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달 책&(429호)에 실은 '인문학 크로스'를 옮겨놓는다. 진화론과 창조론을 주제로 삼아 몇 권의 책을 읽은 독후감이다. 분량상 충분히 다루지 못한 대목은 나중에 따로 기회를 마련해볼 생각이다.

 

 

책&(14년 7월호) 진화론과 창조론 끊이지 않는 논쟁

 

이번 주제의 길라잡이가 된 책은 신학자 신재식 교수의 <예수와 다윈의 동행>(사이언스북스)이다. 제목에서부터 암시되지만 그리스도교와 진화론의 공존을 모색하는 게 저자의 의도이다. 이미 종교학자 김윤성 교수, 과학자 장대익 교수와 공저한 <종교전쟁>(사이언스북스)에 참여하여 종교와 과학의 공존가능성을 모색한 바 있는 저자가 자신의 생각을 좀더 본격적으로 전개한 책이다. ‘종교’와 ‘과학’이라고 뭉뚱그렸지만 구체적으론 기독교(예수)와 진화론(다윈)이다.


보통은 서로 무시하거나 기피하는 게 한국사회에서 기독교와 진화론이 보여주는 관계의 양상인데, 때로는 정면으로 충돌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2012년의 고등학교 과학교과서 논란이 대표적이다. 한 근본주의 개신교 성향의 단체에서 시조새에 관한 기술과 말의 진화에 관한 기술 일부를 삭제해달라고 교육과학기술부에 청원했고 이를 몇 곳의 교과서 출판사가 수용하자 과학계가 반발하면서 논란이 불거졌다. 과학학술지 <네이처>에서까지 “한국, 창조론의 요구에 항복”이란 기사를 실으면서 국제적인 이슈가 되기도 했다. 그런데 이런 떠들썩한 진행과정과는 달리 한국 개신교 교계는 이 사안에 대해 침묵으로 일관했다. 저자에 따르면 “한국 교회에서 진화론은 여전히 거론조차 해서도 안 될 ‘금기’이며 기피 대상”이어서다. 그는 이런 금기를 넘어서는 첫 걸음을 떼고자 한다.    


일단 저자는 다윈의 진화론이 가져온 혁명을 소개하고 그것이 갖는 함축을 해명한다. 다윈의 진화론이란 무엇인가. 자연선택을 핵심개념으로 하는 그 메커니즘은 네 가지로 정리된다. 첫째, 자연계에서는 기하급수적인 증가의 원리에 따라서 생존 가능한 개체의 수보다 더 많은 개체가 항상 탄생한다. 둘째, 대부분의 자연적인 개체군에는 변이가 존재하며 변이 중 어떤 것은 유전된다. 셋째, 개체들 사이에서 생존 투쟁이 벌어지고 각 생물들은 서로서로 경쟁하게 된다. 넷째, 이러한 생존투쟁을 통해 조금이라도 이로운 특성은 계속 누적되어 새로운 종이 생겨나도록 작용한다. 그리고 여기에 전제가 되는 명제는 지구가 수십 억 년의 오랜 역사를 갖고 있으며 생물은 그러한 조건에서 발생해 간단한 형태에서 복잡한 형태로 진화해왔고 인간 역시 다른 동물과 마찬가지로 진화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진화론이 함축하는 자연주의적 세계관이라고 한다면, 당장 이 세계를 창조주가 계획하고 설계했으며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라는 기독교의 세계관과 충돌한다. 흔히 창조-진화 논쟁으로 불리는 이 충돌을 가리키는 이름이 ‘종교전쟁’이다.


‘전쟁’이라고 해서 창조론과 진화론이 대등하게 맞서는 것은 아니다. 다윈이 <종의 기원>을 발표한 이래 150년이 지나는 동안 발견된 진화의 증거들이 압도적이기에 비록 진화론도 진화해왔다고는 하지만 진화 자체는 자명한 사실로 간주된다. 마치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돈다는 사실과 마찬가지의 사실성이다. 신학(theologia)을 신(theos)에 대한 합리적 학문(logos)으로 규정하는 저자는 기독교가 합리주의 정신을 배제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종교와 과학이 전쟁 상태에 놓여있다는 이미지는 만들어진 것이며 신학적 합리주의와 과학적 합리주의는 상통할 수 있다고 본다. 과학사가 로버트 머튼을 인용하면, 오히려 “청교도 윤리를 잉태한 합리주의와 경험주의의 결합은 근대 과학 정신의 본질을 형성한다.” 종교와 과학의 관계가 반드시 전쟁으로만 치달을 필요는 없는 것이다.


저자는 종교전쟁이 진화론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무관심과 몰이해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다윈의 진화론을 비난하는 기독교인들 가운데 <종의 기원>을 읽었거나 생물학 입문서라도 제대로 읽은 사람이 드물다는 지적이다. 그와 함께 주목할 만한 것은 다윈주의에 대한 거부와 반진화론 운동이 미국의 개신교 교단을 중심으로 전개됐다는 점이다. 반진화론이야말로 참된 신앙을 지키는 것이며 미국의 정신을 살리는 길이라고 그들은 믿는데, 이것은 미국적 특징인 동시에 특히 미국 남부 지역의 특징이다. 창조-진화 논쟁은 철저하게 미국 기독교 역사의 경험과 관련된 논쟁이며, 따라서 보편적인 문제라기보다는 상당히 국지적인 문제이다. 다윈의 진화론에 대해서 유독 강한 거부감을 보인 나라가 미국이기 때문인데, 그것은 주로 미국인의 종교적 성향 때문이다.

 

<과학전쟁>에서 장대익 교수가 소개한 2004년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미국인 중 62퍼센트가 공립학교에서 진화론과 함께 창조론도 가르쳐야 한다고 응답했고, 55퍼센트의 미국인은 신이 인간을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창조했다고 굳건히 믿는다. 이러한 신앙적 보수주의를 토대로 나온 것이 창조과학운동과 지적 설계론이다. 창조과학운동은 성서의 창조설을 과학적으로 입증하려는 운동이고, 지적 설계론은 진화론의 빈틈을 창조주의 ‘지적 설계’에 대한 반증으로 삼으려는 입장이다. 하지만 이 두 가지 운동과 입장이 모두 과학으로서 자격미달이며 고작해야 사이비과학에 불과하다는 게 장 교수의 평가다.

 

한국에서도 창조-진화 논쟁이 부각된 것은 한국 기독교계가 미국 보수주의 기독교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인데, 1970년대 들어서 미국에서 창조과학운동이 일어나자 미국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이공계 교수들을 중심으로 한국에서도 1981년 한국창조과학회가 설립된다. 그리고 창조론 진영은 1990년대에는 미국의 지적 설계론을 국내에 소개하는 데 주력해왔다. 미국의 창조론 ‘직수입 대리점’인 셈인데, 아직까지 이 문제와 관련한 법정 투쟁까지는 벌어지지 않은 것이 미국과의 차이라면 차이다. 1925년 미국 테네시 주에서 열렸던 스콥스 재판(일명 ‘원숭이 재판’)과 1981년 미국 아칸소 주에서 열렸던 동등시간 교육법(진화론을 가르치는 것과 동등한 시간 동안 창조론도 가르치도록 요구한 법) 재판 등이 미국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법정 투쟁들이다.


이 중 스콥스 재판에 대해서는 김윤성 교수가 간략하게 정리하고 있는데, 발단은 1925년 테네시 주가 공립학교에서 진화론 교육을 금지하는 법안을 통과시킨 것이었다. 미국의 진보진영은 즉각 이에 반발했는데, 특히 미국시민자유연맹(ACLU) 쪽에서는 법정 투쟁을 통해서 진화론 교육 금지법을 사회적으로 이슈화하고자 했다. 존 토머스 스콥스가 자원자로 나서서 학교에서 과학시간에 진화론을 가르치다가 기소되었고, 이 재판에서 당대의 명사였던 윌리엄 제임스 브라이언과 클래런스 대로가 정부 측과 미국시민자유연맹 측을 대변해 유명한 법정 공방을 벌였다(이 재판은 영화와 연극으로도 만들어졌다). 재판은 진화론 교육 금지법의 문제점을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됐지만 스콥스는 벌금형을 선고받았고 교육계와 출판계에서는 논란을 두려워해 오히려 진화론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결과를 초래했다.


과학 저널리스트 에드워드 라슨의 <신들을 위한 여름>(글항아리)는 바로 스콥스 재판의 진행과정과 문제의 발단에서부터 뒷이야기까지 자세히 다룬 논픽션이다. 저자는 이 재판의 교훈을 “이성의 힘이 종교적 반계몽주의를 내몰았다는 것”에서 찾지만 역설적으로 반진화론은 결코 줄어들지 않았다. 오히려 미국의 보수 기독교 하위문화 내부에서는 계속 성장해나간 추세다. ‘원숭이 재판’ 이후 80년도 훨씬 더 지난 시점이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은 것은, 그래서 ‘예수와 다윈의 동행’도 요원한 것은 변함없는 종교적 성향 때문이다. 1950년대와 마찬가지로 2000년대에도 미국의 10명 중 9명이 신의 존재를 믿으며, 그 중 상당수가 창조설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인다. 저자의 전망의 부정적인 것은 당연해 보인다. “역사가 미래를 예측하는 지표라면 한동안은 악천후가 이어질 것이다.”

 

14. 07. 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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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달 2022-04-27 19: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