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과학출판인협의회(약칭 '인사회')에서 발행하는 <아름다운 서재>(통권 제5호)에 실린 추천사를 옮겨놓는다. 인사회 소속 출판사들의 추천도서 목록과 인사회 선정 '2009 올해의 책' 목록이 포함돼 있는 비매품 책이다. 과분한 자리에 초대를 받아 추천의 소견을 남기게 됐다.    

아름다운 서재(통권 제5호) 추천사 

“난 적어도 책 한 권에 인생이 변했노라고 말하는/ 비열한 인간은 되기 싫었던 것이다.”(이응준, 「어둠의 뿌리는 무럭무럭 자라나 하늘로 간다」)

오래 전에 읽은 시의 한 구절입니다. 보통 ‘내 인생의 책’이니 ‘나를 바꿔준 한 권의 책’ 같은 이야기들을 하지만, 따지고 보면 인생이 그렇게 쉽게 변하는 것 같지도 않고 인간이 그렇게 쉽게 나아지는 것 같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공감한 대목입니다. 책에 매혹된 이후로 책을 읽는 일이 제 주업처럼 돼 버렸지만, ‘책이 전부야!’란 말만큼은 피하고 싶기도 했습니다. 더불어 앉은 자리에서 ‘비열한 인간’이란 소리를 듣고 싶지도 않았지요.  

인생은 ‘책 한 권’ 따위에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나는 책이라곤 읽지 않아!’라고 자랑스레 말해야 할까요? 적어도 이 <아름다운 서재>를 손에 든 분들이라면 그런 ‘아Q’적 발상을 선택지로 꼽지는 않으실 것 같습니다. 다른 선택지가 필요하지요. 맞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여러 권’입니다. 우리가 좀 ‘덜 비열한 인간’이 되거나 더 나아가 ‘비열하지 않은 인간’이 되기 위해서라면 ‘한 권’이 아니라 ‘여러 권’의 책, 다수의 책을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인생이 아직도 비열한 인생의 차원을 벗어나지 못했다면, 우리는 그가 ‘책만 읽어서’가 아니라 ‘책을 덜 읽어서’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혹은 ‘충분히 읽지 않아서’라고 말해야 할는지도 모릅니다.  

한국인의 평균 독서량이 ‘한 달에 한 권’ 정도라고 합니다. 책읽기에 관해서 우리는 ‘한 권 읽기’ 문화를 갖고 있는 것일까요? 굳이 각 나라별 비교수치를 갖고 오지 않더라도 우리의 독서량과 독서문화가 아직 낮은 수준에 머물고 있다는 건 바로 알 수가 있습니다. 더구나 온갖 종류의 책들을 다 포함한 통계치라서 그 ‘한 권’도 ‘인문사회과학서적’이 아닌 경우가 대부분이지요. 시인의 기준을 조금 비틀어서 이렇게 말해보고도 싶습니다. “우리는 적어도 인문사회과학서적을 한 달에 한 권도 읽지 않으면서 책을 읽었노라고 말하는” 비열한 인간, 비열한 독서가는 되지 말아야겠다고요. 개인적 차원에서나 사회적 차원에서나 다수의 책을 읽는 일, 그건 독서가 습관이자 문화일 때 가능하겠지요. 우리가 그런 습관과 문화를 가질 때 비로소 우리의 삶이 조금이라도 달라질 수 있는 것 아닐까요?   

<책 읽는 뇌>란 책의 저자가 말해주는 바에 따르면, 인간에게서 독서는 선천적인 능력이 아닙니다. 곧 인류가 책을 읽도록 태어나지는 않았다는 것이죠. 따지고 보면, 너무 당연한 말이기는 합니다. 인류가 책을 읽게 된 것은 전체 인류사에 견주어 보면 극히 최근의 일이며, 진화적 적응이라고 보기엔 극히 짧은 시간 동안 벌어진 일입니다. 독서는 후천적으로 개발되는 능력이고, 한 과학자의 표현을 빌면 ‘옵션 액세서리’입니다. 그러니 “나는 독서에 흥미가 없어”거나 “나는 책을 못 읽겠어”라는 투정이 특별히 이상하거나 부자연스러운 것도 아닙니다. 독서 능력은 ‘옵션’이니까요. 하지만 강조해야 할 것은 그것이 ‘특별한’ 옵션이란 사실이지요.  

불과 수천 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을 뿐이지만(‘대중적 독서’는 불과 100여 년의 역사를 갖고 있을 따름입니다.) 독서능력이라는 ‘발명품’은 인간의 뇌 조직을 재편성하고 사고능력을 확대시켰으며 역사를 바꾸어놓았습니다. 아시다시피 이러한 인류사적 대전환은 한 개인의 역사에서도 반복됩니다.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우리는 다른 세계, 또 다른 우주에 들어서게 되는 것이니까요. 흔히 인간을 ‘도구적 인간(호모 파베르)’로 정의하면서, 인간이 똑똑해서 도구를 사용하게 된 것이 아니라 도구를 사용하게 되면서 똑똑해지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한 사정은 독서의 경우에도 그대로 적용될 듯싶습니다. 즉 우리는 똑똑해서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책을 읽으면서 똑똑해집니다. 따라서 독서능력이라는 ‘옵션 액세서리’는 있으나 마나한 장신구가 결코 아닙니다. 우리를 ‘특별한 존재’로 만들어주는 강력한 무기입니다.  

물론 독서 능력 자체는 오늘날 표준적이며 어느 정도 보편화된 능력입니다. 그것이 우리를 오징어나 말미잘과는 다른 존재로 구분해주지만 똑같이 책을 읽을 줄 아는 다른 사람과는 구별해주지 못합니다. 각자가 자신의 개성을 발견하고 잠재력을 계발하기 위해서는 이 독서능력 또한 한 단계 업그레이드할 필요가 있는 것이죠. 아니 지속적으로 발달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한 발달은 무엇보다도 다양하고 풍부한 독서, 끊임없이 질문하고 답을 찾는 깊이 있는 독서를 통해서 이루어질 터입니다(그리고 여기 그렇게 읽을 만한 책들의 목록이 수록돼 있습니다).  

“인간은 어떤 경우라도 인간의 단순한 생명과 일치하지 않는다.” 독일의 비평가 발터 벤야민의 말입니다. ‘단순한 생명’을 ‘생존’이나 ‘목숨’으로 바꿔 넣어도 좋겠습니다. 인간은 ‘단순한 생명’으로서 그저 ‘자연사적 삶’만을 영위하는 존재는 아니지요. 간단히 말하면, 먹고사는 게 전부가 아니라는 말이지요. 아니 그렇게 사는 것도 불가능하진 않습니다. 우리가 연어나 날치보다 뭐 그렇게 대수로운 존재인가 의심해볼 수도 있는 것이죠. 하지만, 그러한 의심 자체, 그러한 질문을 던진다는 사실 자체는 이미 우리가 ‘단순한 삶’이나 ‘자연사적 삶’을 넘어서는 차원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함축합니다.  

인간으로서의 외양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전제하에 우리는 인간이란 무엇이며, 어떤 인간이어야 하는가란 질문을 끊임없이 던지는 존재입니다. 물론 이 질문은 인간 문명의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제기된 것이기도 합니다. 독서는 이 질문의 연속성을 상기시켜주면서, 우리를 그러한 질문의 공동체로 묶어줍니다. 그렇기 때문에 독서는 혼자 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독서경험은 혼자만의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나’를 ‘우리’로 확장시켜주면서, 사회역사적 존재로 거듭나게 합니다. 따라서 당위적인 독서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필연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책을 읽어야 하기 때문에 읽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경우라도 책을 읽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읽습니다. 그렇게 읽을 수밖에 없는 책들의 목록을 마주하면서 긴장과 축복을 동시에 느낍니다.  

10. 03.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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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10-04-01 09: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 생각도 아주 가끔씩은 하기도 해요. 책 한권으로 바뀌는 인생 얼마나 줏대없는 인생인가..라는 말도 안되는 궤변을요..^^

로쟈 2010-04-01 10:00   좋아요 0 | URL
더불어 좀 게으른 인생이란 생각도 들지요...

구보 2010-04-01 1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초등학생 아이 독후감 숙제에 <아침형인간>이 있는 걸 봤습니다.독후감까지 써야할 수고를 생각하면 그 책을 대체하고도 남을 많은 책들 때문에 가슴이 쓰립니다.존경하는 인물에 박정희와 김대중이 나란히 있는 모 연예인 네어버책추천 블러그를 봤을 때만큼이나 뜨악하기도 합니다.수많은 중고생들 서가에 꽂혀있는 추천도서들 선정기준도 궁금하기만 할 때가 많습니다.

로쟈 2010-04-02 10:17   좋아요 0 | URL
'아름다운 서재'는 일종의 자가-추천입니다. 각 출판사에서 내놓을 만한 책들을 골랐더군요. 중고생 추천도서 같은 경우는 경험과 피드백이 돼야 할 거 같아요. 추천받아서 읽어보니 괜찮더라, 아니더라 하는...

비로그인 2010-04-01 1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욕망의 진화를 읽으면서 생각해 봤어요. 책읽는 뇌와 그렇지않은 뇌는 어떻게 진화할 것인지...^^*

로쟈 2010-04-02 10:18   좋아요 0 | URL
진화의 산물이 되기엔 기간이 너무 짧구요. '훈련' 문제 같습니다.^^

꼬마별 2010-04-01 1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천도서는 누가 정할까 항상 궁금해하는 한사람입니다
아이들 추천도서 보면 나이에 비해 좀 어렵다 싶은 것도 많은데
목록은 왜 이리도 많은지 모르겠어요..

로쟈 2010-04-02 10:19   좋아요 0 | URL
어린이책은 저도 모르겠어요.^^;

비로그인 2010-04-02 2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칸트에게 영혼, 신, 자유가 있었다면 로쟈님께는 책이 있었다는... 아마 무덤까지 책을 가지고 가실 분이세요. ㅎㅎ

로쟈 2010-04-05 11:29   좋아요 0 | URL
책에 파묻혀 죽을 거라는 얘기는 종종 듣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