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 한겨레21에 실린 '로쟈의 인문학서재'를 옮겨놓는다. 프리모 레비의 <이것이 인간인가>(돌베개, 2007)를 읽은 소감을 간략하게 적은 것이다.

한겨레21(08. 03. 20) 이 사회에도 이분법만 존재하는가

“강한 자는 살아남는다.” 오직 운이 좋았던 덕택에 친구들보다 오래 살아남은 ‘나’는 꿈속에서 이 친구들이 그렇게 이야기하는 소리를 듣는다. “그러자 나는 나 자신이 미워졌다.” 한때 유행처럼 읽히기도 했던 브레히트의 짤막한 시 ‘살아남은 자의 슬픔’ 얘기다.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자’ 프리모 레비의 <이것이 인간인가>(돌베개 펴냄)를 읽다가 자연스레 떠올린 시. 하지만 레비는 자기가 미워졌다는 넋두리를 늘어놓는 것이 아니라 ‘운 좋게도’ 자신이 어떻게 살아남았는지를 세밀하게 기록하고 있다. 죽음의 수용소에 관한 이야기가 모든 이들에게 불길한 경종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바람을 가지고.

이 ‘죽은 자와 살아남은 자’에 대한 레비식 명명은 ‘익사한 자와 구조된 자’이다. 그것이 애초에 그가 책 제목으로 염두에 두었던 것이면서 실제로 그가 쓴 마지막 책 제목이기도 하다. 이른바 ‘절멸수용소’에서 누가 익사하고 누가 구조되는가. 레비가 보기에 수용소의 철조망 안에 감금되는 순간 그 어떤 욕구도 충족되지 않는 삶에 종속되며, “이 삶은 생존을 위한 투쟁 상태에 놓인 인간이라는 동물의 행동에서 본질적인 것이 무엇인지, 후천적으로 습득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입증하기 위해 만들어낼 수 있는 가장 정확한 실험장”이다.

그러한 상황에서 인간을 구분하는 가장 뚜렷한 범주가 ‘익사한 자’와 ‘구조된 자’이다. 물론 대다수는 수용소에 적응하기도 전에 학살당했던 ‘무슬림’들이다. 무슬림이란 죽음을 이해하기에도 너무 지쳐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그리고 곧 ‘선발’되어 가스실로 향하게 될 수감자들을 부르는 수용소의 은어다. 대개 뼈만 앙상하게 남은 그들은 고개를 숙이고 어깨를 구부정하게 한 채 곧 쓰러질 듯한 상태다. 죽음에서 그들을 구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이들이 대부분 ‘익사한 자’들이다.

그럼 ‘구조된 자’들은 어떠한가? 레비는 여러 사례를 들고 있는데, 그중에서 앙리는 스물두 살밖에 되지 않았지만 수용소에서 살아남는 방법에 대한 체계적인 이론까지 갖추고 있는 경우. 그에 따르면, 조직을 꾸리는 것과 동정을 얻는 것, 그리고 도둑질, 이 세 가지가 학살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이다. 그런가 하면 엘리아스는 아예 수용소 체질인 경우. 나이가 스무 살에서 마흔 살 사이일 것 같은 그는 죽을 6리터, 8리터, 10리터나 먹고도 토하거나 설사하지 않고 소화시킨다. 심지어 그러고 나서 즉시 다시 일을 시작할 수도 있다.

그런 엘리아스의 모습에서 레비가 끌어내는 결론은 이런 것이다. “엘리아스는 육체적으로 파괴될 수 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외부로부터의 공격에서 살아남는다. 미치광이이기 때문에 내부로부터 절멸에 저항한다. 그래서 제일 먼저 생존자가 된다. 그는 이런 식의 생존 방식에 가장 적합하고 표본적인 인간이다.” 정상적인 사회에서라면 감옥이나 정신병원에 갇혀 살았을 법하지만 수용소에는 범죄자도 정신병자도 없기에 엘리아스는 가장 성공적인 모델이 된다. “수용소 자체가 사라지지 않는다면 우리 모두가 그렇게 변할지도 모르는 새로운 유형의 인간”인 것이다.

이탈리아 철학자 아감벤은 <호모 사케르>에서 수용소야말로 근대적 정치 공간의 숨겨진 모형(母型)이라고 말한다. 그러한 통찰에 의지하지 않더라도 ‘익사한 자’와 ‘구조된 자’란 이분법적 존재 방식만이 허락되는 사회라면 ‘수용소’와의 구별이 불가능하다. 곧 수용소다. 우리 또한 ‘생존을 위한 투쟁 상태’에 놓여 있으며 우리 사회를 가르는 이분법이 ‘낙오된 자’와 ‘성공한 자’밖에 없다면 이 또한 ‘절멸수용소’와 다를 바 없다. 우리 시대의 ‘앙리’와 ‘엘리아스’가 득세하는 수용소 말이다. 과연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가? 아주 운 좋게 살아남은 레비가 아우슈비츠에서 떠올린 <신곡>의 한 구절이다. “그대는 자신의 타고난 본성을 생각하라/ 그대들은 짐승처럼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덕과 지혜를 구하기 위하여 태어났도다”

08. 03. 20.



P.S. 얼마전에 적은 관련 페이퍼로는 '윤동주-프리모 레비-빅터 프랭클'(http://blog.aladin.co.kr/mramor/1949436)을 참조. 관련서들 가운데서 레비의 <익사한 자와 구조된 자>, 츠베탕 토도로프의 <극한에 직면하기>, 레비와 같은 아우슈비츠의 생존자(이면서 레비보다 10년 먼저 자살한) 장 아메리의 <자살에 대하여>, 그리고 레비의 전기(가령 이안 톰슨의 <프리모 레비>) 등이 번역/소개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 연작은 소개될 예정이라고 하니까 제외하더라도...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소경 2008-03-21 0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필 오늘 읽은 부분인데. 이 대목은 제목부터 눈에 끌더군요. 그리고는 '진지','흥미'하게 읽었다는. 간혹 나오는 익살에 섬뜩 놀래면서요.

로쟈 2008-03-21 13:10   좋아요 0 | URL
책의 정중앙이기도 하지요. 서경식 선생도 지적한 거지만 <이것이 인간인가>는 상당히 치밀한 구성을 갖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