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매기 - 엘리트문고 47
안톤 체호프 지음 / 신원문화사 / 1995년 1월
평점 :
절판


먼저 4막에서 니나가 트례플례프에게 하는 말: '난 이제 진짜 여배우예요. 난 즐겁게 기꺼이 연기를 하고 무대에 서면 도취하여 자기를 훌륭하다고 느껴요.(...) 무대에 서는 거나 글을 쓰는 거나 마찬가지예요. 우리의 일에서 명성이니 영광이니 하고 내가 공상하고 있던 것이 아니라 실은 인내력이라는 것을 나는 알았어요.(...) 자기 십자가를 지는 법을 알고 다만 믿을 지어다, 이거죠.'

이 대사는 <갈매기>라는 연극의 세계에서 자신의 역할을 깨닫는 유일한 주인공이 니나라는 주장을 뒷받침하면서 결국 삶을 '인내'하지 못하고 권총 자살하는 주인공 트례플례프와 니나를 구별시켜 준다. 또한 이 4막의 희곡에서 유일하게 뭔가 등장인물의 의지(힘)을 담고 있는 대사이기도 하다. 니나를 제외한 대다수의 인물들이 자신의 삶과 운명에 대해서 체념하고 달관했던 것과는 달리, 니나는 적극적으로 삶에 뛰어들었고 뭔가 경험했으며 그래서 정말 자신을 '살아있는 인물'로 만들었다.

꿈많고 성공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 찬 젊은 처녀로 등장하고 있는 니나는 3막이 끝날 때까지는 감상적 여주인공의 형상에서 크게 이탈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이러한 형상은 트례플례프가 그녀에게 부여한 형상이면서 동시에 그녀를 읽어내는 독자들이 부여한 형상이기도 하다. 자신을 갈매기로 비유하는 니나에게 트례플례프가 자신이 쏘아죽인 갈매기를 보여주는 것은 그가 니나에게 부여하고 있는 형상(일종의 강박관념)이 어떤 것인가를 시시하고 있다. 갈매기처럼 자유롭게 비상하는 삶이라는 건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

삶에 대한 이러한 경직된 태도는 4막에서 니나와 트례플례프가 대면하는 장면에까지 계속 견지된다. 니나는 잘난 소설가를 따라나섰지만 버림을 받고 배우로서도 빛을 보지 못한 채 2년 만에 고향에 들른 것이다. 여기까지만 보자면 니나 역시 감상적 여주인공이라는 문학적 형상에 대한 모방이다. 하지만 이미 앞에서 인용한 대사에서 보여지듯이 그녀가 보다 넓은 세상에서의 경험을 통해 얻은 삶에 대한 통찰은 문학적 모방으로서의 감상적 여주인공의 그것이 아니다. 그것을 넘어선다.

이렇듯 달라진 그녀의 모습은 그녀가 4막에서 다시 반복하는 트례플례프의 대사를 전혀 다른 각도에서 이해할 수 있도록 해준다. '인간도, 사자도, 독수리도, 뇌조도, 뿔달린 사슴도, 거위도, 거미도, 물 속에 사는 말없는 물고기도, 바다에 사는 불가사리도, 사람 눈으론 볼 수 없던 것들도, 한 마디로 말해서 모든 생물, 모든 생명, 생명이라는 생명은 모두 슬픈 순환을 마치고 사라져 버렸다...' 이것은 1막에서 트례플례프가 20만년 후의 이 지상의 모습으로 그리고 있는 것인데, 이 미래의 시점에서 보자면 현재의 삶이라는 것은 너무나도 미소해서 거의 무가치할 지경에 이른다. 그런데 이 페시미즘을 니나는 4막에서 '정답고 산뜻한 꽃과 같은 감정'으로 다시 암송한다. 이는 그러한 페시미즘과 허무의 긍정으로 읽힐 수 있다.

자신의 창조한 인물(니나는 트례플례프의 여주인공이다)의 이러한 예기치 못한 성숙과 배반은 창조자의 입김이 더 이상은 필요하지 않다는 걸 암시한다. 이제부터 그녀는 자신의 의지에 의한 자기만의 삶을 당당하게 살아갈 것이기 때문이다(마지막 대면에서 그녀는 트례플례프의 품을 빠져나와 유리문 밖으로 나간다. 즉 연극의 공간에서 삶의 공간으로 이동한다, 결정적으로.). 트례플례프의 자살은 이렇듯 (정서적으로도 논리적으로도) 더 이상 자신의 품으로 돌아오지 않는 니나에 대한 유일한 대응으로 보인다.

이런 시각에서 볼 때, <갈매기>는 성숙한 시기의 작가 체홉의 삶과 예술에 대한 깊은 성찰을 읽을 수 있게 한다. 유한한 삶 속에서 순간순간이라도 제 목소리와 빛을 뽐내는 사소한 즐거움이 있는 것이고, 작가 체홉은 이러한 즐거움에의 권리는 충분히 존중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듯하다. 그것이 바로 자신의 불행한 경험에 유폐되지 않고 보다 적극적인 삶에의 의지로 승화시키는 니나와 같은 여주인공의 형상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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