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에 출간된 벤야민의 <아케이드 프로젝트>(새물결) 번역과 관련한 논란을 참고삼아 옮겨놓는다. 첫번째 글은 한국일보 8월 19일자 '책과세상'란에 서평으로 게재됐던 노명우씨(미디어문화연구소장ㆍ독일 베를린대 박사)의 글이고, 두번째 글은 그에 대한 반박으로  지난 8월 27일자 한국일보에 실린 역자 조형준씨의 글이다. 번역과 관련한 '전문가' 논쟁의 한 장면을 보여주는 듯해서 시사적이다. 이 번역본에 대한 나의 소견은 책이 도서관에 들어온 이후에나 검토후에 제시해볼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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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터 벤야민(1892~1940)의 삶은 불행했다. 살아 있는 동안 학문적으로 인정 받지 못했던 그는 나치의 위험을 피해 파리에서 스페인으로 피신하던 중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하지만 벤야민은 현재 그 누구보다 행복한 ‘이후 삶’을 누리고 있다. 그는 가장 많이 인용되고 연구되는 사상가 중 한 명이다. 벤야민의 글은 여전히 ‘현재성’으로 가득 차 있다.

벤야민은 독일 베를린에서 태어나서 성장했으며, 유럽의 여러 도시들을 여행했고, 마지막 삶을 그가 “19세기의 세계 수도”라 불렀던 파리에서 보냈다. 벤야민은 열정적으로 도시에 관해 글을 썼다. 그는 베를린에게 ‘일방통행로’와 ‘베를린의 유년시절’이라는 책을 헌정했고, 모스크바 여행을 통해 ‘모스크바 일기’를 남겼다. 하지만 많은 연구자들이 지적하는 것처럼 벤야민이 가장 애착을 가졌던 도시는 파리다. 그는 파리에 대한 관상학적 연구를 통해 자신이 평생 몰두했던 모든 주제를 완성하려는 야심 찬 계획을 갖고 있었다. 벤야민의 이러한 계획이 이른바 ‘파사쥬(아케이드) 프로젝트’이다.

하지만 벤야민은 이 프로젝트를 완성하지 못한 채 사망했다. 대신 그는 파리에 관한 엄청난 분량의 메모를 남겼다. 벤야민이 파사쥬 프로젝트에 관한 유고를 남겼다는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고 난 후, 사람들은 벤야민의 유고 출간을 고대했다. 난해하기로 유명한 벤야민을 해독할 수 있는 중요한 실마리가 파리 연구 원고더미 속에 있지 않을까 기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고가 1982년 벤야민 전집 제5권 ‘파사젠베르크’(한국어 번역 제목 ‘아케이드 프로젝트’)로 출판되어 세상에 선보였을 때, 이 파리연구 모음집을 보고 사람들은 당황했다. 책이 기대와는 달리 체계를 갖춘 완성된 연구서가 아니라, 독일어와 프랑스어로 된 엄청난 분량의 원고를 주제어에 따라 분류한 자료 모음집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그 책은 독자들의 적극적인 해석 없이는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 ‘벙어리’에 가깝다. 벤야민은 파리 연구를 위한 재료만을 남겼다. 독자들은 그 재료를 갖고 벤야민이 완성하지 못했던 건축물을 지어야 한다. 그렇기에 벤야민의 미완성 저작은 독자들의 창조적인 해석에 따라 보물도 될 수 있고, 그저 두꺼운 자료 모음집에 불과할 수도 있다.

독일어와 프랑스어를 모르는 한국의 독자들이 전혀 접근할 수 없었던 이 책이 한국어로 번역되었다. 한국어 번역은 ‘사건’이다. 하지만 이 ‘번역 사건’은 마냥 즐거운 소식만은 아니다. 번역에서 발견되는 몇 가지 문제점 때문이다. 번역판은 먼저 독일어와 프랑스어를 한국어로 옮기는 정확성 면에서 문제점을 드러낸다. 한국어 번역자는 일러두기에서 독일어판과 더불어 프랑스어판, 영어판, 일본판을 참조했다고 밝히고 있다. 일본어판을 참조한 영향 때문인지, 번역서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본식 한자가 등장한다. 독일어판 묶음 A만을 대조했을 뿐인데, 오역들이 발견된다. 예를 들어 묶음 12, 4에서는 벤야민의 중요한 방법론인 관상학(Physiognomie)이란 단어가 아예 빠져있다.

한국어 번역판은 텍스트 편집에서도 문제점을 드러낸다. 이 저작은 벤야민이 직접 쓴 논평과 연구를 위해 모아둔 직접 쓰지 않은 자료로 구성되어 있다. 하지만 번역판은 상이한 성격을 지닌 이 두 가지 텍스트를 확연하게 구별되지 않도록 편집하였다. 벤야민의 유고집이 일반 독자를 위한 파리 연구서라기 보다 전문 연구자를 위한 자료 모음이기에 세심한 편집은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한국어 번역판에는 ‘용어 해제’라는 납득하기 힘든 제목으로 벤야민이 사용한 중요한 개념의 독일어, 프랑스어, 한국어 대조표를 실어 놓았다. 이는 과잉 친절일 뿐만 아니라 위험한 시도이기도 하다. ‘용어해제’를 통해 벤야민의 고유한 언어에 대한 한국어 표준 번역을 제시하고 싶었다면, 번역자는 번역어를 선정할 때 한국에서 벤야민을 번역하기 위해 노력했던 많은 학자들의 연구를 참고해야 했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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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쓸까말까 많이 망설였다. 어떤 논쟁을 위한 글도, 그렇다고 어떤 발전적인 제안을 위한 글도 아닌 해명성의 글을 쓴다는 것이 고역처럼 느껴졌다. 더 중요하게는 나의 졸역에 대한 평가는 좀 더 시간을 두고 기다려보아야 하며 ‘20세기 최대의 서사시’라는 평대로 강호의 온갖 고수들의 날카로운 혜안을 기다려 계속 수정하고 가다듬어나가야 하리라는 의무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보들레르, 도박, 백화점, 철도, 매춘까지 온갖 분야를 다루는 이 책을 한 명의 역자가 감당한다는 것은 원천적으로 역부족일 수밖에 없으리라. 게다가 저자가 13년 동안이나 매달리는 바람에 개념과 용어상의 통일성, 서지상의 정확성 등은 또 얼마나 문제적이란 말인가. 역자가 아무런 주석도 없는 독일어판 원서와 함께 프랑스어판과 영어판, 잘 읽지도 못하는 일어판을 참조한 것은 이 때문이다.

하지만 서평자는 먼저 번역판의 텍스트 편집이 문제라며 “상이한 성격을 가진 두 가지 텍스트를 확연하게 구별되지 않도록 편집하였다”고 지적한다. 과연 그러할까? 독일어본에서는 발터 벤야민이 쓴 글과 자료로 발췌해둔 인용문을 글자 크기로 구분한 반면, 불어본과 영어본에서는 서체를 달리하는 방법을 택하고 있다. 한국어 번역판에서는 후자의 방법을 따라 ‘활자 크기는 동일하되 서체와 농도’를 달리하는 방법을 택했다. 게다가 벤야민 본인의 글은 문장을 들여 쓰기로 시작하는 동시에 가로 길이를 길게 한 반면, 인용 부호로 시작되는 인용문들은 가로 길이를 짧게 처리했다. 따라서 적어도 다섯 가지 방식으로 양자를 구분해놓았는데, 다른 외국어판보다 훨씬 더 진일보한 방식을 택한 셈이다.

두 번째로 서평자는 ‘Physiognomie’를 ‘골상학(骨相學)’으로 번역하지 않았다며 이를 단적인 오역의 예로 들었다. 이것을 보면서 한 영문학 전공자가 영남대 법대의 박홍규 교수가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을 ‘동양학’이라 번역하지 않았다며 비판한 기억이 떠올랐다. 문제의 대목은 이렇다. “아케이드의 ‘모습’은 보들레르의 ‘너그러운 노름꾼’의 시작 문장에 나와 있다.” 이어지는 보들레르의 글은 거꾸로 이 대목에서 ‘Physiognomie’를 ‘모습’이 아니라 ‘골상학’으로 번역하는 것이 오히려 오역이라는 것을 입증해주지 않는가? 예를 들어 마르크스 책에 나오는 똑같은 ‘부르주아’라는 용어도 만약 중세적 맥락이라면 ‘성 안 사람’이, 그리고 다른 맥락에서라면 ‘시민’이나 ‘부르주아’가 정확한 번역일 것이다.

또 ‘과잉 친절’로 지적한 독일어-프랑스어 용어 해제는 실제로는 역자의 독창적인 아이디어가 아니라 프랑스어판에서 원용한 것이다. 또 역자 서문에서 밝혔듯이 그것을 감히 ‘한국어의 표준 번역’으로 제시할 생각은 꿈에도 없었다. 다만 산책자, 만보객, 산보자 등 아직도 ‘한국어의 표준 번역’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을 고려해 ‘나는 이렇게 번역하니 별다른 오해가 없길 바란다’는 자진 신고에 가까운 것이었다. 서평자의 지적대로 전문가들의 선행 연구를 참조해야겠지만 오히려 전문가들의 의견 자체가 갈리고 있는 상황이 아닌가. 제도권 밖에 있는 역자로서는 제도권 안의 따뜻한 시선은 언감생심이지만 이런 식의 거친 ‘전문가’의 조언은 정중히 사양하고 싶다.(끝)

*참고로, 조형준씨의 글 가운데 'Physiognomie'는 '골상학'이 아니라 '관상학'이다. 노명우씨가 문제삼은 역어가 그렇다. 노명우씨는 "아케이드 프로젝트와 현대성"(2004)이란 논문에서는 '인상학'이라고 옮겼다가 자신이 번역한 질로크의 <발터 벤야민과 메트로폴리스>(효형출판)에서는 '관상학'으로 옮기고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관상학'이란 역어가 적절하다고 본다(이전에 지적한 대로 질로크의 책은 좀 무성의한 번역서인데, 이에 대한 지적은 바쁜 일들이 마무리되면 올리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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