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말 '기습적으로' 출간된 가라타니 고진의 신작 <유머로서의 유물론>(문화과학사)이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온라인 서점의 경우지만, 우리에게 번역 소개된 그의 책들 가운데 가장 많이 팔리고 있는 것이다. 많이 팔리는 만큼 많이 읽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표제글인 '유머로서의 유물론'만큼은 한번쯤 읽히지 않을까 싶다. 8쪽밖에 되지 않는 그 글은 이 책에 묶인 다른 비평문들과 비교할 때 가장 읽기 쉬운 글이기도 하다(게다가 유머러스하다).

고진은 먼저 일본 근대문학에서의 '샤세이분(寫生文)'이 서양의 리얼리즘과 전혀 다른 종류의 것이라고 지적한다. 샤세이분에서의 객관적인 묘사는 "자기 자신을 높은 곳으로부터 보는 자기의 이중화"(127쪽)를 의미하기 때문인데, 이러한 묘사는 근대소설의 내러티브로써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핵심은 '자기의 이중화'이다. 고진은 그것을 프로이트가 말하는 유머와 연결시킨다. "프로이트가 생각하기에 유머는 자아(아이)의 고통에 대해 초자아(부모)가, 그런 일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라고 격려하는 것이다. 이는 자신을 메타 레벨에서 내려다보는 것이다."

물론 유머를 그렇게 정의내릴 경우, 또 다른 '자기의 이중화'인 자기 아이러니(self-irony)와 겹칠 수 있는데, 고진에 의하면 이 둘은 같지 않다. "왜냐하면 아이러니가 타인을 불쾌하게 하는 것에 반해, 유머는 왠지 그것을 듣는 타인도 해방하기 때문이다." 고진은 이러한 유머를 보들레르를 인용하면서 다시 한번 정의내리는 바, "그것은 유한적인 인간의 조건을 초월하는 것인 동시에, 그 일의 불가능성을 고지하는 것이다."(128쪽) 그런 의미에서 유머는 일종의 '정신적 자세'이며 '웃음'과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지만, 대개의 유머는 웃음을 유발하기도 한다. 고진도 사례로 들고 있지만, 사실 카프카가 자신의 음울한 소설들을 읽어줄 때, 청중은 물론 그 자신도 우스워서 데굴데굴 굴렀다는 건 잘 알려진 일화이다(요컨대 그는 블랙 유머리스트였던 것이다).

이러한 예비적인 고찰에 이어서 고진은 제법 근엄해 보이는 사상가들에게서 발견되는 유머로 우리의 주의를 이끈다. 그는 스피노자의 결정론적 세계인식에서 유머를 발견하며, 칸트의 '초월론적 비판' 또한 유머러스한 것으로 규정짓는다. '초월론적'이란 어떤 종류의 '정신적 태도'이며 '자기 이중화'이기에 유머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유머는 마침내 마르크스에게까지 전염된다. 즉 "자기는 세계(역사) 안에 있으며, 그것을 초월할 수 없다, 초월한다는 믿음마저도 그것에 의해 규정되고 있다는 초월론적 비판이야말로 '유물론'이며, 이는 그 무엇보다도 유머인 것이다."(131쪽) 그 유머를 유머로서 받아들이지 못할 때 우리는 이념을 맹신하는 민족주의·국가주의·원리주의자가 되거나 이념의 몰락 앞에서 상처받아 어떠한 이념도 경멸하고자 하는 아이러니스트 또는 어찌할 바를 모르는 니힐리스트로 전락한다.

그렇다면, 아무나 유머리스트가 되는 건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다. 고진이 끝으로 인용하고 있는 프로이트에 의하면 유머적인 정신상태는 귀중한 천분이며 대개의 많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주는 유머적 쾌감을 맛볼 능력조차도 결여하고 있다. 요컨대 고진의 이 유머론에서 당신이 유머적 쾌감을 맛보지 못한다면 당신에겐 정신적 귀족으로서의 자질이 부족하거나 결여돼 있다고 말할 수 있겠다. 반대로 만약에 당신이 이렇게 요약된 글에서까지 유머를 발견하고 데굴데굴 구를 수 있는 정신상태로 무장돼 있다면, 굳이 개그콘서트를 보지 않더라도 세상이 얼마나 희극적이며 유머러스한가를 실감하게 될 것이다.

 

 

 

 

민족시인이라 불리는 소월(1902-1934)의 시에서도 우리는 그러한 유머를 쉽게 발견한다. 저다병(각기병)으로 고생하던 그는 끝내 아편을 먹고 자살하는데, 그의 아내가 전하는 바에 의하면 말년의 그는 마음 상하고 아프다고 술만 마셨다. 그리고 술잔만 들면 울기만 했다. 그런 그가 생의 막바지에 쓴 시가 <三水甲山>(1934)이다(내가 가장 좋아하는 그의 시이다).

三水甲山 내웨왔노 三水甲山이 어디뇨
오고나니 崎險타 아하 물도 많고 山첩첩이라 아하하

내고향을 돌우가자 내고향을 내못가네
三水甲山 멀드라 아하 蜀道之難이 예로구나 아하하

三水甲山이 어디뇨 내가오고 내못가네
不歸로다 내고향 아하 새가되면 떠가리라 아하하

님계신곳 내고향을 내못가네 내못가네
오다가다 야속타 아하 三水甲山이 날가두었네 아하하

내고향을 가고지고 오호 三水甲山이 날가두었네
不歸로다 내몸이야 아하 三水甲山 못버서난다 아하하

三水甲山은 우리 생의 조건이다. 그것은 '지구'라는 '인간의 조건'(한나 아렌트)이면서 '세계-내-존재'라는 현존재의 조건(하이데거)이다. 그러한 조건 속에서 우리는 不歸로서 현존한다. 나는 이 불귀가 고진이 말하는 유머에 상응한다고 생각한다. 때문에 '내 고향'이라는 종교 혹은 이념에 의해 구제될 수 있는 이들은, 그래서 三水甲山을 벗어날 수 있는 이들은 굳이 유머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아하하'라는 웃음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가장 높이 날면서 가장 멀리 보는 새들이나 본전 생각나면 이동하는 철새들 또한 유머와 무관하다. 유머를 필요로 하는 건 아침마다 꼬꼬댁하고 울어제끼는 촌닭들이나 두렵고 다급할 때마다 고개를 처박는 칠면조 같은 새들이다. 그 칠면조들의 칠면조다운 자기 초월에의 본능, 혹은 '자기 이중화'의 의지야말로 유머에 값한다. 말하자면, 칠면조는 유머를 아는 새이다. 그리고 소월은 우리가 자랑할 만한 칠면조이다.

 

 

 

 

지난 연말에 나온 '유머북' 가운데 걸작은 <니진스키 영혼의 절규>(푸른숲)이다. 러시아의 전설적인 무용가 니진스키 자신이 정신질환으로 투병하던 말년에 쓴 일기인데, <니진스키의 고백>(문예출판사, 1975)으로 부분 번역되었던 것이 이번에 같은 역자에 의해서 완역돼 나왔다. 이 책 어느 곳을 들춰도 소월의 '三水甲山' 못지 않은 유머들이 넘쳐나는데, 내가 특히 좋아하는 대목은 "나는 울고 싶은데 신은 내게 쓰라고 명령한다. 그는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걸 바라지 않는다. 아내는 울고 또 운다. 나 역시 운다..."(347쪽)로 시작하는 부분이다. 이 대목의 75년판 번역은 "나는 울고 싶은데 神은 내게 계속 쓰라고 명령한다. 그는 내가 빈들거리는 걸 원치 않는다. 내 처는 줄곧 울고 있다. 나 역시 운다..."(218쪽)이고, 영역은 "I want to cry but God orders me to go on writing. He does not want me to be idle. My wife is crying, crying. I also..."이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걸'보다는 '빈들거리는 걸'이란 번역이 더 마음에 든다. 나 또한 오늘도 빈들거리지 않고 이 글을 쓴다. 이건 신의 명령이자 다 아시겠지만, 유머이다.

03. 01. 15.

P.S. 이 글은 북매거진 <텍스트>에 기고한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