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달 책&(414호)에 실은 '로쟈의 주제별 도서소개'를 옮겨놓는다. 이달의 주제로 고른 건 '왕의 초상'이다. 더 좁혀서는 조선시대 어진과 어진화사에 관한 책들을 읽고 내용을 간추려보았다.

 

 

 

책&(13년 1월호) 궁중회화의 꽃, 어진

 

왕조국가 조선에서 왕의 초상은 어떻게 만들어졌고, 어떤 의미를 지녔을까. 이달에는 전제군주국가에서 권력의 대표적 표상이라고 할 만한 왕의 초상에 대한 궁금증을 몇 권의 책을 통해서 풀어보도록 한다. 가장 먼저 손에 든 책은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펴낸 <왕과 국가의 회화>(돌베개, 2011)다. 조선사와 미술사 전공자들이 조선시대 궁중회화의 이모저모에 대한 개괄적인 소개를 제공하고 있는 책이다. 이에 따르면 왕의 초상 곧 어진(御眞)은 당연하게도 가장 중요한 궁중회화였다. “조선시대 어진은 왕의 존엄과 권위의 상징 그 자체였으며, 어진의 보존은 왕실의 안위와 계승을 의미하였다.” 따라서 궁중의 가장 중요한 회화 업무가 어진의 도사 혹은 모사였고, 도화서의 존재이유도 어진의 도사에 있었다.

 


왕의 초상 제작은 통일신라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고려시대에도 왕의 진영이 제작된 기록이 있다. 고려시대 영정의 특징은 '공민왕과 노국대장공주상' 같은 그림이 보여주듯이 왕과 왕후의 영정이 같이 제작되었다는 점이다. 이런 고려의 유습은 조선 초기까지 지속돼 태조의 비 신덕왕후나 신의왕후의 초상이 그려져 사당에 봉안되기도 했지만 임진왜란 이후에는 자취를 감춘다. 숙종이 계비의 초상 제작을 명령한 적이 있지만 신하들의 반대로 실현되지 못했다 한다.


조선 시대 어진은 ‘터럭 하나만 달라도 그 사람이 아니다’라는 이론에 근거해 정밀하고 사실적인 묘사를 추구했다. 당연히 당대 최고의 초상화 실력자들을 선발하여 제작했으며 이들 어진은 다른 나라의 초상화와 비교해 뒤지지 않는 예술적 성취를 보여준다. 하지만 아쉽게도 현재 남아있는 어진은 조선 태조, 영조, 익종, 철종, 고종, 순종의 초상이 전부다. 첫 임금 태조에서부터 마지막 순종에 이르기까지 엄청난 숫자의 어진이 제작되었음에도 소수만 남은 까닭은 창덕궁의 신선원전에 봉안된 어진들이 한국전쟁 때 부산으로 옮겨졌다가 보관창고의 화재로 그 상당수가 소실됐기 때문이다.

 


조선미의 <왕의 얼굴>(사회평론, 2012)은 한·중·일 3국 군주의 초상화를 비교·소개하는 책인데, 한국 어진의 제작 과정과 현재 보존되고 있는 각 어진의 특징에 대해서도 자세히 설명해준다. 조선은 국초부터 태조의 진전(眞殿)을 서울과 지방 다섯 곳에 세우는 등 진전제도를 확립했다. 비록 왜란과 호란 때 많이 파손됐지만 어진 봉안 처소로서 진전의 존재는 경시되지 않았다. 어진은 제작과정에 따라 도사(圖寫)·추사(追寫)·모사(模寫) 세 종류로 나뉜다. 도사는 군왕이 생존 시에 그리는 것이고, 추사는 사후에 그리는 것으로 가장 어려운 방식이다. 모사는 이미 그려진 어진이 훼손되었거나 새 진전에 봉안해야 할 때 기존본을 모델로 그리는 것을 말한다.


어진을 제작할 때는 도감이 설치되며 당대 최고의 화가가 천거나 시험을 통해 선발돼 어진화사를 맡았다. 어진화사에는 세 등급이 있었다고 하는데, 집필화사(執筆畵師) 또는 주관화사(主管畵師)가 얼굴 부분을 담당했고, 동참화사(同參畵師)가 몸체의 중요하지 않은 부분을 맡았다. 그리고 수종화사(隨從畵師)는 채색을 거들었다. 대략 여섯 명 정도가 제작에 참여하는데 경우에 따라서는 그 이상의 인원이 동원되었다. 어진화사는 직업화가로선 최고의 영예이지만 최고의 화가라고 하여 모두 어진화사가 되는 건 아니었다. 단원 김홍도의 경우 빼어난 그림솜씨로 여러 차례 어진화사에 임명됐지만 한 번도 주관화사를 담당하지는 못했다. 생동감 넘치는 그의 화풍이 개성을 억제하고 묘사의 세밀함을 추구하는 어진과는 잘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펴낸 <왕의 화가들>(돌베개, 2012)은 어진화사들에 대한 더 자세한 설명을 제공한다. ‘재주를 시험한다’는 뜻의 시재(試才)를 통해 엄정하게 선발되면 어진화사는 밑그림을 그려서 제출하고 왕과 대신들의 평가를 듣는 봉심(奉審)을 거쳐서 어진을 완성해나간다. 어진이 완성되면 최종평가를 거쳐서 봉안 절차를 밟았다. 흥미로운 것은 중간평가 단계인 봉심인데, 화원들은 물론이고 신하들도 왕의 얼굴을 잘 알지 못해 애를 먹었다. 용안을 정면에서 응시할 일이 많지 않기 때문에 대신들조차도 초본을 보고서 닮음의 여부를 명확히 판단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왕의 옆에 어진을 두고 용안과 초본을 비교해가며 보는 것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제출되기도 했다. 봉심에서 미흡한 부분이 발견되면 가필(加筆)과 가채(加採)가 이루어졌다.   


한편 어진화사들은 어떤 대우를 받았을까. 17세기 후반에 마련된 기준에 따르면 화원들의 급여는 쌀 12두와 포목 1필로 돼 있는데, 다른 공장인(工匠人)들과 비교하여 훨씬 나은 대우였다고 한다. 급여뿐만이 아니라 능력에 따라서는 관직도 주어졌는데, 주관화사에게는 특별한 경우 3품, 기본적으로는 6품 상당의 관직이 하사됐다. 어진화사들은 초상화만 그리는 경우는 드물었고 산수, 인물, 화조는 물론 궁중 기록화와 장식화, 그리고 문인화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그림을 통해서 기량을 과시하기도 했다. 

 

13. 01.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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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zone 2020-11-25 12: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덕분에 궁중화에 관심이 생기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