지-박사들과 대조되는 것이 마법사/점성술사로서의 동방박사들이다. 그들은 밤하늘의 별자리를 보고서 그리스도의 탄생을 예감하고 사막의 먼 길을 찾아온다. 예루살렘의 한 허름한 마구간까지(우리는 흔히 마구간이라고 하는데, 러시아에서 알게 된 거지만 동굴이라고도 있다. 마구간이 동굴에 있었다고 하면 되는 건지 모르겠지만). 특별한 탄생, 곧 성탄(聖誕)을 축하하기 위해서 말이다. 인용한 브로드스키의 바로 앞 시구에 따르면, 바로 이 날 밤부터 삶의 계산이 시작되었다(쥐즈니 스트 나취짜 스 에또이 취). 여기서 삶의 계산(zhizni schet)라는 건 브로드스키의 고유한 표현인데, 영어로 하면 account of life정도가 될 듯하다. 그건 무슨 뜻일까?


단순하게 말하면, 우리가 쓰고 있는 서력(西曆)의 시작이 바로 이 기원년, 즉 애노 도미나이(A.D.; Anno Domini)로부터가 아닌가. 그러니까 아기 예수가 탄생한 바로 그날, 바로 그 해로부터 삶의 카운트가 시작되었다고 하는 말은 틀린 얘기가 아니다. 그 카운트가 시작된 것이 바로 2004년 전이고 오늘이다. (우리가 기독교인이 아니더라도) 시간을 그리스도 이전과 이후로 나누는 관습을 고려해본다면(이건 거의 관습법이다), 성탄일이 갖는 에포크(epoch)적 의미를 간취할 수 있을 것이다. 성탄절은 그런 에포크적 계기의 반복(불)가능성을 표시한다.


일상적으로도 성탄절인 25일부터 31일까지는 한 해의 마지막 한 주이다. 해서 한 해의 계산(=어카운트)이 자연스레 이루어지는 시기이기도 하다. 한 해의 손익을 계산하고(무얼 잃고 건졌는가? 누굴 차고 누구한테 채였는가?), 몇 점짜리 한 해였는가를 가늠해보는 것이다. 그걸 좀 좀스런 차원이라고 한다면, 좀 거창하게는 인생/인류의 구원에 대해서 계산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과연 지나온 나/우리의 생애가 구제/구원 받을 만한 것인가, 아닌가. 이런 식으로 삶의 계산은 복합적이며 복잡하다(왜 아니겠는가? 하나부터 세기 시작했지만, 벌써 2004이고, 곧 2005가 되는데!). 성탄일이 갖는 이러한 에포크적 계기는 현상학적 에포케(epoche), 곧 판단중지의 계기이기도 하다. 그것은 시간의 원점이면서 계산의 영점이기 때문이다. 그걸 브로드스키는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가? 그의 시구를 다시 읽어보자. 이번엔 반복되는 소리에 주의하면서.


발흐븨 쁘리슐리. 믈라제네츠 끄렙까 스빨.

끄루띄예 즈보듸 야슬리 아끄루좔리.

끄루쥘샤 스녝. 끌루빌샤 벨르이 빠르.

리좔 믈라제네츠, 이 다릐 리좔리.


여기서 반복되는 소리인 끄루(끌루)이란 뜻의 러시아어 끄룩(krug)과 어원을 같이한다. 그러니까 기의(시니피에)상의 이야기가 진행되는 동안에 기표(시니피앙)/소리상으로는 원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백코러스나 백댄서처럼). 그걸 나는 둥근(아치), 원무(를 그리고), (돌았네)라는 식으로 옮겨봤지만(원무를 그리다, 맴돌다는 원래 소용돌이치다란 동사를 옮긴 것이다), 그것은 소리의 번안일 뿐이지 번역은 아니다. 시에서는 음향적인 내용이 논리적인(=로고스적) 내용과 대등하거나 그 이상의 의미를 갖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에, 시의 번역가능성은 동시에 번역불가능성이다. 아니, 그 불가능성을 옮기는 것이 시의 번역이다. 다행히, 시에는 그런 음향적인 내용 외에도 논리적인 내용이 가미가 되며, 그걸 옮기는 건 불가능하지 않다. 인용한 대목의 중간 두 행을 보자.


둥근 아치의 기둥들이 구유를 둘러싸고 있었네.

눈보라가 원을 그리고, 하얀 입김이 맴돌았네.


여기서 둥근 아치와 (마구간의) 구유는 의미론적으로 서로 다른 차원에 속하는 것들이다(즉 8월의 크리스마스같은 것이다). 둥근 아치가 사원/성당(聖堂)의 배경이라면 구유는 마구간의 도구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아치들이 구유를 둘러싸고 있다고 말함으로써, 시인은 아기 예수가 태어난 마구간을 성당화한다. 이것이 소위 성체화(聖體化; transubstantiation)이다. 성찬식에서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피와 살로 변화되는 것이 바로 성체화이다(성체화는 나의 번역이고, 신학에서 뭐라고 번역하는지는 모르겠다). 그리고 이것이 기적아닌가? 마구간이 성소(聖所)가 되는 것 말이다.

 


아기 예수의 탄생이 가져온 이 기적은 바다를 가르는 식의 모세의 기적과는 다르다. 모세의기적이 반복적인 일상에 날벼락을 가져오는/내리는 것이라면, 예수의 기적은 그냥 평범하고 일상적인 삶, 즉 무의미한 삶이 어느 순간 의미 있는 삶으로 전도되는 것이다(즉, 땡전 한푼 없던 삶이 뭔가 의미깨나 있는/있을 삶으로 카운트되기 시작하는 것). 이를 테면, 그것은 기적 없는 기적(miracle without miracle)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을 것이다. 예수는, 그리고 그의 삶은 그러한 기적, 기적 없는 기적의 가능성을 지시한다. 예수를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구원을 받으리니.라는 식의 포교 문구를 나는 그냥 그런 식으로 이해한다(참고로 말하자면, 불경스럽게도 나는 신도 내세도 구원도 믿지 않지만, 시는 믿는다. 브로드스키가 보여주듯이 시에서도, 그리고 문학에서도 성체화의 기적은 일상적으로 일어난다). 구원 없는 구원 말이다. 여보게, 예수 가라사대, 이 마구간 같은 삶이 전부가 아니라는군! 여기가 성당이요, 천국이래. 아니, 궁전이고, 타워 팰리스래! 그래요? 거기도 마구간이래요?

 

이어지는 행에서 시인은 눈들이 원무를 그리고, 하얀 입김이 맴돌았네.라고 쓰는데, 눈들은 아마도 천사들을 대행하는 듯하다(하얀 입김은 아기 예수의 여린 입김일까?). 그런데, 어인 눈일까? 원래의 배경에서라면, 즉 예루살렘에서라면 눈보라 대신에 몰아쳐야 할 것은 모래바람 아닌가? 여기서 힌트를 주는 것은 제목의 1963이다. 즉 1963년에 젊은 (자칭) 시인 브로드스키가 놓여있는 공간, (눈보라 치는) 레닌그라드를 떠올리게 하는 것이다(참고로, 1960년대 러시아시는 두 갈래로 나뉘는데, 옙투센코나 보즈네센스키 등의 체육관 시인들이 한쪽에 위치하고 있다면, 다른 한쪽에는 레닌그라드파라 불린 언더그라운드 시인들이 있었는바, 안나 아흐마토바가 이들의 대모(大母)였으며 브로드스키는 이 후자에 속한다. 그는 전자의 시인들을 혐오했다).


해서, 마구간 바깥에 눈들이 원무를 그린다(눈보라의 소용돌이가 일어난다)는 배경설정은 공간적인 오버랩이면서 시간적인 오버랩이다. 그것은 1963년이란 시간을 기원년의 시간으로 성체화한다. 그런 식으로 고작 두 행을 가지고서 시는 마구간을 성소로, 그리고 1963년을 그리스도의 시간(in the year of our Lord)으로 전환시킨다. 이것이 시의 기적이며, 이 기적을 가능하게 한 것이 아기 예수의 탄생이다. 그러니, 브로드스키가 해마다 성탄에 관한 시를 쓰고자 했던 것은 이해할 만하지 않은가? 인류 역사상 그만한 이벤트를 어디에서 또 찾을 수 있겠는가?


예수의 탄생을 축하/축복했던 우리의 동방박사들은 그런 의미에서 브로드스키의 선조(先祖)이자 시인들이다. 그들이 어떤 축원의 말을 남겼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시에서는 그들이 남긴 선물이 기록돼 있다. 시의 마지막행이다.


아기 예수는 누워 있고, 선물들이 놓였다네.

 


원시에서 누워 있다’‘놓여 있다는 같은 동사이며, 이 시행의 전반부와 후반부는 구문적으로도 동일하다. 그것이 암시적으로 뜻하는 바는 아기예수=선물이라는 것이다. 아기 예수의 탄생이라는 사건이 인간에 대한 신의 사랑을 뜻하는 선물이었다면, 동방박사들은 인간을 대표해서 거기에 답례를 했던 것이다(그러니까 동방박사들이 먼저 선물한 것이 아니다). 이 선물의 교환이 신과 인간 사이의 비대칭적 교환이다. 그것이 비대칭적인 것은 아기 예수(단수)와 선물들(복수)의 교환이기 때문이다. 이제 그 마지막 시행을 다시 읽어보자.


리좔 믈라제네츠, 이 다릐 리좔


이 시 전체가 원환적인 구조로 돼 있다고 언급했지만, 이 마지막 시행도 원환적이다. 같은 소리로 열리고 닫히기 때문이다. 보통 원(환)은 완전성과 영원성의 상징이다. 그러니 성탄에 관한 시가 그러한 원환적 구성을 갖고 있다는 사실은 지극히 자연스럽다. 반면에 이 시에서 자연스럽지 않은 것은 (내 생각에) 아기 예수의 부모, 즉 요셉과 마리아가 등장하지 않는 점이다(앞부분에도 등장하지 않는다). 이건 좀 특이한 일이다(당신의 생각은 어떤가?). 이게 왜 그럴까를 캐기 위해서는 아마도 브로드스키의 다른 시들과 함께 성탄과 관련한 시와 그림들을 좀더 뒤적여봐야 할 것이다. 그런 게 ‘공부’이긴 하지만, 내가 당장에 해치울 수 있는 공부는 아니다. 그런 공부를 하기에는 돈깨나/시간깨나 부족하다. 현재의 나로선 말이다...

 

 

06. 01.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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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1-07 01: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6-01-07 12: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사람의 운명이란 게 그렇죠? 저 같은 경우는 지도교수님의 '재미있는' 강의에 빠지다 보니까 여기까지 왔습니다. 이게 '경지'인지 '지경'인지는 말씀드릴 수 없지만...

돌바람 2006-01-10 09: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 한 편의 조각을 이리 감상하는 것도 참 특별한 경험입니다. <겨울 물고기>랑 <하나도 채 못되는>(성원, 한벙운 옮김, 1987)만 맛보고 드는 단순한 생각 하나.
브로드스키는 1972년 미국으로 망명한 후의 자신을 이렇게 보고 있지 않습니까.

"아직도 나는 분명하고 명확하게 그들을 볼 수 있다. 다시 한번 말하거니와 이 얘기는 내 어린시절의 향수 때문이 아니라 내가 떠나온 모국에 대한 향수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 지금이 아닌 그 당시 그들의 생활 속에는 지금의 내가 어린 나이로 기억되어 있을 것이다. 지금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것처럼 그들도 나를 잘 기억하고 있는가는 의문이다. (...) 그러나 지금의 나, 그들이 이해할 수 없는 언어로 글을 쓰고 있는 나를 그들이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더우기 지금 그들은 이 세상 사람들이 아니지 않은가? 아! 지금이 미국과 나를 알아볼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는데, 그리고 이것이 내가 그들과 우리의 방을 볼 수 있는 유일한 길인데."

인용한 부분에서 '그들'은 시를 쓴다는 이유로 그를 감옥에 쳐넣은 그의 조국일 수도 있고 직접적으로는 그를 기억하는 부모이자 페테르부르크인들(레닌그라드인이 아닌. 이런 표현이 가능하다면)일 수도 있겠지요. 포커스를 맞춰서 본다면, 브로드스키는 예수를 부모의 기억과 예수가 예수로서 자신을 바라보는(1973년 이후의 브로드스키처럼) 공동의 기억 공간에서만 탄생할 수 있는 것 아닐까 하는... 그러니까, 예수가 예수가 되려면 예수가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저 마지막 문장은 이렇게 끼워넣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이것이 내(예수)가 그들(요셉과 마리아)과 우리의 방(성탄??)을 볼 수 있는 유일한 길인데'

이건 좀 위험한 생각이지만, 예수가 예수가 되려면 그의 탄생은 요셉과 마리아, 그리고 동방박사에게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가 깨달은 이후(브로드스키에게는 1973년 이후가 되겠지요) 바라보는 자신의 탄생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참 인간적인 예수이지요. 위의 인용구는 브로드스키가 그의 에세이에서 꾸준히 강조하는 맥락이라는 점에서 인용한 것이어요.^^

*에세이만 보고 끼워맞추다 보니 기냥 억측이 난무합니다. 시집이 없으니 으그 보고 싶어도 볼 수가 없어요. 아, 하나 더. 안나 아흐마토바의 시도 쬐끔 맛보여주심 안 되나요?

로쟈 2006-01-10 1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미하며 읽으셨군요.^^ 브로드스키의 에세이까지 소장하고 계신 분은 드물게 만나는지라 반갑습니다. 제가 분석한 시는 청년 브로드스키의 소품이고, 같은 테마의 작품들을 많이 남겼기 때문에 두루 살펴봐야 종합적인 의견을 제출할 수 있을 듯합니다. 아흐마토바의 시도 읽으신 듯한데,'푸슈킨과 아흐마토바'란 주제에 개인적으로 관심을 갖고 있지만 아흐마토바 시 읽기가 언제 가능할는지는 미지수입니다. 돌바람님의 주문을 한켠에 담아두고 있겠습니다...

돌바람 2006-01-11 16: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 청년 시절의 시로군요. 헛다리 짚었네요.
아흐마토바의 시는 브로드스키를 통해 부분 인용된 것들만 보았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