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은 12월 23일이 동지인 걸로 알고 있었는데, 어젯밤 자정 뉴스를 보니 어제가 동지였다. 뒤늦게 지난 주말 사다놓은 즉석 팥죽을 먹어볼까 하다가 야식도 이미 먹은 터라 참아두었다. 그리고 오늘 아침에야 (맛은 없지만) 구색을 차리느라 '동지 팥죽'을 먹었다(해서 이 글은 죽먹은 힘으로 쓰는 것이다). 문득 머릿속에 떠오른 건 '저 동지의 불빛 불빛 불빛'이란 시구였는데, 기형도(1960-1989)의 시 '위험한 가계 1969'에 나오는 것이다. 생각난 김에 몇 자 적어둔다.

 

 

 

 

제목 그대로 '위험한 家係-1969'는 초등학교 2학년쯤이었을 어린시절 가족사에 대한 회상으로 구성돼 있다. 6개의 절로 돼 있는데, 동지의 불빛이 언급되는 건 맨마지막 절이다.

그해 겨울은 눈이 많이 내렸다. 아버지, 여전히 말씀도 못 하시고 굳은 혀. 어느만큼 눈이 녹아야 흐르실는지. 털실뭉치를 감으며 어머니가 말했다. 봄이 오면 아버지도 나으신다. 언제가 봄이에요. 우리가 모두 낫는 날이 봄이에요? 그러나 썰매를 타다 보면 빙판 밑으로는 푸른 물이 흐르는 게 보였다. 얼음장 위에서도 종이가 다 탈 때까지 네모 반듯한 불들은 꺼지지 않았다. 아주 추운 밤이면 나는 이불 속으로 해바라기 씨앗처럼 동그렇게 잠을 잤다. 어머니 아주 큰 꽃을 보여드릴까요? 열매를 위해서 이파리 몇 개쯤은 스스로 부숴뜨리는 법을 배웠어요. 아버지의 꽃 모종을요. 보세요, 어머니. 제일 긴 밤 뒤에 비로소 찾아오는 우리들의 환한 家系를. 봐요 용수철처럼 튀어오르는 저 冬至의 불빛 불빛 불빛. (<전집>, 95쪽)

 

 

 

 

기형도의 많은 시들이 그의 유년시절과 불행한 가족사에 바쳐져 있다는 것은 잘 알려진 것이다. '위험한 가계'는 그 사정을 가장 직접적으로 그려내고/진술하고 있는 시인데, 그 시작은 아버지의 병환이다. 시의 서두에 진술된 대로, "그해 늦봄 아버지는 유리병 속에서 알약이 쏟아지듯 힘없이 쓰러지셨다."(92쪽) 그리고 이어진 건 이 가족의 '동지', 즉 '긴 밤'이고 '아주 추운 밤'이다(문득 일찍 겨울이 들이닥쳤다는 파키스탄의 지진 피해지역이 떠오른다). 유년의 화자가 희원하는 건 "우리가 모두 낫는 날" 곧, 아버지가 건강을 회복하는 것이고, 가족이 다시 '봄'을 맞이하는 것이다. 올해처럼 눈이 많이 내렸다는 1969년 겨울의 일이다(물론 이번 호남지역의 폭설은 기상관측사상 '최악'이라고 기록된다지만).

 

 

 

 

시의 이 마지막 대목에서 유년의 화자는 그래도 봄에 대한 희망의 끈을 놓지 않으며 '환한 가계'에 대한 꿈을 포기하지 않는다. 지금은 "해바라기 씨앗"처럼 웅크리고 자지만, 언젠가 "아주 큰 꽃"을 어머니에게 보여드릴 거라고 다짐해보는 것이다. 언제가는 '용수철(spring)'처럼 튀어오를 '아주 큰 꽃'과 '환한 가계'!  

1968년하면 떠올려지는 건 '68혁명'이지만, 1969년이 내게 떠올려주는 건 한 시인의 불행한 가족사이다(그런데 이 구체적 가족사는 '그토록 쓰라린 삶'이라는 보편성을 상기/환기시켜주는 힘을 갖고 있다. 그게 시의 힘이고 문학의 힘이다). 시인의 요절 10주년을 맞이하여 지난 1999년에 <전집>이 출간됐었는바, 우연찮게도 그건 이 시에서 제시된 가족사의 불행 30주년을 상기시켜주기도 했다(그 1999년 12월 말에 나는 한 독서대학에서 기형도의 시에 대해 강의할 기회가 있었다). 1969년의 겨울, 이후로 시인은 20년의 삶을 더 살았을 뿐이다. 그는 어머니께 '아주 큰 꽃'을 보여드렸을까? 그는 자신의 꿈을 이루었을까?  

 

 

 

 

기형도가 유년에 가졌던 꿈이 특이한 것은 그것이 단순한 '가상'으로만 설정돼 있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방법론을 동반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점이 여타의 유년시들과 기형도의 시를 차별화시켜주는 것일 듯싶은데, 시에서 그 방법론은 "열매를 위해서 이파리 몇 개쯤은 스스로 부숴뜨리는 법을 배웠어요. 아버지의 꽃 모종을요."라고 제시돼 있다. <전집>을 읽으면서 새삼 주목하게 된 것이지만, 기형도 특유의 '식물적' 상상력을 구성하는 핵심은 이 '모종'과 '전정'이다(내 견문에 이 '전정'에 최초로 주목한 비평가는 정과리이다. 기형도에 대한 그의 평문은 <무덤 속의 마젤란>(문학과지성사, 1999)의 가장 중요한 꼭지를 이룬다. 기형도에 관한 필수적인 참고문헌이지만, 나는 그가 이 '전정'을 기형도의 시적 세계관의 근간으로 명확하게 제시하지는 못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것은 '모종'이란 다른 짝에 주목하지 않어서라고 생각한다).

전정(剪定)은 <전집>에 포함돼 있는 그의 일기 중 한 대목에 등장하는데(1982. 6. 16), 그는 먼저 '가치치기'란 뜻의 전문용어인 '전정(trimming)'을 정의하는바, "관수 재배에 있어서 균일한 발육과 수형(樹形)의 정리를 목적으로 가지의 일부를 잘라내는 일"이 전정이다. 그것은 삶에 어떻게 적용되는가?

"인간에게도 누구나 잎이 주렁주렁 달린 가지가 서너 개 이상 있다. 그 개별적 가지들은 시간의 묶음이며 그 시차인 공간인 가지 안에는 석은 잎부러 부활해가는 잎, 돋는 잎 등이 달려 있다. 그 잎들은 나무의 물관, 체관의 관다발로부터 양분 및 수분을 공급받으며 또 외적인 요소, 즉 햇빛을 이용하여 녹색 동화작용을 일으켜 내적 에너지를 확충한다. 고로 잎은 나무(自我)와 햇빛(外界)의 유기적 매체이다. 개별 인간과 보편 세계의 이질성을 이어주는 것은 '동일인으로서의 인칭'이다. 우리는 그러한 인칭을 2인칭화(사랑, 친구, 가족)한다. 그러나 과수뿐 아니라 인간의 사육 기간 중에서 우리의 관계들 속에는 엄연히 칼날 같은 전정이 가해진다. 그것은 소극적으로 타의에 의한 단절의 전정과 적극적(주관성) 전정으로 구분한다."(<전집>, 321-2쪽)

 

  

 

 

이틀 전에 군대에 입대한 자신의 친구 조병준(내가 알기론 <제 친구들하고 인사하실래요?>의 저자. 더불어, 성석제, 원재길 등이 일기 속에도 자주 등장하는 기형도의 절친한 친우들이었다)과의 관계(=가지)에 대한 상념을 채워나가고 있는 일기인데, 마지막 문단에는 이런 내용도 보인다: "자네가 보여준 믿음이나 우려는 정말 값진 것이므로. 너와의 가지는 나의 전정이 환상 그 밖으로의 소멸임을 내가 인식함으로써 톱날의 부위에서 벗어나야 함을 안다. 이러한 또 하나 나의 성찰이 순간적 긍휼이나 동정의 잔해로써 기억되지 않아야 함을 기원한다."(324쪽) 20대 대학생의 관념성(미숙함)이 엿보이는 문장이긴 한데, 내가 주목하는 것은 기형도의 인식론적 구도이며, 그것은 '가지/전정(가치치기)'란 틀을 갖고 있다. 

그의 시들에서도 두드러지지만 다른 날짜의 일기들에서 빈번하게 출몰하는 식물성 은유들은 이 '가지/전정'의 틀이 기형도 세계인식과 언어운용의 '보편문법'이 아닌가란 생각마저 갖게 한다(오래 전 나는 '기형도의 보편문법'이란 제목의 평문을 기획했었다). 가령, "또 하나 내 청춘의 필름이여, 유리컵 속으로 곧게 뿌리를 내린 둥근 파의 유약함이여-"라거나 "기차 소리여, 나는 아예 네 앞에서 소리 죽여 울고 있는 캄캄한 정전의 필라멘트였지. 아니 하나의 전율로서 소스라치는 일년초 식물이었는지 몰라." 같은 대목들이 그렇다.

이러한 기형도식 식물(나무)의 자기규정과 생존방식이란 무엇인가? (1)나는 식물/가지이다. (2)나는 열매/성장을 위해서 가지치기(=아픔, 상실, 희생)를 해야 한다. (3)나는 (가지)모종을 통해서 삶을 다시 회복한다. 여기서 핵심은 물론 전정(가치치기)모종(옮겨심기)이다. 이런 구도를 전제로 할 때, 앞에서 인용한 "열매를 위해서 이파리 몇 개쯤은 스스로 부숴뜨리는 법을 배웠어요."란 시구는 그가 어린날에 깨달은 '삶의 방법론'을 집약하고 있다. 이러한 관점으로 읽을 경우, 그의 시 '식목제'의 다음과 마지막 대목이 보다 명료하게 와닿지 않는가?  

보느냐, 마주보이는 시간은 미루나무 무수히 곧게 서 있듯

멀수록 무서운 얼굴들이다, 그러나

희망도 절망도 같은 줄기가 튀우는 작은 이파리일 뿐, 그리하여 나는

살아가리라 어디 있느냐

植木祭의 캄캄한 밤이여, 바람 속에 견고한 불의 立像이 되어

싱싱한 줄기로 솟아오를 거냐, 어느 날이냐 곧이어 소스라치며

내 유년의 떨리던, 짧은 넋이여

여기서 인용한 대목의 "개별 인간과 보편 세계의 이질성을 이어주는 것은 '동일인으로서의 인칭'이다."라는 문장을 음미해보자. '개별 인간'과 '보편 세계'의 매개자로 기형도가 설정하고 있는 것이 '동일인으로서의 인칭', 곧 그가 '사랑, 친구, 가족'이라고 토를 달고 있는 '2인칭'이다. 그리고 이때의 2인칭이야말로 기형도적 세계의 핵심이다. 그것은 개별적 자아의 테두리 바깥으로 가지치기되는 존재이면서 아직 3인칭적 보편 세계로는 편입되지 않은 상태의 무엇을 지칭한다. '이 겨울의 어두운 창문'이란 시에서 그 2인칭은 고드름이란 형상으로 응집돼 있다: "어느 영혼이기에 아직도 가지 않고 문밖에서 서성이고 있느냐. 네 얼마나 세상을 축복하였길래 밤새 그 외로운 천형을 견디며 매달려 있느냐."라고 2칭으로 호명되는 그 고드름(그런 의미에서 기형도의 시는 '2인칭의 시'이며, 이것은 1인칭적 고백이나 3인칭적 묘사와는 차별적인 시이다).

흔히 처마밑에 매달려 있는 고드름은 문밖에서 '외로운 천형'을 견디며 서 있지만 결코 바깥세계로 '도주'하거나 하는 '즐거운 액체'의 형상이 아니다. 한 자리에 붙박혀/꽂혀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그것은 식물적이며, 공중에 매달린 '가지모종'을 연상시킨다. 기형도의 시에서 반복적으로, 어쩌면 강박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전정된 이후의 가지가 새로 모종되는 것처럼 어딘가에 꽂혀 뿌리를 내리고 싱싱한 줄기로 솟아올라 '불의 立像'이 되고자 하는 자기암시적 갈망이다. 하지만 그러한 갈망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자기정립을 현실화하기엔 그는 너무 연약한 '작은 이파리'였다(줄기가 아니라). 마치 이런 아버지의 운명을 따르는 것처럼: "봐라, 나는 이렇게 쉽게 뽑혀지는구나. 그러나 아버지, 더 좋은 땅에 당신을 옮겨 심으시려고."

다시 1969년으로 돌아가보자. 반장이었던 유년의 시인에게 담임선생님이 가정방문을 나서겠다고 하나, 시인은 만류한다: "선생님, 가정 방문은 가지 마세요. 저희 집은 너무 멀어요." 선생님은 말한다: "그래도 너는 반장인데." 시인은 다시 말한다: "집에는 아무도 없고요. 아버지 혼자, 낮에는요." 방과후에 시인은 긴 방죽을 걸어오며 몇 번이고 책가방 속에 들어 있는 월말고사 상장을 생각한다. 그리고는 풀밭에 잠시 '꽂혀서' 잠을 잔다: "둑방에는 패랭이꽃이 무수히 피어 있었다. 모두 다 꽃씨들을 갖고 있다니. 작은 씨앗들이 어떻게 큰 꽃이 될까. 나는 풀밭에 꽂혀서 잠을 잤다."(강조는 나의 것)

'작은 씨앗들'이 '큰 꽃'을 피워내는 게 생명의 미스터리이고, 삶의 미스터리이다. 유년의 시인 또한 "어머니 아주 큰 꽃을 보여드릴까요?"라고 대견스레 물을 때 그러한 미스터리를 자신의 것으로 할 수 있으리라는 소망과 의지를 동시에 피력한 것이리라.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 미스터리는 그가 "끝끝내 갈 수 없는 生의 僻地"였다. 그는 다만, "저 고단한 燈皮를 다 닦아내는 薄明의 시간, 흐려지는 어둠 속에서 몇 개의 움직임이 그치고 지친 바람이 짧은 휴식을 끝마칠 때까지" 자신의 죽음을 잠시 유예하던 '마지막 한 잎'이었기에...

05. 12. 23.

P.S. 이상이 내가 기형도의 시에 대해 갖고 있는 대략적인 구도(말하자면 '매트릭스')이다. 자세한 분석은 따로 자리를 마련해야 할 것이나, 핵심적인 얘기는 갈무리돼 있다. 끝으로 초등학교인가 중학교 국어 교과서에 수록돼 있는 그의 시를 옮겨놓는다. 어제 김춘수의 시를 다루며 '울다'란 동사 얘기를 했었는데, 나를 울리는 건 '밤새 울었다'류의 그런 상투형이 아니라 그냥 한 어린아이의 훌쩍거림이다(나는 딸아이를 몇 번 훌쩍거리게 한 기억이 있다. 그런 생각하면 나도 훌쩍거리고 싶어진다). 당신 또한 '유년의 윗목'에서 한번쯤 훌쩍거려보았다면, 시는 그냥 이와 다른 게 아니어도 무방할 것이다.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배춧잎 같은 발 소리 타박타박
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금 간 창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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