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기획회의(304호)의 특집은 '읽고 쓰는 사람들'이다. 책을 읽고 책에 대해 쓰는, '책에 대한 책'을 쓰는 사람들에 대한 리뷰 특집인데, 서평과 서평가의 역할에 대한 간단한 총론에 이어서 최성일, 이권우, 정혜윤, 고명섭, 장정일, 김은섭, 명로진, 윤미화 등이 대표 서평가로 다뤄졌다. 거기에 나도 포함돼 있는데, 한겨레신문의 최원형 기자가 맡은 꼭지의 제목이 '자유로운 '독서공동체'를 위하여'라고 붙여졌다. 로쟈식 서평의 방법과 지향점에 대해 잘 짚어주고 있어서 반가웠다. 일부를 발췌해놓는다.  

 

로쟈의 방법 

로쟈는 책과 책을, 사상과 사상을, 이 작가와 저 작가를, 대표 저작과 입문서를, 원본과 번역본을 어디에선가 불러와 끊임없이 묶고 엮고 꿰어낸다. 신형철 문학평론가는 로쟈의 이런 작업 방식을 '배치하기, 짝짓기, 지도 그리기, 교정하기' 등으로 정리한 바 있다. 러시아의 대문호 도스토예프스키와 영화감독 타르코프스키를 나란히 놓고선 '윤리로서의 미학'이 무엇인지 생각하고, 슬라보예 지젝을 놓고 그 사상의 뿌리를 쥐고 있는 헤겔과 라캉, 마르크스를 오락가락하기도, 지젝을 앞세워 탈이데올로기 시대 이후의 한국문학을 들여다 보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이런 작업이 끊임없이 반복되고 확장된다는 점이다. <책을 읽을 자유>에 모아놓은 자크 데리다에 대한 글 모음을 보자. 데리다 사상의 핵심이 뭔지, 주요 저작은 뭔지, 그의 사상에 발을 들여놓으려면 어떤 입문서를 참조하면 좋은지, 데리다에 대한 중요한 비평가들은 누가 있는지 등이 모두 담겨 있다. 이 내용물은 한두 번의 기획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여러 차례의 읽기-쓰기가 반복되면서 축적된 것이다. 

로쟈의 지향 

로쟈가 지향하는 것은 일종의 '독서공동체'다. 그는 <책을 읽을 자유>에서 책 제목을 정한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공적인 성격의 서평을 쓰면서 내가 바란 것은 그렇게 함께 읽는 '우리'의 확산이었다. 사회적 관심과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좋은 책을 통해 얻은 시각과 통찰을 서로 나누고, 더 나아가 '책을 읽는 문화'를 다져가는 데 일조하고 싶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일상생활 속에서 일어나는 로쟈의 읽기, 쓰기는 로쟈만의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것이다. 여러 차례 반복되는 읽기, 쓰기 속에서 퇴적물을 남기는 로쟈의 글쓰기는, 고매한 자기 세계에 빠져들어 불후의 명문을 써내는 것과도, 대중이 바라는 지식에 대해 시의적절한 명강의를 펼치는 것과도 거리가 멀다. 그의 글쓰기는 철저하게 모든 사람들이 책을 읽을 자유를 누리는, 독서공동체에만 충실하게 복무하고자 한다. 인터넷 서평꾼이나 곁다리 인문학자와 같이 조금 '비뚤어진' 정체성을 달고 있는 이유나, 글 모음이나 서재 등을 통해 자신의 정신활동을 최대한 투명하게 드러내고 있는 이유 역시 여기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세상엔 자신을 알아주는 이가 적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없는 건 아니다. 필자는 글의 마무리로 자유로운 독서공동체의 전망에 대해 적었다.  

로쟈와 함께 

따라서 로쟈와 함께 이 자유로운 독서공동체에 참여하려 한다면, '공부를 정말 많이 해야 한다'는 혼잣말이 절로 나올 것이다. 로쟈처럼 나의 정신활동도 투명하게 까놓고 이야기할 정도로 공부해야 독서공동체에 조금이라도 이바지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실제로 로쟈와 자유로운 독서공동체의 존재는, 학계와 출판계에서 '보이지 않는 감시의 눈' 구실까지 수행하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오역 짚기'다. 그동안 많은 사람들이 잘 몰라서 또는 번역자나 출판사의 얼굴 봐서 번역의 오류를 제대로 지적하지 않는 경향이 있었는데, 로쟈가 여러 차례 오역을 짚고 문제를 제기한 뒤로 출판계 전체에 번역에 좀더 공을 들이는 분위기가 감지되고 있다. 와, 이 정도라면 자유로운 독서공동체의 앞날은 더 밝은 것이라고 내다볼 수 있지 않겠는가.

 

'공부를 정말 많이 해야 한다'란 생각이 자극이 되면 좋겠지만 그렇다고 부담으로 작용한다면 내가 바라는 '독서공동체'는 아니다. 최근에 나온 클레이 셔키의 책이 주장하듯이 '많아지면 달라진다'가 애당초 내가 가졌던 모토이다. 그래서 '대중지성'이나 '지식 품앗이'란 말도 곧잘 썼다. '오역 짚기'도 저마다 자신의 관심분야에서 일조할 수 있는 일이다(보통은 '굳이' 그렇게 하지 않을 따름이다). 여하튼 독서공동체는 '느낌의 공동체'이기도 하고 '생각의 공동체'이기도 하며 '관심의 공동체' '의지의 공동체'이기도 할 것이다. <애도와 우울증>에 대한 저자 인터뷰에서도 기대를 밝힌 바 있지만 '러시아문학 공동체'도 희망해볼 수 있다. 그렇게 책을 읽고 말하는/쓰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과연 뭐가 달라질까, '로쟈'가 가장 궁금해하는 일이다... 

11. 10.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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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이 2011-10-02 2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감합니다.
마지막에 단 코멘트까지 읽고 떠오른 건 알베르토 망구엘이 <독서의 역사>에서 언급한 몇 대목이네요. 가령 휘트먼에 대해: "여기서 그는 민주주의의 개념에 대해, 그것은 광신이나 정치적 학파에 전혀 때묻지 않은 '자유로운 독서가들'의 사회라는 생각을 품기 시작했다."같은.
이번 <기획회의>는 손에 집고 읽어봐야겠네요^^

로쟈 2011-10-03 08:05   좋아요 0 | URL
그러고 보면 미국도 아직은 휘트먼의 이상과는 거리가 먼 사회로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