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간 <자음과 모음>(2008년 가을 창간호)에 실린 '레닌주의와 대중유토피아'의 일부를 옮겨놓는다. 지젝의 <지젝이 만난 레닌>(교양인, 2008)과 수잔 벅모스의 <꿈의 세계와 파국>(경성대출판부, 2008)에 대한 리뷰를 의도한 글이며 '가상대담'의 형식을 빌렸다(가라타니 고진에 대한 언급도 일부 포함돼 있다). 아래는 글의 결론부이다.

 

  

 

 

로쟈: 한편으로 지젝 선생님은 정치적 ‘전체주의’에 대한 진부한 비판들에 대해서도 문제를 제기하셨는데요. 조금 자세히 말씀해 주시죠.

지젝: 대부분의 포스트모던 좌파들은 정치적 테러의 뿌리가 도구적 이성, 즉 과학기술적 착취의 ‘원리’가 사회로까지 확장돼서 사람들을 ‘새로운 인간’으로 변형시키기 위한 재료로 다룬다는 점에 있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정반대입니다. 정치적 테러는 바로 물질적 생산 영역의 자율성이 부정되고 정치적 논리에 종속됐다는 걸 보여줍니다. 한데, 발리바르에서 랑시에르와 바디우를 거쳐 라클라우와 무페에 이르기까지 ‘정치적인 것’에 관한 프랑스제 이론들이 목표로 하는 것은 경제영역을 ‘존재론적’ 위엄이 제거된 ‘존재의’ 영역으로 환원하는 것입니다. 거기엔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 비판이 들어설 자리가 없어요.

 

정치와 경제의 관계는 궁극적으로 ‘두 옆얼굴이냐 꽃병이냐’라는 시각적 패러독스와 유사합니다. 둘 다 볼 수는 없다는 얘기입니다. 즉, 정치적인 것에 초점을 맞추면 경제는 고작 ‘재화의 공급’으로 축소되고, 경제에 초점을 맞추면 정치는 한갓 기술 관료주의의 영역으로 축소됩니다. 하지만 레닌의 위대한 점은 이 두 수준을 함께 사고할 수 있는 개념적 장치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는 것의 ‘긴급성’을 의식했다는 점입니다. 불가능하지만 필요한 과제로 생각했다는 것이죠. 그런 의미에서도 오늘날 우리는 다시금 레닌에게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래, 경제가 핵심이야. 전투는 거기서 결정될 거고, 우리는 전 지구적 자본주의의 마법을 깨뜨려야 합니다. 하지만 그 개입은 경제적이 아니라 정치적이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반세계화 운동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자명한 듯이 말하는 ‘자유와 민주주의’에 태클을 걸어야 합니다. 즉, 자유민주주의가 자본주의적인 사적 소유 없이는 존립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밝혀야 우리는 진정으로 반자본주의적으로 될 수 있습니다.   

로쟈: 그러니까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라거나 “바보야, 문제는 정치야”라는 식으로 일면만을 주장하는 것은 ‘덤 앤 더머’식이 되겠군요. 때문에 두 겹의 싸움이 필요하겠습니다. 반자본주의 운동이 필요하지만, 자본주의의 정치적 형식, 곧 자유주의적 의회 민주주의 문제를 다루지 않는다면 반자본주의가 제 아무리 급진적이라 해도 충분하지 않다, 그런 말씀이시죠? 자유민주주의의 유산을 문제 삼지 않으면서 자본주의를 비판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은 환상이라고 정리하겠습니다. 여기서 정치와 경제는 가라타니 고진의 문제틀로 보자면 주권국가와 자본주의의 관계와 비슷할 거 같네요. 가라타니는 국민국가(민족국가)의 제국주의적 팽창이 새롭게 국민국가를 만들어낸 최초의 예로 나폴레옹의 유럽정복을 들었습니다. 이것은 한나 아렌트의 지적을 따른 것인데요, 사실 1812년 나폴레옹 전쟁의 여파로 러시아의 국민(민족)의식이 고취되면서 러시아란 국민국가가 새롭게 탄생하게 됐다는 사실도 떠올리게 됩니다. 톨스토이의 장편소설 <전쟁과 평화>가 다루고 있는 바이기도 하지요. 벅모스 선생님도 프랑스 혁명에 대해서 주목을 하셨죠?

벅모스: 네, 프랑스의 역사가 푸레의 말을 빌면, 프랑스인들은 대중을 국가로 통합해서 근대 민주주의국가를 만든 최초의 사람들입니다. 주권체로서의 ‘인민’에 의한 테러의 원형과 그리고 ‘민주주의’ 민족국가에 의한 군사적 침략의 원형, 이 두 가지가 프랑스 혁명의 유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프랑스 혁명이 대중민주주의의 두 가지 모델인 민족국가(nation-state)와 혁명계급(revolutionary class)의 기원이라는 점이죠.

로쟈: 흥미로운 대목인데, 그 두 가지 모델을 선생님은 ‘정치적 상상계’ 개념을 갖고 비교하셨습니다.        



벅모스: ‘정치적 상상계’는 발레리 포도로가의 개념입니다. 지형학적 개념으로 정치적 행위자들이 위치해 있는 구체적이고 시각적인 장(場)을 가리킵니다. 세 가지 아이콘이 이 장에는 들어오게 되는데, 공동의 적, 정치집단, 그리고 주권기관이 그것입니다. 그리고, 대중주권의 두 모델,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는 이 정치적 상상계가 다르게 그려져요. 사회주의는 ‘상호 적대적인, 투쟁하는 계급들’이라는 정치적 상상계에 기초하며, 자본주의는 ‘상호 배제적이면서, 잠재적으로 적대적인 민족국가들’이라는 정치적 상상계에 기초합니다.

근대의 이 두 가지 정치적 비전 사이의 가장 두드러진 차이는 어떤 차원이 시각적 경관을 결정짓느냐입니다. 시각적 경관이란 적의 본질과 위치, 그리고 전쟁이 벌어지는 영토를 결정하는 것을 말해요. 민족국가들에서 그 차원은 공간이고, 계급투쟁(계급전쟁)에서 그 차원은 시간입니다. 공간은 민족국가들의 정치적 상상계에서 절대적인 우위를 가지는데, 국가가 된다는 것은 영토를 소유한다는 것과 같은 뜻입니다. 반면에 계급투쟁에서 영토는 일시적입니다. 계급 혁명은 시대를 앞질러 간 역사적 사건으로 이해되기 때문에, 이 승리는 영토의 획득이 아니라 역사적 진보라는 용어로 기술되는 것이에요.

로쟈: 방금 말씀하신 두 가지 정치적 상상계의 구분이 책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이기도 했습니다. “계급투쟁에서 공간은 정치적 목적이 아니라 단지 전술인 데 반해서, 민족국가에서 시간은 전술에 불과하며 공간이 모든 것이다.”라고 책에 쓰셨는데, 이러한 차이는 소위 계급모순과 민족모순을 구분해서 사고하는 데 아주 유용한 개념틀이 되어줄 것 같습니다. 더불어, 독도 영유권 문제를 놓고 외교적 마찰을 빚고 있는 한국과 일본, 두 민족국가의 행보를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되겠구요. 정반대되는 사례일 텐데, 1918년에 레닌은 우크라이나 전체를 독일에 양도하는 브레스트-리토브스크 강화조약에 기꺼이 서명하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인용하셨습니다. “나는 시대를 얻기 위해서 공간을 양여하고 싶다.”

벅모스: 네, 두 가지 태도 사이에는 화해할 수 없는 차이가 있는 것이죠. 이 양쪽의 정치적 상상계에서 민족과 계급 사이에는 변증법적 관계가 있습니다. 민족국가 모델에서는 계급적 차이가 부정되는 것이 아니라 민족 정체성이 계급보다 우선하는 것으로 인정됩니다. 부자나 노숙자나 모두 ‘미국’이고 ‘한국인’이고 하는 식이 되죠. 반면에 소련에서는 계급귀속이 민족성을 초월하는 것으로 간주됐고, 민족은 역사적으로 한시적인 정치적 형태로 이해되었습니다. 양쪽 모두 소수민족에 자율적 주권을 부여하지 않았는데, 민족국가의 경우엔 영토의 경계에 대한 위협을 진압하기 위해서였고, 계급투쟁의 경우에는 민족분리주의의 위협이 역사를 퇴보시킨다고 보았던 것이죠.

로쟈: 그러고 보면, 혁명은 무엇보다도 ‘시간’의 문제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어느덧 저희 대담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마지막으로 한 말씀씩 해주시길 바랍니다.



지젝: 흔히 혁명에는 두 가지 모델, 두 가지 양립 불가능한 논리가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는 역사적 진화의 필연성에 따라 ‘적절한 때’를 기다려야 한다는 입장이고, 다른 하나는 ‘적절한 때’라는 것은 따로 없으며 혁명적 기회가 나타나면 ‘정상적인’ 발전 과정을 우회해서라도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입장이에요. 우리의 과제는 레닌이 1914년에 대응하여 한 일을 1990년에 대응하여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레닌을 반복해야 한다’고 말할 때 그 반복이 뜻하는 것은 레닌으로 다시 돌아가자는 것은 아니죠. 레닌을 반복하는 것은 레닌이 했던 것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실패한 것, 그가 잃어버린 기회를 반복하는 것입니다. 덧붙여, ‘레닌’은 무엇보다는 현재 우리가 처해 있는 ‘사고금지’의 상황을 중단시킬 강력한 자유를 의미합니다. ‘레닌’이란 기표는 우리가 다시금 사유하도록 허락받았다는 것, 바로 그것을 뜻합니다.



벅모스: 제 결론 또한 유물론적이고 마르크스주의적인 것입니다. 역사의 선구자를 자처했던 공산당은 서구의 산업발달에 지속적으로 뒤처진 경제시스템 내에서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애써왔습니다. 그리고 민족국가 시스템은 민족국가의 통제를 끊임없이 벗어나려는 전지국적 자본주의 경제 내에서 헤게모니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해왔습니다. 만약 냉전시대가 끝났다면 그것은 어느 한쪽이 이겨서라기보다는 각각의 정치 담론의 정당성이 각자의 물질적 발전에 의해 근본적인 도전을 받았다는 걸 의미하는 게 아닐까요? 국경으로 구획된 공간의 제약과 단선적인 시간의 독재로부터의 해방이라는 꿈은, 레닌의 말을 빌자면, “현실 그 자체와 마찬가지로 급진적(as radical as reality itself)”이어야 할 것입니다...

08. 09.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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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시차적 관점이 요구하는 것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09-04-13 23:50 
    이번주 한겨레21의 출판면 기사를 옮겨놓는다. 지젝의 <시차적 관점>(마티, 2009)에 대한 간략한 리뷰이다. 아스트라 테일러의 <지젝!>에 대한 페이퍼와 <지젝이 만난 레닌>(교양인, 2008)을 다룬 '레닌주의와 대중유토피아'를 같이 참고할 수 있다.    한겨레21(09. 04, 20) 정치 경제, 두 겹의 싸움이 필요하다 아스트라 테일러의 다큐멘터리 영화 <지젝!>(2005)에서
 
 
드팀전 2008-09-11 1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발터 벤야민과 아케이드..> 를 썼던 수잔 벅모스지요? 그녀의 '정치적 상상계" 개념은 민족/계급 문제를 유형화하는 또 다른 재미있는 아이디어를 주는 듯 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로쟈 2008-09-11 22:57   좋아요 0 | URL
네, 그 벅모스입니다. 유익한 책인데, 번역은 유감스럽게도 부실합니다...

노이에자이트 2008-09-12 15: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부분 계급문제,민족문제를 논하는 것을 보니 공간에 집착하는 한 민족주의에 계급문제는 매몰될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로쟈 2008-09-13 08:53   좋아요 0 | URL
네, 그게 요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