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 매경이코노미에 실은 서평을 옮겨놓는다. 알리 라탄시의 <인종주의는 본성인가>(한겨레출판, 2011)을 읽고 내용을 간추려보았다. 제목에 답하자면, 인종주의는 인간의 본성과 무관하다. 인종주의와 관련하여 나온 책 몇 권을 같이 읽어봐도 좋겠다.  

매경이코노미(11. 11. 09) '인종', 차별을 정당화하는 수단일 뿐

‘중요하지만 대개 생각하기를 꺼려하는 주제’라고 하면 당신은 무엇이 떠오르는가? 알리 라탄시의 <인종주의는 본성인가>라는 저서에서 ‘인종주의’라고 답한다. 꺼려하는 이유야 물론 분명하다. 인종주의에 드리워진 어두운 현실과 야만적 역사 때문이다. 책의 부제는 ‘인종, 인종주의, 인종주의자에 대한 오랜 역사’라고 붙어 있지만, 사실 저자가 강조하는 것은 인종주의가 가진 오래지 않은 역사, 오히려 ‘짧은’ 역사다.  

인종 구분만큼 오래되었을 듯싶지만 정작 ‘인종주의’란 말이 만들어진 것은 1930년대다. 독일 나치의 ‘유대인 청소’ 프로젝트에 상응하는 표현으로 도입된 것이 인종주의다. 그렇다면 그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인종주의란 ‘인종주의의 전사(前史)’ 혹은 ‘인종주의 이전의 인종주의’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인종이란 말이 비록 인종주의보다는 더 오랜 역사를 갖고 있지만, 그렇다고 아주 오래전부터 쓰인 말은 아니다. 영어의 경우 ‘인종(race)’이 현재와 같은 의미를 갖고 등장하는 건 16세기 중반부터라 한다. 16세기는 지리상 발견의 시대이고 제국주의적 팽창과 식민지화가 본격화되는 시대였다. 유럽 식민주의자들에게 신대륙 발견은 동시에 원주민과의 조우를 의미했다. 그들은 원주민에게도 인간의 지위를 부여해야 하는지를 두고 논쟁을 벌였다. 이성을 갖고 있는 똑같은 인간이라면 기독교도로 개종시켜야 했고, 그렇지 않다면 노예로 삼는 것이 정당하다고 보았다. 그리고 17세기 노예무역이 활성화되면서 아프리카인을 인간보다 모자란 존재로 보는 시각이 널리 퍼졌다. 그런 편견이 없었다면 아프리카의 흑인 2,000만 명을 악명 높은 노예 수송선에 싣고 아무렇지도 않게 대서양을 건너가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18세기의 계몽철학자 칸트와 흄조차도 “어떤 사람이 피부색이 새카맣다는 것은 어리석은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생각했다. 19세기에 대두한 과학적 인종주의는 흑인종과 황인종이 열등하다는 걸 입증하려 애썼고, 여성과 하등 인종들이 백인 남성보다 추론 능력이 떨어진다고 간주했다. 그리고 이런 차이를 빌미로 시민권을 제한하고 정치적 차별을 정당화했다.  

제국주의적 인종주의가 사회적 다윈주의와 결합하면서 나타난 것이 1880년대부터 1930년대까지 미국과 유럽을 휩쓴 우생학이다. 다윈의 사촌인 프랜시스 골턴을 비롯한 우생학자들은 인류발전을 위해 ‘부적격자’의 출생은 낮추고 ‘적격자’의 수는 늘리기 위한 정책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에서 나온 최악의 인종주의가 나치의 ‘유대인 청소’와 ‘최종해법’이다. “벼룩이 집에 살고 있다고 해서 가축이 되지 않는 것처럼, 유대인들이 우리들 틈에 끼어 살고 있다 해도 그들이 우리에 속한다는 증거가 되지 않는다”고 한 괴벨스의 발언이 나치의 인종주의를 잘 대변해준다.  

물론 나치의 유대인 청소 프로젝트가 ‘과도한’ 것이긴 했지만 반(反)유대주의 역사는 뿌리 깊은 것 아니냐는 반론도 가능하다. 그러나 ‘반유대주의’란 용어조차도 사실은 1870년대 후반에야 등장했다. 독일의 선동가 빌헬름 마르가 반유대연맹이란 단체를 만들고 유대인에 반대하는 운동을 펼치면서 쓰기 시작한 게 기원이다.  

그러니 우리가 막연하게 생각하는 것보다 인종주의의 역사는 아주 짧다. 더불어 나치의 인종주의 과학이 시도한 인종주의의 정당화는 아무런 과학적 근거가 없다. 유전학에 따르면 인류가 서로 다른 유전자풀(gene pool)을 갖고 있는 인구 집단들로 구분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게 유전자풀의 패턴이 다르고 표현형질에서 차이가 난다고 해서 ‘분리된 인종’이란 개념이 성립되는 것은 아니라는 게 오늘날 인종에 관한 과학적 견해다.  

즉 인종이란 것이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으며 존재한 적도 없다. 따라서 인종의 차이를 전제로 인종 간 차별을 정당화하려는 모든 인종주의는 근거 없는 허울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지구상의 많은 분쟁이 인종화된 형태를 띠고 있다는 게 또한 현실이다. 우리는 ‘탈인종적인 미래’로 넘어갈 수 있을까. 일단은 인종주의에 대한 바로보기가 필요할 듯싶다.  

11. 11. 02. 

P.S. 인종주의에 대해 그다지 읽은 바가 없어서 서평감으로 고른 책이지만 생각만큼의 성과를 거두진 못했다. 저자의 주장에 따르면 인종주의 자체가 몹시도 혼란스러운 개념이서 어쩌면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른다. 역자 또한 "책의 첫 장부터 마지막 장까지, 미 모호함과 혼란스러움은 인종주의에 대해 뭔가 '명료한 규정'을 원하는 독자들의 발목을 잡을 것이다"라고 '옮긴이의 말'에 적었다. "얼핏 보기에도 인종적-계급적-성적-지리적 개념이 혼재해 있는 다층적인 구조"를 갖고 있는 게 인종주의다. "이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인종/인종주의를 짧게 소개하는 것이다 보니, 책이 그리 친절하지는 않다."(295쪽) 좀 아쉬운 부분이다.  

   

번역과 관련해서도 한 대목은 교정하고 싶다. 아무리 무난하고 깔끔한 번역이라도 언제나 옥에 티는 감추고 있는 법이니 그걸 고쳐나가는 일이 역자나 편집자만의 몫은 아니다. 독자의 권리이자 의무이기도 하다. 결론 '탈인종적인 미래를 생각한다'의 한 대목이다.  

탈민족적, 탈부족적, 탈인종적인 세계시민으로서의 생각 틀과 정체성, 그리고 이전보다 더 과거 회귀적인 프로젝트가 계속해서 21세기에도 작동하고 있다.(283쪽)  

원문은 "A long struggle between attempts to create post-ethnic, post-national, post-racial, cosmopolitan frameworks and identities and more backward-looking projects is going to be a continuing feature of life in the 21thcentury."(170쪽)이다. 역자가 '오랜 투쟁(long struggle)'이란 표현을 옮기지 않아서 메시지가 좀 약화됐다는 느낌이다.  

다시 옮기면, "탈민족적, 탈부족적, 탈인종적인 세계시민이라는 인식틀과 정체성을 만들어내려는 시도와 이전보다 더 퇴행적인 인종주의적 프로젝트 사이의 오랜 투쟁이 21세기에도 계속 우리의 삶을 특징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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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ssbinder 2011-11-10 16: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블로그에서 소개되는 번역된 한 권의 책에 관한 글을 읽을 때면 '두 권의 책을 비교해가며 읽고 있을'로쟈님의 모습을 떠올리곤 해요. 그런 성실함을 본받고자 합니다^^

로쟈 2011-11-24 11:42   좋아요 0 | URL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