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 '프레시안 books'에 실린 '3인 1책 전격수다'를 옮겨놓는다(전문은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50130531173010&section=03). 가라타니 고진의 <세계사의 구조>(도서출판b, 2012)를 읽고 나눈 수다다. 묵직한 책이어서 오래 묵혔다가 다루게 됐다.

 

 

 

프레시안(13. 05. 31) 일하지 않고, 소비하지 않고, 국가를 전복할 권리!

 

이현우 : 가라타니 고진은 국내에 이미 많은 책이 번역된 저자입니다. 도서출판b에서 나오는 '가라타니 고진 컬렉션'의 10권 리스트에 이 <세계사의 구조>가 포함되었고, 컬렉션 리스트 외에도 몇 권이 더 나올 예정이라 알고 있습니다. 그동안 푸코나 들뢰즈 등의 유럽 철학자들이 대표적으로 많이 소개되었는데, 동아시아권에서는 고진이 압도적으로 많이 읽히지 않았나 싶습니다.

 

고진이 한국에 처음 수용될 때는 국문학 연구자 중심이었습니다. <일본근대문학의 기원>(박유하 옮김, 도서출판b 펴냄)이 많은 영향을 끼쳤죠. 2004년 계간지 <문학동네>에 실린 '근대문학의 종말'이라는 논문이 실렸을 때부터 한국문단 안팎으로 큰 논쟁을 불러왔는데, 그걸 확장시킨 책 <근대문학의 종언>(박유하 옮김, 도서출판b 펴냄)도 상당한 화제가 되었습니다. 국내에 소개된 비평집 중에는 가장 많이 팔린 책이라고 알고 있어요. 가라타니 고진의 근대문학 종언론에 대해 우호적으로 동의한다기보다 비판적인 견해가 국내 문단에선 더 많은데, 오히려 문단 바깥의 독자들에게는 더 큰 공감을 얻고 있는 듯합니다.

 

다른 한편으로, 고진은 이전까지 자기 자신을 비평가로 칭했는데 <세계사의 구조>는 좀 예외적입니다. 사상가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다는 자부심이랄까,(웃음) 그런 게 좀 보이는 책이죠. 대신 고진의 '비평' 역시 좀 특이한 성격을 띱니다. <트랜스크리틱>(송태욱 옮김, 한길사 펴냄)에서도 썼는데, 그는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읽어내는 게 비평이라고 생각해요. 경제학과 출신이라는 배경에서 출발했겠지만, 독특하고 자극적이죠. 지금껏 개별 텍스트를 치밀하게 해설하는 게 비평이라고 여겨졌지만, 그의 발상과 스케일이 남다릅니다.

 

저는 맨 처음 <탐구>(권기돈 옮김, 새물결 펴냄)라는 책을 읽으면서 뭐 이런 사람이 다 있나 싶어 경악했습니다. 그 이후 국내 소개된 고진의 모든 책을 읽었죠. 그는 일본 내에서도 거의 유일무이한 수준의 비평가이며, 60년대 말의 전공투 세대가 아닌 60년대 초반의 안보 세대로 분류되는 1941년생입니다. 아사다 아키라 등의 '제2의 고진', '제3의 고진' 같은 인물들이 계속 소개되고 있지만, 고진은 극히 예외적이고 독특한 입지의 비평가라 할 수 있습니다.


<세계사의 구조>의 전작 <세계공화국으로>(조영일 옮김, 도서출판b 펴냄)와 <트랜스크리틱>에서부터 이미 가라타니 고진의 독창적인 교환양식론이 소개됩니다. 마르크스는 생산양식이라는 관점에서 세계사를 해석하고 사적 유물론을 정립했는데, 고진은 그걸 보완해서 교환양식론으로 보는 세계사를 얘기했지요. 그리고 그 주장을 해명하는 탄탄한 이론적 뒷받침이 바로 이 <세계사의 구조>입니다. 고진 독자에게도 충분히 흥미로운 책이기도 하지만, 마르크스의 독자라든가 자본주의와 국가주의에 비판적인 견해를 갖고 있더라도 대안이 막막한 독자들에게 충분한 지적 자극을 줄 수 있는 책이 아닌가 싶습니다. 한 가지 문제라면 이게 그냥 읽으면 되는 책인지라…(웃음) 어떤 말을 덧붙여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얘기 나누면서 이슈를 찾아가보지요. 먼저 읽은 소감을 한 마디씩 해주신다면요.

 

이권우 : <세계사의 구조>의 요약본이 <세계공화국으로>라고 하시니 그걸 읽으셔도 될 것 같은데, 제 생각엔 이 책은 맨 앞의 서문과 329쪽의 어소시에이셔니즘 파트부터 읽는 것으로도 주요 핵심은 파악됩니다. 다만 꾸준하게 교양적 차원에서 논의됐던 책들을 따라온 독자라면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는데, 그런 사전지식이 없다면 어렵게 느껴진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모스의 증여론, 마르크스의 자본론, 월러스틴의 근대세계 체제와 칼 폴라니까지 읽은 분들이라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책이에요. 그들의 문제의식을 수용하면서 고진이 독자적으로 자기 사유를 펼치는 부분은 아주 흥미진진합니다. 이런 책은 오히려 틈틈이 읽으면 무슨 말인지 모르고요, 내리 읽어야 합니다.(웃음)

 

문제의식은 아주 선명하고 탁월해요. 동원되는 이론가들에 대한 이해도 놀랍고. 다만 대안이 무엇인가를 중점적으로 찾는 분들에게는 결말 부분이 좀 허탈할 수도 있습니다. 거꾸로 현재 협동조합 운동을 하시는 분들은 이 책을 꼭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분배적 정의에서 벗어나 교환적 정의, 그러니까 격차를 낳는 시스템의 폐기를 새롭게 얘기하니까요.

 

고진은 칸트를 매우 집중적으로 살피는데, 칸트를 재해석하여 정의론을 펼친 사람이 존 롤스고, 롤스로 상징되는 선진자본주의가 분배적 정의라는 흐름을 따라갈 수 있다면 가라타니 고진이 결국 교환의 정의를 새롭게 얘기한다는 걸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고진은 교환양식C, 즉 자본주의적 강고한 체계를 극복하는 대안으로 협동주의 방식을 높이 평하고 그에 따라 프루동도 새롭게 재평가하지요. 오늘날 우리가 자본주의적 교환양식을 벗어날 수 있는 기반이 무엇인가를 물을 때 그 대안이 협동조합이라는 점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할 만한 책입니다.

 

김용언 : 부끄러운 고백을 해야 하는데요. 대학교 3학년 때 이후로 마르크스 관련 이론서를 한 권짜리로 제대로 읽은 게 이번이 처음이라서 굉장히 힘든 독서였습니다. 제가 제대로 이해했는지 확신도 서지 않고 감히 코멘트를 할 입장이 못 되는 듯합니다. 오늘은 무조건 배우겠다는 자세로 경청하겠습니다.


다만 아까 이현우 선생님이 말씀하신 것과 관련하여, 저는 책 후반부의 '네이션'의 구성과 '세계공화국'의 가능성에 가장 관심을 가졌는데요. 고진은 책 304쪽에서 "네이션의 감성적인 기반은 혈연적·지연적·언어적 공동체"라면서 그 공동체 내에서 "가족이나 부족공동체 안의 사랑과는 다른, 오히려 그와 같은 관계로부터 이탈한 사람들 사이에서 생겨나는 새로운 연대의 감정"이라고 네이션의 감정을 설명하는데요. "호수(互酬, reciprocity)적 교환에서 유래하는 채무감정은 돈으로 변제가 되지 않는 것이어서 경제적으로는 그야말로 '경제합리성'을 결여한 것이다. 네이션이 '감정'으로서 나타난다는 것은 네이션이 국가나 자본과는 다른 교환양식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라고 썼습니다. 그리고 430쪽에 이르면 국가연방은 교환양식 C 위에 교환양식A를 회복하는 것, 그럼으로써 "새로운 세계시스템을 창설"하고 "증여의 호수성"을 회복하기를 주장합니다.

 

 

 

이 부분은 충분히 흥미롭지만, 아까 이현우 선생님 말씀처럼 고진이 일본 내에서도 소수의 예외적인 존재라고 하신 게 실감난 건 얼마 전 SNS 상에서 발생한 '아즈마 히로키 사건' 때문입니다.(웃음) 아즈마 히로키는 그동안 국내에서 <일반의지 2.0>(안천 옮김, 현실문화 펴냄),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이은미 옮김, 선정우 감수, 문학동네 펴냄), <게임적 리얼리즘의 탄생>(장이지 옮김, 선정우 감수, 현실문화연구 펴냄) 등으로 잘 알려진 일본의 젊은 평론가입니다.

 

그가 오사카 시장 하시모토 토오루의 위안부 발언에 대해 "'위안부는 필요했다'가 문제발언인가?" "한창 때의 남성을 전장에 밀어 넣고 실컷 사람 죽이라고 시키고, 전투가 끝났으니 상큼하게 일반시민처럼 욕망과 폭력성을 억제하고 살라고 해봤자, 생물적으로 당연히 무리한 일. 그런 무리를 전제로 삼아 논의를 해본들 무슨 소용이 있나 싶다" 등으로 트위터에 글을 써 일본 내에서도 많은 비판을 받았는데요.

 

아즈마 히로키는 1971년생입니다. 이 논쟁을 보면서 젊은 전후세대가 갖고 있는 역사의식의 박약함에 굉장히 놀랐습니다. 일본인 중 일부는 아직도 자신들이 전쟁 피해자라는 점만을 강하게 의식하고 있는 것 같은데,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담당했던 역할과 아시아 각국에 끼쳤던 악영향에 대해 철저하게 되짚어보고 사죄하고 그것을 되풀이하지 않도록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는 당위에 대해서는 거의 의식하지 않는 발언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니까 고진 식의 호수적 관계는 바로 이런 실제 역사에 대한 근본적 죄책감을 해소하려는 증여의 노력에서부터 시작될 텐데, 그 부분에 있어서는 여전히 위험스러울 정도로 준비가 되어있지 않기 때문에 가라타니 고진의 이 같은 지적 성과도 크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떠오르더라고요. <세계사의 구조>와는 크게 관계없는 부분을 얘기한 것 같아 죄송합니다.(웃음)

 

이현우 : 여담을 덧붙이자면, 아즈마 히로키가 아까 얘기한 '제3의 고진'이었거든요.(웃음) 20대의 나이에 데리다 철학을 종횡하며 쓴 데뷔작 <존재론적, 우편론적-자크 데리다에 관하여>는 놀라운 책이었는데, 그 이후 철학과 거리를 두고 오타쿠 문화로 비평의 방향을 돌리면서 정치적 의식이 퇴행한다는 느낌을 받고 있습니다. 70대의 가라타니 고진보다도 노후해 보이죠.

 

고진은 대단히 격렬한 반국가주의 쪽입니다. 국민국가를 절대적으로 지양해야 한다는 입장이죠. 그의 자부심 중 하나는 일본 헌법 제9조, 즉 평화헌법입니다. 고진에게는 그게 국민국가를 지양할 수 있는 일종의 모델이에요. 그런데 지금 일본 쪽 극우의 움직임은 그 헌법조항을 폐지하고 소위 '정상국가'로 가겠다는 입장입니다.

 

생산양식에서 교환양식으로

이현우 : <세계사의 구조>의 핵심은 역시 교환양식론입니다. 제가 아는 범위 내에선 이걸 들고 나온 사상가는 고진이 처음이었어요. 네 가지 교환양식을 잠깐 설명하자면, A형은 증여와 답례로 이뤄지는, 선물을 교환하고 주고받는 호수입니다. B형은 약탈과 재분배, 국가의 지배적인 교환 양식이지요. 화폐를 매개로 한 상품 교환이 세 번째 C형 교환양식인데, 이게 자본주의의 지배적인 교환양식입니다.

 

중요한 건 그 사이의 이행입니다. A형이 사라진 다음 B형이 출현하는 게 아니라, 세 가지가 공존하면서 어떤 사회에서는 A형이, B형이, C형이 지배적이라고 봐야 합니다. 이를테면 소규모 공동체 사회에서의 교환양식인 호수가 국가 체제의 교환양식으로 어떻게 넘어갔는가, 또 국가의 교환양식은 어떻게 자본제적 교환양식에 주도권을 내주게 되었나 그 이행과정을 해명하는 것이 '사상가' 고진의 과제였고, 그걸 성취한 책이 <세계사의 구조>입니다. 사실 해명을 제외한 이론적 골자는 이전 책들에 제시되었기 때문에, 개인적으로는 해명 부분이 가장 흥미로웠습니다.


이권우 : <세계사의 구조>를 읽으면서 1980년대 읽은 책들이 많이 기억나더라고요. 사회구성체라는 단어가 참 자주 등장했죠.(웃음) 사회구성체 안에는 여러 요소가 상존하고 있으나 지배적인 양식이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자본주의 내에도 소작 관계가 있을 수 있는데, 대신 자본주의 상태에서 좀 다르게 변형된다는 뜻이죠. 사회구성체에 관한 예전 책들을 좀 보신 분들에게는 <세계사의 구조> 이해가 쉬울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현우 선생님이 방금 얘기하신 대로 교환양식 A형에서 증여하고 답례하는 과정만을 되풀이하면 국가가 탄생하지 않는다는 설명이 인상적이었습니다. B형에선 국가가 지배만 하는 게 아니라 보호한다는 걸 강조하고요. C형에선 중요한 건, 지금까지 노동자가 자본에 의해 종속되어 생산에만 집중하는 사회계급으로 얘기되었는데, 고진은 상품을 사는 노동자의 출현도 함께 아우릅니다. 상품을 사는 노동자의 출현이야말로 D형으로 넘어가는 사회구성체 요소가 되니까요.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이 책의 핵심적인 용어인 국가와 자본, 네이션, 스테이트 등에 대한 해설이 없다는 점입니다. 번역자께서 고생을 많이 하셨겠지만, 네이션이나 스테이트 등이 사전적 의미로서 쓰이는 게 아니기 때문에 해설을 따로 붙여주는 쪽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김용언 : 저도 첫 페이지부터 그 용어들에서 멈칫했습니다. 고진 전작을 죽 보아온 사람에게는 이미 자주 보아 익숙한 용어기 때문에 그냥 넘어갈 수 있을까요?

 

이현우 : 어려운 문제지요. 고진이 '네이션'이라고 그대로 썼기 때문에 역자도 고심했던 걸로 압니다. '네이션'은 한국말에선 어떨 땐 민족이고 어떨 땐 국민이라 번역되는데, 특히 민족의 경우 한국에선 단군 이래 죽 이어져 내려왔다는 표상을 갖고 있고, 고진이 말하는 민족은 근대 이후, 절대 왕정 국가 이후에 탄생한 공동체기 때문에 쉽게 일대 일로 번역하기가 어렵습니다. 어쩔 수 없이 독자들이 읽어가면서 정리해야 하는 부분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권우 : 용어 해설까지 있었다면 훨씬 더 잘 읽힐 수 있는 책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에 아쉽네요. 다시 책으로 돌아가자면, <세계사의 구조>의 핵심은 마르크스와 칸트입니다. 특히 예전에 <윤리 21>(송태욱 옮김, 사회평론 펴냄)을 읽으면서도 칸트에 대한 고진의 해석에 상당히 공감했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다시금 칸트의 영구평화론을 수용하며 국가를 넘어선 사유를 펼치는 것에 감탄했습니다.

 

이현우 : <트랜스크리틱>에서도 비슷한 횡단 작업을 했습니다. 칸트와 마르크스를 접속시키는 작업, 칸트로 마르크스를 읽고 마르크스로 칸트를 읽는 게 자신의 비평이며 이론적 작업이라고 했지요. 고진에 자주 비교되는 사람이 지젝인데요. 그는 헤겔과 라캉을 '트랜스크리틱'했지요. 두 저자가 2000년대 이후 한국 인문학, 정확하게는 학계 바깥 인문학 독자들과 비평 쪽에 가장 압도적인 영향을 미친 철학자라고 생각합니다. 우연한 유행이라기보다 이들의 작업이 보여주는 독특한 문제의식과 이론적 상상력이 많이 어필한 게 아닐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여담이지만, 고진이 객원교수로 예일대학에 잠깐 머무른 적이 있었는데, 당시 예일학파의 거두였던 폴 드 만으로부터 격려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일본 내에서조차 고진의 작업을 알아주는 사람이 없었는데 폴 드 만이 격려를 해주었으니 기운을 낼 만했지요. 머리를 올려주었다고 할까요. 고진의 말에 따르면 자신의 작업을 그 이전과 이후로 나눈 매우 중요한 순간이었다고 합니다.(웃음)

 

(...)

 

13. 06.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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