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하급관리 마카르 제부시킨과 먼 친척뻘 되는 소녀 바르바라의 편지만으로 이루어진 도스토예프스키의 데뷔작 <가난한 사람들>에는 대학생 가정교사 포크로프스키 부자(父子)의 얘기가 나온다. 바르바라의 회상 속에서 어릴 적 연정의 대상이기도 했던 포크로프스키에게는 가난하고 늙고 병든, 게다가 알콜중독인 아버지가 있었는데, 아들은 이 아버지의 자랑이자 경외의 대상이었다. 그런 아버지가 아들의 생일 선물로 바르바라의 도움을 받아 헌책방에서 러시아 시인 푸슈킨 전집을 사지만, 미처 선물을 전해주기도 전에 병약했던 아들은 홀연히 세상을 뜨고 만다.

아들의 장례식날, 아들의 관은 드디어 뚜껑이 덮이고 못이 꽝꽝 박힌 채 짐마차에 실린다. 그리고 묘지를 향하여 마차가 삐걱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한다. 마부가 채찍을 휘두르고, 말은 빠른 걸음으로 내달린다. 그리고 가련한 포크로프스키 노인은 그 뒤를 쫓아가면서 어이어이 소리를 내어 운다. 뛰어서 쫓아가느라고 그 울음소리는 몹시 떨리면서 가끔씩 끊어지기도 한다. 노인은 모자를 떨어뜨렸지만 그것을 집으려고 멈춰 서지도 않는다. 궂은 날씨에 내리는 비가 그의 벗겨진 맨머리를 적시고 쌀쌀한 바람이 일기 시작한다. 하지만, 노인은 그런 것과 무관하게 여전히 소리를 내어 울며 마차의 이쪽저쪽을 겅중겅중 뛰어서 왔다갔다한다.

낡아빠진 프록코트의 옷자락이 바람에 나부끼고, 호주머니란 호주머니에서는 책들이(푸슈킨 전집) 비죽이 기어나온다. 길가는 사람들은 모자를 벗고 성호를 그으면서 놀란 얼굴로 이 가련한 노인을 지켜본다. 그 사이에도 책들은 쉴새없이 호주머니에서 진창으로 굴러떨어진다. 사람들이 그를 불러 세워 물건을 떨어뜨렸다고 가르쳐준다. 노인은 그것을 집어들고는 다시 마차 뒤를 쫓아간다. 길모퉁이에서 어떤 거지 노파가 그에게 손을 내밀며 들러붙더니 함께 관 뒤를 따라간다. 그렇게 마차는 길모퉁이를 돌아 시야에서 사라져간다...

작가 도스토예프스키는 <죄와 벌>이나 <카라마조프의 형제들> 같은 만년의 걸작들로 잘 알려진 문호이지만, 내 마음에 가장 강한 인상을 준 소설은 이렇듯 ‘감상적인’ 에피소드들로 눈물샘을 자극하는 그의 데뷔작이다. 사실 러시아 문학을 좋아하게 된 것은 이런 대목들로 대표되는 그들의 ‘값싼’ 정서가 나에게 맞았기 때문이다. 어떤 초월적 실재에 대한 믿음도 가지고 있지 않기에, 나로선 사랑하는 이의 죽음은 절대적인 상실이며, 결코 다 애도될 수 없는 어떤 잉여의 체험이다. 그래서 결국, 아들의 관을 실은 마차를 끝끝내 따라갈 수 없었던 포크로프스키 노인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그저 겅중겅중 뛰어서 왔다갔다할 따름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것’, <가난한 사람들>의 한 대목에서 내가 배우고 느끼는 것은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어떤 이들이 종교를 만나는 그 자리에서 나는 시를 만난다.

 

 

 

 

 
한때 시인 이성복은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것’을 ‘어쩌자고’란 부사어를 통해서 집약적으로 표현한 바 있다. 가령, 세상엔 어쩌자고, 아내와 아이들이 있는 것일까? (시인 백석을 따라서)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있는 것일까? 그토록 사랑스러우며, 그토록 연약하고, 그토록 한심한! 왜 세상엔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한 이들이 있는 것일까? 왜 어찌할 수 없는 슬픔이 있는 것일까?... 그리고 얼마전 새로 나온 시집 <아, 입이 없는 것들>에서 시인의 ‘어쩌자고’는 ‘왜, 어떻게’로 변주된다. 왜, 어떻게 그이는 여기에 와 있는 것일까? 바로 그 ‘남국의 붉은 죽도화’는 왜, 어떻게 여기에 와 피어 있는 것일까?

왜, 어떻게, 너는 이곳에 와서 꽃피었니?
초록 잎새 속에 뿌려진 핏방울.
내 살 속의 살, 살보다 연한 뼈

나는 그 연한 뼈마디보다 더한 슬픔도, 덜한 슬픔도 알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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