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 한겨레의 '로쟈의 번역서 읽기' 꼭지를 옮겨놓는다. 지난주에 보낸 원고이지만 게재는 이번주에 됐다. 지젝의 <삐딱하게 보기>(시각과언어, 1995)에 대해 적었는데('슬라보이 지제크'는 '발터 베냐민'과 마찬가지로 한겨레의 표기방식이다), 지젝의 책으론 가장 먼저 번역됐고 가장 많인 팔린 책이지만 오역된 대목들이 계속 방치되고 있다는 지적을 담았다. 혹시나 싶어 두어달 전에 다시 구입해봤지만 수정은 '쉐익스피어'를 '셰익스피어'로 고친 것 정도였다. 

 

 

 

한겨레(12. 05. 20) 오역 범벅 '삐딱하게 보기' 

 

슬라보이 지제크의 <삐딱하게 보기>를 오랜만에 손에 들었다. 지금 가장 유명한 동시대 철학자이자,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철학자’로도 불리지만, 20년쯤 전 이 책이 나왔을 무렵엔 40대 초반의 ‘뉴페이스’였다. 그의 이론적 기획은 헤겔철학과 라캉 정신분석을 결합하려는 것이었고, 책 부제도 ‘대중문화를 통한 라캉의 이해’다. 히치콕 영화부터 필름 누아르, 에스에프·탐정소설, 그리고 스티븐 킹을 통해서 라캉을 읽으려는 독특한 시도다. “고도로 정신적인 문화적 산물들을 통속적이고 평범하며 세속적인 문화적 산물들과 나란히 독해하는 것”이 이론적으로 생산적이고 전복적인 과정이라고 말한 발터 베냐민의 충고를 따른 것이다.

 

물론 전제가 있다. 지제크가 다루는 대중문화의 산물들이 독자에게도 친숙해야 한다는 점이다. 낯선 이론을 친숙한 작품들과 대질시키려는 의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히치콕 영화조차도 ‘고도로 정신적인 문화적 산물’로 간주되는 상황이라면 사정은 달라진다. 혹 우리 처지가 그런 것은 아닐까.  

 

 

가령, 히치콕 영화 <사보타주>에 대한 그의 분석을 흥미롭게 읽으려면 영화에 대한 사전인지가 필요하다. 마지막 장면에서 아내는 남동생이 희생된 버스폭발 사고에 남편이 관여한 사실을 알게 된다. 저녁식사 자리에서 그녀는 자꾸만 식탁 위 칼에 손이 간다. 이 대목이 번역본에서는 “접시 위의 칼이 마치 자석처럼 그녀를 끌어당기는 힘을 발휘한다. 그녀의 의지를 꺾으려고 남편이 그 칼을 억지로 움켜쥐기라도 한 것인 양”이라고 했지만, 여기서 ‘남편’(husband)은 ‘손’(hand)을 잘못 옮긴 것이다. 그녀의 손이 의지와 무관하게 칼을 손에 움켜쥐려 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뜻이다. 남편은 그런 모습을 보고 식탁을 돌아 다가가며, 그들의 얼굴과 어깨만 보이는 대면 장면 뒤 칼에 찔려 쓰러진다. 아내가 찌른 것인지 남편이 자살하려는 의도로 찔린 것인지 모호하게 처리돼 있다.

 

지제크는 이 살인 장면을 두 가지 위협의 제스처가 만난 결과로 분석한다. “그것은 훼방된 제스처다. 즉 실행되도록, 완성되도록 의도된 제스처가 아니라 외적인 장애에 의해 좌절된 제스처”다. 하지만 여기에도 반전이 있다. 라캉이 정의한 위협의 제스처와는 정반대로 옮겨졌기 때문이다. 라캉에 따르면, 위협이란 애초 완수되지 않도록 의도된 행위다. 문제의 장면에서 아내의 욕망은 남편을 찌르려는 욕망과 억제하려는 욕망으로, 남편의 욕망 또한 자기보존적 욕망과 마조히즘적 욕망으로 분열돼 있다. 이 두 분열된 욕망의 중첩과 일치에서 나온 결과가 살인이라는 게 지제크의 견해다.

 

<삐딱하게 보기>는 지제크의 저작 가운데 가장 먼저 번역됐고, 현재까지 가장 널리 읽힌다. 하지만 많은 오역들이 교정되지 않은 채 방치돼 있다. 분석 대상인 대중문화를 참고하지 않은 것이 ‘외적 장애’라면, 애초에 다 읽을 생각이 없는 독자의 모호한 욕망도 한몫 거드는 게 아닌가 싶다. 널리 읽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아무도 읽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 책도 ‘고전’에 값한다.

 

12. 05. 18.

 

 

P.S. 실제로 <삐딱하게 보기>는 지난 2005년에 동아일보가 선정한 '21세기 新고전 50권'의 하나로 선정되기도 했다.

어려운 이론과 복잡한 현실을 자유롭게 넘나든다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아주 특별하다. 슬라보예 지젝은 영화와 소설을 통해 자크 라캉의 정신분석학 개념을 잘 드러내 준다. ‘대중문화를 통한 라캉의 이해’라는 부제를 달았지만 이를 ‘라캉을 통한 대중문화의 이해’라 불러도 무방하다. 현대를 사는 우리 자신의 정신세계나 심리적 자화상을 분석하고픈 독자에게 중요한 지침을 주는 책이다. 

참고로, 경향신문의 이번주 '21세기에 보는 20세기 사상지도' 또한 지젝을 다루고 있다(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205181812485&code=900308). 

 

 

한편, 다음달 6월말에 지젝이 방한할 예정이라고 한다. 2003년 가을에 이어 두번째일 듯한데, 오랜만에 '실물'을 보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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