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야민의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제3판) 읽기의 계속이다. 이 논문에 대한 체계적인 해제를 목적으로 하는 건 아니기 때문에 내키는 대로 몇 대목을 짚어보고 있다. 이 페이퍼에서 다룰 대목은 10절의 후반부로 내용 자체는 간명하며 어렵지 않다. 

 

 

 

 

일단 8절부터 벤야민은 영화라는 기술복제 매체가 배우의 연기에 끼친 영향에 대해서 분석한다. 그것은, 단적으로 말하면, 영화는 배우에게서 인격의 아우라를 제거한다는 것이다. 아우라는 무엇보다도 '여기'와 '지금'에 결부되어 있는데, 관객이 현장에서 직접 배우의 연기를 관람하는 연극무대와는 달리 영화에서는 그러한 현장성이 부재하는 것이니까 아우라의 결여는 당연하다. 벤야민은 이렇게 말한다.

"무대 위에서 맥베스를 둘러싸고 있는 아우라는 관객이 입장에서 보면 맥베스 역을 해내는 배우의 주위를 감돌고 있는 아우라와 떼어놓을 수 없다. 그러나 영화 제작소에서 행해지는 촬영의 특징은 관객의 자리에 카메라가 대신 들어선다는 점이다. 이렇게 되면 연기자를 감싸고 있는 아우라는 사라지기 마련이고, 동시에 그가 연출하는 인물의 아우라 또한 사라지게 된다."(최성만, 124쪽) 

"무대 위에서 맥베드를 둘러싸고 있는 아우라는, 관객의 입장에서 보면 맥베드 역을 해내는 배우의 주위를 감돌고 있는 아우라와 분리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영화제작소에서 행해지는 촬영의 특징은 관객의 자리에 카메라가 대신 들어선다는 점이다. 이렇게 되면 연기자를 감싸고 있는 아우라는 사라지기 마련이고, 동시에 그가 그려내는 인물의 아우라 또한 사라지게 된다."(반성완, 214쪽)  

"무대 위에서 맥베드 주변에 있는 아우라는, 현장에 있는 관객에게는 맥베드를 연기하는 배우 주위에 있는 아우라와 분리될 수 없다. 그러나 영화제작소에서의 촬영의 특이한 점은, 촬영이 관객의 자리에 기계장치를 설정한다는 데에 있다. 그리하여 배우를 둘러싼 아우라는 떨어져나갈 수밖에 없고 그와 동시에 배우가 연기하는 인물의 아우라도 떨어져 나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강유원, 10쪽)

이 대목에서 최성만과 반성완본은 대동소이하다. '분리될 수가 없는 것이다'가 '떼어놓을 수 없다'로, '그려내는'이 '연출하는'으로 바뀐 정도이다. 한데, 배우가 "연출하는 인물"이란 표현은 아무래도 좀 어색하다. 강유원본에서도 확인할 수 있지만 그냥 '연기하는 인물' 혹은 '그려내는 인물'이 아닌가 한다. 강유원본에서는 '카메라' 대신에 '기계장치'가 들어섰는데, 이 또한 직역인지는 모르겠으나 너무 '기계적'인 번역이다.   

아무튼 같은 연기라고는 하나 연극연기와 영화연기는 그 본질에 있어서 차이가 있다. 벤야민의 따르면, 그 차이란 "무대 위에서 움직이는 배우는 자신을 그가 연기하는 역할과 동일시하지만 영화배우의 경우에는 대체로 그러한 동일시가 실패한다는 점이다."(최성만, 125-6쪽) 강유원본은 이 대목은 "무대 위에서 연기하는 배우는 자신을 하나의 역할 속에 옮겨 넣는다. 영화배우에게는 그러한 것이 거의 허용되지 않는다."로 옮겼는데, '거의'는 너무 강한 표현이다.

영어본은 '매우 자주', 러시아어본도 '자주' 정도로 옮겼는데, 영화연기의 경우는 여러 테이크로 나누어 찍으니까 연기의 몰입과 연속성을 확보하기가 어렵다는 정도의 뜻이고 사실 오늘날에는 거의 극복되는 게 아닌가 싶다(벤야민은 김태희의 연기를 떠올리는 듯하지만 전도연처럼 하는 연기도 가능하니까). 해서 요즘 현실에 맞게 수정하자면 "영화배우는 그가 연기하는 역할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데 종종 어려움을 겪는다" 정도겠다.  

물론 그러한 어려움의 이유로 벤야민이 제시하는 건 연기력 자체가 아니라 연기를 둘러싼 환경이다. 아무리 뛰어난 연기력을 갖춘 배우라 하더라도 영화연기에서는 애를 먹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영화배우의 연기는 하나의 통일된 작업이 아니라 여러 개의 개별적 작업이 합쳐져서 이루어진 것이다. 거기에는 예컨대 촬영소의 임대료, 동료 배우들의 사정, 무대장치 등과 같은 것에 대한 부차적인 고려 말고도, 연기자의 연기를 일련의 조립할 수 있는 에피스드로 쪼개어놓을 수밖에 없는 기계장치의 기본적인 필연성들도 작용한다."(최성만, 126쪽)

"영화배우의 연기는 하나의 통일된 작업이 아니라 여러 개의 개별적 작업이 합쳐져서 이루어진 것이다. 거기에는 예컨대 촬영소의 임대료, 공연자(共演者)의 사정, 장치 등과 같은 것에 대한 부차적인 고려 말고도, 연기자의 연기를 일련의 조립할 수 있는 에피소드로 쪼개어 놓는 기계의 기본적인 필요들도 작용한다."(반성완, 215쪽)

"그[영화배우]의 연기는 어디까지나 통일된 연기가 아니라 많은 개별적인 연기들이 합해진 것이다. 촬영소의 임대료, 상대 역의 변동, 무대장치들과 같은 것에 대한 부수적인 고려 외에도, 연기자의 연기를 일련의 조립가능한 에피소드로 나누는 기계도 기본적으로 필요하다."(강유원, 10쪽)

여기서도 최성만본과 반성완본은 대동소이하다. 몇 단어가 바뀌었을 뿐이다. 영화연기의 결정적인 특징은 그것이 연극에서처럼 한번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여러 차례 나뉘어서 이루어진다는 것. 하나의 연기 신(scene)이 보통 여러 쇼트로 이루어진다는 걸 생각해보면 되겠다. 게다가 하나의 쇼트조차도 여러 차례, 곧 여러 테이크로 촬영되는 게 일반적이다. 그렇게 분리해서 찍은 걸 나중에 편집과정에서 이어붙이는 게 영화인 것이다. 부차적인/부수적인 고려가 아닌 '기본적인 필요'란 영화가 필름조각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이고 그에 따라서 연기의 분할이 요구된다는 점이다. 해서, 강유원본에서처럼 '기계'가 필요한 게 아니다. 영화를 만드는 기계장치는 이미 주어졌다. 필요한 건 그 기계장치의 필요/요구에 연기를 맞추는 것이다.  

 

 

 

 

이러한 영화연기의 사례로 벤야민이 들고 있는 건 도주 장면의 몽타주(편집)이다. 스튜디오(제작소)에서 창문에서 뛰어내리는 장면을 찍은 다음에, 도주 장면은 나중에 옥외촬영을 해서 두 장면을 이어붙이면 되는 식이다. 이 경우 연극이나 실제에서라면 연속적인 행동이지만, 영화연기에서는 상당한 시간차를 둘 수도 있다. 또 한가지 드는 사례는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깜짝 놀라는 배우의 반응쇼트를 찍을 경우이다. 이때 원하는 연기가 나오지 않았을 경우(연극에서라면 낭패이겠지만) 감독은 며칠 뒤에 아무런 예고 없이 배우의 등뒤에서 총을 쏨으로써 그를 놀라게 하고 그 장면을 찍어서 영화에 끼워넣을 수도 있다는 것. "예술이 지금까지 그것이 피어날 수 있는 유일한 영역으로 여겨져 온 '아름다운 가상'의 왕국에서 벗어났다는 사실을 이보다 더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도 없을 것이다."(최성만, 126쪽)

물론 최근에는 CG 때문에 실제 연기 장면이 벤야민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기이하게 보일 수도 있다. 가상의 상대역을 고려하면서 연기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경우 '아름다운 가상'이라기보다는 상당히 우스꽝스러운 가상이라고 해야겠다.  

여하튼 그런 식으로 영화에서 배우의 아우라는 상실되며, "영화는 아우라의 위축에 대항하기 위해 스튜디오 밖에서 '유명인물'이라는 인위적 스타를 만들어낸다."(최성만, 128쪽; 반성완, 216쪽) 인용문에서 '유명인물'은 짐작에 영어단어 'personality'를 옮긴 것이다. 강유원본에는 그냥 '퍼스낼리티'라고 옮겨진 것으로 보아 벤야민의 원문이 그렇게 돼 있는 듯하다. 영화 안에서는 이 퍼스낼리티가 구축될 수 없기 때문에 영화 '바깥'에서 인위적으로 만들어주어야 한다는 얘기. 이 스타 숭배 현상에 대한 벤야민의 시각은 이렇다.

"영화 자본에 의해 장려되고 있는 스타 숭배는 이미 오래전부터 상품성의 부패한 마력에 지나지 않았던 그런 개성의 마력을 보존하고 있다. 영화 자본이 발언권을 쥐고 있는 한 오늘날의 영화에서 우리가 일반적으로 기대할 수 있는 유일한 혁명적 업적은, 영화가 전통적인 예술관에 대해 혁명적인 비판을 촉진하고 있다는 점이다."(최성만, 128쪽)

"영화 자본에 의해 장려되고 있는 스타 숭배라는 이 마력은 실제로는 이미 오래전부터 상품성의 타락한 마력 속에서 겨우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영화자본이 발언권을 쥐고 있는 한은 오늘날의 영화에서 우리가 일반적으로 기대할 수 있는 유일한 혁명적 업적은, 영화가 전통적인 예술관에 대해 혁명적인 비판을 촉진하고 있다는 점이다."(반성완, 216쪽)

"영화자본에 의해 촉진되는 스타숭배는 인격성이라는 마력을 간직하고 있는데, 이 마력은 이미 오래 전부터 자신의 상품적 특성이라는 타락한 마력에서만 존립하는 것이다. 영화자본이 발언권을 쥐고 있는 한, 오늘날의 영화에게는 일반적으로 예술에 관한 전래의 표상에 대해 혁명적인 비판을 촉진한다는 것 이외의 다른 혁명적 기여를 인정해줄 수가 없다."(강유원, 11쪽)

벤야민이 보기에 스타숭배 현상은 상품성과 밀접한 연관을 갖고 있으며, 영화산업 자체를 소위 영화자본이 쥐락펴락하고 있는 이상은 영화에서 혁명성을 기대하기는 어렵다(비록 불가능한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다만 벤야민이 기대하는 것은 영화가 전통적인 예술관, 혹은 예술의 전통적인 표상에 대한 혁명적인 비판을 촉진하는 것이다.    

전통적 예술에서라면 예술작품의 대상은 한정돼 있었다. 하지만 "현대의 인간은 누구나 영화화되어 화면에 나올 수 있는 권리를 제기할 수 있다."(최성만, 129쪽) 혹은 "모든 오늘날의 사람들은 영화화되려는 요구를 가질 수 있다."(강유원, 12쪽) 곧, "스크린에 내가 나온다면'이란 욕망을 실현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 벤야민이 예로 드는 영화는 지가 베르토프의 <레닌에 관한 세 노래>(http://www.youtube.com/watch?v=eIdeEgY4LTo, http://www.vunet.org/videos/story-313.html)나 요리스 이벤스의<탄광광부> 등이다.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가를 일별해보기 위해서 벤야민은 글쓰기(문학)이 처한 역사적 상황과 비교한다.

수백년 동안 문학계/문필분야에는 소수의 글쓰는 사람이 있었을 뿐이지만 19세기말부터는 사정이 바뀌어 "오늘날에 와서는 직업을 가진 유럽인치고 직업 체험담이나 항의, 르포르타주와 이와 유사한 것들을 발표할 기회를 갖지 못하는 사람은 원칙적으로 거의 없다".(인터넷이 보급된 20세기말은 또 한번의 분기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로써 필자와 독자의 차이는 근본적으로 그 의미를 상싱하게 되었다. 필자와 독자의 차이는 이제 다만 기능상의 차이가 되었고, 또 경우에 따라서는 이렇게되 될 수 있고 저렇게도 될 수 있게 되었다. 독자는 언제든지 필자가 될 준비가 되어 있다."(최성만, 129쪽) 바로 이런 것이 변화된 상황이다. 이어지는 대목.

"고도록 전문화된 노동 과정에서 싫든 좋은 전문가가 될 수밖에 없었던 독자는 필자가 될 기회를 얻게 된다. 노동 자체가 곧장 말로 표현된다. 노동을 말로 서술하는 것은 노동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능력의 일부가 된다. 글을 쓰는 권한은 이제 특별한 전문교육이 아니라 종합기술교육에서 그 기반을 얻게 되고, 그럼으로써 그러한 능력은 공동재산의 성격을 띠게 된다."(최성만, 129-130쪽)

"고도록 전문화된 노동 과정에서 싫든 좋은 전문가가 될 수밖에 없는 독자는 필자가 되는 기회를 갖기 마련이다. 소련에서는 일 자체가 곧장 말로 표현된다. 일을 말로 표현하는 것은 노동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능력의 일부가 된다. 글을 쓰는 문학적 능력은 이제 특별한 전문교육이 아니라 다방면에 걸친 기술교육을 통해서 배양되어지고, 그럼으로써 그러한 능력은 공동소유의 성격을 띠게 된다."(반성완, 217-8쪽)

"독자는 좋든 싫든 고도로 전문화된 작업과정에서 전문가가 될 수밖에 없었고, 그러한 전문가로서 저자로 등장할 기회를 얻는다. 소비에트 연방에서는 노동 자체라야 발언권을 가진다[말발이 선다]. 그리고 노동을 말로 표현하는 것은 노동의 수행에 요구되는 능력의 일부를 이룬다. 글을 쓰는 권능은 이제 더이상 전문 교육이 아닌 다방면의 기술교육에 기초하며 그리하여 공동의 재산이 되는 것이다."(강유원, 11-12쪽)

세 가지 번역을 비교해보면 알 수 있지만 최성만본에서는 '소련에서는'이란 구절이 누락됐다. 그리고, 글을 쓰는 권한/글을 쓰는 문학적 능력/글을 쓰는 권능 등으로 옮겨진 대목은 영어본에 따르면 'literary competence'이고, 러시아어본에 따르면 (직역하자면) '저자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다. 아무려나 이젠 누구든지 저자/필자가 될 수 있다는 것. 벤야민에 따르면 "이 모든 것은 영화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글쓰기에는 수백 년이 걸렸던 변화가 영화에서는 단지 십 년 사이에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대표적으론 러시아 영화의 경우가 그렇다.

"러시아 영화에서 보게 되는 배우의 일부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의미의 배우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연출하는 사람들이다. 서구에서는 영화의 자본주의적 착취로 인하여 복제되기에 대한 현대인의 정당한 요구는 무시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영화산업은 환상을 불러일으키는 생각들과 애매한 투기로써 대중의 관심을 자극하는 데만 열을 올리고 있을 따름이다."(최성만, 131쪽)

"러시아 영화에서 보게 되는 배우의 일부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의미의 배우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연출하는 민중이다. 서구에서는 영화의 자본주의적 착취로 인하여 자기자신을 재현/연출해보려는 현대 인간의 정당한 요구는 외면 내지 무시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 아래에서 영화산업은 환상을 불러일으키는 스펙타클과 아리숭한 상상력을 통하여 대중의 참여를 자극하는 데만 관심을 쏟고 있을 따름이다."(반성완, 218쪽)

"러시아 영화에서 접하게 되는 배우의 일부는 우리가 말하는 의미에서의 배우가 아니라 스스로를 연출하는 사람들이다. 서유럽에서는 영화의 자본주의적 착취가, 현대인이 자신의 복제에 대해 가지고 있는 정당한 요구를 고려하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영화산업은 환상적인 생각이나 모호한 사색을 통해서 대중의 참여를 자극하는 데에만 관심을 가질 뿐이다."(강유원, 12쪽)

세 가지 번역 모두 대동소이한데, 다만 마지막 대목에서는 차이가 있다. 강조 표시한 대목들이 영어본에서는 'illusory displays and ambiguous speculations'로 옮겨졌고, 러시아어본에서는 (영어로 직역하자면) 'illusory images and dubious speculations'로 번역됐다. 최성만본에서는 '영화산업'이 주어란 점을 고려해서 'speculations'를 '투기'로 옮긴 듯하다. 한데, 영어본이나 러시아어본에서처럼 'speculations'가 'displays'/'images'와 댓구를 이룬다면 '투기'는 어색하다. 나는 의역으로 보이지만 맥락상 반성완본이 가장 자연스러운 게 아닌가 싶다...

08. 01. 12-1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