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문 일이긴 하지만 일간지 지면에서 자신의 이름을 발견할 때가 있다(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801161803331&code=990000). 좀 낯설게 느껴지는데, 오늘 아침에 경향신문의 오피니언란을 읽을 때도 그랬다. 어제 갑작스레 전화연락을 받고 블로그의 기사가 실리게 될 거라는 건 알았다. '블로그 속으로'라는 소위 '블로그 탐방' 연재인데, 목요일에는 주로 경향신문을 집어들기 때문에 몇 주 전 처음 연재가 시작될 때부터 읽어본 기억이 있다(우석훈, 이택광 교수의 블로그들이 이 서재보다 먼저 다루어진 블로그들이다). 지면에 게재된 건 작년말에 작성한 '벤야민 읽기의 우울'(http://blog.aladin.co.kr/mramor/1797977)이고 글의 선정과 발췌에 나는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 기억을 위한 자료로 창고에 넣어둔다.   

경향신문(08. 01. 17) [블로그 속으로]우울한 ‘벤야민’ 읽기

수전 손택의 ‘우울한 열정’에서 벤야민에 관한 장을 다시 읽어보려고 찾았으나 눈에 띄지 않는다. 원저인 ‘토성의 영향 아래’를 내가 안 갖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데 생각이 미치자(도서관에서 주로 빌려 읽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게 되었다. 책을 찾아보려는 열정 역시 이럴 땐 ‘우울한 열정’이다(손택은 벤야민이 우울증적 기질의 비평가였음을 지적한 바 있다).(…)

그런 우울 모드는 오전부터 간간이 붙들고 있는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도 빚지고 있다. 야심차게 출간되기 시작한 이 선집이 적어도 한국어 정본의 역할을 해줄 것으로 기대했지만 내가 읽기에 독어본이나 영어본 등 다른 판본의 도움 없이 국역본만으로 벤야민을 읽고 이해하기는 여전히 지난해 보인다. 가독성을 경계해 마지 않았던 아도르노만큼은 아니더라도 벤야민 읽기 역시 팍팍한 여정이다.

걸음을 지체시키는 원인은 번역자들이 원칙으로 삼은 듯이 보이는 ‘직역주의’에 있다. 원저에 대한 ‘충실성’이 이유인 듯한데, 덕분에 한국어 독자는 들러리에 머문다는 인상을 받는다. 하지만 의문스러운 건 벤야민에 대한 충실성이 부자연스럽거나 어색한 한국어까지 정당화하느냐는 것이다(벤야민 자신이 그런 어색하고 부자연스러운 독일어 문장을 구사한다면 물론 정당화될 수 있다. 하지만 독일 최고의 문학비평가를 자임했던 벤야민이 과연 그런 식의 독일어를 구사한 것인지?).

아직 이번에 나온 국역본들을 전반적으로 훑어보진 않았기 때문에 내가 사안을 침소봉대하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벤야민의 가장 대표적인 ‘논문’의 경우는 사실 지난 1983년에 나온 반성완 교수의 번역보다 더 낫다고 말하지 못하겠다(내가 읽을 수 있었던 대여섯 종의 우리말 번역본들을 고려할 때 그렇다). 물론 반성완본의 여러 오역들에 대해서는 여러 후학들이 지적하고 있는 것이지만 나는 우리말 문장력에서만큼은 반성완본이 가장 낫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예컨대 벤야민의 에피그라프격으로 인용한 발레리의 첫문장은 이렇다.

“제반 예술이 정초되고 그것들의 여러 유형이 생겨난 것은 우리의 시대와는 판이하게 달랐던 시대에서 시작되었고, 사물과 상황에 대한 그 권력이 우리 시대에 비하면 미미하기 짝이 없던 사람들에게로 거슬러 올라간다.”(최성만, 99쪽)

“예술이라는 개념과 예술의 여러 상이한 형식은 오늘날의 시대와는 크게 다른 시대, 즉 사물과 상황을 제어하는 힘이 우리들의 힘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미미한 시대에 생겨났다.”(반성완, 197쪽)

여기서 무엇이 맞는 번역이냐는 부수적이다. 다만 나의 관심은 문장이고 문체이다. 그리고 어차피 이 대목의 원문은 불어이기에 두 판본 모두 ‘중역’이다. 그러니까 여기서 문제되는 것은 벤야민에 대한 충실성이 아니라 발레리에 대한 충실성이며 불문학 쪽에서도 뛰어난 문장가로 꼽히는 발레리라면 보다 유려한 문장을 구사하지 않았을까. 인용문의 끝문장을 읽어본다.(…)

머리말에 이어지는 1절의 첫문장도 부자연스럽기는 마찬가지다. “예술작품은 원칙적으로 항상 복제가 가능했었다.”(100쪽) 왜 ‘가능했다’가 아니라 ‘가능했었다’인가? 우리말에서 ‘가능했었다’라고 하면 ‘현재는 가능하지 않지만’이란 뜻을 함축한다. 물론 벤야민이 뜻하는 바는 아니다. 2절에서도 첫문장은 좀 어색하다.(…)

가장 완벽한 번역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복제와 마찬가지로 원저가 갖고 있는 현존성, 곧 아우라를 갖지는 못한다. 다만 근접해보고 싶을 따름이다. 번역에 대한 불만은 그런 근접에의 욕망이 불가피하게 빚어내는 ‘착시 효과’일 수도 있다. 보기에 따라서는 무난하게 읽힐 수도 있는 대목들에 대해 괜한 투정을 부리는 것일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욕망은 언제나처럼 끝간 데를 알지 못하는 법. 해서 ‘사람들이 번역에서 기대할 수 있는 것이 생겨나도록’ ‘번역 자체를 가장 마법적인 방식으로 변화시키는 데’ 이를 때까지 이런 투정은 결코 끝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08. 01. 17.

P.S. 이 연재에서 제일 처음 다루어진 건 우석훈의 '유관순 그리고 좌파소녀들'(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801021744581&code=990000) 이다. 그의 블로그는 일일 방문자수가 이곳의 세 배가 넘는 '최강 블로그'의 하나다(http://fryingpan.tistory.com/). 요즘 경부운하에 대한 글들이 연이어 올라오고 있으므로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방문해보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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