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서재에 글을 올린다. 프라하에서 며칠 보내고(서재 바탕화면의 프라하 성을 며칠간 눈앞에서 보았다) 어제 오후 베를린에 도착해 하루 일정을 마쳤다. 한국은 15일 새벽 5시지만 7시간 시차가 있어서 이곳은 14일 밤 10시 좀 넘은 시각이다. 도중에 핸드폰이 방전돼 먹통이 되는 바람에 한국 소식은 노트북을 통해서만 확인하고 있었다. 포스팅이 늦어진 건 마우스가 고장났기 때문인데, 오늘은 저녁을 먹고 호텔 근처 전자제품 양판장에 가서 최저가 마우스를 하나 구입해 겨우 포스팅이 가능해졌다(긁어오기 기능이 필요해서). 지난 일요일 중앙선데이에 실린 '로쟈의 문학을 낳은 문학'을 옮겨오는 게 베를린에서의 안부 인사다. 몇주 순연된 연재라 쓰기는 꽤 오래 전에 쓴 글로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과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잠자는 미녀>를 비교하여 다뤘다. 가와바타의 작품에 대한 마르케스의 언급은 산문집 <꿈을 빌려드립니다>(하늘연못, 2014)에서 읽을 수 있는데, 몇 가지 번역상의 의문점은 나중에 따로 다루기로 한다.

 

 

중앙선데이(04. 08. 10) “아흔 살 되는 날, 뜨거운 밤을 내게 선사하고 싶었다”

 

올 봄 세상을 떠난 마르케스가 공식적으로 발표한 마지막 작품은 『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2004)이다. “아흔 살이 되는 날, 나는 풋풋한 처녀와 함께하는 뜨거운 사랑의 밤을 나 자신에게 선사하고 싶었다”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이 중편의 구상은 20여 년이나 거슬러 올라간다. 1982년 파리에서 뉴욕으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그는 우연히 젊고 아름다운 여인과 나란히 앉게 된다. 탑승하기 위해 줄을 서면서 그녀를 처음 보았을 때 ‘평생 본 여자 중에 가장 멋진 여인’이라고 생각했던 여인이다.

어떤 인연이 이어졌을까? 대단하진 않다. 아름다운 여인은 승무원에게 물 한 잔 갖다 달라고 하더니 수면제 두 알을 먹고는 여덟 시간이 넘는 비행시간 내내 잠만 잤기 때문이다. 등을 돌린 채 태아의 자세로 숨소리 한 번 내지 않고 평온하게 잠든 여인을 보면서 마르케스는 그녀의 마력에 빠진다. 그리고 대서양 2만 피트 상공에서 잠자는 미녀를 애타게 관찰하는 자신의 상황이 일본 작가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작품 속 상황과 유사하다는 걸 발견한다. 가와바타가 1960년대에 쓴 말년작 『잠자는 미녀』(원제 『잠자는 미녀의 집』) 말이다.

마르케스는 1968년 가와바타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할 때 그를 처음 알게 되었다. 그 후 일본 작가들과 교분을 갖게 되면서 일본 문학에 몰입, 가와바타는 물론 미시마 유키오, 엔도 슈사쿠, 오에 겐자부로, 다자이 오사무 등의 작품을 섭렵했다. 그러면서 일본 소설과 자신의 소설 사이에 공통점이 많다는 걸 확인하지만, 마르케스가 진짜 쓰고자 했던 건 『잠자는 미녀』 같은 작품이었다.

“짓궂은 장난일랑 하지 말아 주세요. 잠들어 있는 아가씨 입에 손가락을 집어넣는다거나 하는 것도 안 돼요, 라고 여자는 에구치 노인에게 다짐을 받았다.” 『잠자는 미녀』의 서두다. 에구치 노인은 예순일곱이고 친구의 소개로 ‘잠자는 미녀의 집’에 처음 들러 여주인에게 주의사항을 듣는다. 바닷가에 있는 이 유곽에서는 남자로서의 능력을 상실한 노인들을 상대로 알몸으로 잠든 앳된 처녀들과 하룻밤을 보내도록 해 준다. 여자들은 특수한 수면제를 먹고 잠이 든 상태라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 “아가씨는 단지 돈이 필요해서 잠들어 있는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돈을 지불하는 노인들에게 이런 아가씨 옆에 눕는 것은 이 세상에 더 없는 기쁨임에 틀림없다.”

소설에서 에구치는 이 집을 다섯 차례 찾아 잠자는 미녀들과 밤을 보내며 지난 60여 년 동안 자신이 만난 여자들을 떠올린다. 그는 아직 남성으로서의 능력을 잃지 않았기 때문에 이 집을 찾아오는 다른 노인들의 진정한 슬픔이나 기쁨을 통절하게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에구치 또한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서 잠에 빠져 있는 아가씨와의 교제에서 ‘허무한 결핍’을 느낀다. “이 요부 같은 아가씨의 눈을 보고 싶다. 목소리를 듣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잠든 아가씨를 손으로 더듬기만 하는 유혹은 에구치에게 그리 강렬하지 않고 오히려 비참한 생각을 수반하는 것이었다.”

 



『잠자는 미녀』의 에구치 노인이 삶의 허무를 절실하게 깨닫는다면, 『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의 노인은 사정이 좀 다르다. 이 소설에서 ‘나’는 독신이며 학교 교사로서, 그리고 신문의 편집자와 칼럼니스트로서 일생을 보냈다. 평생 어떤 여자와 잠을 자든 돈을 주지 않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오십 줄에 들어설 때까지 작성한 기록에 따르면 한 번 이상 잠을 잔 여자는 총 514명이었다. 이제 아흔에 이르러 그는 생이 얼마 남지 않았으리라고 예감하고 ‘풋풋한 처녀’와의 뜨거운 밤을 자신에게 선물하고자 한다. 이십 년 만에 연락을 받은 단골집 포주 로사는 ‘나’의 요구를 어렵사리 들어준다. 생일날 밤늦게 찾아간 유곽에는 한 소녀가 자고 있었다. 예기치 않게 알몸으로 누워 자고 있는 소녀를 바라보면서 하룻밤을 보낸 ‘나’는 새로운 깨달음을 얻는다. “그날 밤 나는 욕망에 쫓기거나 부끄러움에 방해받지 않고 잠든 여자의 몸을 응시하는 것이 그 무엇과도 비할 바 없는 쾌락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문제는 이 경험이 ‘나’를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신하게 해 주었다는 데 있다. 그는 자신의 여인에게 보내는 연애편지 형식의 칼럼을 쓰기 시작했고, 아흔 살에 비로소 첫사랑의 감정을 느꼈으며 사랑의 고통에 신음했다. “오, 가련한 나, 이것이 사랑이라면, 얼마나 고통스러운가!” 같은 시 구절을 비로소 마음속 깊이 느낄 수 있었다. 너무 뒤늦은 건 아닌가?

하지만 놀랍게도 마르케스의 인생관은 가와바타와 전혀 다르다. 아흔 번째 생일을 보낸 ‘나’는 인생이 그렇게 다 흘러가 버렸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석쇠에서 몸을 뒤집어 앞으로 또 90년 동안 나머지 한쪽을 익힐 수 있는 유일한 기회”라고 생각한다! 가와바타 소설의 허무주의는 마르케스의 소설에서 강력한 인생 예찬으로 변모한다. “그러니까 나는 건강한 심장으로 백 살을 산 다음, 어느 날이건 행복한 고통 속에서 훌륭한 사랑을 느끼며 죽도록 선고받았던 것이다.” 자기 작품과 일본 소설들 사이에 많은 공통점이 있다고 한 말은 마르케스의 농담인지도 모르겠다.

 

14. 08. 1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