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집에 가는 길에 사서 읽은 한국일보에는 눈길을 끄는 글이 둘 있었다. 먼저, 매주 연재되는 고종석의 시인산책. '시인공화국 풍경들'이란 타이틀이 연재의 제목인데, 내가 어제 처음으로 읽은 이 연재는 김영승의 <반성>을 다루고 있었다. 나는 오늘 부랴부랴 인터넷에서 나머지 4회분의 연재를 마저 읽는다. 그간에 그가 다루었던 시인들은 김소월, 김정환, 성미정, 김수영이었다.



김소월에 이어서 김정환의 시집을 다루는 것도 의외이지만, 이어서 성미정의 시집 <대머리와의 사랑>을 읽는 건 파격적이다(이 시집을 나는 안 갖고 있는 듯하다). 아마도 그런 파격은 의도된 것인 듯하다. 김수영은 물론 이름값하는 시인이고("어째서 자유에는/ 피의 냄새가 섞여있는가를/ 혁명은/ 왜 고독한 것인가를/ 혁명은/ 왜 고독해야 하는 것인가를" 안 시인은 '몽상가'가 아니었다), 이어서 어제 다루어진 시인은 '아름다운 폐인'으로 자칭하는 김영승.

고종석이 연재하는 시인공화국의 풍경들은 내게 낯설지 않은 풍경들이며 그래서 반갑다. 매주 한번씩은 한 명의 시인과 대면하는 시간을 가져본다는 게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게다가 대부분의 경우 나로서도 할말이 없지 않은 시인들임에랴. 해서, 고종석의 시인산책은 한동안 내가 손꼽아 기다리는 연재가 될 것이다. 나중에 책으로 묶여도 좋을 것이고.

내가 이런 식으로 고대했던 연재는 아주 오래전 김훈/박래부 기자의 '문학기행'과 김성우 논설위원의 '러시아문학기행'이었다. 15년도 더 된 이야기이다. 그리고나서 한참 후에 김훈의 '자전거 기행'이 있었다. 하루하루 흘러가는 게 세월이지만, 그런 기행/연재는 그 세월에 품위를 부여한다. 그 품위는 비록 얇은 신문지에 실려오지만, 그걸 읽는 마음에 얇지 않은 부듯함을 전달해준다. 시의 시대는 이미 지나갔더라도 그런 시대에 대한 회고만으로도 당분간은 풍족하다.

두번째는 사르트르(1905. 6. 21 - 1980. 4. 15) 탄생 100주년을 맞이하여 프랑스에서는 올해를 '사르트르의 해'로 정하고 대규모의 행사들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 그와 병행하여 국내에서도 기념행사들이 기획/진행중이라고 전한다. 그의 마지막 대저 <변증법적 이성비판>도 번역출간될 거라는 얘기도 있고. 사르트르에 대해서는 이전에 '모스크바통신'에서 그의 노벨상 수상거부(1964) 40주년을 계기로 몇 마디 거든 바 있는데, 분위기가 그런 만큼 나도 뭔가 '준비'는 해야겠다. 러시아어본도 몇 권 구해본 김에 '비로소' 좀 읽기도 하고.

  

사르트르에 처음 접하는 사람이라면 의당 그의 전기 <사르트르>(창, 1993) 나 자서전 <말>을 집어들 만하지만, 내가 추천하고 싶은 것은 폴 존슨의 <지식인의 두 얼굴>(을유문화사, 2005)이다. 거기서 사르트르에 관한 장은 역설적으로 '행동하지 않는 지성'이란 제목을 달고 있는데, '지식인들'에 대한 이 냉혹한 비판서를 통해서 거품을 말끔히 제거한 다음에 문제적인 저작들을 읽어보는 게 내가 권할 만한 순서이다. 가령, "실존주의자 사르트르는 전형적인 남성우월주의자였다"라는 걸 미리 알고서 사르트르를 읽어보시라는 것이다. 그래야지 지식인들은 그 '모순' 속에서 제값을 발휘한다.

존슨의 책은 이전에 <지식인들>(한언, 1993)이라고 처음 출간됐었고, 을유문화사에서 나온 <벌거벗은 지식인들>(1999)도 같은 책을 옮긴 것이다. 이번에 나온 것까지 역자가 모두 다르다. 제일 처음 나온 걸 재미있게 읽은 기억이 있는데, 번역에 무슨 문제가 있었던 것인지?

그런 기사들과 함께 전철에서 (다시) 읽은 건 아즈마 히로키의 글 '우편적 불안들'(몇년전에 동서문학지에 번역돼 실렸다)인데, 이 글은 자신의 출세작 <존재론적, 우편적>(1998)에 대한 해제적 성격의 강연문이다. 지난 2월초 모스크바에서 돌아오자 마자 (우연히 복사물이 눈에 띄어) 읽게 된 것인데, 많은 생각거리를 제공해주는 계발적인 글이다. 해서 '우편적 불안에 대하여'란 제목의 글을 '모스크바 통신'에 이어지는 마무리로 기획하기도 했었지만, (병치레 때문에) 결과적으론 실현되지 못하고 미루어졌다. 뒤늦게 작성되는 만큼 이 글은 원래의 의도를 다 포괄하거나 포함하지는 않는다. 나는 그저 히로키의 생각을 따라가면서 몇 마디 첨언을 할 생각이다.

  

 

 

 

 

 

 

 

먼저 히로키에 대해서. 1971년생인 그는 (소련이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하는) 1991년 약관 20세에 '솔제니친 사론'을 통해서 등단한다. 프랑스 현대사상과 데리다 철학에 능통한 그는 <존재론적, 우편적>이라는 데뷔작을 통해서 제2의 아키라란 평을 듣는데, 아키라는 <구조의 힘>(국역본은 <구조주의와 포스트구조주의>)을 쓴 비평가 아사다 아키라를 말한다. 본문에서 그 자신이 비교하고 평가하기도 하지만, 국내에 소개된 바를 참조하면 가라타니 고진 - 아사다 아키라 - 아즈마 히로키 정도의 계보를 그려볼 수 있을 것이다. 거기서 히로키는 '젊은 피'이자 비평의 제3세대, 혹은 새로운 세대쯤 되는 듯하다.

일본의 비평공간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지만, 나는 고진이나 아키라를 흥미롭게 읽었고, 그런 흥미 면에서라면 히로키 또한 뒤지지 않는다(거기에 대응할 만한 한국 비평가를 거명하지 못하겠다). 그래서 <존재론적, 우편적>이나 <우편적 불안들> 같은 그의 주저들이 번역되기를 기대한다. 근래에는 동경대 대학원쪽으로 유학을 가는 이들도 많이 있으므로 번역자원이 부족하지는 않을 것이다.

히로키는 이 강연문의 서두에서 먼저 '콘스타티브(constative)'와 '퍼포머티브(performative)'라는 개념을 설명하고 들어가는데, 전자는 '사실확인적'이란 말이고 후자는 '행위수행적'이란 뜻이다. 그걸 드러내는 문장을 우리말로는 각각 '진술문'과 '수행문'이라고 보통 번역한다. '진술문'은 맞다, 틀리다를 판별할 수 있는 문장을 말하지만, '수행문'의 경우엔 그런 진위의 범주가 적용될 수 없다. '수행문'은 대신에 성공하거나 실패한다(즉 '통하였는냐?'가 수행문의 기준이다). 때문에 수행문은 현실(컨텍스트)과의 관련 속에서만 의미/기능이 이해될 수 있다.

히로키의 전제는 사회의 단편화, 포스트모던화이다. 그것이 뜻하는 바는 사회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특권적인 시점이 부재하다는 것. 이른바 총체적 시점, 혹은 총체성의 상실이다. 그러한 상실(하루키 번역본의 표현의 빌자면, '상실의 시대')이 전면화되는 것이 1990년대이며(그러니까 소련과 동구권의 대몰락 이후이며) 그러한 처지에서는 자신의 메시지(편지)가 제대로 도착하는 건지 마는 건지 불확실하게 된다. '우편적 불안'에 휩싸이게 되는 것이다.

아키라의 <구조와 힘>(1983)은 그러한 상황 속에서도 전체를 조망하는 퍼스펙티브를 제시하고자 애를 쓰는데, 거꾸로 말하면 1980년대에는 그래도 우편적 불안이란 걸 그다지 의식하지 않았다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1990년대는 상황이 다르다는 게 히로키의 상황판단이고, 사회적 커뮤니케이션은 점점 더 아주 작은 '취미 공동체' 내의 소통으로 축소된다. 오타쿠 문화는 그러한 (변화된) 사회적 상황의 소산이다.

정리해서 얘기하면, 포스트모던화는 두 단계로 나뉘어지는데, 처음엔 "문화전체(사회전체)를 예측할 수 없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전명하고자 하는 욕망만이 좀비처럼 살아남아 있는 단계"로서, 여기서는 아직 '우편적 불안'이 전면화되어 있지 않다. 하지만, 이때의 전망이란 건 날조이고 사기에 지나지 않는다. 그건 아사다 아키라가 제시한 전망이 이미 극히 제한된 범위 안에서만 소통되었다는 데에서 확인된다(그러니까 <구조와 힘>에 열광하는 소수의 '취미 공동체'가 있었을 따름).

두번째 단계를 히로키는 1989년경부터로 보는데, 이 단계에서는 사회전체를 예측한다는 게 더더욱 어려워졌고 사람들은 더이상 전체를 조망하고자 하는 욕망을 가질 수 없게 되었으며 그저 자잘한 우편적 불안에나 시달리게 된다. 90년대가 바로 그러한 시대이다(한국소설사의 지형에서라면 윤대녕, 신경숙의 소설들이 통하던/먹히던 시대이다. '은어낚시통신' 같은 취미 공동체!). 그걸 부정하고, 날조이더라도 전체이론에 계속 매달리게 되면 오움진리교 같은 현상을 낳게 된다고 히로키는 지적한다.

아키라와 히로키는 각각 이 두 단계에 각각 대응하는 비평가이며, 아키라에서 히로키로의 이행은 들뢰즈에서 데리다로의 이행이다(그럼 오움진리교에 해당하는 건 네그리?). 그러한 상황인식을 전제로 하여 히로키는 자신의 <존재론적, 우편적>이 '우편적 불안'을 '우편적 향락'으로 바꿔보려는 기획의 소산이었다고 고백한다.

이어서 그는 '상징계'의 힘이 약화된 것이 요즘의 현실이 아닌가 지적하면서 메가 히트 애니메이션 <미녀전사 세일러문>을 만든 감독 이쿠하라 구니히코의 말을 인용하는데, 내가 보기엔 혜안이다. 그에 따르면, 요즘 젊은이들은 아주 가까운 것과 아주 먼 것밖에 모른다. 즉, 연애 아니면 세계의 종말에나 관심을 두는 것이다. "바꿔 말해 그들의 감각으로는 연애나 가족문제 같은 지극히 자기주변적인 문제와 세계의 파멸 같은 지극히 추상적인 이야기가 하나로 달라붙어 있는 것이죠."

그러한 지적을 라캉식으로 바꿔서 말하자면, 사람들은 저마다의 상상계와 현실계(=실재)에만 들러붙어 있다. 그래서 요즘 젊은이들에게는 리얼한 것(=실재) 아니면 이미저리한 것(=상상계) 밖에 없다. 심볼릭한 것(=상징계)가 약화되고 결여되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진단을 이어받으면서 히로키는 이렇게 말한다: "사회가 포스트모던해져 버린 결과 요즘 사람들은 세계가 가까운 것과 먼 것으로 분열되어 있는 것으로서 느끼고 있습니다. 가족이나 우주 이외의 '일본'이나 '국가'라는 중간 레벨의 존재에 대한 감각은 쏙 빠져버려 있는 것이죠. 그렇게 되면 라캉도 말했듯이 맨먼저 약해지는 것이 언어의 힘인 셈입니다. 실제로 그러한 현상이 지금 일본에서 표면화되고 있습니다."

그럼 한국은? 얼핏 '대-한-민-국'을 열호하는 한국의 젊은이들은 그러한 양극화로부터 비켜나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실제로 '대한민국'이 이들에게서 '중간항'으로 작동하고 있는지는 의심스럽다. 혹 자신에게 '가까운 것'이거나 '먼 것'으로서의 '대한민국'은 아닐는지? 어쨌든 "상징계, 즉 심볼릭한 레벨이 없어지면 사람들의 관심은 상상적인 인간관계나 '세계의 종말'로 집중"된다. 이런 경우 (소설이나 드라마에서) '지구의 소멸'이라는 거대서사적 테마는 그저 주인공과 애인 사이의 작은 인간관계를 부각시키는 소재로서나 쓰인다.

한국적인 드라마에서라면 '세계의 종말'에 대응하는 것이 아마도 죽음일 듯싶다. <가을동화>인지 <겨울동화>인지 하는 드라마들에서 연애(상상계)-결혼(상징계)-죽음(실재)이라는 3항에서 '결혼'이 배제된 것이 주된 트렌드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결혼과 가족들간의 오손도손, 티격태격을 다룬 일일드라마들에서도 그러한 인간관계를 벗어난 주제(이런 경우에는 국가)가 다루어지는 예는 거의 없다. 그런 건 시사고발 프로그램의 영역으로 제쳐놓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우리는 저마다 오타쿠가 된다(요즘 언론에서는 '진보상업주의'라는 말을 쓰던데, '진보오타쿠' '좌파오타쿠'란 말도 가능할 것이다. 거기서 소수의 취미 공동체에 대응하는 것은 소수의 이념 공동체이다).

데리다에 대한 좀 특이한 책을 쓴 히로키는 이런 시각을 내비친다: "데리다의 저서를 즐거이 읽는 독자는 제가 생각하기에 일본에서 천명, 유럽에서 이천 명, 아메리카에서 이천 명이 다일 것입니다(*그런 셈법이라면 한국에서는 오백 명 미만이다). 그들은 하나의 취미의 공동체에 속해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여서 만나면 국적이나 문화적 배경이달라도 단번에 얘기가 통합니다. 데리다를 둘러싼 '수다'가 점점 증식되고 데리다에 대한 메일 리스트가 개설되곤 하지요. 저의 책이 번역되는 것은 이 '수다'에 등록되는 것을 의미합니다."(나 또한 그런 수다에 끼어드는 걸 좋아하지만.)

그런 진단을 좀더 확장하자면, 들뢰즈를 기치로 내세운 수다 공동체, 알쏭달쏭한 타자 담론을 중심으로 모인 수다 공동체 등이 공통의 언어 없이 난립해 있는 것이 현실이다(공부와 삶의 괴리이면서 나는 이게 인문학 위기의 본 얼굴 같다는 생각이 든다). 방법은 두 가지. 공통의 언어를 억지로라도 만들어야 한다는 쪽과 작은 취미 공동체 안에서 끝까지 살아가야 한다는 쪽. 히로키는 그 중간에 서 있고 싶다고 하면서 그 방법에 대한 시도로 자신의 저작을 규정짓는다(고진의 '트랜스크리틱'도 그는 같은 맥락에서 이해한다) . 그리고 그게 데리다 철학의 의의라고 평가한다: "제가 좋아하는 데리다의 말 중에 위대한 사상가란 언제나 조금 큰 우체국이다'라는 것이 있는데, 실제로 이 세계에 있어서 철학의 역할은 편지(정보)를 배달하는 우편적인 기능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히로키가 주목하는 데리다의 텍스트는 <우편엽서>이다.)

대략 이런 내용이 글의 절반이다(시간/분량상 여기서 끊는다. 이후에 내용은 가라타니 고진의 비평에 대한 평으로 이어지는데, 관심이 있으신 분은 직접 참조하시길 바란다). 그리고 이 정도만으로도 많은 걸 평정할 수 있다. 언제부턴가 취미 공동체의 수다거리가 돼 버린 문학에 대해서도(우리 주변의 쿤데라 오타구, 하루키 오타쿠, 도스토예프스키 오타쿠, 지젝 오타쿠 등등에 대해서도). 우리는 그 공동체의 바깥으로 나갈 수 있는가? 공동체를 넘어선 공화국을 꾸릴 수 있는가? 질문은 아직 열려 있다.

이런 내용의 글을 다시 읽은 건, 그리고 3월의 마지막날에 (뒤늦게라도) 정리해두는 건 어제 모스크바에서 부친 책들이 도착했기 때문이다. 두 달이 넘게 걸린 셈인데, 아무튼 비로소 나의 '도착'은 완료되었다. 모스크바에서 내내 했던 일 중의 하나는 통신문을 쓰는 거였는데, '모스크바여 안녕'이란 마지막 통신문이 비로소 제값의 무게를 갖게 된 것. '모스크바여, 다시 안녕!' 다스비다냐!..

05. 03. 31

P.S. '우편적 불안'에 이어서 지난 2월에 내가 쓰고자 했던 건 윤동주와 정현종, 두 시인에 대한 것이었다(2월 16일이 윤동주의 기일이었지만, 대부분 무관심했다. 그리고 2월말에 정현종 시인은 '문학교수'로서 정년퇴직했다. 시인으로선 정년이 없겠지만) . 물론 타이밍을 놓친 터라 다시 생각을 가다듬기 위해선 다른 기회가 필요하다. 그리고 <삐딱하게 보기>의 3장 읽기(생각보다는 오역이 많다). '민주주의'와 '전체주의', 그리고 '국가'(고진의 <일본정신의 기원>이 요긴한 읽을 거리였다)가 당분간 읽고 생각해볼 거리이다. 생각이 모이면, 정리해두도록 하겠다.

P.S.2. 어제 잠시 '로쟈'란 이름을 인터넷에서 검색해 보다가 몇몇 블로그에 나의 글이 올려져 있는 걸 보았다. 한 블로그에서는 '로쟈'가 박노자의 다른 필명인 걸로 소개돼 있었는데(모스크바로 되돌아간?), (이미 귀화하여 한국인이긴 하지만) 박노자만큼 내가 (한국어를!) 잘 쓴다는 것이 자랑할 만한 일인지는 좀더 따져보아야겠다(내가 그보다 한국어를 더 오래 배우고 써왔건만). 박노자의 <당신들의 대한민국>에 대해서 나는 서평을 쓴바 있으며, 그 중 한 구절이 한동안 신문광고에 인용되기도 했었다. 박노자는 누구처럼 자기 책의 서평을 쓸 만한 위인은 아니므로 '로쟈=박노자'란 오해는 불식되었으면 한다. 다시 밝혀두지만, 로쟈는 (로자 룩셈부르크와도 무관하며) <죄와 벌>의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의 이름, '로지온'의 애칭이다(왜 그 이름을 쓰게 됐는지는 내년쯤이면 아시게 된다).

P.S.3. 눈에 띈 오타를 손보면서 몇 마디 덧붙인다. 그렇게 적은 분량을 쓴 건 아니지만, 급하게 작성하다 보니까 본문을 충분한 분량으로 쓰지 못했다(모스크바에서였다면 지금의 두 배 정도의 분량이 되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모든 걸 보완할 수는 없고, 오늘(만우절) 아침에 읽은 글 한 대목을 인용해두기로 한다. 이번주 <한겨레21>은 '태극기 세대'를 특집으로 다루고 있는데, 그 특집의 한 꼭지는 '그 불안하고 기이한 개인주의'(전효관)란 제목을 달고 있다. 필자의 지적을 잠시 들어본다.

"나는 촛불시위와 월드컵을 통해 광장을 놀이의 공간으로 전환시켰다든지, 공적 영역에 개인 욕망의 문제를 투사했다는 사실을 긍정적으로 생각한다... 다만, 놀이와 연대의 소재가 왜 민족과 국가고 태극기일 수밖에 없는지를 질문해야 한다고 느낄 뿐이다. 여전히 지금 문제가 되는 것은 개인이라는 작은 주체와 국가라는 큰 주체 사이에 부재하는 연대의 형식과 내용일 듯하다. 젊은 세대는 개인주의화를 통해 형성된 감수성의 연장선에서 개인의 권리에 민감하다. 하지만 집단으로서 권리에는 점점 무감(각)해지고 있다. 높은 인권 감수성과 낮은 정치 의식의 충돌은 태극기 세대를 규정짓는 또 하나의 특징이다. 이런 상황에서 개인의 권리 주장이 생존을 위한 방어라는 측면에서 제한되어 사회적 공간과 연대 능력의 발전으로 드러나지 못할 수 있다. 개인과 국가 사이 중간 영역의 공백이 여전히 문제고, 작은 주체들의 연대와 공감을 통해 매개 영역을 설정하지 못하고 있다."

필자가 지적하는바, '개인이라는 작은 주체'와 '국가라는 큰 주체' 사이에 부재하는 연대의 형식과 내용이라는 것이 내가 본문에서 거론하고자 했던 중간항이다. 그 중간항의 프로이트적 상관항이 바로 자아이며, 현대는 그러한 자아의 약화로 특징지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건 일본의 오타쿠 세대나 한국의 태극기 세대나 마찬가지가 아닐까라는 게 나의 짐작이다. 사드와 함께 칸트는 넘쳐나지만, 그걸 매개해주는 자아는 약화되어 있으며 무시되고 있다. 그럴 경우 제일 먼저 약해지는 것은 (라캉-히로키도 지적하다시피) 언어의 힘이다. 그때 언어라는 건 코드화된 랑가주, 즉 랑그를 말한다. 서로의 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코드, 문법, 규칙. 그게 상징계이다.

어린애들의 옹알이 같은 말들과 UFO성 언어들이 인터넷상에서 범람하고 있는 것은 상징계의 약화/무시에 대한 증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뜻하는 바는 젊은이들의 '유아화'이다. 히로키가 예로 들고 있는 건 이런 식의 대화이다. "저거 괜찮지?", "이게 좋다", "그건 안돼." 혹은 언어를 생략한 이미지만의 소통, 혹은 음악을 통한 소통. "좋지?" "응, 좋아!" 오직 그들만이 통하는('논리'가 아니라 '느낌'으로 통하는) 언어로 은밀하게 소통한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랑그는 최소화되는 것. 이런 것들이 게임세대, 비주얼 세대, 넷세대들에게서 지배적이 되어 간다는 것이 히로키 등의 지적이며 내가 동의하는 바다. 그렇다고 공통의 언어를 다시금 억지로라도 만들어내야 하는 건지, 아니면 현재의 조건에서 작은 공동체의 한계를 '트랜스'해보려고 애를 써야 하는 건지, 그것도 아니면 그저 자기만족적인 공동체에 안주하며 '바깥'으로의 외출을 포기해야 하는 건지. 남은 선택지는 대략 그 세 가지이다. '우편적 향락'이란 아마도 그 두번째 길이 인도하는 선택지에서 누릴 수 있는 향락이지 싶다.

몇 마디 덧붙여 보았는데, 본문의 내용이 좀더 수월하게 전달되었는지?..(알 도리가 없는 건가?)

05. 04. 01.

 

 

 

P.S. 분문에서 언급한 아즈마 히로키의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문학동네, 2007)이 번역돼 나왔다. 근간 소식은 작년부터 접하고 있었던 터인데, 생각보다 분량은 얇다. 예전에 이 책과 관련한 기사는 http://blog.aladin.co.kr/mramor/854169 에 모아놓은 바 있다. 그의 <존재론적, 우편적>도 근간 예정이라고 하니까 모아서 읽어봄 직하다. 그 둘 사이에는 어떤 단절이 존재하는 듯하지만...

07. 07. 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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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4-01 02: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바람구두 2005-04-01 09: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호, 기대됩니다. 로쟈님...

로쟈 2005-04-01 14: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대'랄 게 없는 건데요.^^ 한 가지, 본문에서 언급한 히로키의 <존재론적, 우편적>은 도서출판b에서 번역서가 나온다는군요...

sqiz 2020-12-03 17: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고 히로키의 관광객의 철학의 존재론적,우편적을 해설하는 내용에 대해서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