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글쓰기의 폐쇄성과 자아도취, 지긋지긋하다.

번역비평학회에서 발표한 글의 일부를 옮겨놓는다. 제목은 '번역은 무슨 생각을 하는가: 철학/이론서 번역에 대한 몇 가지 단상'이며 옮겨놓는 것은 발표문의 서론과 결론 부분이다.  

얼마전 알라딘 블로그에 이런 글이 올라왔다. ‘그 글쓰기의 폐쇄성과 자아도취, 지긋지긋하다’란 제목의 페이퍼인데(작성자는 ‘빵가게 재습격’님이다), 프랑스 철학서에 대한 비판을 신랄하게 늘어놓았다. 소위 ‘고급’ 철학/이론서를 읽으며 한번쯤 ‘당해본’ 독자들이라면 공감할 법도 한 내용이어서 잠시 읽어보기로 한다. 이렇게 시작한다.

“도대체 프랑스 지식인이란 자기도취와 자폐적인 난잡함을 지껄이는 존재들에 불과한가? 얼마 전에 알렝 투렌의 <현대성 비판>을 읽어보다가, 짜증스러워서 책을 그냥 덮어버렸다. 그러면서 생각난 김에 집에 있는 프랑스인들의 책들을 몇 권 꺼내서 살펴보았는데, 도대체가 그 ‘난잡함’ 이 그 ‘난잡함’ 수준이었다. 독자를 가정하지 않고, 복잡한 개념을 정의하지 않으며, 접속어를 무색하게 만드는 기이한 문장구조와 문학적 표현인지 개념적 표현인지 분간할 수 없는 독백을 설사하듯이 지껄여대는 것. 이건 바로 정신병자나 할 수 있는 능력이 아닐까 의심스러울 정도다.”(이하 인용문의 강조는 모두 인용자)
 
원서 자체의 난해성과 번역의 난해성을 구별하고 있지 않아서(물론 구별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어려운 책이어서 어렵게 옮겨진 경우처럼) “그 난잡함이 그 난잡함 수준”이라는 평에는 전적으로 동감하진 않지만 강조한 대목처럼 “독자를 가정하지 않고, 복잡한 개념을 정의하지 않으며, 접속어를 무색하게 만드는 기이한 문장구조와 문학적 표현인지 개념적 표현인지 분간할 수 없는 독백”을 읽는 것 같은 느낌은 생소하지 않다. 만약 그것이 정말 저자의 화법이고 포지션이라면 번역(자)은 어떻게 말을 받아야 할까? 무슨 생각을 하며 어떤 포즈를 취해야 할까? 일단은 그런 질문들을 던지고 싶다. ‘빵가게 재습격’님의 불평을 조금 더 들어보자.

“세상에는 학자들이나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는 이론서가 있고, 그 이론서의 서술이 쉽지 않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론서라는 것은 자신의 개념을 남들에게 ‘전달’하기 위한 것이고, 잘 알지 못하는 일반인이라고 하더라도 여러 책들을 참고하고 뒤적이면서 어느 정도는 따라갈 수 있는 것이 정상이다. 가령 ‘초기 독일 미학은 보편적인 것과 특수한 것을 매개하여 감각중추의 세계를 추상에 의해 제거해 버리지 않고 규명해 줄 일종의 구체적인 논리를 가공해 내려는 기획이다.’(<미학이론>) 같은 서술을 보자. 여기에서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보편적인 것’, ‘특수한 것’, ‘감각중추의 세계’ ‘추상에 의해 제거해 버리지 않고 규명해 줄 (...) 기획’ 같은 것인데, 독일 미학의 전통에서 보편과 특수의 의미, 미적인 것을 규명하려는 기획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알게 되면 대략 이 저자가 무엇을 말하고 싶어 하는지는 이해할 수 있다. 요컨대, 지식과 서술의 전문성에 어느 정도 익숙해진다면 ‘따라갈 수’는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프랑스 지식인들의 이 서술 꼬락서니를 보라.” 



나는 아도르노의 책이나 독일 미학 서적을 프랑스 철학서들보다 쉽게 읽을 수 있는 수준이 못되어 유독 프랑스 철학서만 비판의 도마에 오르는 것이 잘 이해되지는 않는다(사실 난해성의 원조라면 칸트나 헤겔을 따라갈 수 있을까?). “잘 알지 못하는 일반인이라고 하더라도 여러 책들을 참고하고 뒤적이면서 어느 정도” 따라갈 수 있는 건 프랑스 철학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또 그래도 끝내 못 따라가는 건 독일 철학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물론 문화적 차이가 낳는 스타일상의 차이는 있겠다. 가령 “독일의 전통적인 변기는 변기 구멍이 앞에 있어서 우리 눈앞에 드러난 똥의 냄새로 병이 있는지 조사할 수 있다. 전형적인 프랑스 변기는 구멍이 뒤에 있어서 물을 내리면 똥은 빨리 사라진다. 마지막으로 미국의 변기는 앞의 두 형태의 중간 형태로 변기에 가득 차 있는 물에 똥이 떠 있지만 자세히 조사할 수는 없다.”고 할 때의 세 가지 다른 변기 스타일처럼 말이다(헤겔은 독일-프랑스-영국의 지리적 삼항을 ‘독일의 반성적 철저함’ ‘프랑스의 혁명적 조급함’ ‘영국의 온건한 공리적 실용주의’로 대비시켰다).  

지젝이 인용하고 있는 소설 <날기가 두렵다(Fear of Flying)>에서 에리카 종은 이렇게 말했다. “독일의 화장실은 제3제국의 공포를 이해하는 열쇠이며, 그와 같은 화장실을 만든 사람들은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다.” 이걸 “그와 같은 책을 쓴 사람들은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다”라고 비틀어서 말할 수 있을까? 만약 그런 비틀기가 억지스럽다면, 프랑스 철학자들만이 “정신병자나 할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로 치켜세워질 이유는 없을 것이다. 그래도 그들의 ‘꼬락서니’는 한번 들여다보는 게 좋겠다.
    
“역사가들의 관심이 특히 장기적인 기간에 돌려진 지도 이제 몇 십 년이 지났다. 그들은, 정치적 돌발사건과 그들의 일화 아래에서, 안정적이고 깨어지기 어려운 평형들과 비가역적인 과정들, 항상적인 조절, 오랫동안의 지속을 거쳐 정상에 달했다가 전복되는 일정한 경향의 현상들, 축적과 느린 포화의 운동들, 전통적인 이야기들의 연쇄가 사건들의 모든 두께로부터 복구해 낸 부동의 그리고 말 없는 커다란 주춧돌을 드러내고자 했던 것이다.”(<지식의 고고학>) 



미셸 푸코의 ‘이론적’ 저작인 <지식의 고고학>(1969)의 서두 부분이다(내가 갖고 있는 번역서는 <지식의 고고학>(민음사, 1992)이다. 이후 2000년에 신판이 나왔지만 인용문을 보건대 번역은 수정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딱 40년 전 책이니 액면으로도 시차(時差)를 무시할 수 없는 책이다. 어느 정도의 낯설음은 감안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이 번역문에 대한, 아니 푸코의 ‘꼬락서니’에 대한 ‘빵가게 습격’님의 불만은 이렇다.  

“‘역사가’는 누구인가? E. H. 카의 역사가인가? 아니면 -주석이 말하는 대로- 아날학파인가? 또한 그들의 ‘정치적 돌발사건과 그들의 일화 안에서 안정적이고 깨어지기 어려운 평형들과 비가역적인 과정’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그들의 ‘축적과 느린 포화의 운동’은 도대체 무슨 운동이며 ‘사건들의 두께’는 어떤 형태의 두께인가? 이런 개념들을 역사학 이론서에서 찾아본다고 알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실제로 무엇을 말하는지도 불명료하기 이를 데 없다. 아마 역사가들이 과거를 재단하고 일정한 이론 혹은 패러다임 속에서 인과적으로 나열하는 작업을 암시하려는 것 같은데, 서술이 불투명해서 이마저 장담할 수 없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말하고 싶은 것은 이것이다. 역사서술을 이 따위로 신비스럽고 암시적으로 나타내서 뭘 어쩌겠다는 것인가?  



인용된 대목은 역자의 주석대로 ‘장기지속으로서의 역사’에 대한 아날학파의 관심과 역사서술을 푸코가 정리하고 있는 부분이다(그러니까 ‘역사서술’이 아니라 ‘역사서술에 대한 서술’, 곧 메타-역사서술이다). ‘아날학파’에 대해서 검색해보거나 관련서를 약간만 들추어보아도 전체적인 요지는 따라갈 수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런 나열식 문장의 생경함을 전적으로 제거하기는 어렵다. 그리고 보통의 철학/이론서 번역이 그렇듯이 원서의 난해함에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번역의 난해함이 더 보태진다(한국어 독자들은 이중의 난해함과 대면해야 한다!).  

철학/이론서 번역을 대할 때 ‘전문독자’가 아니라 그저 ‘평균보다 조금 나은 독자’로서 나는 그런 난해함과 접할 경우, 영역본이나 (간혹 갖고 있는) 러시아어본을 참조하게 되는데, <지식의 고고학> 영역본(1972)은 서두의 “역사가들의 관심이 특히 장기적인 기간에 돌려진 지도 이제 몇 십 년이 지났다.”를 이렇게 옮겼다. “For many years now historians have preferred to turn their attention to long periods,(...)” 계속 이어지는 영역문은 인용문 전체가 한 문장이다. 짐작엔 불어 원문도 그러할 듯싶은데, 한국어본은 이를 두 문장으로 나누었다(이왕 나누는 거라면 세 문장으로 나누는 건 무리였을까?). ‘long periods’를 ‘장기적인 기간’이라 옮긴 것이 (비록 중복이긴 해도) 무리는 아니지만, ‘장기간의 역사’나 ‘장기지속’ 혹은 ‘장기지속으로서의 역사’라고 ‘의역’할 수는 없었을까?

인용문의 후반부는 어떤가. “전통적인 이야기들의 연쇄가 사건들의 모든 두께로부터 복구해낸 부동의 그리고 말 없는 커다란 주춧돌을 드러내고자 했던 것이다.” 이 대목의 영역은 이렇다: “[they were trying to reveal] the great silent, motionless bases that traditional history has covered with a thick layer of events.” 영역본만을 옮기면 “그들은 전통적인 역사서술이 사건들의 두꺼운 층으로 덮어버린, 거대한 무언의, 부동의 토대를 드러내고자 했다.” 정도이겠다. 여기서 먼저 대비되는 것은 ‘전통적인 이야기들’과 ‘전통적인 역사서술’이다. 이건 짐작에 불어의 ‘histoire’가 갖는 중의성에 기인하는 듯싶다(크리스테바의 <사랑 이야기>가 우리말로는 <사랑의 역사>라고 옮겨질 때처럼). 하지만 그런 중의성을 갖고 있지 않은 영어에서는 역자가 ‘story(tale)’나 ‘history’ 가운데 문맥에 맞게 선택을 해야 한다.  

개인적으로는 ‘전통적인 이야기들’보다는 ‘전통적인 역사서술’을 아날학파의 ‘새로운 역사서술’과 대비시키는 것이 더 이해하기 쉬운 게 아닌가 한다. 참고로, 역시나 불어처럼 ‘이스토리야(istorija)’란 말이 중의적인 러시아어본(2004)에서는 ‘전통적인 서사(내러티브)들’이라고 옮겼다. 한데 문제는 ‘이야기들’이 아니라 다른 곳에 있다. “사건들의 모든 두께로부터 복구해낸”이란 번역은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영역본에서 “전통적인 역사가 사건들의 두꺼운 층으로 덮어버린”이라고 옮긴 대목이고, 러시아어본에 따르더라도 “전통적인 내러티브의 어지럽고 두꺼운 사건들 아래 숨겨진” 정도이다. 그렇게 사건들의 더미에 덮인/숨겨진 ‘주춧돌’(초석)을 드러낸 것은 전통적인 역사서술이 아니라 아날학파의 새로운 역사서술 아닌가? 바로 그런 맥락에서 국역본의 번역은 명쾌하지 않다. “신비스럽고 암시적”이며,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오역’이다(불어본 원서로 치자면 바로 첫 문장인데, 한국어본의 오역은 초판이 나온 지 17년이 지난 지금도 교정되지 않았다. 불어본을 찾아보니 'recouvrir'를 옮긴 것인데, 영어의 'cover'와 같은 뜻이다. 역자는 'recover'와 혼동한 것일까?).  



사실 아쉬운 대목은 연이어 나온다(그렇다고 해서 <지식의 고고학>의 예외적인 사례는 아니다). 장기지속으로서의 역사를 분석하기 위해 아날의 역사학자들이 동원하고 있는 자료들을 푸코는 나열하고 있는데, 그 중 하나는 “풍토와 그의 진동에 관한 연구”이다. 영어로는 “the study of climate and its long-term changes”이다. “기후와 그 장기적인 변화에 관한 연구”라고 옮겨질 수 있는 부분이다. 러시아어에서도 그런데, ‘기후’라는 단어가 불어에서는 ‘풍토’를 뜻하기도 하는 듯하다(찾아보니 불어의 'climat'를 옮긴 것이고. 기후와 풍토를 모두 뜻할 수 있다).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풍토가 어떻게 ‘진동’할 수 있는가?(역자는 ‘지진’과 같은 것을 연상한 것일까?) 러시아어본에 쓰인 단어는 ‘kolebanie’인데 ‘진동’이란 뜻도 갖지만 이런 경우에는 ‘변동’이라고 옮겨준다. 그래서 “기후와 그 변동에 관한 연구”라고 옮길 수 있다. 아무려나 “풍토와 그의 진동”즘 되면 문제는 불어나 영어가 아니라 한국어다. ‘엎친 데 덮친 격’의 소재가 되는 것은 대부분 따로 있지 않다.  

‘빵가게 재습격’님은 이밖에도 몇 가지 사례를 더 인용한 뒤에 평균적인 독자가 가질 법한 실감을 토로한다. “아니, 프랑스인들이란 이런 난해하고, 암시적이며, 정신병자의 헛소리 같은 문구를 암송하며 즐기는 족속들이란 말인가? 고작 100년 전에 쥘 베른을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머리박고 읽어댔던 것을 생각하면  가능성이 없는 이야기다. 이런 자폐적인 소리를 지껄이며 ‘68혁명’을 언급하고, 모더니즘의 비인간화와 파괴성을 공격하고, 탈근대로 가자는 주장을 한다는 게 가능하기는 한가? 내 눈에는 지나친 엘리트주의와 자기도취적인 만족감에 허우적거리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 책을 읽으며, 의미를 고구하고 의의를 찾아내는 일이 훌륭할지는 모르겠으나, 이건 한없이 시간이 남아 머릿속의 개념을 탐구하면서 무한정 탐닉하는 종교인에게나 어울리는 일로 보인다. (...) 그러니까, 이렇게 결론 내리는 수밖에 없다. 프랑스인. 심오함인지 자폐적인 난잡함인지 신나게 니네끼리만 지절대라. 그리고 책으로 내지마라. 지긋지긋하다.”  

물론 이러한 불평에는 어떤 전도 혹은 전치가 있다. 거론된 책들은 프랑스인이 저자이지만 한국인이 번역해서 한국의 출판사에서 낸 책이니만큼 곧바로 동일시하기는 어렵고, 설사 비난을 하더라도 “이런 거 번역해서 책으로 내지마라. 지긋지긋하다.”라고 말하는 것이 보다 정확하겠다(프랑스인들이 자기네 책을 내라고 압력을 행사하는 것이 아닌 한). 즉 문제의 출처는 그들이 아니라 우리이고 우리의 번역 현실이다. ‘번역가게’는 ‘우리가게’인 것이다.    

이런 식의 오역 뒤지기는 아마도 한동안(어쩌면 끝없이) 계속될 수 있을 것이다. 좋은 번역서가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좋은 번역자/번역가가 사회적으로 대우받는 시대가 온다면, 물론 사정은 지금보다 훨씬 좋아질 것이다. 부르디외가 매번 강조하듯이 오역의 문제도 어쩌면 사회구조적인 문제일는지 모른다. 그 구조는 아마 금방 바뀌거나 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지/무책임하고 불성실한 오역들을 양산해내는 현재의 번역/출판관행에 면죄부가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결론적인 제안은 이렇다. 자기가 이해한 것을 이해한 만큼 번역할 것. 자기가 이해할 수 없는 번역에 대해서는 두 눈 부릅뜨고 따져볼 것. 오역에 대해서는 가차 없이 지적할/수정할 것(이런 ‘행위자’들의 노력에 대해서 ‘구조’도 언젠가는 감복할 날이 오지 않을까?). 그래야 번역서가 나와도 읽지 않고, 읽어도 문제를 알지 못하고, 알아도 지적하지 않는 악순환의 고리를 어디선가는 끊을 수 있지 않을까? 

사실 우리 ‘번역’의 현황과 여러 문제점들에 대해서는 많은 진단과 제언이 제시돼 왔다. 하지만 ‘번역의 문제’를 ‘번역가게의 문제’로 치환해서 보면 아직도 덜 주목받고 있는 성싶은 문제가 있다. 누구를 위한 번역이고, 번역비평인가 하는 점. 번역비평은 그 성격상 번역에 대한 이견과 오역에 대한 지적/교정을 포함할 수밖에 없는데, 그러한 작업의 시시비비를 번역자와 비평자간의 의견차 문제로 환원하게 되면 자칫 감정적인 문제로 전화될 소지가 있다(실상 많은 경우에 번역비평은 감정적인 대응만을 유발하곤 한다. 심지어는 법적인 대응까지도!).  

하지만 중요한 것은 번역자나 비평자나 일차적으론 책의 독자이며, 독자로서 중요한 것은 책을 읽는 것, 그것도 더 정확하게, 더 잘 읽는 것이다. 즉, 독자는 번역자-독자와 비평자-독자의 제3항이자 공통항이다. 번역비평은 바로 그 ‘독자’를 위한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 여기서는 두 가지 인문서의 사례를 들고 싶다. 먼저, 우리에게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인문학’ 붐을 일으켰던 얼 쇼리스의 <희망의 인문학>(이매진, 2006)의 한 대목을 읽어본다.

“프로타고라스는 사람들에게 정치 기술을 가르치고 좋은 시민으로 만드는 것이 자기의 목적이라는 주장을 반복했는데, 언뜻 생각하기에 애국심에 불타는 우파라면 이런 목적을 소중히 여길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프로타고라스와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은 플라톤이 이상 국가에서는 잘 살아가는 좋은 시민들, 민주적인 시민들 속에 박혀 있는 파괴분자일 뿐이다.”(190-1쪽)

‘급진적 인문학’(원제는 ‘Radical Humanism’)이란 장에서 저자는 줄곧 프로타고라스와 플라톤을 대비시키면서 프로타고라스를 ‘인문학의 스승’으로 간주하는 반면에 플라톤은 시인들을 ‘파괴분자’로 낙인을 찍어 추방한 귀족주의자(엘리트주의자)로 자리매김한다. 그런 맥락에서 나온 문단이라 인용문의 마지막 문장은 좀 어색하다. ‘민주적인 시민들’과 ‘파괴분자(프로타고라스)’를 대립시키고 있어서다. 원문을 찾아보니 “Protagoras is a subversive among the good citizens of Plato's idea of a republic, a democrat."(110쪽)이다.  

번역문은 ‘좋은 시민들(good citizens)’과 ‘민주적인 시민들(a democrat)’을 동일시했지만, ‘민주적인 시민들’과 ‘a democrat’는 일단 수(數)가 다르기에 문법적으로 그렇게 보기 어렵다. 문법적으로 보자면 이 ‘민주주의자(a democrat)’는 앞에 나오는 ‘파괴 분자(a subversive)’를 다시 받은 것이다. 바로 이어지는 설명이지만, 프로타고라스는 페리클레스 시대에 ‘민주주의 법전 편찬자’이다. 그는 ‘민주적인 시민들’과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그가 바로 ‘민주주의자’였다. 여기서 번역비평자의 자리는 독자를 위한 ‘교정자’의 그것이다. 모두가 서로 고쳐가면서 같이 읽는 것, 그것이 ‘희망의 인문학’이 아닐까. 



얼 쇼리스와 시카고대학의 동창이지만 전혀 다른 길을 걷게 되는(쇼리스의 표현을 빌면, “레오 스트라우스는 불룸 교수를 우파로 끌어들였고, 이 세상은 나를 좌파로 인도했다.”) 앨런 블룸의 <미국 정신의 종말>(범양사, 1989)에서도 한 대목을 인용하는 것이 공평하겠다. “사회과학 분야에 고전이 없다는 사실은 우리가 그들에게 유리하게 또는 불리하게 해석하는 것과는 별개로, 그 사실이 사회 과학자들에게 불편함을 야기시킨다. 유명한 사학자로서 대학원 과정의 사회과학 방법론 개론을 가르치던 교수가 투키디데스에 대해 내가 천진하게 ‘투키디데스는 바보였어’라는 질문을 던지자 화를 내며 멸시조로 반응하던 일이 기억난다.”(396-7쪽)  

엘리트 고전주의자인 앨런 블룸이 ‘투키디데스는 바보였어’란 말을 한 것인지 미심쩍어서 찾아보니 이 대목도 잘못 번역되었다. 두 번째 문장의 원문은 이렇다: “I remember the professor who taught the introductory graduate courses in social science methodology, a famous historian, responding scornfully and angrily to a question I naively put to him about Thucydides with "Thucydides was a fool!"”(펭귄판, 346쪽) 역자는 ‘유명한 사학자’의 반응(responding)에 걸리는 "Thucydides was a fool!"을 불룸의 순진한 질문(question)에 걸리는 것으로 잘못 보았다. 단순한 착오이지만 결과는 좀 중하다. 발언자를 바꾸어놓은 셈이니까. ‘독자를 위한 번역비평’의 취지는 (전문가가 아닌) “잘 알지 못하는 일반인”을 위하여(우리는 모두 자신이 잘 알지 못하는 분야의 ‘일반인’이다) 자신이 할 수 있는 품앗이를 동원하자는 것이다. 그것이 번역비평에 관한 ‘대중지성’의 역할이다...   

09. 02.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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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2-13 23: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2-13 23: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그럴만두하군 2009-02-14 1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출판사 이매진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지금 <희망의 인문학> 개정판을 준비중입니다.
지적해주신 부분 꼭 반영하겠습니다.
좀 시간이 걸리더라도 꼼꼼히 봐야겠습니다.
늘 관심 가져주셔서 로자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럼 수고하세요.

로쟈 2009-02-14 15:08   좋아요 0 | URL
아, 그런가요? 계속 업그레이드 되면서 저자의 문제의식이 많이 공유되면 좋겠네요...

2009-02-14 14: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2-14 15: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노이에자이트 2009-02-15 15: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인용하신 프로타고라스나 투키디데스가 나오는 문장에서는 역시 콤마의 용법을 잘 모르니까 오역이 나오지 않나 생각합니다.영어의 구두점은 우리나라 구두점과 다르기 때문에 소홀히 해서는 안되는데 학교현장에선 다루지 않으니까 문제지요.

로쟈 2009-02-14 15:06   좋아요 0 | URL
문법을 간과해서 빚어지는 실수도 있고, 문맥을 잘못 이해해서(혹은 무시해서) 벌어지는 착오도 있는 듯해요. 실수야 다 할 수 있는 거지만, 그게 교정으로 걸러지지 않는 것도 문제죠...

2009-02-14 18: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2-14 21: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2-14 20: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2-14 21: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2-14 21: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콩세알 2009-02-14 2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번역의 문제가 더 큰가요? 작년에 복이 많아(?) 지인들과 '순수이성비판'과 '정신현상학'을 공부했었는데요 어렵다 어렵다 하긴 했지만 프랑스 철학책을 대했을때처럼 황당한 느낌은 들지 않았기 때문에 '빵가게'님의 글이 좀 공감이 갑니다. 번역이 더 큰 문제라면 정말 곤란하네요. 불어를 할 줄 몰라서..그렇다고 영어로 철학책 읽는 것이 쉬운 것도 아니고 제대로 다시 도전해 보고 싶은데..-.-;;

로쟈 2009-02-15 00:44   좋아요 0 | URL
<정신현상학>을 독파할 정도면 못 읽을 책은 없으실 듯싶은데요. 안 읽힌다면 십중팔구 번역이 문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