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7장이다. 내가 보기에, 지젝의 소프트 버전처럼 보이는 이 책에서 살레클의 변별성을 구성하고 있는 것은 5장과 7장이다. 그녀는 포스트모던 전위예술에 대해 넓은 안목과 이해를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7장에서는 여성의 음핵절제와 피터 그리너웨이의 <필로우북>과 함께 ‘바디 래디컬’ 그룹의 작업 등이 분석되고 있다(음핵절제를 지칭하는 말은 ‘여성 할례’이지만, 여성뿐만 아니라 남성의 경우에도 이상할 만큼 ‘할례’라는 용어가 번역에서는 기피되고 있다).

먼저 226쪽. ‘신체 채색’은 물론 ‘바디 페인팅body painting’의 번역인데, ‘신체 채색’이란 말이 오히려 생소하다. 외국어에 대한 혐오에서가 아니라면(그럴리는 없어 보이는데), 굳이 더 생소한 번역어를 선택하는 이유를 모르겠다. 거기에 무슨 ‘향략’(역자의 ‘향유’)이 있는 것인지?

-233쪽. ‘여성적 수줍음female shyness’은 ‘여성의 수줍음’이라고 하는 게 더 나을 듯하다. ‘-적’이란 말은 다른 말로 대체가능할 경우, 풀어주는 것이 읽기에 더 편하다. 또 ‘여성적 수줍음’이란 표현은 ‘남성적 수줍음’을 연상시키는데, 프로이트가 얘기하는 것은 여성의 고유한 특징으로서의 수줍음이므로, ‘여성의 수줍음’이라고 해주고 싶다.

-234쪽의 둘째줄. ‘남근 기관의 부재’에서 ‘부재’는 ‘lack’의 역어이다. 오역이라는 건 아니지만, 다른 곳에서는 (그리고 일반적으로) ‘결여’라고 번역되는 단어가 유독 여기서만 ‘부재’로 번역되었다. 바로 앞뒤로도 ‘결여’라고 번역돼 있으므로, 일관성을 희생시킬 만한 이유는 없어 보인다.

-242쪽 맨아래. “출판업자는 매우 무례했으며, 아버지에게 몸을 내맡길 것을 요구했다.” 영화 <필로우북>의 내용에 관한 것인데, 원문은 “The publisher was extremely rude and demanded sexual favors from the father.” 번역문은 sexual favor란 원뜻이 잘 드러나지 않는, 점잖은 번역이다. 그런 상황에서 쓰는 말은 ‘몸을 내맡기다’가 아니라, ‘몸을 대주다’이다.

-245쪽. 밥 플래니건이란 ‘공연 예술가’ 얘기인데, ‘공연 예술가’는 ‘퍼포먼스 예술가’로 바뀌어야 한다. 우리말의 ‘공연예술’은 연극이나 연주회를 다 포괄하는 말이며, 더 제한적인 의미로 사용할 때는 ‘퍼포먼스’라고 해야 한다(255쪽의 올란의 ‘공연’도 마찬가지이다). 바로 다음, “그의 외음부는 절단된다”에서도, 남자의 경우는 보통 ‘생식기’라고 하는 것인데, ‘외음부’란 역어는 상당히 낯설다(남성의 경우에도 ‘음부’란 말을 쓰는가? 여성의 ‘외음부’에 해당하는 것은 남성의 ‘음경’, 곧 ‘생식기’이다).

-252쪽. 바디 래디컬 그룹에 대한 얘기인데, 7행 “거기서 발생하는 것은 말 그대로의 것이다.”도 정확한 번역이라고 할 수 없다. 원문은 “What is happening is literal.”이며, 이에 대한 번역은 “거기서 일어나는 일은 말 그대로 해프닝이다” 정도이어야 한다. 'literal'이 ‘happening’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performance'를 ‘공연’이라고 하는 것까지야, 말릴 수 없다고 하더라도, ‘happening’을 ‘발생하는 것’으로 옮기는 것은 좀 심하다 싶다(‘해프닝’은 현대미술의 어엿한 한 장르이다).

-254쪽. ‘자본의 세계화(the globalization of capital)’를 역자는 ‘자본의 범역화’라고 옮기는데(271쪽에서도), 이미 통용되고 있는 말이 어디가 문제라는 것인지? ‘범역화’란 용어가 사회과학에서 통용되는 말인가? 내가 인터넷에서 찾아본 ‘범역화’의 유일한 용례는 다음과 같다: “문학에 대한 기존의 인식이 붕괴되고 새로운 패러다임이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문학에도 ‘퓨전전의 시대’가 당도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추세를 확인할 수 있는 현상은 장르 사이의 전통적인 관념이 빛을 잃고, 문학이라는 하나의 이름으로 범역화 되어가고 있는 점이다.” 역자의 고집이 기이하다고 할밖에.

-256쪽 중간 부분. “재생산은 재설계되고, 성관계는 주체와 기계 사이의 인터페이스로 대체된다.”(지나는 김에, ‘인터페이스’는 되는데, ‘퍼포먼스’나 ‘해프닝’은 왜 안되는가?) 첫번째 절에서(Reproduction is redesigned), 재생산은 재설계의 목적어가 아니므로(번역문은 그렇게 읽힌다), “재생산(=생식)은 재설계가 되고” 혹은 “재생산은 재설계로 바뀌고” 등으로 번역되어야 한다.

-257족. ‘무제약적 자유의 가능성(unlimited possibilities of freedom)’은 ‘자유의 무한한 가능성(들)’로 바뀌어야 한다. 이어서 “자기-부과된 절제의 신체 예술(a body art of self-imposed cuts)”은 나라면, “바디 아트로서의 자해(적인 절단)”라고 하겠다.

-258쪽. 각주4) ‘이스람교’는 ‘이슬람교’의 오타이다.

-<페이스 오프>와 <가타카> 등의 영화를 소재로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는 결론의 경우에 새로운 건 없다. 굳이 한번더, 지적하자면, 279쪽에서 “그 순간 ‘쓰여지지 않기를 멈추지 않는다’로서 조음되는 성적 관계의 불가능성은...”에서 ‘조음되는’은 ‘말해지는’이라고 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리고, 찾아보기. 번역본의 찾아보기는 가령, (ㄱ)에서 <강간살인>Lustmord이라는 작품명 다음에 괄호안에 넣은 작가명 홀저를 병기해주고, (ㅎ)에 가서, 다시 작가명, 홀저 제니(Hilzer, Jenny)와 작품명 <강간살인>을 써주고 있다. 이렇게 이중적으로 해줄 필요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한다면, 작가명 ‘O. 헨리’가 찾아보기에 빠져 있다. 참고로, 오. 헨리는 이번에 두툼한 작품선집이 새로 나왔는데, 살레클이 분석하고 있는 <기념물(Memento)>도 번역되었는지 모르겠다(목차에서 같은 제목의 작품은 눈에 띄지 않는다).

자, 이 정도면 이 다양한 사례(판본)들에 대한 풍성한 향연을 충분히 즐긴 것이라고 말하고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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