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출판문화협회에서 펴내는 월간지 출판문화(587호)에 실은 초대석 칼럼을 옮겨놓는다. 수년 전 독서에세이를 연재한 적이 있는데, 이번에 다시 청탁을 받아 내년에도 격월로 독서에세이를 연재할 예정이다. 이 칼럼은 그 맛보기라고 해야겠다.

 

 

출판문화(14년 10월호) 책은 여전히 우리의 미래다

 

굳이 해보지 않아도 아는 일이 있는 것처럼 굳이 읽어보지 않아도 어림할 수 있는 글이 있다. 서평가가 <출판문화>의 초대석 지면에 쓸 수 있는 글이 그런 종류일 것이다. 책을 읽자, 라는 빤한 얘기. 그렇다, 흥미로울 게 전혀 없는 고정 레퍼토리다. 우리가 독서량 조사에서 매번 꼴찌를 맴도는, 다시 말해서 어지간히 책을 안 읽는 국민이라는 것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을 좀 읽어야 하지 않을까라는 염려 섞인 제안. 이 글은 그런 기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임을 미리 밝힌다. 늘 반복하는 주장에 한두 마디 더 얹을 수 있다면 나로선 최선이겠다.

 

책이 거의 모든 것이라고 생각하는 축에 속하지만 그렇다고 책에 대한 열혈 신자는 아니다. ‘독서 천국 부독서 지옥을 설파할 생각은 없다는 얘기다. 책에서 배운 것인지는 몰라도 내 나름으론 관용적이다. 다른 가능성에 대해서도 얼마든지 고려한다. 어떤 가능성인가? 어차피 책과 담을 쌓기로 한 것이 우리의 결연한 태도이자 문화라면(이건 비독서 문화라고 해야겠다), 그리고 책을 안 읽는 게 우리가 가장 잘할 수 있는 것 가운데 하나라면 그런 장기를 살리는 것도 한 가지 방책은 되지 않겠느냐는 것. 자문해보자. 잘하지 못하거나, 별로 하고 싶지 않은 일을 억지로 해서 좋은 결과를 얻은 경우가 과연 얼마나 되던가. 다른 선택지에 대한 기회비용까지 계산하면 역시나 좋은 선택은 아니었다는 결론이 나올 것이다. 소질이 없다면 일찍 접는 것도 차선은 된다. 어쩌면 한국인에게 독서 또한 그런 없는 소질은 아닐까.

 

예부터 책읽기를 즐겨온 자랑스러운 전통을 우리는 갖고 있다고도 말한다. 일리가 없지 않지만 딱히 맞는 말도 아니다. ()보다 문()을 숭상했던 조선조 선비들이 그 전통의 주역일 터이지만 문제는 책을 읽을 줄 아는 선비들이 결코 전체 인구의 다수는 아니지 않았느냐는 반론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일제 강점기 때 식민지 조선의 문해율이 30퍼센트를 넘지 않았다면 조선의 문해율 인구가 그보다 높았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즉 아무리 한쪽에는 독서를 즐기는 선비들이 있었다고 해도 인구의 절대 다수는 책과는 거리가 먼 문맹이었을 것이다. 책을 읽어온 내력 못지않게 안 읽어온 내력도 무시 못한다고 해야 온당하다.

 

물론 문해율만 놓고 보자면 사정은 달라진다. 어려운 한문 대신에 한글을 쓰게 된 덕이 크지만, 오늘날 한국인의 문해율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곧 한글 문장을 읽지 못하는 한국인은 거의 없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다. 30퍼센트 미만이던 문해율 인구가 거의 100퍼센트에 육박한다고 하면 말 그대로 뽕나무밭이 푸른 바다로 변한 수준이다. 그렇다, 나름 대단한 일이고 자부심을 가질 만하다. 그런데 그런 자부심이 자기도취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한 가지 의문도 해결해야 한다. 어째서 그런 높은 문해율에도 불구하고 한국인의 독서량은 형편없이 적은가라는 의문이다.

 

나는 두 가지 답변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한 가지 답변은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불분명하지만, 우리가 분명 책을 읽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안 읽기로 작정했다는 것. 운전면허를 갖고 있지만, 운전을 하지 않는 사람이 있고, 가수 뺨치는 소질을 갖고 있지만, 노래만은 극구 사양하는 사람도 있다. 마찬가지로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책을 읽을 수 있지만 다른 일에 손댄다는 것이다. 그것이 개인적인 선택이라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겠으나 집단적으로 그런 선택을 했다고 하면 그 이유는 연구과제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답변은 문해력이 곧바로 독서력, 곧 책을 읽을 수 있는 능력을 보증해주는 것은 아니라는 것. 다시 말해서 문해력과 독서력이 일치하는 건 아니라는 설명이다. 그래야 높은 문해율과 낮은 독서량 사이의 불일치가 설명된다. 이 경우 사람들은 책을 안 읽는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실상은 책을 읽을 능력이 부족해서 못 읽는 게 된다. 어느 쪽이 진실에 가까울까?

 

만약에 전자라면, 즉 다들 책을 읽을 수 있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읽지 않는 것이라면 문제의 해법은 관심을 독서로 돌리게끔 하는 것이다. 어떤 유인책이 효과적일지는 궁리해봐야겠지만 해법 자체가 복잡한 건 아니다. 물을 먹이기 위해 말을 강가로 데려가듯이, 어떻게든 책을 접하기 쉬운 곳으로 자주 데려가다 보면 어느 시점에서인가 국민의 절대다수가 독서국민으로 탄생하는 기적이 연출될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만약 후자라면, 즉 문해력은 습득했지만 독서력이 갖춰지지 않아서 책을 못 읽는 거라고 한다면, 문제는 좀 복잡하다. 일단 책은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읽을 수 있다는 착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우리가 책을 안 읽는 것이 아니라 못 읽는 것이라는 현실 직시가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 단계에서 독서력을 갖추기 위한 독서가 이루어져야 한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독서력을 갖춘다는 게 대단한 수고를 요구하는 힘든 일은 아니라는 점이다. 비유컨대 그것은 반복적인 독서를 통해서 우리 뇌에 독서근육을 만드는 일에 해당하다. 꾸준한 운동이 우리의 근력을 키워주는 것과 마찬가지로 꾸준한 독서는 우리의 독서근육을 발달시킨다. 책은 기분으로 읽는 게 아니라 근육으로 읽는다. 얼마만큼의 독서량이 있어서 독서근육이 만들어지는가에 대해서는 확정적으로 말할 수 없지만 대략 150권가량의 독서가 권장된다. 1~2, 혹은 길게 잡아도 3~4년에 걸쳐서 그 정도 분량의 책을 읽는다면 자연스레 독서근육이 길러질 수 있다. 그리고 일단 독서근육이 형성된 다음이라면, 독서는 한결 수월하고 재미있는 일이 될 것이다. 그러니까 이 경우에도 선후관계는 바뀔 수 있는데, 책은 재미있어서 읽는다기보다는 읽다 보면 재미있어진다.

 

독서력을 갖춘 독서국민이 되는 방도에 대해 적어보았는데,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자면 왜 굳이 그래야 할까란 회의도 검토해보아야겠다. 성인의 일 년 평균 독서량이 열권에도 미치지 못하는 현실에서, 온 국민이 책을 읽는 독서강국으로 가는 길은 너무 멀고도 험한 여정일 수밖에 없다. 왜 그런 고난을 감수해야 하는가. 몇몇 선진국의 사례가 있다손 치더라도 우리의 형편과 소질을 고려하지 않고 무작정 따라하기에 나서는 것은 몰주체적 행태 아닌가. 귤이 회수를 건너면 탱자가 된다는 말이 있듯이 남의 나라의 좋은 문화가 항상 우리에게도 좋은 문화가 되는 건 아니다. 다른 나라의 훌륭한 도서관시설과 독서문화가 부럽다지만, 과거에 우리가 토착 민주주의라고 불렀던 한국형 민주주의가 따로 있었던 것처럼, 한국형 비독서 문화도 충분히 가져봄직하다. 어쩌면 그것이 한강의 기적을 낳은 성공신화의 밑바탕이었는지도 모를 일 아닌가?

 

나로선 이런 회의도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세계에서 최초로 금속활자를 발명했다곤 하지만 우리에게 그 용도는 똑똑한 백성을 만드는 데 있지 않았다. 책을 널리 보급하여 누구라도 책을 읽을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 우리의 이상도 아니었다. 책은 읽어온 내력보다 안 읽어온 내력이 양적으로는 오히려 더 본질적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책을 읽자고 제안한다면 뭔가 대단한 비전이라도 제시해야 할 듯싶지만, 나의 동기는 소박하다. 우리가 잘 안 해본 걸 한번 해보자는 것.

 

책을 안 읽는 건 너무도 오랫동안 줄기차게 해왔다. 부독서가 우리의 적성에 맞는지도 모르겠다. 그뿐 아니다. 책을 직접 구매한 독자의 경우도 대략 15퍼센트 정도만 완독한다고 하니까 우리의 비독서는 상당한 스펙트럼을 자랑한다. 책이 없어서 안 읽을뿐더러 있어도 안 읽는 것이니 말이다. 때문에 식상하다. 여전히 책을 읽는 사람이 신기하다고 생각할 게 아니라 꾸준히 책을 안 읽는 사람이 식상하다고 생각해보는 건 어떨까. 그래서 좀 덜 식상한 선택을 해보는 건 어떨까. 그래서 놀라운 반전의 드라마를 써보는 건 어떨까. 한국인들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는 드라마!

 

 

이게 아주 이상한 드라마는 아니다. 디지털 시대의 구루였던 스티브 잡스의 사례만 하더라도 그렇다. 잡스는 애플사의 아이패드가 출시되던 날 아이들의 반응은 어떠냐는 기자의 질문에 자기 아이들은 써본 일이 없다고 대답했다. 그가 선호했던 건 아이들과 식탁에 앉아 책과 역사에 대한 대화를 나누는 것이었다. 그가 아이들에게 권한 건 아이패드가 아니라 책이었다. 인터넷 시대에 책은 너무 낡은 것 아니냐는 낡은 생각을 뒤집을 필요가 있다. 독서국민은 우리가 아직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것이며 책은 여전히 우리의 미래다.

 

14. 10. 1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