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슈킨의 돈후안 텍스트'에 이어지는 글이다. 역시나 2004년 가을에 작성된 것이고 모스크바통신에 올려놓았던 적이 있다. 다시 올리면서 이미지들을 덧붙여둔다. '돈후안주의'란 테마와 관련하여 관련서와 영화의 이미지도 몇 종 나열해본다. 말론 브란도와 조니 뎁이 주연했던 영화 <돈주앙>은 볼 만한 영화이다. 가장 최근에 나온 소설 <돈주앙의 잃어버린 일기>(램덤하우스, 2007)은 언제 한번 살펴봐야겠다... 

 

 

 

 

푸슈킨의 <석상손님>(1830) 읽기의 계속이다. 주된 내용만 간추리면서, 푸슈킨이 해석하고 있는 ‘돈후안주의’의 의미가 무엇이며, 그것이 왜 ‘파멸’에 이르는가에 대한 나름의 의견을 제시하도록 하겠다. 네 개의 장면으로 구성돼 있는 <석상손님>(영어로는 'The Stone Guest')은 돈후안과 레포렐로가 마드리드에 도착한 장면에서부터 시작된다.

“태초에 욕망이 있었다”에 대응하듯이 맨처음 입을 여는 것은 리비도-돈후안인바, 그의 첫 대사는 “여기서 밤까지 기다리자.”이다. 물론 유혹자 돈후안이 활동하기에 적합한 시간이 낮이 아니라 밤이라는 것은 자연스러우며, 돈후안을 푸슈킨의 분신으로 볼 경우 그가 푸슈킨의 에고가 아닌 리비도의 형상이라는 점은 바로 이 첫대사에서부터 암시되고 있다. 그리고 이어지는 대사는 “아, 마침내 우리가 마드리드의 성문에 이르렀구나!”인데, 이 대사는 주의해서 읽을 필요가 있다.

먼저, 공간적 배경의 변화. 돈후안 텍스트의 기본적인 배경은 스페인의 세비야 외에 이탈리아의 항구도시 나폴리나 시칠리 등이며 마드리드가 명시적인 배경으로 등장하지는 않는다. 물론 모차르트의 <돈조반니>에서 돈후안(돈죠반니)의 여성 편력을 늘어놓을 때 적어도 5개국이 거명되며(돈후안이 농락한 여성의 숫자는 이탈리아에서 641명, 독일에서 231명, 프랑스에서 100명, 터키에서 91명, 스페인에서 1,003명 등 총 2,066명이다. 물론 이러한 과장된 숫자가 <돈조반니>에 익살극적인 성격을 강화시켜준다. 한편, 이 숫자는 안나 아흐마토바를 인용한 것이며, 주판치치에 따르면 이탈리아에서 640명으로 한 명 적다. 그게 그거겠지만), 여자의 외모를 가리지 않는 그가 특정한 도시를 가렸을 리는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석상손님>에서 공간적 배경이 ‘세비야’에서 ‘마드리드’로 옮겨진 것은, 작가 푸슈킨과의 관련성을 노골적으로 암시한다. 즉 17세기 스페인의 지방도시 세비야가 아닌 수도 마드리드에 대응하는 것은 19세기 러시아의 수도 페테르부르크이며, 마드리드에 다시 (몰래)입성한 돈후안은 유배중이던 1820년대에 미하일롭스코예에서 여러 차례 페테르부르크로의 입성을 시도했던 푸슈킨의 모습을 비틀어서 재연하고 있다(‘마드리드의 돈후안’은 ‘페테르부르크의 푸슈킨’이다).

둘째, “우리가 성문에 이르렀다”는 표현에서 ‘이르다/도달하다’란 러시아어 동사는 보통 (공간적으로)‘어떤 장소에 도달하다’란 뜻과 함께 (시간적으로)‘어떤 연령에 도달하다’란 문구를 구성한다. 이때의 ‘어떤 연령’이란 대개 성년/어른을 가리키며, 공간개념의 ‘문’은 성년/어른의 문턱이라는 시간개념의 흔한 은유이다. 그리고 1830년 가을, 푸슈킨은 이미 지적한대로 콜레라 속에서도 바로 이 문턱(=결혼)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해서, 돈후안과 푸슈킨은 모두 어떤 문턱에 자리하고 있다. 문제는 그 문턱을 넘어서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문턱넘기를 주제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석상손님>은 입사제의적 드라마이며, 이 드라마의 그러한 성격은 돈후안의 첫대사에 이미 새겨져 있다.

그리고, 주목해야 할 것은 이 드라마 텍스트에 최초로 등장하는 인칭대명사 ‘우리’이다. 돈후안이 ‘우리’라고 일컫은 것은 물론 돈후안 자신과 하인 레포렐로이다. 즉 리비도-돈후안과 레포렐로-푸슈킨이다. 돈후안에게 ‘사회’란 바로 레포렐로와의 2자적 관계를 뜻하는바, 그것은 사회라기보다는 ‘유사-사회’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2자적 관계, 즉 하인(=엄마) 레포렐로가 주인(=아이) 돈후안의 모든 요구를 들어주는 식의 관계란, 아이와 엄마라는 기본적/모태적 2자 관계의 변형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경우엔 그러한 2자적 관계에 제3자로서의 ‘아버지’ 혹은 ‘아버지의-이름’이 개입함으로써 아이가 상징적 거세를 통해 사회라는 상징적 질서에 편입될 수 있도록 해준다. 하지만, 석상손님과의 조우 이전의 돈후안의 세계에는 그러한 ‘아버지’가 부재한다.

물론 제3자로서의 ‘아버지’의 후보가 없지는 않다. 유배지에서 제멋대로 마드리드에 입성한 돈후안이 유일하게 두려워하는 인물로 꼽는 ‘국왕’이 바로 그이다. 하지만, 그러한 사실을 국왕이 알게 될 경우 어떻게 하실 것 같느냐는 레포렐로의 질문에 대해서 돈후안은 그가 자신을 다시 돌려보낼 것이며, 국사범(國事犯)도 아니기에 목을 베지는 않을 거라고 답한다. 오히려 피살자의 가족들로부터 보호해주기 위해서 유배를 보낸 거라고. 중요한 것은, 스페인의 국왕이 실제로 돈후안을 사랑해서 유배를 보냈는지의 여부가 아니라 돈후안이 그렇게 ‘상상’한다는 점이다. 즉, 그의 상상 속에서 국왕은 자신을 거세할(=목을 벨!) ‘아버지’, 다시 말해서 ‘부권적 기능’의 대행자가 아니라 오히려 피살자의 가족들로부터 돈후안을 보호하고자 하는 ‘어머니’의 형상이다.

여기서도 확인할 수 있는 바이지만, 돈후안의 상상력이란 언제나 2자적 상상력이며 거기에는 어떠한 제3자도 배제돼 있다. 그는 심지어 <장면3>에서는 기사단장의 ‘석상’조자도 그 문법적 성 때문에 여성으로 대우한다. 상징계의 문턱을 제대로 넘어서지 못한, ‘아버지의-이름’이 부재하는 세계에 속한 그는 아직 상상계의 존재이며, 이러한 그에게서 가장 활성화되어 있는 것은 다름아닌 ‘시적 상상력’이다. 결과적으로 그의 파멸을 가져오게 되는 도나 안나와의 만남도 이 상상력에서 처음 비롯된바, <장면1>에서 그는 도나 안나의 발뒤꿈치만 간신히 보고서도, 레포렐로의 말을 빌면, 한순간에 모든 걸 상상해낸다: “나리께는 그걸로 충분하죠. 나리의 상상력은 눈깜짝할 사이에 나머지를 모두 그려내니까요.”

요컨대, 돈후안에게는 3자적 관계를 통해서 유도/형성되는 사회적 자아가 결여돼 있으며(그래서 ‘리비도-돈후안’이다), 사회적 정체성 또한 부재한다. 그리고, 이러한 결여/부재의 이면이, 아브람 테르츠(시냐프스키)의 말을 빌면, “모두를 사랑하면서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돈후안식 사랑이고, 푸슈킨이 새롭게 조형해낸 즉흥시인적 자질이다.

하지만, 돈후안의 시적 상상력은 그의 가장 큰 재능이면서 동시에 최대 약점이다. 즉, 도나 안나의 발뒤꿈치는 돈후안에게서 ‘아킬레스의 발뒤꿈치’였다는 게 밝혀지는바, <장면3>에서 그녀를 유혹하려는 자신을 (죽은)기사단장이 어떻게 생각할 거 같으냐는 레포렐로의 물음에, 돈후안은 그가 결코 질투하지 않을 거라고 ‘상상’한다. 그는 시적인 상상력으로 여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지만, 한편으로 기사단장(석상손님)에 대한 과소평가와 불경을 유도한 것도 이러한 그의 상상력이며, 결과적으로 이 오도(誤導)된 상상력이 그의 파멸을 부르게 된다.

이미 앞에서 돈후안이 말하는 ‘우리’는 (상징계적)‘사회’가 아니라 (상상계적)‘유사-사회’라는 지적을 했지만, ‘우리’라는 말이 전제하는바, 마치 리비도에 대한 에고(자아)의 관계에서처럼, 레포렐로가 자신의 ‘충직한 하인’으로서 언제나 뒤를 따라다니며 뒤치다꺼리를 해줄 거라는 돈후안의 순진한 기대 혹은 상상이 그려낸 상상적 구성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걸 확인시켜주는 장면을 보라. <장면1>의 마지막 대목이다.

돈후안: 한데 벌써 어두워졌군.
달이 우리 머리 위로 떠올라
이 어둠을 밝은 여명으로 바꾸어놓기 전에
마드리드에 입성하자.(퇴장)

레포렐로: 스페인의 귀족이 도둑처럼
밤을 기다리고 달을 무서워하는군, 맙소사!
빌어먹을 인생이군. 대체 언제까지 저런 작자와
붙어다녀야 하는 거야? 그래, 이젠 힘도 다 빠졌어.


“여기서 밤까지 기다리자.”라고 한 <장면1>의 서두 부분을 이어받고 있는 이 장면에서 암시적이게도 돈후안은 “마드리에 입성하자”는 말과 함께 무대에서 퇴장해버리고 레포렐로 혼자만이 남게 된다(결국은 그렇게 될 것이다). 레포렐로는 돈후안을 ‘도둑’에 비유하면서(그가 ‘도둑’인 것은 사회의 상징적 질서 바깥에 있기 때문이다), 그에게 붙어다녀야 하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한다. 에고(자아)와 마찬가지로 이미 사회화된 존재로서 상식적인 도덕률의 담지자인 그는 하인으로서 부득이 ‘난봉꾼’ 주인 돈후안을 따라다니긴 하지만, 이젠 그의 기력과 인내가 바닥이 난 상태이다. 그러한 사정을 그는 이 장면에서 명시적으로 토로하고 있다. 이미 그는 은연중에 주인의 죽음에 대한 욕망을 드러내지 않았던가. 즉, <장면1>의 중반, 수도승과 대화를 나누는 장면에서, 그는 “돈후안 같은 난봉꾼들은 모조리 자루에 넣어서 바다에 처넣어야 한다”고 말했다.

레포렐로의 말은 문맥상 돈후안을 “후안무치하고 파렴치한 난봉꾼”으로 보는 수도승의 시각에 맞장구를 쳐주고 자신들에 대한 의혹을 무마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상징적 ‘핑계’가 감추고/드러내고 있는 것은 주인 돈후안과 분리되고자 하는 실재적 욕구이다. 그리고 이러한 레포렐로-푸슈킨의 욕구는 텍스트 속에서 교묘하게 실행된다. 마드리드에 도착한 돈후안이 가장 먼저 달려가고자 하는 대상은 라우라인데(“오, 라우라! 나는 곧장 그녀에게로 달려갈 거야”), 돈후안의 걸음을 지체시키면서 수도승에게 주의를 기울이도록 하는 것은(“저기 오는 게 누굴까요?”), 그리하여 기사단장의 미망인 도나 안나를 돈후안에게 간접적으로 소개하는 것은 레포렐로이며, <장면3>에서 도나 안나와의 밀회를 약속받은 돈후안에게 이번엔 기사단장(석상)의 존재를 환기시키는 것도 레포렐로이다.

주로 돈후안의 뒤치다꺼리를 하는 게 레포렐로의 주된 일이지만, 이 두 경우에 그는 운명의 길라잡이가 된다. 도나 안나와의 사랑이 결과적으로 돈후안의 파멸을 가져오게 되는 것이라면, 레포렐로는 그 파멸의 간접적인 사주자가 될 것이다(이 드라마를 사실주의적 심리극으로 독해/공연할 경우 <장면4>의 석상손님은 레포렐로가 분장한 것으로 처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돈후안에게 석상에 대한 ‘공포’를 불어넣은 장본인이며, 도나 안나와의 만남에 대해서 못마땅하게 생각했었다. 한편으로 “내일 준비하게”라고 <장면3>에서 돈후안이 언질을 주지만, <장면4>에서 그는 나타나지 않는다. 그는 어디에 있었던 것일까?).

돈후안이 밤이 되길 기다려서 마드리드에 입성하는 데에서 알 수 있듯이, 마드리드는 밤의 공간이고 꿈의 작업이 펼쳐지는 무의식의 무대이다. 물론 거기엔 <석상손님>을 작가 푸슈킨의 ‘백일몽’(프로이트)으로 읽고자 하는 우리의 관심도 반영돼 있다. 주의할 것은 이 백일몽의 무대가 균질적인 무대가 아니라, 이질적인 무대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 차이를 낳는 것은 레포렐로의 등장 유무이다. 왜인가? 그는 리비도-돈후안의 충동을 보존하면서도 감시하는 에고(자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돈후안의 ‘진정한’ 판타지는 레포렐로의 부재속에서 펼쳐진다. 레포렐로가 등장하는 장면/무대가 비록 ‘유사-사회’라고 하더라도 최소한의 상징적 질서가 존중되는 상징계적 공간이라면(물론 이 ‘상징계’는 레포렐로를 기준으로 한 것이다), 그가 등장하지 않는 장면/무대는 ‘즉흥시인’ 돈후안의 판타지가 마음껏 펼쳐지는 상상계적 공간이다.

<장면1>과 <장면3>에서 주요 배역은 돈후안과 레포렐로이며, 레포렐로를 기준으로 한 이 상징계 공간은 개방공간이다(해서 가장 ‘현실적인’ 공간이다). <장면2>와 <장면4>는 돈후안의 상상계적 공간이면서 시적 판타지의 공간이다. 그리고 판타지의 특성상 이 두 공간은 폐쇄공간이다. 그의 판타지는 <장면2>에서 상징적 질서(돈카를로스)에 승리를 거두지만, <장면4>에서는 상징적 질서(석상손님)에 아무런 중재없이 충돌하여 패배한다. 그것은 ‘라우라의 집’과 ‘도나 안나의 집’이라는 각기 다른 공간의 성격과도 관련될 것이다. 이에 대해서 차례대로 설명하기로 한다.

<장면1>에서의 2자적 관계에 대해서는 앞에서 이미 설명한바 있다. 이제 <장면2>로 넘어갈 차례인데, 사실 돈후안과 도나 안나와의 관계를 이 작품의 중심적인 관계축으로 본다면 돈후안과 라우라의 만남을 무대화하고 있는 이 장면은 <석상손님>에서 가장 ‘잉여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잉여성은 거꾸로 이해될 필요가 있다. 즉, <장면2>는 푸슈킨판 돈후안 텍스트에서 가장 독창적이며 가장 중요한 장면이다. 돈후안 텍스트의 ‘반복’ 속에서 푸슈킨만의 ‘차이’가 집약돼 있는 것이 바로 이 장면이기 때문이다.

<장면2>는 라우라의 집을 배경으로 저녁식사를 하면서 그녀가 남자 손님들에게 둘러싸여 노래를 불러주는 걸로 시작한다. ‘손님1’의 말을 빌면, 그녀의 노래에는 “당신의 음울한 손님 카를로스도 감동한 눈치이다.” 손님들을 감동으로 몰고 간 그녀의 노래는 “충실한 친구이자, 바람둥이 연인” 돈후안이 지어준 것이다. 그리고, 돈후안이 여자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만큼이나 남자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라우라는 그의 ‘친구’로서 전혀 모자람이 없는 ‘여성 돈후안’이다. 그녀는 만찬이 끝나고 손님들을 돌려보내면서 ‘음울한 손님’ 돈카를로스만은 붙잡는데, 그가 돈후안을 생각나게 해주었다는 이유에서이다. 이어지는 두 사람의 대사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두 가지인데, 라우라가 돈후안을 무척 사랑했다는 것과 그녀의 사랑은 순간/현재의 사랑이라는 것. 이 순간/현재에의 충실성이라는 것이 ‘돈후안주의’의 핵심적인 모토이다.

 

 

 



물론 이 충실성의 전제조건으로 놓여 있는 것은 ‘젊음’인바, 젊음이란 티르소의 텍스트에 의하면 ‘죽음과 신의 심판으로부터의 거리’이며, 티르소의 돈후안이 자신의 모토처럼 입에 달고 다니는 말은 “아직 멀었어!”(국역본에서는 “오래도 두고 보시는구먼.”)이다. 즉, ‘돈후안주의’란 현재의 젊음을 근거로 하여 미래의 죽음과 (기독교 문화권의 경우) 죽음 이후의 심판/정의를 거부하거나 간과하는 태도로 규정될 수 있다.

다르게 말해서, 돈후안주의는 현재의 젊음, 젊음의 현재를 어떠한 규범적 테두리로부터도 벗어나 있는 무제약적인 것으로 예찬하며 숭배하는 태도이다. 따라서, 흔히 돈후안주의로 지목되는 무분별한 여성편력은 돈후안주의의 본질과는 무관하며 그러한 태도의 부수적인 결과일 따름이다. 푸슈킨이 새롭게 제시하고 있는 ‘여성 돈후안’ 라우라의 남성편력이 말해주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푸슈킨은 돈후안주의의 핵심으로서 ‘젊음’ 지상주의가 갖는 매력과 위험을 동시에 간파하고 있었고, 이어지는 카를로스와 라우라의 대화는 이에 관한 것이다. 카를로스는 라우라에게 나이를 묻고 18살이라고 대답하자, 그녀가 아직은 젊지만, 그래서 앞으로도 6년간은 남자들이 애무와 아첨과 선물을 갖다 바칠 테지만(젊음은 24살까지이다!), 세월이 흐른 뒤 결국은 늙어서 현재의 젊음을 상실하고 쪼그라질 것이고, 사람들로부터 ‘할망구’라 불릴 거라고 얘기한다. “그때는 뭐라고 말할 것인가?” 즉, 그때도 지금처럼 당당하고 자신만만할 것인가?

카를로스의 대사는 비록 거칠고 분위기에 안 맞는 것이긴 하지만, 이 장면에서 그가 대표하고 있는 ‘산문적 세계관’을 집약하고 있다. 그 세계관은 “시간은 모든 것을 변화시킨다”’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예브게니 오네긴> 또한 이러한 주제적 배경을 갖고 있다. 그것이 ‘소설’인 근거이다. 루카치에 따르면, 소설에서 본질은 시간과 함께 주어진다).

거기에 대해서 라우라는 먼 북쪽의 파리에서는 차가운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불지도 모르지만, 그것이 레몬과 월계수 내음을 풍기고 있는 현재 마드리드의 아늑한 밤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대꾸한다. 그녀의 대사, “그게 우리랑 무슨 상관이죠?”는 티르소판 “아직 멀었어!”의 푸슈킨 버전이면서, 라우라가 대표하고 있는 돈후안적 세계관, ‘시적 세계관’의 논리라고 할 수 있다. 더불어 그것은 “멈추어라, 너는 진정 아름답구나!”(“Verweile doch! du bist so schön!”) 라는 파우스트적 발견과도 일맥상통한다.

즉, 돈후안주의와 파우스트주의는 모두 지속(=시간)이 아닌 순간에서 삶의 의미(=향락)과 구원을 찾는다는 점에서 동류적이다(푸슈킨은 괴테를 ‘낭만주의의 거인’으로 평가하며, <파우스트>를 바이런의 <만프레드>와 동일시한다). 그 동류적 세계관은 “현재의 순간은 영원하다”는 것으로 집약될 수 있을 것이다. 그 순간/현재 앞에서 웃으라고 라우라는 카를로스에게 명령한다.

돈카를로스의 산문적 세계관과 라우라의 시적 세계관의 대결에서 판정승을 거두는 것은 라우라이며, 패배를 자인하는 돈카를로스가 라우라에게 던지는 대사는 ‘사랑스런 악마!’이다. 그리고 <장면4>에서 도나 안나가 돈후안을 지칭하는 말도 ‘악마’이다: “당신은 파렴치한 난봉꾼이고, 살아있는 악마라고들 말하죠.” <석상손님>에서 돈후안주의는 ‘사랑스러운 악마’ 라우라와 ‘살아있는 악마’ 돈후안 커플에 의해서 대변되는바, 가령 <장면3>에서 도나 안나와의 대화 장면에서 도나 안나가 “절 사랑한 지 오래되었나요?”라고 묻자, 돈후안은 “오래 되었는지 아닌지는 저도 모릅니다./ 다만 순간적인 삶의 가치를 알게 된 바로 그 순간부터,/ 행복이란 단어가 무얼 의미하는지 알아차린/ 바로 그 순간부터입니다.”라고 답한다.

거기서도 돈후안주의의 모토인 ‘순간적인 삶의 가치’에 대한 옹호가 다시 반복되고 있다(더불어 지적하자면, 돈후안주의자의 행복은 언제나 일순간이다). 그리고 그러한 옹호의 수사학은 매혹적이다. 도나 안나가 돈후안을 가리켜 ‘위험한 사람’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런 수사의 위험성을 감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 매혹에 일단은 굴복하며 밀회를 약속한다. 사실, 순간에 충실한 사랑은 지속이란 관점에서 보면, 변덕스러운 사랑이지만 결코 거짓된 사랑은 아니다. 사랑하는 그 순간만큼은 진실이 담지돼 있는 사랑이기 때문이다. 즉, 돈후안은 모든 여자를 진실되게 사랑한다. 따라서 도나 안나에 대한 돈후안의 사랑은 진실한 사랑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와의 사랑이 돈후안의 편력에서 특권화될 수는 없다.

라우라와 돈후안 두 사례에서 확인할 수 있지만, 오직 충만한 현재만을 사는 돈후안주의자에게 과거와 미래는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하여(무시간성은 리비도를 규정하는 성격이기도 하다), 따라서 그들에게서 어떠한 후회나 책임감도, 혹은 죄의식도 기대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장면4>에서 돈후안은 도나 안내에게 자신이 남편을 죽였다는 걸 고백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내가 당신의 남편을 죽였소./ 그리고 거기에 대해선 후회하지 않아요./ 나에겐 아무런 참회도 없습니다.”). 요컨대, 그들은 그저 후안무치하며 순진무구할 따름이다. 그것을 범례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장면2>의 후반부이다.

불청객 돈후안이 라우라의 집에 들이닥치자 라우라는 다시 곧장 돈후안의 품에 안기고 돈카를로스는 (기사단장인 형 돈알바르에 대한) 복수와 (라우라에 대한) 질투의 칼을 빼어든다. 하지만, 결투에서 단숨에 그의 숨을 끊어놓는 건 돈후안이다. 그리고는 이 돈후안주의 커플은 아무런 죄의식도 없이 망자(亡者) 앞에서 사랑을 나누는바, <장면2>는 이렇게 마무리된다.

돈후안: 라우라, 그자를 오래전부터 사랑했나?
라우라: 누구를요? 무슨 잠꼬대 같은 소리예요?.
돈후안: 고백해보시오, 내가 없는 동안 몇 번이나 날 배신했지?
라우라: 당신은요, 건달 나리?
돈후안: 말해보시오... 아니, 나중에 따집시다.

이 장면에서 돈후안은 잠시 라우라에게 질투의 감정을 피력하지만, 현재의 충만을 사는 돈후안주의자들에게 과거사(過去事)가 문제될 리 없다. 해서, “나중에 따집시다”는 이들의 또다른 표어가 된다. <장면2>에서는 ‘돈카를로스’라는 제3자가 등장함에도 불구하고 고작 ‘3각 관계’로 머물면서, 3자적 관계(=상징적 질서)로 이행하지 못한 것은 돈카를로스가 대표하는 상징계의 권위가 돈후안과 라우라, 두 사람을 제압하기에는 역부족이기 때문이다.

즉, 돈카를로스는 ‘유사-제3자’이다. 그는 돈후안을 ‘거세’하기 위한 칼을 빼들지만, 돈후안주의의 공간인 라우라의 집에서 그를 이길 수는 없다. 사실, 그는 돈후안에게 패배하기 이전에 이미 라우라와의 (말)싸움에서도 패배하지 않았던가. 그의 산문적인 언어는 라우라의 시적인 언어를 당해내기에도 역부족이었다. 이로써 돈후안을 제압하기 위해서는 좀더 강한 적수가 필요하게 되는데, 그것은 티르소 텍스트에서부터 도입된바, 석상의 ‘오른손’(=신의 정의)이다. 그리고, <장면3>과 <장면4>는 돈후안 혹은 돈후안주의가 비로소 제격의 적수를 만나서 제압당하는 이야기이다.

<장면3>은 <장면4>의 결말을 예비하는 장면인데, (1)돈후안과 도나 안나의 대화, (2)돈후안과 레포렐로의 대화, 두 대목으로 구성돼 있다. 여기서 주의해볼 대목은 ‘연가를 부르는 즉흥시인처럼’ 도나 안나에게 말을 걸 궁리를 하던 그가 기사단장(석상)에 대해서 ‘상상’하는 부분이다.

벌써 올 때가 되었는데. 그녀가 없으면,
내 생각에, 기사단장도 심심할 거야.
여기서는 아주 거인으로 서 있구만!
어깨 좀 봐! 헤라클레스를 뺨치는군!..
고인은 실제로 왜소하고 허약했었는데,
여기서는 발돋음을 하고 손을 뻗쳐봐야
자기 코끝에도 못 미치겠어.
우리가 에스코리알 뒷편에서 맞붙었을 때
그는 내 칼에 찔려 찍 소리 못했지,
핀에 꽂힌 잠자리처럼. 하지만 그는
오만하고 용감했어. 엄격한 정신을 정신을 가진 데다...



기사단장의 석상과 돈후안이 처음 대면하는 장면인데, 실제의 왜소하고 허약했던 기사단장(석상)은 세 가지 이미지/비유를 통해서 그에게 제시되고 있다. 즉, 기사단장(고인)-거인(헤라클레스)-잠자리가 그것들이다. 그리고, 기사단장에 대한 이 세 규정항은 라캉의 도식을 빌자면, 실재(the Real)-상징계(the Symbolic)-상상계(the Imaginary)라는 RSI 3항에 그대로 대응한다. 여기서 특별히 문제되는 것은 (상상계의)‘잠자리’와 (상징계의)‘헤라클레스’ 사이의 간극이다.

석상 앞에서 돈후안은 이러한 간극에 ‘처음’ 노출되는 것이며, 이것이 그를 경탄하게 하면서 동시에 당황하게 만든다. 그의 상상은 거인(석상)에서 실제의 기사단장으로, 그리고 잠자리로 이행하면서 차츰 현실을 자기의 것으로 전유(專有)하지만, 그러한 전유는 (예전만큼) 완전하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즉, 거기에 틈새가 생긴 것이며, 이러한 틈새는 곧장 ‘하지만’이란 반전을 가져온다. “하지만, 그는 오만하고 용감했어. 엄격한 정신을 가진 데다..” 때마침 도나 안나가 등장하지 않았다면, 이러한 나열은 한동안 더 계속되었을 것이고, 상상력의 이러한 반전은 다시 “그는 정말로 위대한 거인이었어!”라는 정점으로까지 치달았을지도 모른다.

죽은 기사단장의 거인 같은 석상에서 돈후안은 비로소 제3자로서의 ‘아버지’ 형상을 보게 되는 것이며(‘엄격한’이란 수식어!), 이 체험은 그에게 경탄과 함께 (무의식적인) 공포로 각인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나타나는 도나 안나는 따라서 전형적인 ‘엄마’의 형상이다. 다른 돈후안 텍스트들에서와는 달리 <석상손님>에서는 기사단장이 도나 안나의 아버지가 아니라 남편으로 등장하고, 도나 안나와의 만남 이전에 돈후안이 결투에서 기사단장(돈알바르)를 죽였기 때문에 이 작품에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구도를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무리인 것으로 생각되기 쉬우나, 그러한 판단은 성급한 것이다. 오히려 푸슈킨의 텍스트는 티르소 등의 텍스트보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전형적인 구도에 더 충실하다. 그리고, 도나 안나의 실제 남편이었던 돈알바르가 아닌 그의 석상을 ‘아버지’의 형상으로 가져왔다는 점에서 푸슈킨은 <‘아버지’에서 ‘아버지의-이름’으로의 이행>이라는 라캉적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이해를 선취하고 있다고도 말할 수 있다.

돈후안이 질투하는 것은 그가 죽인 돈알바르가 아니라 대리석 석상이며(석상을 부러워하는 돈후안의 대사: “저는 말없이 경탄하며 생각합니다. 그녀의 신성한 숨결로 따스해지고 사랑의 눈물로 범벅이 된 차가운 대리석, 저 대리석의 임자는 행복하구나라고...”), 이 작품에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구성하는 <아이-엄마-아버지>는 <돈후안-도나 안나-석상>의 3항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구도를 전제할 때 <장면4>에서 도나 안나에 대한 돈후안의 ‘지순한’ 고백은 문자 그대로 읽혀져야 할 것이다.

그렇소, 나는 오랫동안 방탕의 충실한 제자였소.
그러나 당신을 본 순간부터
나는 완전히 다시 태어난 것 같소.

여기서 ‘다시 태어났다’는 말이 문자 그대로 뜻하는 바는 돈후안이 (다시 태어난)‘어린아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르네상스(Renaissance)’와 연관짓는 것은 과장이며, 이 고백의 진실성 여부를 따져묻는 것은 부차적이다. ‘방탕의 제자’이면서 ‘순간의 사제’인 돈후안은 달콤한 한순간을 위해서 매번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며, 그를 통해서 되살아난다. 그리고 이러한 ‘갱생(rebirth)’이 그가 ‘젊음’을 유지하는 비결이다. 다시 <장면3>에서 돈후안이 도나 안나의 발에 엎드려 본격적인 구애에 돌입한 대목을 잠시 따라가본다.

도나 안나 맙소사! 일어나세요, 얼른 일어나요... 당신은 대체 누구시죠?
돈후안 희망없는 열정의 희생자요, 불행한 사내입니다.
도나 안나 오 하느님 맙소사! 여기, 무덤 앞에서!/ 저리 가세요.
돈후안 1분만, 도나 안나,/ 제발 1분만!
도나 안나 누가 오기라도 하면!..
돈후안 철문은 닫혀 있습니다. 딱 1분만!
도나 안나 그래요? 그런데, 왜죠? 무얼 원하시는 거예요?
돈후안 죽음입니다. 오, 지금 당장 당신의 발 아래 죽었으면.(...)


이런 대목에서 돈후안의 구애는 어린아이의 투정/요구와 구별되지 않는다. 더불어 “제발 1분만!”이라고 간청하는 돈후안의 모습은 순간에 모든 것을 거는 돈후안주의의 이면이라 할 만하다. 무얼 원하는 거냐는 물음에 대해서, 돈후안은 단도직입적으로 ‘죽음’이라고 답하는바, 사실 돈후안의 사랑을 이끌고 가는 힘은 욕망이라기보다는 충동이다. 그것은 죽음/고통을 기꺼이 감수한다는 점에서 쾌락원칙을 넘어서며, 라캉적 의미에서 향략(jouissance)에 값한다.

이런 점에서, 몰리에르의 <돈주앙>의 주인공 돈후안(돈주앙)을 드 라클로의 <위험한 관계>의 주인공 발몽과 대비시키고 있는 주판치치의 지적은 시사적이다. 그녀는 발몽과 돈후안의 차이를 ‘욕망(desire)’과 ‘충동(drive)’의 차이로 규정하면서, 돈후안의 형상을 이렇게 설명한다.

“반면에 돈후안은 자신의 행동을 이끌고 가는 틈새를 만족 그 자체에서 찾는다. 그의 경우는 욕망의 환유가 아니다. 즉 (욕망의) ‘진정한’ 대상을 영원히 붙잡지 못하는 경우가 아니다. 그는 자신에게 맞는 어떤 유일한 여자를 찾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가 한 여자에서 다른 여자로 계속 옮겨가는 것은 실망이나 결여, 즉 그가 이전의 여자에게서 찾지 못한 어떤 것 때문이 아니다. 그와는 반대로 돈후안에게는 모든 여자가 다 잘 맞는 여자이며, 그를 계속적인 편력으로 이끄는 것은 그가 이전의 연인에게서 발견하지 못한 어떤 것 때문이 아니라 정확히 그가 발견한 어떤 것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목적을 성취하지 않고도 만족을 얻는다. 혹은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의 목적이란 다름 아니라 ‘반복적인 편력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며, 그는 바로 거기에서 만족을 얻는다. 바로 이것이 돈후안을 충동의 형상으로 만들어준다.”(<실재의 윤리>, 214-5쪽, 번역 수정)

원문은 이렇다: “Don Juan, on the contrary, finds the gap that constitutes the drive of his actions in satisfaction itself. His case is not that of the metonymy of desire, of the eternal elusiveness of the 'true' object (of desire). He is not looking for the right woman; his constant moving on to another woman is not motivated by disappointment or lack, by what he did not find with the previous woman. On the contrary, for Don Juan each and every woman is the right one, and what drives him further is not what he did find not find in his previous lover, but precisely what he did find. He attains satisfaction without attaining his aim or - more exactly, he attains satisfaction precisely in so far as his aim is nothing but 'getting back into circulation'. This is exactly what makes Don Juan a figure of the drive."(A. Jupancic, 'Ethics of the Real: Kant and Lacan', Verso, p. 136)

이러한 지적은 몰리에르의 돈후안뿐만 아니라, 푸슈킨의 돈후안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즉, 돈후안이 이네자에서 라우라로, 라우라에서 도나 안나로 옮겨가는 것은 어떤 실망/결여 때문이 아니라 지극한 만족 때문이다. 그는 언제나 만족하며, 그의 반복적인 편력은 오히려 이 만족에서 비롯한다. 따라서, 도나 안나를 돈후안의 최후의 여인, 곧 진정으로 그가 찾던 여인으로 이해하고, 그가 진정한 사랑을 발견한 순간에 파멸하는 것이 이 작품의 비극성이라고 보는 것은 돈후안을 충동의 인간이 아니라 욕망의 인간으로 전제할 때 가능한 이해이다.

<장면4>에서 도나 안나에게 (다른 여인들에 대해서)“그들 중 이제까지 내가 사랑한 여인은 한 명도 없소.”라고 한 돈후안의 고백이 이러한 시각의 이해를 지지하는 듯하지만, 돈후안이 순간/현재에 충실할 뿐이라는 점을 다시금 상기할 필요가 있다(더불어 그는 도나 안나로 인하여 다시 태어나지 않았던가?). 즉, 그의 그런 고백은 ‘진실’이지만(그는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다), ‘사실’은 아니다(하지만 그를 믿을 수는 없다).

요컨대, 그는 충동의 인간이라 할 수 있는바, 이 충동의 보다 정확한 이름은 ‘죽음충동(death drive)’이다. <장면4>에서 특히 두드러지지만, 그러한 충동의 인간으로서, 그리고 순간의 인간으로서 그는 언제라도 죽을 준비가 되어 있다(“죽음이란 게 뭔가요? 만남의 달콤한 한순간을 위해서라면/ 나는 아무런 불평없이 목숨을 바칠 겁니다.”) 그렇다면, 언제라도 죽을 준비가 돼 있는 죽음충동의 인간 돈후안이 결국엔 죽음을 맞이하는 ‘당연한’ 결말은 어떻게 준비되며,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인가? 그리고 돈후안의 비극은 어디에 있는 것인가? 이 작품의 궁극적인 메시지는 무엇인가?

<장면3>에서 도나 안나로부터 밀회의 약속을 얻어낸 돈후안은 “난 어린아이처럼 행복하다!”고 말한다. 이 ‘환희’의 표현은 돈후안주의의 핵심을 집약하고 있는 문구이다. 이미 <석상손님>에서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구도에 대해서는 지적한바 있는데, 그 드라마가 본격적으로 무대화되는 것은 바로 이 장면에서부터이다. 이어지는 장면에서 그는 기사단장의 석상을 다음날 도나 안나의 집으로 오도록 초대한다. 그것도 밀회를 나누는 자리에 보초를 서라고. 돈후안의 의도는 물론 도나 안나에 대한 정념에 드리워져 있는 기사단장의 그림자를 제거해보고자 하는, 그래서 자신의 ‘완전한 승리’를 확인해보고자 하는 것이겠다.

하지만, 그것은 현실의 준엄함/엄격함을 모르는 어린아이 같은 욕구이다. 그런 그에게 레포렐로는 석상에의 두려움을 불러일으킨다. 결국 레포렐로의 ‘엄살’을 물리치고 돈후안은 직접 석상에게 초대의 말을 하는데, 이때 그는 석상을 ‘기사단장’이라고 호칭한다. 이미 지적한대로, (죽은)‘기사단장’과 ‘석상’은 다른 차원에 속하지만 어른-아이 돈후안은 그 차이를 구별해내지 못한다. 그는 자신이 이미 죽인바 있는, 그래서 만만하게 본 기사단장을 초대했지만, 정작 초대에 응해 <장면4>에서 나타난 것은 ‘거인’으로서의 ‘석상손님’이다. 그 석상손님은 그가 이길 수 없는 적수였다.



여기서 작가 푸슈킨에게서 성숙이란 무엇이고, 행복이란 무엇이었나를 물어볼 필요가 있다. 역시나 ‘볼지노의 가을’의 완성된 <예브게니 오네긴>(1823-1830)에서 우리는 그에 대한 시사를 얻을 수 있다(이 작품의 결말 장면에서도 <오네긴-타치야나-장군(남편)>의 오이디푸스 구도가 반복된다. 그것은 <석상손님>의 결말과 동형적이다).

 

 

 

 

돈후안과 마찬가지로 또 다른 ‘어린아이’ 오네긴이 여행에서 돌아올 무렵, 자연의 순리/법칙에 대해서 화자-푸슈킨이 ‘명상’하고 있는 대목(8장 29연)에서, 그는 동일한 사랑의 열정/충동이라도 계절에 따라 의미가 달라짐을 지적한다. 그것은 마치 봄날의 비가 화려한 꽃과 열매를 맺게 해주지만, 차가운 가을의 비바람은 주변의 숲을 벌거숭이로 만들어놓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물론 이러한 이러한 이치는 자연의 봄/가을에 대응하는 인생의 봄/가을에도 적용된다. 자연적 시간에서와 마찬가지로 인생의 사계(四季)에도 모퉁이, 즉 ‘전환기’가 가로놓여 있으며(돈후안이 ‘문’ 앞에 서 있었음을 기억하자), 그것을 기준으로 하여 삶의 가치들은 전도되기도 한다. 예컨대, 열정이란 것도 청춘의 열정과 때늦은 나이의 열정이 삶에서 갖는 기능은 봄비와 가을비의 그것처럼 상반되며 전혀 다른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푸슈킨의 시간적 상상력은 공간에서의 환유적인 상상력과는 달리 은유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에게 시간은 같은 시간의 연속이 아니라 다른 시간들로의 도약이다. 시간은 양적인 것이 아니라 질적인 것으로 주어지며, 이 시간을 살아가는 일이란 생장하고 변화/성숙하는 일이다. 그 점을 ‘일상적인 통찰’로서 간명하게 말해주는 것이 8장의 10연이다.

젊어서 젊은이다운 자는 행복하며,
제때에 성숙한 자는 행복하다.
나이를 먹으며 차츰 삶의 냉담함을
견딜 수 있게 된 자는 행복하다.


이 첫 4행이 던지는 메시지는 상식적이며 간단하다(푸슈킨은 어려운 진리를 얘기하지 않는다). 즉, 인간의 행복이란 인생의 사계에 걸맞게 처신할 때 얻어진다는 것이다. 젊었을 때 젊은이다는 열정으로 삶에 뛰어드는 자는 행복하다. 그리고, 나이 들어 삶의 냉담함을 견딜 수 있게 된 자, 그와 타협할 수 있게 된 자는 행복하다. 물론 이때 후자의 행복은 (열정의) 어떤 상실을 전제로 한 ‘차가운 행복’일 것이며, 따라서 거기에 어떤 아이러니가 개입되는 것은 불가피하다. 하지만, 그 아이러니는 성숙의 지표이자 대가이다.

해서, 때가 되면 젊음(러시아어로 ‘몰로드’)도 차츰 삶의 냉담함(러시아어로 ‘홀로드’)과 타협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푸슈킨의 지혜이다. 젊음은 영원하지 않으며, 시간 앞에서 패배하기 마련이다. 젊은날의 방황/방랑은 아름답지만, 늙은날의 그것은 안쓰럽다. 따라서 젊음을 밑배경으로 하여 충만한 순간/현재만을 삶의 시간으로 누리고자 하는 돈후안주의가 궁극적으로 비극적인 결말에 이르는 것은 당연하다. 젊음/열정의 상징 돈후안(몰로드)는 냉혹한 석상손님(홀로드)을 이겨낼 수 없는 것이다.

다시 <석상손님>으로 돌아오면, <장면4>에서 ‘돈디에고’(‘돈디에고’란 이름은 티르소 텍스트에서 돈후안의 ‘아버지’로 등장한다. 돈후안은 ‘아버지’라는 가면을 쓰지만, 그는 ‘아버지’가 될 수 없다) 돈후안은 도나 안나가 남편을 죽인 원수인 돈후안을 만나게 되면 ‘악당’의 가슴에 칼을 꽂겠다고 하자, 가슴을 내밀며 바로 자신이 돈디에고가 아니라 돈후안이라고 고백한다. 물론 이러한 태도는 석상을 밀회의 자리에 부른 것과 마찬가지로 보다 완전한 사랑/승리를 쟁취하기 위한 돈후안의 도전/도박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믿지 않아 하는 도나 안나에게 세 차례나 반복해서 자신의 이름을 밝힌다.

돈후안이 ‘돈후안’임을 시인하는 이 대목은 두 가지 방향에서 읽힐 수 있다. 먼저, 이 또한 고도의 돈후안적 전략으로 보는 것이다. “인간은 진실 그 자체를 이용해서 타자를 속인다. 모두가 가면 뒤에서 진실한 얼굴을 찾는 세계에서 그들로 하여금 길을 잃게 만드는 가장 좋은 방법은 진실 자체의 가면을 쓰는 것이다. 하지만, 가면과 진실을 일치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지젝,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 84쪽) 즉, ‘돈후안’은 돈후안의 또다른 가면에 불과하다(도나 안나를 속이기에/유혹하기에 가장 적합한). 물론 이때 전제가 되는 것은 돈후안 자신조차도 그것이 가면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것이 돈후안주의가 갖는 ‘진정성’의 조건이다.

또다른 방향은 자신의 이름을 세 번 (부인하는 대신에) ‘인정’함으로써 돈후안 스스로가 ‘상징적인 거세’를 수행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자아의 자기정체성이라는 것은 사회적 ‘호명(interpellation)’, 혹은 이데올로기적 호명에 의해서 가능하게 되는바, 돈후안이 그러한 호명으로서의, 또는 ‘고정적 지시자’로서의 (상징계적)‘돈후안’을 자신의 가면이 아닌 정체성으로 승인/수용할 때, 더 이상 (상상계적)‘돈후안’은 남아있지 않게 된다. 즉, ‘돈후안’은 이미 죽은 것이다.

따라서, <장면4>에서 돈후안은 두 번 죽는다(도나 안나도 그에게 두 번 키스한다). 그것은 <장면2>에서 돈카를로스가 라우라와 돈후안에 의해서 두 번 죽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이 두 죽음은 실제의 무대에서도 ‘장면화’된다. 도나 안나의 작별의 키스를 받고 돈후안은 무대에서 퇴장하지만(첫번째 죽음), 석상에 쫓겨 다시 무대로 뛰어들어왔다가 다시 석상의 손에 이끌려 무대에서 꺼져버리기(두번째 죽음) 때문이다.

돈후안 그 차갑고 평온한 키스를 한번만 더...
도나 안나 당신은 참 성가신 분이군요! 자, 여기 있어요.
무슨 문 두드리는 소리지? 어서 숨어요, 돈후안.
돈후안 안녕, 잘 있어요, 나의 사랑스러운 친구.
(퇴장했다가 다시 뛰어들어온다.) 아!
도나 안나 무슨 일이에요? 아!..
(기사단장의 석상이 들어온다. 도나 안나는 쓰러진다.)
석상 부른대로 왔노라.
돈후안 오 맙소사! 도나 안나!
석상 그녀를 놔두게./ 모든 건 끝났어. 자네, 떨고 있구만, 돈후안.
돈후안 내가? 천만에. 내가 자넬 불렀고, 이렇게 보니까 반갑네.
석상 그럼 손을 내밀게.
돈후안 여기 있네... 오, 이 자의 돌손은/ 정말로 꽉 쥐는구나!
나를 놔줘, 내 손을, 어서 놓아달라고...
나는 죽는구나, 끝장이야, 오 도나 안나!
(둘은 바닥으로 꺼져버린다.)

도나 안나의 ‘차갑고 평온한 키스’는 작별의 키스이면서 이미 죽음의 키스이다. 그 키스는 “여기 있어요.(영어로는 ‘Here he is’)”라고 말하면서(러시아어에서 ‘키스’는 남성명사이다), 그 이면에서는 “여기 그가 있어요.”라고 남편인 기사단장(석상)의 도래를 예고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불어 악수의 손을 내밀라고 한 석상에게 돈후안이 “여기 있네(영어로는 ‘Here she is.’)”라고 한 대사도 이면적으로는 “여기 그녀가 있네.”란 뜻을 가지면서 사실상 “모든 것이 끝났다”는 걸 확인시켜주고 있다(러시아어로 ‘손’은 여성명사이다). 그리고 더불어 ‘끝났다’란 말도 석상과 돈후안에게서 두 번 반복된다). 그러한 이면성을 ‘텍스트적 무의식’이라고 한다면, 푸슈킨의 텍스트에 언제나 드리워져 있는 것은 그러한 텍스트적 무의식이며, 그것이 그의 간명한 텍스트들이 복잡한 의미작용을 낳게 하는 배경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 드라마의 이면에서 레포렐로-푸슈킨의 내적 드라마를 읽어내고자 했는바, 그것은 어른-아이의 세계(=돈후안주의)에서 (결혼이라는 사회적 제도가 담지하는) ‘성숙한 어른의 세계’(루카치의 정의에 따르면 이것은 소설의 세계이기도 하다)로 넘어가고자 했던 작가 푸슈킨의 ‘작별의식’이기도 하다. 도나 안나가 돈후안에게 건네는 말을 빌자면(“아, 당신을 증오할 수만 있다면! 하지만 이제 우린 헤어져야 해요.”), 우리는, 그리고 레포렐로-푸슈킨은 돈후안을 증오할 수 없지만(그는 ‘사랑스러운 악마’이다), 우리는 그와 헤어져야 한다. 이젠 ‘삶의 냉담함’을 견디며 살아야 할 나이가 됐기 때문이다.

 

 

 



이 마지막 장면에서 돈후안은 석상(=죽음)에 맞서서 “미적 인간, 미의 탐색가로서의 원칙을 포기하지 않음으로써 돈후안은 스스로 자신의 존재에 비극적 주인공으로서의 품위를 부여하고, 멜로드라마의 얇은 차원으로 내려서지 않는다.”고도 지적된다. 그리고 역시 유사한 결말을 갖고 있는 모차르트의 오페라 <돈조반니>에 대한 지젝의 해석을 빌면, 돈후안은 “자신이 그것[자신의 악]을 고집하면 영원히 지옥에 떨어질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최종적으로 악을 선택함으로써 그는 역설적이게도 윤리적인 영웅의 위상을 얻는다.”(<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 59쪽)

즉, 그는 절대적인 쾌락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쾌락원칙 너머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그런 의미에서, 그는 정확히 절대적인 윤리(=정언명령)의 대행자인 석상만큼 ‘윤리적’이다(칸트와 함께 사드를(Kant avec Sade)’이라는 라캉의 표어는 여기서 ‘석상과 함께 돈후안을(Statue with Don Juan)’로 변주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절대성을 고집하는 이들의 입장은 언제나 타협적인, 가치상대론자 푸슈킨의 입장과는 구별된다(그는 제카브리스트에 동조했지만 가담하지 않았으며, 전제주의와도 거리를 두었다. 1830년대에 그가 몰두한 건 ‘역사’였고, 그 결과 얻어진 것이 <푸가초프 반란사>라는 역사서이다. <대위의 딸>은 그 부산물이다). 한 연구자는 푸슈킨의 <석상손님>이 삶의 ‘중간영역(middle ground)’를 유지하기 위한 시도라고 평가하는데(돈후안에게는 그런 영역 존재하지 않는다), 그 ‘중간영역’을 다른 말로 바꾸면 리비도와 초자아를 중재/매개하는 ‘자아(ego)’의 자리가 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자아-레포렐로, 레포렐로-푸슈킨의 자리이기도 하다. 돈후안과 석상이 꺼진 자리에 남아있는 건 도나 안나(와 레포렐로)뿐이다. 마치, <예브게니 오네긴>의 마지막 장면에서 ‘석상’처럼 굳은 오네긴을 두고 화자-푸슈킨과 그의 뮤즈 타치야나만이 떠나듯이, <석상손님>에서 삶을 계속 이어나가는 것은 도나 안나와 레포렐로-푸슈킨이 될 것이다.

이제 우리가 처음 떠나온 자리로 되돌아가 에피그라프를 다시 읽을 차례이다. 거기에는 이렇게 씌어 있었다. “오, 위대하신 기사단장님의/ 고귀하신 석상이시여!../...아, 주인님!”(<돈죠반니>) 여기서 이탈리아어 ‘주인님(padrone)’과 흔하게 운을 맞추는 단어가 ‘아버지(padre)’라는 점을 상기해보자(흔히 ‘padre - padrone’라고 말한다. 같은 제목을 가진, 타비야니 형제의 영화도 있었다). 

그때, <석상손님>의 진정한 ‘주인’이자 ‘아버지’, 곧 이 텍스트의 산출자는 ‘석상손님’도 아니고 ‘돈후안’도 아니다. 푸슈킨의 <석상손님>이란 텍스트의 의미를 읽어내고자 하는, 그래서 돈후안의 행적을 열심히 따라가본 ‘레포렐로-독자들’이 마침내 도달하게/발견하게 되는 주인과 주인기표는 다름아닌 ‘푸슈킨’이다. 그리하여, 독자가 맨마지막에 다시 읽는 에피그라프는 푸슈킨의 ‘위대하신/고귀하신’ 작품(<석상손님>) 앞에서 자신을 비춰보며 그대로 반복하게 되는 대사가 될 것이다(“아, 주인님!”).

P.S. 푸슈킨이 ‘볼지노의 가을’에 <석상손님>을 완성한 날짜는 1830년 11월 4일이다. 그리고 나는 ‘모스크바의 가을’을 보내며 2004년 11월의 첫주를 <석상손님>과 함께 했다. 참고로, 올해는 푸슈킨 탄생 205주년이 되는 해였다. 이 글은 그걸 기념하는 한 레포렐로-독자의 ‘입막음’의 글이다(물론 이 작품에 대한 읽기는 이걸로 마감되지 않는다. 이 글은 고작 하나의 이정표일 따름이다). 아마도 <석상손님>에 대한 최초의 ‘레포렐로-독자’는 동시대 비평가 벨린스키(1811-1848)일 것인바, 그는 이렇게 말했다: “결론적으로 <석상손님>은 예술적인 면에 있어서 푸슈킨 최고의 작품이다. 이 작품은 너무도, 너무나도 훌륭하다!”

04. 11. 09./ 07. 09. 23. 

P.S. 마땅한(맘에 드는) 이미지들이 없어서 꽤 애를 먹었다(그나마 라우라 역의 여배우가 맘에 든다). 비소츠키 주연의 영화 <석상손님>에서 이미지들을 따오면 가장 좋았을 텐데, 아직은 그렇게 할 만한 기술(혹은 장비)이 내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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