롤리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음, 권택영 옮김 / 민음사 / 1999년 6월
평점 :
절판


작가 나보코프는 자신의 예술론을 한마디로 요약한 바 있다. '내게 픽션은 거칠게 말해 미학적 지복을 주는 한 존재한다.' 그런데 그런 책들은 흔치 않다.(나머지는 쓰레기이다.) <롤리타>는 물론 그 흔치 않은 책들에 속한다. 천재적인 언어감각과 교활한 작가적 재능의 작가 나보코프조차도 자신의 대표작으로 꼽았을 정도니까. 그리고 이 점은 '서문'에 이미 드러나 있다.

'비비안 다크블룸은 <나의 신호>라는 전기를 곧 출간할 예정인데 원고를 탐독해 본 비평가들은 그것이 그녀의 작품 중 가장 훌륭한 책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8쪽)

비비안 다크블룸은 영어 철자를 재조합하면 블라디미르 나보코프가 된다. 즉 나보코프의 아나그램이다. 마치 히치콕 영화에서처럼 작가 자신이 카메오로 출연하고 있는 것.(사실 히치콕과 나보코프는 여러 모로 비교해 볼 만하다. 둘은 모두 1899년생이다.) 그래서 독자에게 '신호' 혹은 '암시'(힌트)를 주고 있는 것이다. 그녀의 작품, 즉 자신의 작품(<롤리타>)가 가장 훌륭한 책이 될 거라고.

사실 험버트 험버트가 자신의 님펫인 롤리타(12세)와 걷잡을 수 없는 사랑에 빠지는 이 '불륜담'(그래서 논란이 됐지만)에 혹자는 동정을 느낄 수도 있고, 또 혹자는 부러움 섞인(?) 불쾌감을 느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 표면적인 이야기의 이면에서 작가 나보코프가 정말로 말하고자 했던 건 무엇이었을까?

'나의 개인적인 비극은 타인의 관심사가 될 수도, 되어서도 안되겠지만, 그토록 자연스러운 내 말, 자유롭고 풍요하고 끝없이 온순한 러시아어를 버리고 이류의 영어를 해야 하는 내 설움에 있다.'(431쪽)

영어를 쓰는 미국 작가가 되기 이전에 나보코프는 이미 탁월한 재능의 러시아 작가였다. 그가 자신의 모국어를 포기하고 영어로 글을 쓸 수밖에 없었던 설움이 바로 롤리타에 대한 험버트의 포르노그라피적 사랑의 배면에 넘쳐 흐르고 있는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내게 <롤리타>는 결코 에로틱하지 않으며 비윤리적이지도 않다. 작가의 표현을 빌면, 유머 누아르이되, 좀 서글픈 유머 누아르일 뿐이다. 왜냐면, 우리의 유년이란, 결코 다시는 회복되지 않는 것이기에.

역자는 유려한 번역을 통해 비록 나보코프의 말장난을 다 옮기지는 못했지만(그건 불가능하다), 험버트의 여정을 충실히 따라갈 수 있도록 했다. 다만, 해설에서 이 작품을 <저자의 죽음>을 말하고 있는 소설로 평한 것은 동의하기 어렵다. <롤리타>를 끝까지 꽉 쥐고 있는 사람은 바로 전지적인 작가 나보코프이기 때문이다. 사실, 험버트며, 퀼티며, 얼치기 작가들에게 모두 징벌을 내리는 사람은 다름 아닌 작가 나보코프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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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담 2019-12-17 18: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부러운 섞인이라니요 ㅎ 로쟈님 너무 나가시는 것 같네요. 누군가 어린 여성에게 성욕을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소설의 표면적인 내용은 사실 있어서는 안되는 일이지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은 합니다만, 부러움섞인 불쾌감이라는 가벼운 농으로 표현되는 것은 좀 불편하네요. 누가 부러워 할까요. ㅎ 로쟈님 연령대에 판타지를 가진 중년 남성이겠지요. 여성들은 로쟈님의 그 말장난과 전혀 관련이 없기 때문에 공감을 할 수 없을 것이고, 공감대가 없는 말장난은 그냥 쓸데없는 말일 뿐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