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 주간경향(976호)에 실은 북리뷰를 옮겨놓는다. 조금 읽기 편한 책으로 고른 게 피터 매캘리스터의 <남성 퇴화 보고서>(21세기북스, 2012)인데, 생각보단 '하드'했다. 당신이 역사상 가장 못난 남성이라고 반전도 없이 몰아붙이는 책이니!..

 

 

 

주간경향(12. 05. 22) 역사상 가장 못난 현대 남성

 

“지금 이 책을 읽는 남자나 이 책을 선물로 받을 남자는 역사상 가장 ‘못난 남자’다.” 호주의 고인류학자 피터 매캘리스터가 쓴 <남성 퇴화 보고서>의 도발적인 서두다. 사실은 책 전체가 이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한 것이니 서두이면서 동시에 책의 결론이기도 하다. 고인류학자로서 남자를 포함한 인간 연구에 몰두해온 그가 처음부터 ‘악의적인’ 의도로 남성을 해부대에 올려놓은 건 아니었다. 고백대로라면 저자는 이전 남성과 비교해 ‘호모 매스큘리누스 모더누스’(현대의 근육질 인간)의 미덕에 대해 쓰고자 했다. 하지만 지금껏 지구를 걸어 다닌 호모 사피엔스 수컷들과의 비교과정에서 그런 미덕을 찾는다는 게 불가능하다는 걸 발견한다. 그의 ‘남성인류학’이 승리가 아닌 패배의 기록으로 채워진 이유다.


저자는 힘, 허세, 싸움, 운동능력, 말재주, 미모, 육아, 성적 능력, 8가지 비교 범주를 통해서 현대 남성이 과거의 조상들에 비해 얼마나 나약하며 모자란가를 조목조목 입증해나간다. 현대 남성에 대한 이토록 ‘상세하고도 굴욕적인 자료들’을 낳은 선행연구들도 놀랍고 이를 빠짐없이 참고한 저자의 집념도 혀를 내두르게 한다.

 

몇 가지만 살펴보자면, 먼저 ‘힘’에서 현대 남성은 과연 얼마만큼 자부심을 가질 수 있을까. 근육질 몸매에 대한 과도한 집착마저 보이는 현대인이지만, 고대인과의 비교 결과는 실망스럽다. 저자는 2004년 세계팔씨름연맹 챔피언으로 이두근의 둘레가 55cm나 되는 알렉세이 보에보다를 대표로 내세웠지만, 키가 153cm인 네안데르탈인 여성과의 팔씨름에서도 진다는 결과를 얻는다. 네안데르탈인 남성은 상체 근육이 여성보다 50%나 더 많다고 하니 애초에 비교 자체가 무리다. 더 굴욕적인 건 침팬지조차도 근육의 힘이 인간보다 네 배나 더 강하다는 점. 따라서 호모 사피엔스가 ‘퇴화한 유인원’의 일종이라는 주장이 무리가 아니다. 동물행동학자 데즈먼드 모리스가 일찍이 인간을 ‘털없는 원숭이’라고 명명했지만 더 정확하게는 ‘털없고 약한 원숭이’라고 불러야 한다는 게 저자의 생각이다


 

자신의 용감함을 과시하려는 ‘허세’는 또 어떤가. 가령 미국 해병대에서는 교관들이 훈장 뒷면의 뾰족한 바늘로 병사들의 가슴을 찌르는 ‘블러드 피닝’(Blood Pinning)의 전통이 있고, 미국 도시 갱단의 입회식에서는 신입회원이 무차별 구타를 당하는 동안 바닥에 떨어진 동전 여섯 개를 주워야 하는 ‘공짜로 동전 줍기’ 행사를 치르기도 한다. 하지만 역시나 호모 사피엔스 남자 조상들이 겪은 고통에 비하면 애교스럽다. 선사시대 캘리포니아의 한 부족 소년들은 성인식 때 독침개미들이 우글거리는 구덩이에서 뒹군 다음 쐐기풀로 채찍질을 당해야 했다. 브라질 카야포족 남성은 맨손으로 말법집을 습격한 뒤 말벌에게 쏘이는 ‘말벌 싸움’을 평생 열 번 정도 치러야 했다. 고문과 사냥의 시련, 그리고 두개골 절개수술 같은 주제로 옮겨오면 더더욱 할 말이 없어지는 게 현대 남성이다. 고대 부족사회에서는 자신을 드러내는 방도가 무모한 고통과 위험을 감수하는 것밖에 없었다고 위안을 삼는 수밖에. 


아무래도 힘에서는 밀린다면 반대로 자상함 같은 덕목에선 승산이 좀 있지 않을까. 하지만 이 또한 역부족이다. 요즘은 어린자녀와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내는 ‘새로운 아빠’ 모델도 등장했다지만, 좋은 아빠 상은 아프리카의 아카 피그미족 남성의 몫이다. 그들은 하루 평균 12시간을 자녀와 함께 보낸다. 그리고 집에 있는 시간의 약 4분의 1 동안은 아이를 품에 안고 지내며 아예 아내와 더불어 아이를 데리고 잔다. 심지어는 아기에게 젖도 물린다. 현대 남성을 ‘부족한 아빠’로 몰아붙이기에 충분하다. 저자는 현대인이 자랑할 만한 성적 능력과 성적 자유, 금욕까지 더 비교해보지만 모두 완패다. 그래서 결국은 제목대로 ‘남성 퇴화 보고서’가 되었다. 호모 에렉투스 조상 이래로 퇴화를 거듭해온 여정, 하지만 이 ‘남자의 진실’이 저자의 소회대로 한탄스럽기만 한 건 아니다. 어쩌면 우리는 자신이 ‘못난 남자’라는 걸 아는 유일한 남자일지도 모르니까.

 

12. 05.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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