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자 한겨레에 실리는 '로쟈의 번역서 읽기'를 옮겨놓는다. 이번에 다룬 건 안드레이 플라토노프의 <코틀로반>(문학동네, 2010)이다. 얼마전 마이리스트에 적은 대로 <구덩이>(민음사, 2007)도 같은 작품의 번역이다(다만 번역 대본이 달라서 번역상에도 약간 차이가 있다). 단편 <포두단 강>은 <귀향 외>(책세상, 2002)에 수록돼 있다. 지면의 제약으로 자세히 다루진 못했는데, 그래도 관심만 부추길 수 있으면 소임은 다한 게 아닌가 한다. 참고로, 본문에 삽입한 사진은 작가의 가족사진이다.   

한겨레(10. 10. 23) 사회주의를 향한 열망과 연민의 무덤 

러시아의 조지 오웰’로 불리는 작가가 있다. 철도 노동자 출신의 작가 안드레이 플라토노프. 그의 작품 <코틀로반>이 혁명 후 러시아사회를 그린 ‘디스토피아 소설’로 소개되면서 그런 별칭을 얻었다. 그의 문제의식은 무엇이었던가. 유명한 단편 <포투단 강>에 나오는 구절에 그의 고민이 묻어 있다. “삶에 대한 무지도 가난과 배고픔만큼이나 사람의 마음을 괴롭혔다. 인간으로 존재한다는 것이 심각한 것인지 아니면 무의미한 것인지 알아야 했다.” 

플라토노프의 주인공들은 생에 대한 의구심과 진리에 대한 갈망으로 괴로워한다. <코틀로반>에 등장하는 노동자 보셰프도 그렇다. 그는 서른 번째 생일날 공장에서 해고당하는데, 작업시간에 너무 자주 사색에 빠진다는 게 이유다. 어디선가 개가 짖어대자 “개도 답답할 테지. 나처럼 태어났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살고 있으니까”라고 생각할 정도다. 그렇다고 그가 자기 삶의 앞가림 같은 개인적인 문제로 괴로워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 건 수수께끼 축에도 들지 못한다. 대신에 그는 ‘일반적인 삶의 계획’에 대해 골몰한다. 모두가 당신처럼 사색에 빠진다면 일은 누가 하느냐는 핀잔에 그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면 일을 해도 의미가 없다”고 답한다. 그는 몸이 편하고 불편한 것에는 개의치 않았다. 하지만 진리가 없다면 부끄러워서 살 수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는 다른 사람에게서라도 그런 진리를 발견할 수만 있다면 자신의 허약한 몸을 기꺼이 노동에 전부 바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스탈린시대의 러시아는 그에게 진리를 제공해주었을까.

또다른 노동자 사프로노프는 생의 아름다움과 지성의 고귀함을 사랑하는 인물이다. 하지만 온 세계가 보잘것없고 사람들이 우울한 비문화적 상태에 빠져 있다는 사실에 당혹해 한다. 사회주의의 경제적 토대를 건설하기 위해 스탈린이 기획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참여하면서도 그가 느끼는 우울함은 가시지 않는다. “어째서 들판은 저렇게 지루하게 누워 있는 걸까? 5개년 계획은 우리들 안에만 들어 있고, 온 세계에는 진정 슬픔이 가득한 건 아닐까?”라는 게 그의 풀리지 않는 의문이다. 이런 노동자들이 모여서 ‘전(全) 프롤레타리아의 집’을 건설하기 위한 공사용 구덩이를 판다. ‘코틀로반’은 그 구덩이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 공사의 책임자인 건축기사 프루솁스키는 이 거대한 공동주택을 고안해낸 인물이지만, 정작 거기에 살게 될 사람들의 정신구조에 대해서는 느낄 수도, 머릿속에 그려볼 수도 없었다. 그는 그 건물이 단지 악천후만 피하게 해줄 뿐인 ‘빈 건물’이 될까봐 두려워한다. 그는 자신이 반드시 살아 있어야 할 만큼 가치 있는 존재라고도 생각지 않는다. 그에게 삶은 희망이 아니라 인내일 뿐이다.

구덩이 공사가 마무리되자 노동자들은 당의 열성분자들과 함께, 집단농장을 만들기 위한 부농계급 철폐사업에 투입된다. 부농으로 지목된 농민들은 뗏목에 실려 시베리아로 보내지고 이제 노동자들은 집단농장 전체, 세계 전체를 돌봐야 하는 과제를 안게 된다. 하지만 ‘사회주의의 미래’라고 아끼던 고아 소녀 나스탸가 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노동자들은 소녀의 무덤을 만들어주며 비탄에 잠긴다.

이것은 분명 소비에트 사회주의에 대한 음울한 전망이지만, 결코 조지 오웰 식의 풍자는 아니다. 자신이 사랑하는 이념에 대한 지극한 연민이고 염려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이 1987년에서야 소련에서 공식 출간된 것은 아이러니다. 현실 사회주의는 플라토노프의 연민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10. 10. 22.  

P.S. <코틀로반>과 관련해서는 영어 번역과 해설서가 훌륭하다. 로버트 챈들러와 올가 미어슨의 번역(2009)은 러시아본 결정판(나우카, 2000)을 옮긴 것으로 최초 출간본(1987)과의 차이도 일목요연하게 밝히고 있어서 요긴하다. 플라토노프 전문가인 토마스 시프리드의 해설서도 작품의 맥락에 대한 자세한 설명으로 독자의 이해를 돕는다. 러시아에서 나온 연구서나 해설서는 이번 겨울에 구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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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22 23:2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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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22 23:2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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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23 00:3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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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23 09:2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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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06 03:2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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