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번 '최근에 나온 책들(37)'과 관련하여 내게는 '좋은 일'과 '나쁜 일'이 있었다. '좋은 일'이란 건 나의 궁색한 소리에 한 독지가께서 한꺼번에 다섯 권의 책을 '선물'로 보내주신 것. 거기에는 내가 그 글에서 언급한 지젝 책 두 권과 박노자의 책이 포함돼 있었다. 처음엔 선의를 사양했지만, 나중에 갚으면 된다라는 말씀에 넙죽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 책들을 오늘 받았다(이 분은 나의 주소지도 알고 있었다). 고맙고 기쁜 일이다.

반면에, '나쁜 일'이란 건 강유원씨에 대한 언급과 벤야민 번역에 대한 지적이 때아닌 구설수에 올랐다는 것. 나로선 번역 텍스트들에 대한 자세한 읽기를 5월중에 시도해보겠다고 했건만 한 성급한 독자의 선의/악의 때문에 성마른 비난들에 내몰렸다(물론 일부에 국한되는 얘기이긴 하지만, 그것이 인문학에 대한 과도한 열기의 분출인지 종교적 열정의 갈급한 표출인지는 아직 판단하기 어렵다. 그에 대한 성급한 판단은 잠시 미뤄두도록 하겠다). 그 대부분의 비난들에서 내가 별로 얻을 게 없었다는 건 유감스럽다.

텍스트는 읽으면 되는 것이고, 강유원씨의 작업도 기본적으로 텍스트에 대한 읽기이다. 하지만 모든 언어의 텍스트를 그 모든 언어로 읽을 수는 없으므로 번역이 필요하며 또 요긴하다. 번역의 중요성과 의의에 대해서는 항상 강조해온 바이므로 다시 반복하지 않겠다. 또 번역이 중요한 만큼 번역에 대한 비판, 즉 번역의 장단점을 짚어보는 일 또한 중요하다는 건 당연하다(강유원씨 또한 이 일에 앞장서 온 사람이다). 그리고 그런 일에 사적인 감정이라는 건 우습고도 같잖은 것이다(일면 면식도 없는 강유원씨에 대해서 내가 사적인 감정을 갖고 있을 리 만무하다). 중요한 건 텍스트 읽기이고, 이해이다. 그걸 위해서 서로가 도움을 줄 수 있고 서로의 오류는 교정받을 수 있다. 나머지는 나의 관심사항이 아니며, 번역에 대한 나의 지적에 대해서도 똑같은 논리가 적용되기를 기대한다.

어쨌든 좋은 일과 나쁜 일이 있었으며, 좋은 일에 대해서는 오래 기억해두도록 하고 나쁜 일에 대해서는 곧 잊어버릴 작정이다. 그게 정신건강에 도움이 될 것이기에. 한편, 당부의 말씀을 덧붙이자면, '최근에 나온 책들'이라는 연재는 나의 블로그와 내가 드나드는 카페에만 올려놓는 것이므로 허락없이 다른 공간에 퍼나르는 일은 삼가해주셨으면 한다. 글의 성격상 이 연재는 순전히 나의 '기억'을 보조하기 위한 것이다(물론 몇 분의 지인들 정도는 염두에 두고 있다). 그것이 다른 분들의 기억 보조에 사용되는 건, 가능한 일이긴 하나 나로선 부수적인 일이다. 이건 기본적인 전제이다. 거기에 대해서 왈가왈부하는 일은 내가 보기에 주제넘는 일이면서 당나귀들의 일이다. 나와 친분이 있는 사이가 아니라면 말이다.

 

 

 



지난주에 나온 책들 가운데에서도 다섯 권을 꼽는 일은 식은 죽먹기이다. 아마도 몇 권은 어림짐작으로 맞히실 수 있을 것이다. 가장 먼저 꼽아야 하는 것은 당연하게도(!) 에드워드 윌슨의 <통섭: 지식의 대통합>(사이언스북스)이다. 나는 언제가 '윌슨의 모든 책'이라고 쓴바 있으며(나는 한 리뷰에 '에드워드 윌슨과 나'라고까지 적었다. 비록 '객기'일지언정 아주 근거가 없지는 않다), 그의 <통섭(Consilience)> 또한 예외는 아니다(사회생물학과 생물철학쪽 서가를 보니 이 책의 복사본이 뉘어져 있다). '사회생물학'을 창시한 지 30년만에 우리말로 번역되는 그의 또다른 주저이기에 반갑고, 무엇보다도 최적임의 역자들이 수고해준 것이 미덥다(개인적인 얘기지만, 몇 년 전 내가 이 책을 대출했을 때 선행 대출자로 역자의 이름을 볼 수 있었다).

책은 부제에 걸맞게 학문과 지식의 대통합에 대한 윌슨의 구상을 펼쳐보인다, 고 한다. 이미 <사회생물학>에서 그 구상의 얼개를 내비친바 있지만, 윌슨이 보기에 학문은 인문학과 자연과학으로 양분되면서 사회과학은 모두 양극, 특히 생물학과 인문학으로 흡수될 거라는 게 윌슨의 전망이다(생물학은 우리의 물질과 경험을 다루고 인문학은 텍스트를 다룬다). 한 서평에 따르면, 이 책은 윌슨의 여러 책들 가운데 "가장 현란한 지적 파노라마"를 보여준다. 그러니 멀미약을 지참하고서라도 한번 읽어봄 직하다. 데리다 같은 '현란한 몽매주의자'에 대한 비판도 나온다고 하니까 주변적인 구경거리들도 놓치지 말아야겠다.

 

 

 


두번째 책은 크로포트킨의 <만물은 서로 돕는다>(르네상스). 재작년에 자서전이 번역돼 나온 이 러시아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는 지리학자이자 동물학자이기도 하며 자연세계에서 적자생존이 아닌 상호부조의 원리가 진화의 동력이라는 걸 이 책에서 입증하고자 한다. 즉 "상호부조야말로 상호투쟁과 맞먹을 정도로 동물계를 지배하는 법칙"이며 그 이상이다. "상호부조는 어떤 개체가 최소한의 에너지를 소비하면서도 최대한 행복하고 즐겁게 살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더라도 상호부조에 대해서만 강조하는 건 자연계의 일면만을 강조하는 게 될 것이다(악어와 악어새는 서로 우호적이지만, 악어와 악어사냥꾼은 서로 적대적이니까).

사실 비슷한 논지의 책이 이미 소개돼 있긴 하다. 10년 전에 나온 <새로운 생물학>(범양사출판부, 1994)은 "자연생태계를 잔인하고 냉담한 사냥터로 보는 다윈의 적자생존론을 부정하고 자연속에서 생물들이 협동과 조화를 통해 살아가고 있음을 밝힌" 새로운 생물학을 소개하고 있다. 또 매트 미들리의 <이타적 유전자>(원제는 <미덕의 기원>)도 시작은 바로 크로포트킨의 탈옥 에피소드이다. 크로포트킨의 삶 자체가 상호부조론의 실례였던 것. 상호부조론 혹은 '이타성'이라는 것도 기본적으로는 유전적/생물학적 이익과 관련되는바, 그런 이익을 산출하는 알고리듬에 대해서는 이미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을유문화사)에서 과학적 통찰과 상세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게임이론으로 푸는 인간 본성 진화의 수수께끼'라는 부제를 단 최정규의 <이타적 인간의 출현>(뿌리와이파리, 2004)는 그에 대한 보다 자세한 해설을 담은 국내서이다. 

 

 

 

 

'아나키즘 사상의 생물학적 기초' 라 평가되는 신간은 영역에서 옮긴 듯한데, 말하자면 중역본이 될 테다. 나는 작년에 모스크바에서 크로포트킨의 자서전을 헌책방에서, 그리고 그의 선집인 <아나키야>를 새책방에 구입한바 있다. 어느 구석에 처박혀 있는지는 확인해봐야겠지만, 기억에 이 '상호부조론'도 포함돼 있었던 듯하다. '원전주의자'들에 따르면, 나는 이 책에 대해서 제법 읽고 말할 만한 처지가 된다. 하지만, 그들의 논리에 따라, 바쿠닌과 크로포트킨을 따르는 아나키스트들은 모두 러시아어를 배워서 러시아어로 책을 읽어야 하는 것인지? 물론 아니다. 원전 형이상학은 현전의 형이상학만큼이나 지지될 수 없는 것이다. 그건 그냥 그럴 듯한 기분에 지나지 않는 것(어떠한 텍스트도 의미가 자명하게 현상하지 않는다. 의미는 번역/결정되는 것이고 해체/재구성되는 것이며, 발견/발명되고 생산/소비되는 것이다). 직접성의 환상에 따라, 기분에 따라 공부하는 이들이 아직도 드물지 않은 건 유감스런 일이다.

 

 

 

 

세번째 책은 카사노바의 자서전 <불멸의 유혹>(휴먼&북스)이다. 그의 자서전은 12권에 이르는 방대한 규모를 자랑한다고 하니까(그러니 나름대로 '숭고한' 책이다! '수학적 숭고' 말이다) 번역서의 분량이 912쪽이라 하더라도 그 일부에 지나지 않는 것. 재작년에 나온 <카사노바의 스페인 기행>(예담, 2002)도 그 자서전의 일부이니까 (겹치지 않는다면) 나란히 구입해놓을 만하다.

물론 내내 "마리나는 체실리아보다 나이는 어렸지만 몸은 더 성숙했다. 그녀는 언니보다 자기가 낫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려고 안달이었다. 그녀 속에서 활활 타오르는 불길을 보면 그녀 말이 맞는 것 같았다. … 그러다 어느 순간, 자기가 처녀가 아니란 사실을 내가 알고 기분이 나빠질까봐 두려워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라는 식의 내용만을 읽게 된다면 약간은 낯이 뜨거워질 수도 있겠지만, 카사노바의 자서전은 나름대로 고전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책이다. 그건 내가 이 책을 읽어서 하는 소리가 아니라 믿을 만한 작가 츠바이크가 그렇게 말하고 있기 때문에 하는 소리다. 츠바이크의 카사노바론은 <천재와 광기>(예하, 1993)에 실려 있으며, 아주 훌륭한 책이다. 거기에 실린 톨스토이론, 도스토예프스키론, 니체론 등이 모두 일급의 에세이이다.

 

 

 


네번째 책은 쓰지 유미의 <번역과 번역가들>(열린책들). 현직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는 저자가 유럽에서 활동하고 있는 동료 번역가들의 육성을 담은 책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인터뷰집인 셈. 같은 저자의 <번역사 산책>(궁리, 2001)이 이미 소개된바 있다. 그 책에서 인용되고 있는 한 구절: "번역은 한마디로 '말의 무게를 다는 것’이다. 저울의 한쪽에 저자의 말을 얹고 또 한쪽에는 번역어를 올려놓는다. 그리고 이 둘이 균형을 이룰 때까지 작업을 계속해나간다. 하지만 저울에 올리는 것은 사전에 정의된 말이 아니라 저자의 말이다. ‘저자의 정신이 투입되어 스며들어 있고 거의 감지할 수 없을 정도이긴 하지만 깊은 수정이 가해진’ 말이다. 그것은 살아서 고동치는 말이며 원문에서 벗어나 있다 하더라도 다리를 뻗어 작품 전체와 긴밀히 얽혀 있다. 저울에는 그 생명의 무게가 얹힌다. 따라서 저울의 또 한편에도 ‘똑같은 생명의 리듬을 타고 움직이는 등가의 무게’가 필요하다."

조금 첨언하자면, 그때 저울에 다는 건 비단 단어만이 아닌 '말'의 여러 수준이다. 문장과 문단과 텍스트 전체가 거기에 올려져야 한다는 얘기. 그리고 궁극적으로 저자 자신을 올려놓아야 할 것이다. 그럴 경우 톨스토이는 한국어 톨스토이로, 도스토예프스키는 한국어 도스토예프스키로 다시 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다섯번째 책은 메를로퐁티의 논문 번역서인 <간접적인 언어와 침묵의 목소리>(책세상문고)이다. 1952년에 발표된 논문은 나중에 단행본 <기호들>(1962)에 첫 논문으로 수록되었다. 소개에 따르면, 이 책은 "분량은 짧지만 메를로 퐁티 철학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몸의 현상학 그리고 회화와 언어의 표현 형식에 대한 탈근대적 이해 등 그의 존재론과 예술론을 집약적으로 살펴볼 수 있도록 해준다. 이 책에서 그는 언어와 회화는 개념적 언어가 아닌 침묵으로 표현되며, 철학은 예술의 표현 형식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나는 영역본 <기호들>을 갖고 있으며(이 책은 러시아어로도 번역돼 있다), 번역서의 초반부를 좀 읽어보았다. 예상할 수 있는 바이지만, 소쉬르의 언어학과 관련한 대목이 먼저 나오는바, 언어학에 대한 예비적인 지식이 독해에 필수적임을 알 수 있었다. 더불어, 미학 전공인 역자가 다소 미진하게 번역한 대목도 확인할 수 있었다. 원전주의자들의 기대와는 다르게, 이런 건 굳이 불어 원본과 대조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내용이다. 이런 내용을 포함하여, 메를로퐁티의 텍스트와 벤야민 텍스트의 번역 읽기는 5월중에 시간을 내서 시도해보도록 하겠다. 관심있는 다른 분들이 수고를 덜어준다면 나로선 고마운 일이 될 것이다...

05. 05. 02.

P.S.1. '네바 강의 환각'과 관련한 보충. 지난 토요일 한겨레에는 '김윤식 교수의 문학산책'란이 연재됐는데, '작가의식의 방법적 승리'의 세 가지 사례로 노교수는 (1)최인훈의 <하늘의 다리>(1970)에서의 환각("갠 하늘에 여자의 다리 하나가 오늘도 걸려 있다. 허벅다리 아래가 뚝 잘린 다리다."), (2)현기영의 <순이삼촌>(1978)에서의 환청("조용한 대낮일수록 콩 볶는 듯한 환청은 자주 일어났다."), 그리고 (3)임철우의 <직선과 독가스>(1984)에서의 환후("모두가 그 독가스 탓이죠. 회사에서나 집에서나 거리에서도 잠자리에서도 그 지독한 놈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었으니까요.")를 든다. 이데올로기라는 관념을 먹고 사는 괴물(=터부)에 맞서는 것으로서 온몸, 곧 감각기관이 동원되었고 이것이 걸출한 작가의식의 산물이라는 것. "분단문제, 4.3사건, 5월의 광주란 과연 무엇이었던가. 있지도 않은 허깨비들, 일종의 환각이고 환청이고 환후였던 것. 이 현장성의 휘황함이여. '우리문학 만세!'라고 내가 속으로 가만히 중얼거리는 까닭이오."

이 '환각'으로서의 문학은 이전에도 강조된바 있는 것이기에 새로운 건 아니다(노교수는 자신의 문학론을 반추하고 반복한다). 내게 의미있는 것은 그러한 문학론 자체가 '김윤식스러움'을 내포한 그만의 것이라는 것. 그 '환각'을 그는 다른 말로 '황홀경'이라 불렀던바, 문학이란 그 '환각'의 발명이며 '황홀경의 사상'이다.

P.S.2. 이미 알려진 바대로, 마이어스의 <누가 슬라보예 지젝을 미워하는가>(앨피)은 루틀리지의 'Critical Thinkers' 시리즈를 옮긴 것인데, 오늘 책의 속표지를 보니까 6권의 책들이 근간으로 예정돼 있다. 스피박, 데리다, 롤랑 바르트, 폴 드 만, 스튜어트 홀, 하이데거가 그것들이다. <지젝>과 <사이드>의 역자들로 봐서는 수유연구실의 사람들이 번역을 책임지고 있는 듯하다. 아마도 올해 안에 책들이 나온다면, 해당 사상가들에 대한 입문서나 교양서로 자신있게 추천할 만한 책들의 목록이 늘어나게 될 것이다.

근간 리스트를 보다가 좀 아이러니컬하게 느껴진 것은 이미 출간된 <들뢰즈>가 빠진 것. 짐작대로 수유연구실의 연구진들이 번역해내는 책이라면 '들뢰즈 없는 시리즈'란 앙꼬 없는 찐빵 같은 것이지 않(았)을까? 하여간에 마이어스의 <지젝>에 대해서는 조만간 독후감을 올리도록 하겠다. 지젝을 안 읽어도 되는 이들의 여가시간이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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瑚璉 2005-05-02 15:04   좋아요 0 | URL
흐음, 그래도 이번 페이퍼에는 제가 읽어본 책들이 꽤 나와서 퍽 흐뭇하군요(^.^;).

로쟈 2005-05-02 15:32   좋아요 0 | URL
어느새 읽으셨더란 말인가요?..

瑚璉 2005-05-02 16:18   좋아요 0 | URL
잠시 소통장애가 있었던 걸로 보입니다. 제가 이번에 소개해 주신 책들을 벌써 읽었을 리가 있나요(-.-;). 단지 배경설명으로 말씀해주신 책들 중 몇 권을 읽어보았다는 멘트였습니다.

2005-05-02 16:38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