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에 실은 '로쟈의 번역서 읽기'를 옮겨놓는다. 조지 오웰의 <1984>에 나오는 한 대목을 다뤘다. 번역본이 많이 나와 내가 갖고 있는 것만 해도 7-8종인데, 가장 많이 읽히는 번역본들을 주로 참고했다. 분량상 에리히 프롬의 말을 말미에 덧붙이지 못했다. "오웰의 작품은 강력한 경고이다. 만약 <1984>를 스탈린주의의 잔학함에 대한 또 다른 묘사로만 해석하고, 그것이 또한 우리에게 의미하는 바를 알지 못한다면 정말 불행한 일이다."

 

 

 

한겨레(12. 09. 08) 무산계급이 잊고 있는 말 ‘다수는 힘이다’

 

조지 오웰의 <1984>를 아주 오랜만에 다시 읽으며 새삼 주목하게 된 것은 지식인에 대한 회의와 노동자에 대한 그의 믿음이다. 주인공 윈스턴은 일기에 “희망이 있다면 그것은 무산계급에만 있다”고 적는다. ‘무산계급’ 대신에 ‘노동자층’이나 ‘프롤’이라고 옮긴 번역본들도 있다. ‘프롤’은 ‘프롤레타리아’에서 온 단어이리라. 그가 사는 가상국가 오세아니아의 인구 85퍼센트를 차지하는 사람들이 바로 프롤이다. 여러 번역용례를 참고하면 윈스턴은 이 ‘피압박 대중’만이, 이 ‘우글거리고 경멸당하는 대중’만이, ‘저 거대한 소외집단’만이 당을 무너뜨릴 수 있다고 믿는다.

전체주의 체제의 오세아니아는 다수의 프롤과 소수의 당원으로 구성돼 있다. 당원은 다시 외부당원과 내부당원으로 구분된다. 외부당원인 윈스턴은 당과 빅브러더의 지배체제에 대한 반란을 꿈꾸지만 성공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당내 반체제조직인 ‘형제단’이 소문대로 존재한다손 치더라도 철저한 감시시스템 때문에 서로 모이기도, 알아보기도 어려울 것이라고 그는 생각한다. 반면에 무산계급 노동자들은 음모를 꾸밀 필요도 없다. “그냥 들고일어나서 파리 떼를 쫓는 말처럼 몸을 흔들기만 하면 된다.” 왜냐하면 그들은 다수이고 다수는 힘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들이 자신의 힘을 인식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언젠가 윈스턴은 사람들이 북적대는 거리를 지나다가 마치 폭동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수백 명의 여자들이 절규하는 소리를 듣는다. 그는 드디어 반란이 일어난 줄 알고 흥분하지만, 알고 보니 노점상에서 파는 양은냄비를 구하려고 서로 아귀다툼을 벌인 것이었다. 왜 정작 더 중대한 일에는 함성을 지르지 못하는가. “그들은 의식을 가질 때까지는 절대로 반란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며, 반란을 일으키게 될 때까지는 의식을 가질 수 없을 것”이라는 게 윈스턴의 잠정결론이다. 무산계급의 반란은 말하자면 ‘가능한 것의 불가능성’이다.

당연하게도 당은 이 점을 아주 잘 알고 있다. “힘든 육체노동, 가정과 아이에 대한 걱정, 이웃과의 사소한 말다툼, 영화, 축구, 맥주, 도박”이 노동자 대중의 유일한 관심사라는 걸 파악하고 있기에 그들을 관리하는 건 어렵지 않다. 정치의식이나 이데올로기를 주입할 필요도 없다. 노동 시간을 늘리거나 배급량을 줄이는 식으로 통제하고 원시적인 애국심을 적당히 이용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1984> 하면 떠올리게 되는 성욕에 대한 엄격한 규제나 텔레스크린을 통한 감시도 노동자들에겐 해당되지 않는다. 치안경찰도 그들에 대해선 간섭하지 않는다. “노동자와 동물은 자유이다”가 아예 당의 슬로건이다.

그렇지만 윈스턴은 노동자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아직 생각할 줄 모르더라도 그들은 가슴과 배와 근육에 세계를 뒤엎을 힘을 기르고 있다. 윈스턴은 노래를 부르며 빨래를 널고 있는 튼튼한 아낙네의 모습을 보면서 아름다움을 느끼고 “언젠가는 저 힘센 여자의 배에서 의식을 가진 종족이 태어날 것”이라고 믿는다.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은 그렇게 도래할 것이다. 암울한 디스토피아 소설 <1984>에서 읽을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다.

 

12. 09. 0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