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 슬픈 얘기하는 데 키득거리는 건 예의도 아니고 뭐도 아니지만 남덕현의 산문집 <슬픔을 권함>(양철북, 2015)의 한 대목을 읽다가 그만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내놓고 웃을 순 없어서 한밤에 그냥 키득키득. 책소개에 나오는 대목이다.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처사님! 이 노래 슬퍼. 특히 ’강변 살자‘ 이 대목이 슬퍼!”
“슬프고말고요! 뭐든 합의를 못 보면 슬픈 법이지요.”
“여기서 합의가 왜 나와?”
“강변 살자며? 엄마하고 누나하고 아직 동의를 안 한 거 아니요? 그러니까 자꾸 강변 살자, 강변 살자 노래를 하지.”
“합의 보면 살 수는 있고? 하여튼 처사님 어깃장은 알아줘야 해! 여기서 합의가 왜 나와 합의가? 이루지 못하는 꿈은 슬픈 법이외다!”
“스님. 이런 애들은 말이죠, 지 소원대로 강변에 집 짓고 살아도 슬퍼요. 어디 갖다 놔도 슬퍼.”
“왜요?”
“그냥요. 그런 종자들이 있어요.”(슬픈 종자들, 94-95쪽 재구성)

저자의 이력이라곤 재작년에 <충청도의 힘>(양철북, 2013)을 냈다는 게 소개의 전부다. 우리 나이론 50세. 내내 슬픈 얘기만 골라서 늘어놓는데, 웃음이 번지는 것은 작정한 '해학의 정신' 때문인 듯하다. "나는 슬플 때 가장 착하고, 슬플 때 가장 명징하며, 슬플 때 가장 전복적이다. 내가 슬픔의 명령에 순순히 복종하는 이유이며, 이 책은 그 명령에 따른 흔적이다."라고 말하는 정신이 오랜만에 접하는 해학의 정신이다.

 

서양식으로 말하면 유머의 정신. 삶의 모순이 우리를 쓰라리지 않게끔 하는 것. 처절한 슬픔과 절망 속에서도 그에 굴복하지 않으려는 태도의 소산이다. 스무살 시절 좋아했던 니체의 경구. 대략 떠올리자면, "오직 인간만이 웃을 수 있다. 오직 인간만이 웃음을 고안해내지 않을 수 없을 만큼 깊이 괴로워했기 때문이다." 그런 생각으로 한밤에 웃프다...

 

15. 01.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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