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력이란 무엇인가? 가장 단순하게 말해서, 중력은 ‘잡아당기는 힘’이다. 이것을 조금 현대적인 의미로 이해하면, 프로그램(pro-gram)이다. 즉 우리의 글자들(gram) 앞에 있는(pro) 어떤 것이고, 이 글자들에 무게를 주는 어떤 것이다. 이때의 어떤 것은 어떤 작용력이다.

 

  

 



M. 하이데거의 존재(Sein)가 모든 존재자를 존재자이게끔 하는 개방성이라면, 중력은 모든 글자들을 글자들이게끔 하는, 모든 형태들을 그런 형태들이게끔 하는 개방성이다. 모든 생명체의 DNA글자들, 유전형(genotype)과 표현형(phenotype)은 그래서, 중력의 장 속에 놓인다. 그리고 모든 어련하다 싶은 행동양태나 행동거지들은 중력의 입김 속에 놓인다. 중력은 그런 것이다.

하이데거가 현존재(Dasein)로서의 인간을 ‘내던져진’ 존재로 규정할 때, 그는 이 중력에 대해서 잠시 잊은 듯하다. 즉 그는 현존재의 한 면만을 말한 것. 다른 한 면이란 바로 현존재가 ‘잡아당겨지는’ 존재라는 것이다. 우리는 결코 내던져진 채로 가만 놔두어지는 존재가 아니다(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꼼지락거린다). 따라서 내던져짐에 대한 분석만으로는 현존재의 전모가 밝혀지지 않는다. 잡아당겨짐에 대한 정당한 이해가 반드시 거기에 덧붙여져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의 존재물음과 존재사유는 제값의 덩치를 가지게 될 것이다.


시는 포스트그램(post-gram)이다(시인은 포스트그래머이다). 시는 글자들을 보내는 기획이면서, 동시에 중력 이후의 삶을 묻는 기술이다. 우리의 바탕이 이러이러하고 그래서 우리가 이 모양이란 걸 알게 된 이후의 삶은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를 묻는다는 점에서 시는 특권적이다. 삶이 무게(질량)와 거리의 관계에 의해 정식화되는 중력의 지배하에 놓인다면, 시는 그것에서 벗어난다. 적어도 벗어나는 체한다. 시는 무게와 부피를 가지지 않는다. 즉 시는 의미를 가지지 않으며, 의미에 지배되지 않는다. 시는 단지 어떤 형태의 가능성에 대한 탐구이다.

시라는 것은 백과사전적(혹은 n차원적) 의미공간에서 어떤 자력(磁力)에 의해 결합되는 단어들의 집합이다. 새로운 시라는 것은 이 의미공간에서 새로운 항로를 발견한다는 뜻을 갖는다. 이때 시의 공간은 다만 새로운 가능성의 공간이다. 따라서 시는 현존하지 않는다. 시의 흔적만이 현존할 따름이다. 언젠가 당신 뺨에 흐르던 눈물 자국처럼, 그것은 곧 마르고 곧 지워지며 곧 잊혀진다. 그러나 당신은 그것이 부재한다고 말할 수 없다. 그것이 부재한다고 말하는 것은 당신의 삶을 많이 가난하게 만들 것이다. 시는 그런 것이다. 시는 삶의 윤리학이 아니라 존재의 윤리학이다.

시적인 것의 세 가지 사례: ⒜아침에 아이들을 깨울 때는 “일어나라”고 소리를 지르는 대신에 경쾌한 음악을 틀었다. 출근하는 남편을 배웅하기 위해 잠옷 위에 바바리를 걸치고 아파트 현관으로 나갔다가 아예 지하철을 함께 타고 남편의 직장까지 가기도 했다.

⒝어떤 상황에서는 움직일 수 없는 상태(경직 상태)로 되는 것이 생존에 가장 유리할 때가 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많은 동물들은 바로 이와 같은 방식으로 약탈자로부터 위기를 모면한다... 카메룬 두꺼비와 돼지코뱀은 위협을 당하게 되면 등을 땅에 대고 드러누워 혀를 빼물고 죽은 시늉을 한다. 그러나 이 방어기제는 완벽하게 발달된 것은 아니어서 똑바로 길을 가다가 어떤 방향으로 움직일 때 즉시 다시 드러눕는 우스꽝스러운 실수를 한다.

⒞아버지께서는 시상(詩想)이 떠오르실 때면 항상 우리를 불러다 받아쓰게 하셨다. 언젠가 아버지께 “아버지의 하시는 일은 시 쓰시는 일밖에 없으시면서 그것도 왜 혼자 하시지 않으세요?”하고 철없는 불평을 한 적이 있다. 그때 아버지께서는 “시를 쓰려고 하면 내가 시를 쓸 수 있구나 하는 기쁨에 손이 떨려 글씨가 제대로 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던 기억이 난다.

이 세 가지 사례는 등가적이다. 과연 이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3초의 시간 여유. 정답은 과잉, 뭔가 넘쳐남이다. 먼저 ⒜는 바순(파고트)을 전공, 시립교향악단의 수석 바순주자로 활동하다가 “립스틱을 지워야 하는 것이 싫어”서 그만 둔 M여사(41세)의 얘기다. 다른 건 평범하다. 경쾌한 음악쯤은 나도 튼다. 하지만 바바리만 걸치고 ‘아파트 현관’을 지나서 남편의 직장까지 동행하는 건 흔한 일이 아니다. G. 베커의 가족경제학 이론에 따르면, 기본적으로 부부생활(결혼)은 생물학적 차이에 바탕을 둔 교환계약이며 생산기술과 부부노동의 잠재적 시장가격에 의해 부부생활이 결정된다. 이때 사회적 의미에서 결혼이란 특정한 남녀가 함께 생활하는 것을 제도로써 사회가 수용한 것이라고 정의된다. 사랑의 감정은 결혼이라는 제도적 교환계약의 한 요소이다. 필요한 요소이긴 하지만 필수적인 요소는 아니다. 따라서 M여사 류의 감정(표현)은 과잉이다. 그래서 시적이다!

⒝의 두꺼비도 마찬가지이다. 이 녀석의 불완전한 방어기제 또한 눈물나게 시적이다. 하루에도 몇 번씩 “혀를 빼물고 죽은 시늉”을 하며, 무슨 생각을 할까? 나는 이 시지프적인 두꺼비가 제법 시를 알 만한 동물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이건 양서류로서는 보기 드문 경우이다. 포유류의 시적 동물로서의 우리는 이 두꺼비에게 깊은 연민을 가져야 마땅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는 박용래 시인의 얘기다. 시가 무엇이기에 손이 떨려 글씨도 제대로 못쓴단 말인가? 이건 시를 초과하는 현상이다. 그래서 시적이다! 이 세 가지 사례는 각각 제도와 본능과 시가 무엇인가라는 사유에로 우리를 이끈다. 그것은 과잉, 넘쳐남을 통해서이다.

 

 

 

 

H. 베르그송은 생명적인 것에 덧붙여진 기계적인 것을 ‘웃음’이라고 규정한 바 있다. 나는 기계적인 것에 덧붙여진 생명적인 것을 ‘시(시적인 것)’라고 규정하겠다. 물론 이때의 시는 장르적인 규정이 아니다. 이 시적인 것은 우주적인 차원의 것이다. 바로 우리가 존재-시와 중력-시를 말하고 더듬고 사유하는 차원 말이다. 장르로서의 시는 이 전체-시(한 권의 시집Le Livre!)의 아주 작은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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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9-04 20:5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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