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12월 중순이 넘어가면 출판계는 대작이나 문제작을 내놓지 않는다. 연말연시에 책 선물을 하는 경우는 있지만 독서할 시간은 많지 않고 그만큼 책을 찾는 발길도 줄어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12월에 나오는 책들은 대개 '밀어내기용'이 많다. 해를 넘기지 않기 위해 애를 쓴 결과다. 하지만 간혹 '통념'을 건너뛰는 책들도 나온다. 

  

이번주부터 나오기 시작한 <루쉰 전집>(그린비)이 그렇다. 1, 2, 7권이 선보였는데(더 나왔나?) 장서가들의 '책탐'을 부추길 만하다. 15권짜리 장정에 들어간 김영수의 완역본 <사기>도 <로마제국쇠망사> 완역본을 능가하는 대사업이 될 듯하다. <사기 본기1>(알마, 2010)이 이번주에 나왔다.   

전집이 아닌 단행본에 시선을 맞추자면 <문학카페에서 철학읽기>(웅진지식하우스, 2006)의 저자, 아니 내게는 <데칼로그>(바다출판사, 2002)의 저자 김용규의 <서양문명을 읽는 코드 신>(휴머니스트, 2010)이 출간됐다. 아니 이것도 '순수' 단행본은 아니군. '서양문명을 읽는 코드' 시리즈라 한다. 당초 신학과 철학을 전공한 저자의 '야심작'이라 할 만한데, 860쪽이 넘는 분량은 조철수의 <예수 평전>(김영사, 2010)을 떠올려준다. '대작'에 값하는 책들이다.   

개인적으론 <서양문명을 읽는 코드 신>이 '신이란 무엇인가'란 질문으로 시작하는 것이 흥미롭다. 자연스러워 보이지만, 거기에서 하나의 선택과 방향, 물음 등이 읽히기 때문이다. 방대한 여정도 시작은 첫걸음부터다. '신이란 무엇인가'란 형이상학 고유의 물음형식이 이 책의 첫걸음인 것이다. 그래서 떠올린 책은 잭 마일스의 <신의 전기>(지호, 1997)다. 퓰리처상 수상작이라고 해서 몇년전에 구해놓았는데, 현재는 절판중인 책이다(소장도서라곤 하지만 항상 어디에 두었는지가 문제다). 얼마전에 나온 카렌 암스트롱의 <신을 위한 변론>(웅진지식하우스, 2010)까지 포함하면 얼추 신에 대한, 신을 위한 '종합선물세트'가 될 만하다. 그런데, 왜 하필 신에 대한 관심이 필요한가? 저자가 길잡이로 삼은 것은 <팡세>의 한 구절이다.  

"자신의 비참함을 알지 못하고 신을 아는 것은 오만을 낳는다. 신을 알지 못하고 자신의 비참함을 아는 것은 절망을 낳는다."  

'서양문명을 읽는 코드'로 '신'에 이어지는 것은 '이성'이라 한다. 언제쯤 출간되는지 모르겠지만 볼프강 벨슈의 <이성1>(이학사, 2010)과 같이 읽어봄직하다. 이 또한 제1부만 번역돼 나온 상태인데, 원서의 부제는 '우리시대의 이성비판과 횡단이성'이다. 절반만 번역되었기에 번역본 부제는 '우리시대의 이성비판'이 됐다. 저자의 색깔이 더 강하게 드러날 '횡단이성'이 마저, 얼른 출간되면 좋겠다. 그런데, '우리시대'가 언제부터인지 궁금하신가? <계몽의 변증법>(문학과지성사, 2001)부터다. 거기서 알 수 있지만 제목의 '이성비판'에서 '이성'은 '비판'의 주어가 아니라 목적어다. 저자는 데리다와 들뢰즈, 리처드 로티와 넬슨 굿맨 등 프랑스와 미국철학의 '이성비판' 사례를 폭넓게 다루고 있다. 볼프강 벨슈의 전작으론 <미학의 경계를 넘어>(향연, 2005)가 소개돼 있다. 몇년 전 세미나에서 읽었는데, '미학의 해체'란 주제가 흥미롭지만 번역은 좀 아쉬웠다.    

그리고, 아감벤 독자들에겐 반가운 소식인데, <호모 사케르>를 기준으로 하자면 초기 저작인 <유아기와 역사>(새물결, 2010)가 번역돼 나왔다. 부제는 '경험의 파괴와 역사의 근원'. 알려져 있다시피, 그는 이탈리아어판 벤야민 전집 편집자로 명성을 얻었는데, 그의 벤야민관을 엿보게 해주는 책이다. '벤야민 르네상스를 불러온 문제작'이란 뒷표지의 문구가 그래서 나온다. 덧붙이자면, "프랑크푸르트학파-아도르노의 연장선상에 있던 벤야민을 20세기 지성사의 전혀 새로운 성좌 속에 배치시키고 있는 역작"이다. 개인적으론 <장치란 무엇인가?>(난장, 2010), <세속화 예찬>(난장, 2010)과 함께 연말에 읽을 '아감벤 3종세트'다.   

그런가 하면 '이글턴 3종세트'도 있다(연말이라 독서도 '묶어서' 한다). 오랫동안 대기중이던 <이론 이후>(길, 2010)가 출간됐기 때문이다. 소개는 이렇다. "이론의 중요성을 각인시키고자 하는 테리 이글턴의 문제작. 인간은 결국 '이론'을 통해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비로소 자신을 성찰하고 미래를 설계할 수 있다는, 어떻게 보면 당연한 논리를 치밀한 문화이론을 바탕으로 제시함과 동시에 그 굴곡의 역사를 되짚어본다." 

 

생각난 김에 연말에 읽을 '이론서'가 필요하신 분은 지젝 등이 편집한 <공산주의 이념>(Verso, 2010)이 어떨까 싶다(어제 배송받은 책이다). 알랭 바디우의 <공산주의 가설>에 대한 발표와 토론을 책으로 엮은 것이다(<공산주의 가설>은 특이하게도 알라딘에서는 판매하지 않는다. 나는 교보에서 구입했다). 같이 읽을 만한 책은 바디우의 <철학을 위한 선언>(길, 2010)과 지젝의 <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창비, 2010). <공산주의 가설>은 <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에서 소개를 받고 구입한 책이다.  



문학분야를 건너뛰면 관심도서 가운데 남는 건 로저 펜로즈의 <실체에 이르는 길>(승산, 2010)이다.  

 

"세계적인 석학 로저 펜로즈의 8년 만의 역작. 스티븐 호킹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거목이 창조해 낸 ‘현대물리학의 집대성’"이라고 소개되는 책. 난이도가 있는 책이어서 '독서'가 될지 '구경'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우주의 법칙으로 인도하는 완벽한 안내서'라는 홍보문구는 유혹적이다. 하지만 어제 두 군데 서점에 들렀을 때는 구할 수 없었다... 

10. 12. 10.  

P.S. 원래는 '이주의 관심도서' 리스트를 만들어놓으려고 했으나 얘기가 길어져서 페이퍼로 돌리고, 제목을 따로 붙여놓는다. 파스칼의 단장을 약간 비틀어놓으면서...  

"자신의 비참함을 알지 못하고 책을 읽는 것은 오만을 낳는다. 책을 읽지 않고 자신의 비참함을 아는 것은 절망을 낳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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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꾸때리다 2010-12-10 09: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데 reality라는 말은 철학에서는 주로 '실재'로 번역하지 않나요? '실체'라는 말은 substance의 번역어로 사용하고요...

로쟈 2010-12-10 09:17   좋아요 0 | URL
정신분석에선 '현실'이니 다 제각각입니다. 물리학에선 '실체'라고 옮기나 봅니다...

비로그인 2010-12-10 13: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신의 비참함을 알지 못하고 책을 읽는 것은 오만을 낳는다. 책을 읽지 않고 자신의 비참함을 아는 것은 절망을 낳는다."

이 문장이 파스칼의 문장보다 더 강렬하게 다가오네요. 신은 멀고 책은 가까워서 그런가요? ㅎㅎ 연말에도 여전히 바쁘시겠죠? 날이 본격적으로 추워질 모양인데 감기 조심하시구요^^

로쟈 2010-12-11 10:28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신은 멀고 책은 가깝지요.^^ 연말에도 바쁘긴 한데, 그래도 최악은 넘긴 듯합니다.^^;

2011-01-06 13: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11-01-06 18:49   좋아요 0 | URL
가끔씩 들르셔서 그런 모양입니다.^^; 새해 복많이 받으시길~

귀족온달 2011-02-05 0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개인적으로는 <신을 위한 변론>과 <신을 올호하다>를 관심있게 읽었습니다. 리차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과 크리스토퍼 히친스의 <신은 위대하지 않다>에 대한 반론으로 쓴 책들이었는데요, 로쟈님의 서평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사실 신학에 무지한 저로서는 이글턴이 말하는, 히치킨스는 신학을 모르면서 종교를 무신론적 관점에서 공격한다는 지적이, 좀 마뜩잖았습니다. 게다가 이글턴은 히치킨스의 계급적인 문제를 거론하면서 왜 사회적인 문제에는 입을 닫으면서 종교를 공격하느냐고 일침을 놓는데, 이 수준이 되면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 아닌가 싶을 정도입니다. 사회주의적 신앙인 vs 자유주의적 무신론자....예전에 <종교전쟁>이라는 책에서도 신학자분의 대담을 통해서도 시원하지 않았는데요, 과학을 기반으로 한 무신론에 대한 신학의 답변은 어떤 것인지 궁금합니다. 혹은 그것에 대해서 탐독할만 한 다른 책들은 머가 있을까요? 두서 없는 댓글 죄송하고요 ㅠㅠ 앞으로도 좋은 서평 부탁드립니다^^ 새해복많이 받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