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강의차 전주에 내려갔다가 한옥마을에서 일박하고 오늘 오후에 서울로 올라왔다. 귀경길에 버스에서 요즘 알라딘에서 화제인 '북플'을 스마트폰에 깔고 어떤 '물건'인지 살펴봤는데, 블로그에 좀 적응하나 싶었더니 적응할 게 하나 더 생긴 것 같아서 그다지 반가운 마음은 들지 않았다. 그래도 최근 즐찾과 공감(좋아요)가 늘어난 원인이 북플 때문일 거라는 짐작은 들었다. 사실이 그렇다면, 뭐 굳이 기분 나쁜 일은 아니겠다. 다만 적응에 시간이 좀 걸릴 거라는 거. 나대로는 그냥 하던 대로 블로그 포스팅에만 주력할 참이다. 그리고 오늘의 일거리는 이번주 시사IN(376호)에 실은 리뷰를 옮겨놓는 것. 듀런트 부부의 <역사의 교훈>(을유문화사, 2014)을 읽고 적었는데, 이 부부의 방대한 대작 <문명 이야기>(민음사)의 입문서로 읽어도 좋겠다 싶다. 아니, 그냥 역사 입문서로 읽어도 좋겠고. 그나저나 <문명 이야기>는 몇 권 구입하긴 했지만 섣불리 엄두를 못낼 분량이로군...

 

 

시사IN(14. 11. 29) 역사의 쓸모를 찾다 보니

 

<철학이야기>로 잘 알려진 미국의 저술가 윌 듀란트는 아내 아리엘 듀란트와 함께 총 11권의 대작 <문명 이야기>를 집필한 문명사가이기도 하다. 그만한 규모의 대작을 써낸 저자라면 소회가 없을 리 없다. 어떤 소회일까란 궁금하여 듀란트 부부가 쓴 <역사의 교훈>(1968)을 펼쳐들었다. 역시나 두 저자가 방대한 저술을 마치고 맞부딪친 질문은 이런 역사 연구가 어떤 쓸모가 있느냐는 것이었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이 이 책에 들어 있다. 


두 저자는 전반부에서 역사와 지구와의 관계에서부터 생물학과 역사, 종족과 역사, 성격과 역사 등 다양한 주제에 걸쳐서 역사 연구에서 얻은 교훈들을 제시한다. 삶이 생존경쟁과 적자생존에 얽매이며 끊임없이 후손을 보아야 한다는 게 역사의 생물학적 교훈이라는 지적이 눈길을 끌지만 좀더 흥미로운 건 종교와 역사, 경제와 역사, 사회주의와 역사 등을 다룬 후반부이다.


저자가 보기에 인간들 사이의 불평등은 타고난 것이면서 문명의 복잡성과 더불어 더 심화된다. 빈부의 차이도 마찬가지다. 격차가 벌어지면 사회적 불안과 분노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데, 이것을 막아주는 것이 종교다. 나폴레옹이 명쾌하게 정의내리길, 가난한 사람이 부자를 죽이는 걸 막아주는 게 종교다. 만약 종교라는 ‘초자연적 희망’이 절망의 유일한 대안이 되어주지 못하면, 계급투쟁은 더 격화되며 공산주의라는 유토피아를 불러오게 된다. 종교와 공산주의는 마치 한 우물에 매달린 두 개의 양동이와 같아서 “하나가 아래로 내려가면 다른 하나가 올라온다. 종교가 쇠퇴하면 공산주의가 상승한다.” 마찬가지로 사회주의가 빈곤을 없애려는 노력에 실패한다면 다시금 초자연적 신앙의 복구를 눈감아주는 수밖에 없다. 

 


듀런트는 사람들마다 능력의 차이가 있기 마련이고 이에 따라 부의 집중은 자연스럽게 나타난다고 본다. 이러한 집중이 ‘가난한 사람들의 수적인 강세’가 ‘소수 부자들의 능력의 강세’를 맞먹는 지점에까지 도달하면, 이는 필연적으로 부를 재분배하는 정권이나 가난을 재분배하는 혁명으로 이행한다. 역사에는 부의 재분배가 성공을 거둔 사례도 있는데, 고대 아테네에서 솔론의 개혁이 그런 경우다. 그는 모든 채무자들의 부담을 덜어주고 부자에게는 가난한 사람보다 12배까지 많은 누진세를 물게 했다. 그리고 아테네를 위해 싸우다 전사한 사람들의 아들은 국가가 양육하도록 했다. ‘부자세’에 반대한 부자들과 토지 재분배를 요구한 과격파의 불만을 사긴 했지만 솔론의 개혁은 아테네를 혁명에서 구원하는 데 성공했다. 선제적 개혁이 혁명의 저지선이었던 것이다. 

 


솔론의 개혁과는 반대되는 사례가 로마 시절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 실패다. 호민관에 당선되었던 형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는 1인당 토지 소유를 제한해 토지를 재분배하자는 개혁안을 내놓았지만 원로원은 ‘재산 몰수’에 해당하는 조처라며 완강하게 반대했다. 티베리우스는 폭동에서 살해당하고, 동생 가이우스 그라쿠스가 형의 과업을 계승하려고 했지만 역시나 실패한 뒤에 자살한다. 이어서 가이우스의 추종자 3000명도 원로원 법에 의해 사형 당했다. 개혁에 대한 이러한 비타협적 거부가 가져온 결과는 이후 100년 동안 지속된 계급 전쟁과 내전이었다.


듀런트가 보기에 부의 집중은 자연스럽고 불가피하지만 이것은 주기적으로 폭력이나 평화적인 방법의 재분배 요구에 직면하게 한다. “모든 경제사는 사회 유기체의 느린 심장 박동이며, 부를 집중하고 억지로 재순환시키는 광대한 들숨과 날숨”이다. 그렇다면, 경제사가 보여주듯이 역사는 주기적인 반복에 불과한가? 진보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 듀런트는 교육의 확산이란 점에서 진보의 의미를 찾는다. 문명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각 세대로 새롭게 배워서 익혀야 하는 것이기에 교육은 문명에서 핵심적이다. 역사란 가치 있는 유산의 창조이자 기록이며 진보는 이런 유산을 잘 보존하고 전달하고 사용하는 것이다. 저자가 <문명 이야기>라는 방대한 저술에 몰두한 이유이면서, 우리가 그의 책을 읽어볼 만한 이유다.

 

14. 11.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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