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일이 너무 많으면 손을 놓게 되듯이 읽을 책이 너무 많아도 바라만 보고 있게 된다. 책상 위와 아래 잔뜩 쌓인 책들을 망연히 바라보다가 얇은 책 한권을 빼든다. <추첨민주주의>(이매진, 2011)다. 이번주에 나온 책으로 에이미 굿맨과 데이비드 굿맨의 <미친 세상에 저항하기>(마티, 2011)와 같이 묶을 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민주주의'를 주제로 한 책들도 너무 많아서 사실 어디에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막연하지만, 이번주에 책을 고른다면 이 두 권부터 시작해도 좋겠다. 일은 손이 닿는 데부터 시작하는 수밖에 없는 것처럼 독서 또한 그렇다.  

       

한겨레(11. 07. 16) 위기의 ‘대의 민주주의’ 노동자부터 주부까지 추첨으로 뽑아 국회로!

데모크라시는 그리스어 ‘데모스’와 ‘크라토스’가 합쳐져 만들어진 말이다. 곧 민주주의는 ‘전체인민’이 ‘스스로 통치’하는 체제를 뜻한다. 아테네처럼 작은 도시국가에서는 그것이 가능했으나 인구가 많은 현대의 국가에서 모든 이들이 모여서 의사를 결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에 따라 도입된 것이 대의기관으로서의 국회다. 국회는 보통, 평등, 직접, 비밀 투표에 의해 선출되어 자신을 뽑아준 국민을 대표하여 각종 법령을 제정하고 국가의 대사를 결정한다. 원론적으로 그렇다.

현실은 그게 아니다. 대한민국 18대 국회는 299명 정원 가운데 절반에 가까운 141명, 47%가 서울대 출신이다. 법조인 출신은 60명으로 20%. 반면 노동자 출신은 3명, 단 1%다. 인구의 절반인 여성은 국회의원 중 14%에 불과하며, 유권자의 41%를 차지하는 19~39살은 7명으로 2%인데 전체 인구의 17%인 50대는 142명으로 48%를 차지한다.

인류가 발명한 정치체제 가운데 그래도 가장 나은 게 이 꼴인 것을 어쩌란 말인가. 그러면 그 대안으로 국회의원을 추첨으로 뽑는다면? 책 <추첨 민주주의>는 이런 도발적인 제안을 내놓는다. 우선 역사적으로 뜬금없는 얘기가 아니다. 아테네의 정치도 기본이 추첨이었다. 민주주의의 원형으로 꼽는 까닭은 시민들이 민회에 모여 결정을 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지금으로 보면 행정, 입법, 사법의 전 분야에서 아주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모두 추첨으로 공직을 충원했기 때문이다.

고대 로마와 르네상스 시기 이탈리아 도시공화국에서도 용례는 발견된다. 14세기 피렌체에서는 예비 선정위원회를 통과한 이들을 대상으로 비밀투표를 실시해 3분의 2 이상 득표한 사람들의 이름을 가죽가방에 넣은 뒤 무작위로 선택해 행정관을 뽑았다. 베네치아는 13세기 후반부터 추첨과 투표를 혼합해 최고 지도자인 도제를 뽑기 시작해 1798년 공화국이 붕괴할 때까지 이 제도를 유지했다. 이런 추첨 대표 방식은 현재 사법 배심제의 형태로 그 예가 남아 미국, 영국,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등 46개국에서 운영되고 있고 한국에서도 시범적으로 도입되고 있다.

책은 추첨제의 장점에 대해 파고들어 간다. 우선 추첨을 하면 국민 전체의 구성과 근접한 국회를 구성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지금처럼 선거비용을 댈 수 있는 부자, 학벌 좋은 전문직 엘리트, 텔레비전 카메라가 돌아갈 때만 입에 침을 튀기는 ‘미디어형 인물’이 아니라 일용직 노동자부터 전업주부까지 국회로 진출할 수 있다. 이러한 소시민들이 의회의 주인이 되면 의원은 특권이 아니라 봉사가 되며 의사당은 정쟁공간이 아니라 일하는 장소가 될 것이다.

또 추첨을 하면 부패가 줄어들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현재의 선거 시스템은 원천적으로 부패 가능성이 내재돼 있다. 입후보하려면 일정 금액을 기탁해야 하고, 선거자금이 없이는 운동원을 둘 수 없기 때문이다. 일단 당선되면 그동안 들인 돈을 벌충하려는 유혹을 견디기 힘들고, 다음 선거에 또 나오려면 자금을 든든히 마련해 두어야 한다. 하지만 추첨제에서는 재선이 사실상 불가능하고 설혹 된다 하더라도 돈과 무관하므로 부패와 무관하다. 설혹 부패한다 해도 현재의 의원들보다는 덜할 것이다. 이와 함께 거수기 역할도 사라진다. 뒷배 역할을 하는 이익단체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으며 소속정당의 이데올로기를 단체로 대변할 일이 없기 때문이다.

군대 내 투표부정을 폭로했던 이지문씨는 덧붙인 글에서 “추첨제는 하나의 수단일 뿐, 그것 자체로 완전무결한 것은 아니며 제도의 성패는 결국 사람의 몫”이라고 말했다. 그 점에서 이 책은 현재 대의제 민주주의가 능사는 아니며 보완할 여지가 많은 제도임을 환기하는 것으로도 읽힌다.(임종업 선임기자) 

경향신문(11. 07. 16) 풀뿌리 민주주의 만들고 있는 ‘시민 영웅들’

미국의 진보적 독립언론인 ‘데모크라시 나우!’의 창립자이자 진행자인 에이미 굿맨(54)이 민주주의를 위해 싸우는 “평범한 시민들”의 저항을 취재해 담아냈다. “용기와 신념을 갖고 풀뿌리 민주주의”를 만들고 있는 평범한 영웅들이 “장기적이고 진정한 변화”를 일궈나가는 이야기라고 저자는 서문에서 밝히고 있다.

2006년 8월 아랍 출신의 미국인 건축가 라에드 지라르는 케네디 공항에서 보안요원들에게 탑승을 제지당했다. 문제는 그의 티셔츠였다. 거기에는 영어와 아랍어로 ‘우리는 침묵하지 않을 것’이라고 적혀 있었다. 보안요원들은 그 셔츠를 벗기고 ‘뉴욕!’이라고 쓰인 티셔츠를 입혔다. 그들은 앞자리로 지정된 지라르의 탑승권을 찢었으며, 맨 뒤의 화장실 옆 좌석번호가 적힌 탑승권을 내밀었다. 지라르가 이 ‘황당한 굴욕’을 ‘데모크라시 나우!’에 출연해 공개하자, 그 고백은 “인종 프로파일링에 대한 시민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그가 입었던 것과 똑같은 티셔츠가 수천장이나 만들어졌고, 많은 예술가와 학생들이 그 옷을 입은 채 공항으로 몰려가 항의했다. 결국 ‘문제의 티셔츠’는 비행기 탑승에 아무 지장이 없는 ‘평범한 티셔츠’로 복귀했다. 아울러 이 시위는 외모와 옷차림을 검열하는 미국식 애국주의와 인종주의에 경종을 울렸다.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미국 뉴올리언스를 휩쓸었을 때의 일이다. 대통령 부시는 2주가 지나서야 폐허가 된 도시를 찾아와 “여러분이 마을과 생활을 재건할 수 있도록 모든 조치를 취하겠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진풍경이 벌어졌다. 숨진 주민들의 주검을 수습하는 일을 군, 경찰, 지방정부가 수수방관했다. 시신들은 도로와 벌판에서 부패했다. 곧이어 재난 복구에 ‘민영화’가 도입됐다. 부시에게 거액의 정치자금을 내놨던 ‘캐니언 장례회사’가 시신 한 구당 1만2500달러를 받아가며 수습에 나섰다. 집 잃은 주민들 가운데 일부는 ‘카니발 크루즈 라인’이라는 회사의 선박에 수용됐다. 저자는 “공화당의 자금줄인 이 크루즈 회사는 휴가철 요금의 두 배가 넘는 금액을 챙길 수 있었다”고 꼬집는다.

결국 시민들이 나섰다. 뉴올리언스 9구역은 “가장 활기차게 재건이 진행”된 곳이다. 거기에는 주택을 복구하고, 이재민에게 의료와 법률 서비스, 기초적 생필품을 제공하려는 자원봉사자들의 모임인 ‘커먼 그라운드’의 본부가 있다. 그들은 단돈 50달러와 3명의 봉사자로 출발한 지 며칠 만에 이슬람사원에 진료소를 열었고, 영화감독 마이클 무어에게 4만달러를 지원받아 저소득층을 위한 생필품 보급소를 설치했다. 본부 앞 표지판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자동차로 구경만 하고 지나가는 당신, 내 고통을 구경하려면 차를 세우고 값을 지불하라. 여기서 1600명이 숨졌다.” 



책에는 이 밖에 도서관 이용자의 개인정보를 염탐하는 일을 거부하며 ‘애국법’에 항의한 코네티컷주 도서관의 사서들, 반전연극을 공연하려다 제지당한 고등학생들, 이라크전 파병을 공개 거부한 육군 장교 등이 등장한다. 모두 ‘데모크라시 나우!’를 통해 세상에 알려진 인물들이다. 1996년 태동한 이 인터넷 매체는 “깊이 있는 뉴스 전달과 진보적 관점의 시사 분석”을 모토로 삼는다. 광고나 기업의 후원이나 협찬을 받지 않고 공공재정에도 의존하지 않는다. 사이트 회원들과 시청자의 후원금, 방송중계업자들이 지불하는 저작권 사용료, DVD와 책, 머그잔 등을 판매한 수입으로 제작비를 충당한다. 민주주의를 빙자한 선정주의, 뻥튀기 제목을 동원한 ‘낚시질’은 보이지 않는다. “풀뿌리 시민영웅들”이 주요 등장인물이지만, 노엄 촘스키, 나오미 클라인, 슬라보예 지젝, 우고 차베스 같은 ‘유명 인물’도 종종 등장해 진행자 에이미 굿맨과 시사 문제를 주고받는다.(문학수 선임기자) 

11. 07. 16.   

P.S. 추첨민주주의에 대해서는 가라타니 고진의 <일본 정신의 기원>(이매진, 2006)도 참고할 수 있다. 대의제에 대한 대안으로 제비뽑기(추첨제)가 갖는 의의에 한 장이 할애돼 있다. 그밖에 민주주의 관련서로 최근에 나온 책으로는 고병권의 <민주주의란 무엇인가>(그린비, 2011), 고성국의 <10대와 만나는 정치와 민주주의>(철수와영희, 2011)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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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엘리트주의 청산과 추첨민주주의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1-08-01 21:42 
    내일자 경향신문의 '문화와 세상' 꼭지를 옮겨놓는다.낮에 쓴 칼럼인데, 강준만의 <강남좌파>(인물과사상사, 2011)의 문제의식을 풀어놓고 싶었다. 같이 참고한 책은 어니스트 칼렌바크와 마이클 필립스가 쓴 <추첨민주주의>(이매진, 2011)다.경향신문(11. 08. 02) [문화와 세상]엘리트주의 청산한국사회의 여러 문제들을 지속적으로 진단하고 비판함으로써 소위 ‘강준만 한국학’이란 걸 세워온 강준만 교수가 최근 <강남좌파&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