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를 주제로 한 강의도 종종 하다 보니 독서법에 관한 책도 읽게 된다. 공부를 위해 읽는 것이 아니라 강의를 위해 읽는 셈인데, 오늘 배송받은 책은 이토 우지다카의 <천천히 깊게 읽는 즐거움>(21세기북스, 2012)이다. '속도에서 깊이로 이끄는 슬로 리딩의 힘'이 부제. 지금은 100세를 넘긴 하시모도 다케시라는 한 국어선생님의 '전대미문의 수업'을 소개하는 게 책의 골자다.

 

 

 

1950년대부터 이분이 중고등학교 학생들에게 한 수업은 "교과서는 들춰 보지도 않은 채 얇은 소설책 한 권으로 3년 동안 공부"하는 '기적'의 수업이었다. 이걸 미독(味讀)이라고 부르는데, 음미하면서 읽는다는 뜻이겠다. 어떤 결과가 나왔을까?

하시모토의 제자들은 전후 빠르게 전개된 성장사회, 속도사회에 역행하기라도 하듯 느리게 그러나 착실하게 '배우는 힘'과 '살아가는 힘'을 익혔다. 그 결과 <은수저> 수업 3기에 해당하는 1968년 졸업생은 사립학교 사상 최초 도쿄 대학 최다 합격이라는 위헙을 달성한다. (5-6쪽)

성공작이었다는 얘기다. 제자 중의 한 사람은 2009년 일본의 최고재판소 제23대 사무총장에 취임한 야마사키 도시미쓰인데, 하시모토의 슬로 리딩 수업에서 무엇을 배웠는지에 대해 이렇게 정리한다.

"나는 우연히 재판관이라는 직업을 선택했습니다. 그런데 이 일은 궁극의 만능선수랄까요, 사회 각 분야에 영향을 미치는 사상(事象)을 다룹니다. 판결을 내리는 마지막 순간에 도움이 되는 것은 법률지식이 아니라 넓은 의미에서의 교양이랄까, 그것의 바탕이 되는 사고방식, 그리고 모든 사물을 균형 있게 바라본다는 사고입니다. 그런 모든 사고의 뿌리를 하시모토 선생님께 배웠다고 생각합니다."(31쪽)

찾아보니 제자들에겐 '에티 선생님'이라고 불린 하시모토 다케시의 책도 번역돼 나왔다. <아이의 미래를 바꾸는 슬로 리딩>(지식트리, 2012)이 그것이다. 책소개는 이렇다.

슬로 리딩의 창시자이자 하시모토 다케시는 공부를 싫어하는 아이들에게 ‘놀이’를 통해 ‘배움’에 대한 흥미와 즐거움을 주고자 ‘은수저 슬로 리딩법’을 고안해 냈다. “배우는 것이 싫다.”고 말하는 아이에게 단순히 “‘논다’라는 기분으로 배우면 되지 않겠니?”라고 대답하기보다는 교사 스스로 아이들의 눈높이와 요구에 맞게 교재를 개발하고 교안을 마련하고자 한 데서 슬로 리딩법은 시작됐다. 이후 하시모토 선생의 ‘슬로 리딩’ 학습법은 그의 제자들인 소설가 엔도 슈사쿠, 도쿄대학 총장 하마다 준이치, 최고재판소 사무총장 야마사키 도시미쓰, 가나가와 현지사 구로이와 유지 등이 집필한 <기적의 교실>, <은사의 조건> 등에 소개되었고, 이를 NHK에서 자세히 취재, 방송함으로써 일본 열도에 슬로 리딩과 고전 읽기 열풍을 불러일으켰다. 그 후 100세를 맞이한 하시모토 선생은 나다 중학교로 복귀, 토요 특강을 통해 원조 ‘슬로 리딩’을 강의하고 있다.

100세 이후에도 강의를 한다는 사실도 놀라운데, 여하튼 그의 슬로 리딩이 일본에서는 큰 반향을 일으킨 듯싶다. 작가 히라노 게이치로가 <책을 읽는 방법>문학동네, 2008)에서 제안하는 '슬로 리딩', 곧 지독(遲讀)도 이런 분위기에서 나오지 않았을까 싶다. 물론 모든 책을 다 '지독'하거나 '미독'할 필요는 없으며 그렇게 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하지만 한 권 정도는 그렇게 읽는 경험을 해보는 게 중요하다는 것이다. 교육적 효과면에서도 그렇다.

 

 

베스트셀러 저자이자 <독서력>(웅진지식하우스, 2009)의 저자인 사이토 다카시는 하시모토의 '슬로 리딩'에 대해 평해달라는 주문에 '걸어서 가는 소풍'을 비유로 든다.

일반적인 독서는 버스를 타고 휙 가버리는 것입니다. 하지만 한 발짝 두 발짝 걷다가 길가의 꽃에 이끌려 발을 멈추고 이내 걸음을 옮기는, 그런 산책 같은 소풍은 결코 쉽게 잊히지 않습니다. 이것이 하시모토식 '슬로 리딩'입니다.(41족)

우리 교육현장에서도 이러한 '슬로 리딩'의 효과를 체감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속독으로는 도저히 배울 수 없는 것들이 있는 법이다).

 

 

하시모토 선생이 교재로 사용한 나카 칸스케(간스케)의 <은수저>(세시, 1997)는 번역된 적이 있지만 지금은 절판됐다. 메이지 시대를 배경으로 한 자전적 소설이라고 하는데, 반드시 <은수저>만이 미독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건 물론 아니다. 사이토 다카시는 "<은수저>처럼 시간을 들여서 꼼꼼히 읽으면 실력이 붙는 작품"을 꼽아달라는 주문에 이렇게 답한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초등학생은 나쓰메 소세키의 <도련님>, 중고생은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 대학생은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사회인이라면 <논어> 정도가 좋습니다. 장르는 서로 다르지만 각각의 세계가 있고, 상당한 영향력을 지닌 가치관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41쪽) 

모두가 '구면'인 작품이라 반가운데, <논어>를 제외하면 개인적으로는 모두 강의해본 작품들이다. 특히 <죄와 벌>은 6주간 읽은 적도 있다. 3년짜리 '슬로 리딩'에는 많이 못 미치지만, 한 1년간 읽는 건 해볼 수도 있겠다 싶다. 요즘 이곳저곳에서 하고 있는 지젝 강의도 마찬가지인데, 얇은 책이더라도 몇달 간 같이 읽는다면, 그만큼 '실력'이 붙지 않을까. 그런 게 슬로 리딩의 힘이다...

 

12. 09.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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