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 한겨레의 '로쟈의 번역서 읽기'를 옮겨놓는다. 포크너의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민음사, 2003)를 다뤘는데, 번역본은 <내가 누워 죽어갈 때>(부북스, 2013)란 제목으로도 나와 있다(번역은 둘다 교정돼야 할 부분들이 있다). <소리와 분노>(문학동네, 2013)에 뒤이어 읽거나 앞서 읽으면 좋은 작품이다. <내가 죽워 누워 있을 때>는 작년에 영화로도 만들어졌는데, 개봉까진 아니더라도 DVD판 정도는 출시되길 기대한다.   

 

 

 

한겨레(13. 02. 24) 포크너의 미국 남부 가난한 집안 얘기

 

미국 현대문학의 가장 위대한 작가로 꼽히는 윌리엄 포크너의 대표작은 <소리와 분노>(1929)이지만 그가 연이어 발표한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1930)도 ‘명불허전’에 속한다. 고투 끝에 완성한 <소리와 분노>와는 달리 포크너가 불과 6주 만에 단숨에 쓴 작품이기도 하다. <소리와 분노>의 난해함에 당혹했던 독자라도 편하게 읽을 수 있는 소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주 만만하지만은 않다. 15명의 등장인물이 들려주는 59개의 독백이라는 형식 자체가 독서의 긴장을 늦춰주지 않는다.

 

어떤 이야기를 담고 있는가. <소리와 분노>가 미국 남부의 귀족 콤슨 가문의 몰락을 다뤘다면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는 빈곤한 번드런 집안 얘기다. 이야기는 오남매의 어머니 애디 번드런이 병상에 누워 있고 목수이기도 한 장남 캐시는 마당에서 어머니의 관을 짜고 있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둘째 아들 달과 셋째 아들 주얼은 자칫 어머니의 임종을 못 할 걸 알면서도 3달러를 벌기 위해 길을 나서고 아버지 앤스는 이를 만류하지 않는다. 앤스는 젊을 적에 바깥에서 일하다 한번 병을 얻은 적이 있다. 그 뒤에는 땀을 흘리게 되면 죽을 거라고 믿는 위인이다. 가장이 힘들여 일하지 않기에 모든 일은 아내 애디와 자녀들의 몫이 된다.

 

작품에서 단 한 번 나오는 독백에서 병상의 애디는 앤스와의 불행한 결혼생활을 회고한다. 거슬러 올라가면, 인간이 사는 이유는 죽음을 준비하기 위해서라는 생각을 늘 주입했던 그녀의 아버지가 불행의 시작이었다. 애디는 고독에 갇혀 살았다. 남편 앤스도 그 고독을 깨뜨려줄 수 있는 인물이 아니었다. 오히려 애디는 앤스가 말하는 사랑이 공허한 말의 껍질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앤스에게 아이들을 낳아 주지만 자신은 아이를 원하지 않았다. 남편에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것이 자기의 의무라고 믿는다. 그녀에게 남편 앤스는 이미 죽은 존재다. 매질을 하면서도 다른 가족 몰래 더 아낀 셋째 아들 주얼은 혼외관계로 얻은 자식이다. 그녀는 속죄의 의미로 앤스에게 딸 듀이 델과 늦둥이 막내아들 바더만을 낳아준다.

 

 

원하지 않은 둘째 아들이 태어났을 때 애디는 자신이 죽으면 40마일이나 떨어져 있는 친정의 가족묘지에 묻어달라고 미리 약속을 받아낸다. 남편에 대한 애디식 복수다. 번드런 가의 가족묘지가 가까이에 있었지만 최소한 죽어서는 ‘번드런’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그런 애디가 세상을 뜨자 남은 가족, 즉 남편과 자식들의 여정이 시작된다. 더운 여름날 애디의 관을 마차에 싣고 묘지가 있는 읍내까지 가는 열흘간의 간단치 않은 여정이다. 홍수가 난 강을 건너다가 큰 곤경을 치르고 착란을 일으킨 아들 달이 헛간에 불을 지르는 바람에 관이 불타버릴 뻔한다.

 

무모한 여정의 끝에 다리를 다친 캐시는 불구가 되고 달은 정신병원으로 보내진다. 정작 삽도 챙겨오지 않았던 아버지 앤스는 아내의 장례를 치르자마자 번듯하게 의치를 해 넣고 ‘오리같이 생긴 여자’를 데려와 새엄마로 아이들에게 소개한다. 자식들이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봉변만 당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그는 모든 걸 얻는다. “내겐 시련의 연속이군”이라는 그의 입버릇이 무색하다. <소리와 분노>에서와 마찬가지로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에서도 아버지의 무능력, 어머니의 무관심과 편애가 자식들에게 상처를 주고 불행으로 이끈다. 그게 인생이야, 라고 말하기엔 너무 부조리한 불행으로.

 

13. 02.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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